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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워크숍

[제4회 국제워크숍] 다니가와 간 대담!!

조회 수 4646 추천 수 0 2010.04.21 18:45:41

다니가와 간(谷川雁)에 대하여

 

1. 타니가와 간의 간략한 소개

 

1923년 규슈 구마모토현 미나마타 출신. 1945년 동경대 사회학과를 졸업. 패전 후 후쿠오카 지방지 니시니혼신문(西日本新聞) 기자로 취직, 동시기 시인으로 활동 시작. 1947년 노조운동에 대한 당시 연합군총사령부(GHQ) 개입으로 해고. 1949년 공산당 규슈 지방위원회 기관지부장. 1950년 결핵발병 귀향. 1958년대 큐슈 다이쇼 탄광(大正炭鉱)에서 민중 문학 문화운동에 참여, 잡지 『サークル村(서클 마을)』를 창간해 '유민(流民)'의 코뮨을 만들기 시작. 1960년 노동자조직 「大正行動隊(다이쇼 행동대)」조직. 동년 공산당에서 제명됨. 1962년 「다이쇼 광업퇴직자 동맹」을 조직 일본은행 등 채권자/금융기관에 대한 직접행동. 1965년 동경에 돌아가 언어교육기관 테크/라보교육센터를 창립, 80년대 초까지 대중 언론 활동 중단. 1982년 ものがたり文化の会(이야기문화협회) 창립,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바탕으로 아이들의 '인체교향극'(人体交響劇)을 제창. 1989년 십대를 위한 합창곡집 『白いうた 青いうた(흰 노래 파랑 노래)』작사. 1995년 폐암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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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에는 시집으로 『大地の商人(대지의 상인)』(1954),『天山(천산)』(1956)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原点が存在する(원점이 존재한다)』(1958), 『工作者宣言(공작자선언)』(1959), 『影の越境をめぐって(그늘의 월경을 둘러싸여)』(1963), 『意識の海のものがたりへ(의식의 바다의 이야기로)』(1983), 『無の造型(무의 조형)』(1984), 『北がなければ日本は三角(북이 없으면 일본은 세모)』(1995) 등이 있다.

 

 

2. 타니가와에 대한 대담

 

하지메(이하, 하): 선생님은 작년4월부터 약1년간 동경에서 지내셨는데 그 때 다니가와 간에 대한 세미나에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땠는지 궁금해요. 거기서 지금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다니가와를 보고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이진경(이하, 이): 제가 아는 것이 일본의 지적 분위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도 없고 더구나 학회를 많이 다닌 것 아녔지만,  제가 토쿄에 있을 때 타니가와 간 심포가 처음으로 열렸지요. 학자들은 물론 이야기문화협회나 겐지 연극회, ‘라보’(교육센터)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까지 모이는 심포지움이었어요. 그 밖에 오키나와에서도 음악발표나 시낭송회를 포함해 타니가와 간에 대한 토론 등 그를 기념하는 행사도 있었죠. 다니가와 간 연인이었고, 큐슈에서 오랫 동안 함께 활동했던 모리사키 카즈에의 공개강연회 같은 것도 있었어요. 그리고 요네타니 씨와 이와사키 씨가 공동 편집한 「타니가와 간 셀렉션」이 두 권으로 출판되었고, 그로 인해 서평이나 좌담 같은 것이 여기저기 신문에 실리곤 했죠. 상당히 붐을 이룬 느낌이었어요.  전 친구인 요네타니 씨의 대학원 세미나에서 타니가와 간을 같이 있었지요.

 

하: 그 전 사쿠라이 상한테도 얘기를 듣지 않았어요?

