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후기입니다.

2015.04.11 19:50

신혜 조회 수:130

민주주의의 지형학 후기/신혜

 

어쩌다보니 아렌트와 파농 부분의 후기를 맡게 됐네요. <폭력과 정치>라는 소제목 하에서 진행된 강의였습니다. 어쩐지 이제 아렌트하면 아렌트는 제가 봤을 때 고대 사람이에요.”한 강사님 말씀이 생각날 거 같아요.(...) 어째 이런 농담들이 더 잘 기억나는지... 그럼 이제 익숙해진 몇 개의 대립쌍을 먼저 적어볼까요.

- 폴리스: 자유, 시민, 정치, 인간성, logos-, 정치의 수단

- 오이코스: 필연, 노예의 영역, 동물성, 자유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영역.

일단 아렌트가 말하는 폭력과 권력의 구분을 보아야할 겁니다. 아렌트에게 권력이 긍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권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폭력이 무언가의 수단으로써 사용된다는 것과는 분명 다르죠. 권력은 권력의 유지와 쟁취를 위해서는 권력을 사용합니다. 권력의 목적은 정치고요. 그렇다면 권력은 어떻게 얻어야 할까요? 아렌트는 logos의 영역에서 얻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로, 설득을 통해서 얻어야한다는 이야기겠죠. 다른 말로 말하자면, 폭력을 통해서 권력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일까요?

아렌트에 따르면 폭력은 수단이 목적(정치)을 압도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폭력은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폭력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단기적으로 사용될 때에만 합리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렌트가 말하는 폭력의 가장 큰 위험성은 해체할 뿐 사람들을 결집시키지 못하며, 상황을 파국적으로 만들 뿐 새로 시작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지점입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는 로고스의 영역에 속합니다. 로고스를 통해 정치를 한다는 건, 말로 권력을 얻는다는 이야기이고, 이는 곧 누군가를 설득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설득은 폭력과는 달리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습니다. 설득의 전제는 타자를 전제한다는 것이죠. 모여서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고 하네요. 이런 면에서, 아렌트에게 폭력은 정치의 대척점에 존재합니다.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건 결국 파국을 불러일으켜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이에 반해 파농은 폭력이 시작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렌트와는 달리 공동체의 결집을 만들어낸다고도 보았죠. 이렇게 써놓으니 아렌트와는 정말 확 구별되네요. 파농은 폭력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파농에게 폭력은 단지 도구적 행위가 아닙니다. 도구는 목적에 종속되죠. 그리고 목적과는 분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추구하는 데 꼭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거죠. 파농에게 폭력은 공동체의 구성행위이며, 주체화 행위입니다. 즉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의를 갖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긍정됩니다. 폭력은 단지 부정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성하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식민지는 원주민을 탈주체화, 비주체화 시킵니다. 식민지 상황에는 인식론적 폭력이 늘 존재하죠. 파농이 말하는 물리적 폭력의 정당성은 이 지점에서 나타납니다. 식민지 원주민의 폭력은 그들을 주체화합니다. 그들은 폭력을 행하는 동시에 주체화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원주민들을 결집시킵니다. 이는 곧 물리적 폭력으로 인식론적 폭력을 공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런 지점에서 폭력은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죠. 식민지 해방의 목적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농이 폭력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강의 시작할 때 아렌트와 파농 둘 중 누구를 지지하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할 때, 전 파농에 손을 들었었습니다. 왜 파농을 지지하냐고 질문을 던졌다면, 저도 왠지 그의 문체가 좋아서(..) 뭔가 고양되는 느낌이 들어서(..) 뭔가 파농의 상황이 급박한 게 막 보여서(..) 이런 대답을 했을 거 같아요(..) 진짜 뭔가 감정적으로 끌리는 느낌이 드는 게, 막 식민지 조선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아렌트에게 묻고 싶었죠. 아니 대체, 식민지 해방을 위해서는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냐? 무력 투쟁은 안 된다고 하면, 식민지 원주민들이 어떻게 이주민들이 독점하는 권력의 장에 들어가서 권력을 얻어야 한다는 얘긴가. 이렇게요.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장, 소통의 장에서 이미 배제된 사람들이 권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파농이 말하는 식민지 상황에서의 인식론적 폭력-경계 설정의 문제는 이런 아렌트의 폴리스-오이코스의 문제와 겹쳐질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주민들은 도저히 이주민들이 독점하는 폴리스라는 고고한 영역에 포함된 인간일 수 없어 보입니다. 여기에서 원주민의 물리적 폭력 사용은 오이코스의 영역으로 구획된 노예들의 경계 허물기가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노예, 여성, 이방인들이 말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을 오이코스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폭력과 먼저 맞서 싸워야 할 테니까요.