 

이: 재작년 일본에서 안티 G8 때 사쿠라이 상 집에 묵었었는데, 그때 사쿠라이 상이 타니가와 얘기를 많이 했지요. 수유너머에서 타니가와 간의 사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듣고싶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꼭 읽어보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숙제’가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요네타니 씨가 타니가와를 읽는 세미나를 한다고 하길래, 숙제를 할 기회라고 생각해서 적극 참석하게 되었던 셈이죠. 타니가와가 나중에 어린이 극이지만, 연극과 관련된 활동을 했기 때문인지, 사쿠라이 씨는 연극하는 분인데 타니가와 간에 대해서 많이 읽었던 것 같고, 또 아주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주: 사쿠라이 다이죠(桜井大造) 씨는 일본, 오키나와, 대만, 중국 등에서 텐트(천막)을 치고 연극을 하고 계시는 동아시아 연극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우리 친구이다. 그가 단순한 극단운영자가 아닌 것은 2008년 안티G8 때 이진경 샘과 고병권 샘이 일본 입국심사에 걸렸을 때 체류지가 사쿠라이 상의 집이라고는 걸 알고서 심사관의 안색이 바뀌었다는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연극 속에서 차에 불질러 천막이 불타기도하고 어떤 공연에는 전경이 '진압'하러 왔다고 한다)

 

오하나(이하, 오): 타니가와는 책을 많이 냈나요? 꾸준히?

 

하: 운동가로서 적극 활동했던 때, 즉 40세 정도까지 그랬지요. 그때까지 시집 두 권과 ‘공작자’라는 말을 새로운 유행어로 만든 「공작자 선언」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 이외에, 「써클 마을」 같은 잡지도 냈었어요. 운동에 개입하는 글들을 주로 썼죠. 시도 쓰고 글도 쓰고.

 

이: 글의 스타일을 보면 역설과 반어를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 편이지요. 상식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당혹스런 편견을 일반화하여 더 밀고 나가는 경우도 있고, 옳다고 믿는 것을 깨면서 말하는 경우도 있구요. 그래서인지 일본사람이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라고들 많이 하더군요. 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경험은, 일본어가 짧아서 어려웠고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고생은 했지만, 내용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요. 그건 아마도 제가 공부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면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입장으로 보아도, 공산당으로 대표되던 전통적 좌파와 다른 좌익적 길, 좌익적 사유를 했던 사람인데, 저의 경우도 사회주의 붕괴이후 레닌주의로 요약되는 전통적 좌파와 다른 새로운 좌파적 사유를 모색했기에 비슷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오: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기대는 철학자가 있어요?

 

이: 특별이 좋아하는 철학자는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선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내용에서도 그렇지만, 사유방식이나 어법, 글의 스타일 등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저 역시 선불교에 대해 한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기에, 그리고 지금의 맥락에서 현대적 사상과 연결하며 끌어들이려 하고 있기에 이해하기 쉬웠던 것도 있는 듯 해요.

 

하: 실제로 젊은 시절 道元(도우겐: 일본 조동종의 시조, 일본 선불교의 대표적 인물)을 많이 읽었다고 해요. 사상 문학 전반적으로 다 읽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폴 발레리 등 서양 문학 그리고 당시와 같은 동양 고전도 많이 읽은 것 같아요. 또 로자 룩셈부르크의 글와 피터 팬도 번역했다네요.

 

이: 요네타니 씨의 경우, 타니가와를 ‘유민의 코뮨’을 구성하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고 있어요. 이건 아마 요네타니 씨가 우리 연구실과 접속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해요. 코뮨적 문제의식 또한 타니가와를 이해하기 쉽게 해 준 요인이기도 한 셈이지요.더불어 타니가와에게는 큐슈라는 지역 자체가 중요한데, 이 곳은 피차별 부락민들, 조선인, 대만인, 오키나와인 등 식민지 인민들이 유민으로서 광산 주변으로 모이고 혼합되는 곳이었지요. 타니가와가 큐슈야말로 일본의 중심이고, 동경은 오히려 도마뱀의 꼬리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지요.

 

하: 요네타니 선생님의 이름이 나오는 김에 말해 두어야 되는데 이번에 오시는 건 타니가와가 아니고 요네타니 선생님이지요(영혼은 모르지만ㅎg). 이 분은 원래 전공 영역은 동아협동체론(東亜協同体論), 특히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제자이자 맑스주의자이었던 미키 키요시(三木清)(1945년 옥사)나 오자키 호즈미 같은 사람이지요. 동아시아 협동체론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30년대 말에 중일전쟁 하에 제창되었는데 반제국주의를 주장하는 등 일본제국주의를 안에서부터 바꾸려고 했던 셈인데 당연히 중국 등 일제에 저항하는 세력한테는 인정 받지 못하고 또 아시다시피 40년대에는 그 악명 높은 대동아공영권을 일제가 내세운 바람에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 시도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암튼 요네타니 선생님은 이 분야의 전문가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타니가와 간으로 연결됐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지금까지 다 책들이 절판이 되어 사상적으로 묻혀 있었던 타니가와 간의 선집(「타니가와 간 셀렉션」)을 내시는 바람에 지금 일본에서 타니가와 간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큐슈이라는 도시/중심에서 떨어져 활동했다는 부분, 이 점 때문에 마오와의 연관을 지적하는 이들 있지요. 제목도 <모택동>이라고 붙인 훌륭한 시가 있기도 하지요.

 

이: 중국 혁명이 성공한 게 49년 신정부 선 해니까, 당시 타니가와로선 중국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요. 물론 마오의 영향도.

 

하: 그런데 정말 이 사람은 역설 덩어리에요. 이 사람의 시적 감성을 보며 늦게 온 “전후의 일본 낭만파”라고 하기도 하는데(주: 그러나 내용은 좌파), 일본낭만파는 우파잖아요. 그래서 그런 감수성이 공존해요. 그런데도 또 진정한 일본낭만파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미시마 유키오를 정말 싫어했다는데, 말하고 쓰는 능력으로 미시마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은 타니가와 정도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어요(아니면 오에 겐자부로?).

 

이: 아시아 공동체, 이론적으로는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더욱 밀고 나가려는 점에서, 통상적인 근대주의자, 서구주의자들과 다른 면이 분명히 있지요. 그는 이중의 공동체로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개념을 수직적 공동체와 수평적 공동체의 결합이란 관점에서 받아들여요. 수직적 공동체란 가부장적인 것 같은 것인데, 공동체의 이러한 측면이 일본의 대중이 일본 군국주의에 적극 이용되었던 이유라고 보지요.그러나 그에 대해 탈아시아(서구화)하는 방식으로 출구를 찾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수평성을 확장하고 밀고나가 수직적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방식으로 찾고자 하지요. 군국주의의 나무에 있는 균열을 확장시켜 그것을 새로운 것이 접목될 수 있는 지점으로 만들고자 하는 거지요.
우카이 선생과 토론하며 들은 것인데, 타니가와와 함께 60년대 신좌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1924년 생,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의 경우에는 그 추종자 가운데 우파가 있다고 해요. 그러나 타니가와의 경우에는 어떤 추종자도 우파가 될 수 없는 그런 사상가라고 하시더군요.

 

오: 어떤 점에서 그런 거죠?

 

이: 60년대 초 요시모토의 글을 보면, 조직을 거부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아나키스트처럼 보여요. 그런데 60년대 말 <공동환상론>을 쓰면서 가족이나 전통적 성격의 공동체를 사유의 요소로 끌어들인다고 하네요. 직접 읽은 게 아니라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런 면이 우파가 될 수 있는 싹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같은 사람도 어쩌면 요시모토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들었던 것 같네요.

 

하: 나카자와 신이치를 우파라고까지 하긴 어렵겠지요. 서구주의에 반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고, 뉴아카데미즘의 비정치성이란 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할 순 있겠지만요. 아마도 여기서 우카이 샘이 말한 우파는 가토 노리히로 같은 사람인 같아요. 국민-국가의 단위의 생각 플러스 근대성, 아시아와의 관계가 우파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지 않을까? 암튼 이건 한국에서도 논의를 많이 할 수 있는 테마죠.

 

이: 그렇네요. 가토 얘기를 그런 맥락에서 들은 것 같기도 하네요.