...괜히 써놓고 보니 소심해지는데... 아렌트도 분명 이에 대해 뭐라고 할 텐데... 뭘까요... 파농과 아렌트를 더 읽어보는 걸로...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말로만 들어봤던 텍스트였는데 드디어 읽게 되어서 좋았어요. 이 텍스트를 관통하는 쌍으로는 목적과 수단-순수 수단을 꼽을 수 있습니다. 강의 시작할 때 몇 개의 개념쌍을 그리고 차례대로 이 두 항에 개념들을 대응시켰었죠.

목적-수단: 법실증주의, 법정립적 폭력-법보존적 폭력, 정치적 총파업, 신화적 폭력

순수수단: 혁명적 총파업, 신적 폭력

이런식으로요!

벤야민은 법의 기원에는 폭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ㄱㅖ약론적인 아름다운 구도는 없다고요.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이란 개념이 이런 맥락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 폭력이 법의 이름 하에 허용되고, 어떤 폭력은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을 봅니다. 전자는 사형제도로, 후자는 개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해하는 행위 정도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왜 후자의 폭력이 위험한 것일까요? 개인의 자연적 목적을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명제가 위험한 건, (질서) 바깥에 무엇인가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법은 자신의 질서를 운명으로 제시합니다. 자기 바깥에 무언가가 있지 않기를 욕망하죠. 그렇기 때문에 한없이 법의 외부로 향하는 어떤 폭력의 존재 자체는 문제가 되고, 법은 이를 금기시합니다.

이쯤에서 이 질문이 나올 수 있겠네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비판하는 폭력을 무엇일까요? 강의 시간에 던졌던 물음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놀랐었어요(...) 바로 과 관련된 폭력입니다. 즉 이 글은 법 정립적 폭력, 법 보존적 폭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법과 폭력의 관계는 앞에 적었던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앞에 적은 키워드들!) 그러나 이에 대립되는 항인 순수수단으로써의 폭력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벤야민이 말하는 비폭력은 조금 독특합니다. 법 정립적/보존적 폭력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벤야민이 말하는 비폭력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법 정립적 폭력을, 법 보존적 폭력을 파괴하기 위해 폭력을 다시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다시 다른 법의 정립을 낳을 뿐 아닌가요? 여기에서 순수수단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벤야민이 말하는 어떤 목적에 종속되는 폭력이 아닌 그 자체로 순수한 수단이 되는 폭력이란 무엇일까여..

벤야민은 폭력을 비판할 때 목적 수단 관계에서 생각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대신 순수수단의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멋진 말을 하면서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설명이 나오죠.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은 신화적 폭력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법 질서를 운명으로 만드는 그런 폭력이죠. 니오베와 같이 이러한 운명에 싸움을 걸어 도발했을 때,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은 단지 피를 흘릴 뿐인,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적 폭력은 다릅니다.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고, 경계를 설정하고, 법의 운명 안에서 끊임없이 죄를 짓고 속죄하길 반복하며, 위협하고, 피를 흘리게 만든다면, 신적 폭력은 법파괴적이고, 경계를 파괴하며, 면죄해주고, 내려치며, 피 없이 목숨을 앗아가는 폭력입니다. 이러한 폭력은 파괴적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재화들, , 생명 그리고 이와 동류의 것들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파괴적인 것이지, 결코 생명체의 영혼과 관련하여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165)

신화적 폭력, 운명으로 제시되는 법이 폭력을 행할 때 드러나는 피. ‘단순한 생명이 흘리는 피는 단지 인간이 육신적 생명체로 규정됨을 보여줍니다. 너희는 그래봤자 피흘리는 생명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요. 신적 폭력은 계율로, “판단의 척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동 지침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 계율은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원칙 위에 세워집니다. 신적 폭력은 어떤 생명에게 넌 단지 육신을 가진 생명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단지 어떤 목숨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벤야민은 이렇게 멋있게 말하죠. “인간은 아무리 비싼 값을 치른다 하더라도 인간의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살아 있음)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안의 순수하고 단순한 생명과도 일치하지 않고, 그의 어떤 상태나 성질, 심지어 그의 물리적 인신의 유일성과도 일치하지 않는다.”(167) 그리고 벤야민은 계속 멋있게 말하면서(...) 우리는 모든 신화적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엔 징표이고 봉인이지만, 결코 신의 집행 수단은 아닌 신의 폭력은 아마도 주권적인 폭력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169) 라며 글을 마칩니다.


...쓰다보니까 기운빠져서 마지막엔 대충 인용하면서 얼렁뚱땅 썼는데.. 아 힘들어... 아니 이게 뭐라고 일주일 내내 신경쓰게 만드나.... 어쨌건 다 썼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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