 

하: 요시모토는 대중론을 펼치고 자기가 대중임을 자임했지요. 자기가 전쟁 때 군국소년이었다며, 왜 대중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는가에 대해, 이 감각을 단순히 미국에 패했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패전했기 때문에 ‘이젠 민주주의다’라고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거지요. 대중의 감각을 거기서 시작하려고 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향하지 않았던, 그렇기에 전후 좌파 사이에 절대적인 권의를 가지게 되었던 일본공산당의 지도부조차 대중과 제대로 맞서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이지요. 그런 대중성(일상성)에 붙었다는 점에서 보수성이 있는 반면, 타니가와는 그러한 민중을 일본국민이라는 단위가 아닌 부락민이나 탄광 노동자와 같은 소수자 안에서 찾으려던 감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또 하나 타니가와에게 특이한 점은 거의 ‘배신’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행동, 당시에는 실제로 그렇게 단정되기도 했던 전환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도쿄에 가지마’라는 시로 유명했던 그가, 1960년대 중반 갑자기 급진적 활동을 접고 도쿄로 돌아가 ラボ教育センター(라보교육센터)에서 언어 교육(영어 일본어 그리고 또 하나의 아시아 언어)을 주로 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넘는 언어 감각 교육을 주도했지요. 외국어 교육이 통상적인 영어 교육이 아니었던 거에요. 교재 중에는 사투리로 할머니가 민화를 말하는 교재 등이 있었는데 그 회사에서 좀 더 기업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과 싸우다가 거의 추방당했지요.

 

이: 80년대부터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을 통해 신체극이라는 어린이 연극단체를 만들어 연극을 시켰지요.

 

하: 네 그게 이야기문화협회(物語文化の会)입니다. 인체교향극이라고 하더군요.

 

오: 왜 갑자기 어린이인가요?

 

이: 내가 이해하기로, 이 사람은 「환영의 혁명정부를 구성하라」에서 혁명적 감성을 선취해야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감성의 혁명은 나이 든 사람들로선 힘들지 않겠어요? 그것은 감성적 관성이 강하지 않고 변화 가능성이 큰 어린이들에게서 더 큰 가능성을 보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어린 친구들을 데리고 이것을 시도해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예요.

 

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으로 볼 때 아주 특이한 건 그 뜨거웠던 60년대를 통상적인 의미의 정치성을 버리고 있었다는 점이지요. 그럼에도 타니가와의 50년 대의 사상과 행동은 68 때 학생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정말 기이한 반시대성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바로 그 시기에 자본주의 사회 중심에서 회사 사장을 하기도 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배신;했다고 많이들 생각했죠.

 

이: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전공투의 대표적인 슬로건이 이 사람의 글에서 따온 것이었죠. 그만큼 전공투 세대에게 타니가와의 영향력은 강력했던 셈인데, 바로 그런 시기에 그는 전혀 달라보이는 일을 하고 있었던 거죠.

 

하: 이 사람은 순간의 왕은 죽었다고 하면서(순간의 왕은 시인이지요) 시를 안 쓴다는 선언까지 해요. 원래 이 다니가와의 시와 정치는 함께 가는 것이었이에, 절필했다고 간주되었지요. 그런데 사실 이 사람은 라보 등의 교재를 중심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교재가 거의 다 시어(詩語)로 되어 있는 문학 작품으로 볼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하네요.
또 하나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 이 사람은 라보와 함께 그 당시 일본에 있었던 최상급 언어학자들을 모아서 도쿄 언어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아주 학술적인 언어학의 연구소지요. 60년대 초에 촘스키도 부르고 로만 야콥슨도 부르고 하며 실제로 학회를 운영했다고 해요.

 

오: 언어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았었나 보네요?

 

하: 촘스키의 생성문법이론이나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에 대한 관심은 선구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구조주의가 유행하기 훨씬 전의 일이니 말예요. 야콥슨이 와서 일본 언어학자와 했던 토론이 책으로 출판된 걸 본 적이 있어요. 캠브리지 대학에서 출판되었어요. 도쿄에 가지마라고 시까지 썼던 사람이 당시 도쿄에 가서 도쿄대 명예교수 같은 사람을 불러서 이런 작업을 한 거죠. 행동력과 조직력이 엄청난 사람이지요.

 

이: 다이쇼 투쟁과 안보투쟁이 그 전환점이었지요. 물론 좀더 직접적인 것은 광부들의 코뮨이 자리잡게 되면서, 자신이 더 할 일이 없어졌다고 보았기에 거길 떠났다고 요네타니 씨는 말하더군요. 50년대 말 에너지 산업이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이른바 ‘구조조정’과 광부들의 대대적인 해고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광부들의 투쟁이 크게 일어납니다. 그 때 타니가와는 매우 적극적 개입하게 되지요. 그 때 공산당, 사회당, 노조는 어쩔 수 없다고 보아 적절하게 타협하려는 입장을 갖고 있었지요. 타니가와는 그런 타협에 반대하여 ‘다이쇼 행동대’를 조직해 공산당과 대립하며 훨씬 좌파적 투쟁을 하게 됩니다. 물론 투쟁은 ‘패배’하지만, 이를 계기로 민주집중제를 비롯해 좌파의 조직이나 사상 전반과 크게 갈라서게 되지요.
뒤이어 일미 안보협약 개정이 있었고 그것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이 이어 벌어졌는데, 다이쇼 투쟁으로부터 역량과 관심이 그리 이동하게 되지요. 그래서인지 타니가와는 안보투쟁에 대해,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투쟁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보게 됩니다. 광부들의 프롤레타리아적 투쟁과 대비되는 소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보았지요. 일본공산당과 사회당은 대정투쟁을 포기하면서 안보투쟁으로 중심을 옮겼지만, 안보투쟁에서도 역시 타협적 입장을 취했고, 그 결과 일본 전학련 등 학생운동 조직들 중심으로 공산당과는 다른 길을 걷는 신좌파조직들이 광범하게 형성되고, 그들이 안보투쟁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게 되지요. 요시모토도 일본 공산당이나 전통적 좌파의 입장을, 그리고 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의 민주주의론까지 근본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지요. 맥락은 다르지만 다니가와와 요시모토 모두 민주주의 비판이란 점에서 일치했던 건데, 이 두 사람의 글을 필두로 하여 민주주의 비판을 중심 내용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신화」(1960 출간, 66년 재출간)라는 책은 60년대 이후 일본 사회운동 전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요. 그래서 우카이 샘도 자신이 운동할 때에도 민주주의는 나쁜 거라 생각했었다고 하더군요.^^ 70년대 운동에서도 그것은 일반적인 태도였던 것이었던 셈이지요.

 

하: 안보투쟁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미안보조약이 고정되는 계기가 되었던 1960년 안보조약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어요. 그 해 5월에서 6월까지 수십만명이 국외의사당을 포위하고 국회에 돌입하는 등 엄청난 정치적 고양과 국민적 운동이 일어났는데도 정부(당시 수상은 만주국의 기술관료이자 A급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는 그걸 쌩 무시하고 안보조약을 개정하고 말았어요 (마치 촛불 같죠?). 그 때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타니가와의 시도는 '성공'이든 '실패'이든 시사하는 것이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 다니가와가 지금 일본에서 다시 주목 받는 이유에는 신자유주의이 패권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새로운 공동성과 저항의 실험들을 보려는 흐름이 있는데다가 현재 경제위기와 불안정고용의 영구화라는 상황이 타니가와 간이 생각하고 실천한 상황도 관련되어 있는 거 같아요. 특히 탄광의 폐광과 구조조정, 그로 인한 대량해고가 일어난 상황도 비슷하지요. 거기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특수성이 크게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가 지금 주목 받는 건 시기적으로 볼 때 정말 늦은 거라고 해야 하지요. 물론 상황은 너무 잘 맞는 거 같아요. 지금까지 이런 상황이 없었으니까. 특히 일본에서는. 대이쇼 행동대는 노동자들의 조직이 아니라 실업자들의 조직이었죠. 그런데 노조보다 훨씬 절실하게 강력하게 행동한 것이지요. 지금 일본에서 있는 프리타 노조 등도 그런 맥을 같이하고요. 이런 시대적인 일치성이 지금 이 사람을 부각하는 배경을 만든 거라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 타니가와가 갖는 힘과 매력은 단지 상황적인 이유로 환원되진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이런저런 이론가가 사상가의 저작들을 많이 읽은 편인데, 사상 내지 이론으로서의 매력이 매우 강력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에서 이번에 타니가와를 함께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셈인데, 많은 분들이 이 매력적인 사상가의 글을 함께 읽게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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