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차 쪽글

2015.03.16 19:26

은선 조회 수:382



중단된 일상

스스로 일상을 중단하는 것과 국가로부터 일상을 중단 되는 일은 둘 다 비정립적일 수 있는가?

아감벤은 ' 역사적 선험을 비정립하기 위해서 역사적 선험으로 돌아가려는 적실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노력이다. 예술적 아방가르드와 우리 시대의 정치운동의 실천 상당 부분도 작업의 비정립을 수행하려는 그 어떤 정당성도 결여되어 있는 만큼 훨씬 더 억압적인 권력의 재창출로 귀결되긴 했지만 말이다. 오직 삶의 형태에서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형태만이 구축적으로 비정립적이다. '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철학자들에게 '비노동'이라는 테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과제이자 현대의 정치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아우또노미스트나 비포역시 노동의 중단으로 부터 비 노동의 시간으로부터 다른 가능성을 유추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태업과 노동중단은 중요한 정치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생산에서 벗어나되 구축을 한다. 그러나 과연 지금 이러한 테제는 작동할 수 있을까?
현재는 노동을 할 수 있는 공장 밖으로 퇴출 당하는 것이 문제이다. 노동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중단 당하고 공장이라는 politeia 에서 oikos 로 퇴출당한 40-50대 남녀들이 수십만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은 강제로 노동의 조건에서 퇴출당했으며 그 누구도 이제 감히 태업이나 파업을 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 정규직들이 얼마전 했던 파업은 "잔업을 늘려달라"였다. 누구도 파업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으며 심지어 2013년 12월 민노총 사무실 침탈이라는 비참한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동하지 않는 날 '토요일'에 파업을 하였다. 그리고 12시 전에 집으로 흩어지거나 술집으로 흩어졌다. 노동의 중지는 한국에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그러한 상황에서 퇴출당한 쌍차 노동자들의 요구와 운동은 자격을 잃은 자들의 복권의 싸움이 되었다. 그들이 호소 하는 대상은 어쩌면 국민도 국가도 아니고 그 공장 안의 동료들이다. 그 안에서 노동하고 있는 동료들은 정치의 자격이 있는 자들이며 쫓겨나 굴뚝이라는 경계에서 긴장을 만들고 있는 그들은 국가와 자본의 적이자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리비도를 해결해야하는 대타자이다. 쌍차 노동자들은 폭력을 원하지 않았고 되려 폭력으로부터 되려 공장을 지키고자 했다. 그들은 공장 외부에서 정치와 비정치의 경계에서 위태하게 서있다. 이창근은 일상을 중지함을 굴뚝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sns를 통해 모두에게 생중계하고 있다. 쌍차 노동자들의 중지는 근대적 노동중단의 틀이 아니라 생명을 잃은 26명의 생명에 대한 복권의 의미이며 새로운 차원의 정지이다.



-----------------밑은 요약 -------------------



비정립적 역량 이론을 위한 개요

1.

275

서구 정치의 원초적 장소는 ex-ceptio 즉 벌거벗은 생명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인간 생명의 포함적 배제에 있습니다. 생명은 배제되어야만 하는 동시에 그 자신의 배제를 통해서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무정치적인 것은 예외의 구조를 지닌 복잡한 작동을 통해 정치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생명의 분할 절합 그리고 예외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출발부터 서구 정치는 생명정치 입니다.

2.
예는 배제적 포함인 반면에 예외는 자신의 배제를 통해서 정상적인 사례에 포함 됩니다.
이 포함적 배제가 아르케의 원초적 구조를 정의합니다

"주권적 권력의 근본적 활동은 벌거벗은 생명을 원초적인 정치적 요소로서 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벌거벗은 생명은 서구의 법적 -정치적 기계에 있어서 조에와 비오스, 자연적 생명과 정치적 생명으로 자격을 갖춘 생명 사이의 절합의 문턱으로서 기능합니다.

말라르메의 말로 하면 언어는 모든 원리의 부정에 아르케에서의 자신의 상황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로고스로부터의 로고스에서의 실재적인 것의 포함적 배제인 ex-ceptio는 언어의 사건의 원초적 구조입니다.

3. 고전기 그리스에 있어서 내전의 기능에 관한 진일보한 연구는 생명이 정치화되는 메커니즘을 명확히 밝히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크리스티안 마이어는 자신이 시민권의 정치화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실현된 정체구성적 개념이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전의 사회적 소속은 일차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조건과 지위에 의해 정의되었으며 이차적으로만 시민권이 내포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시민권에 의해 정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시민권 자체가 사회적 정체성의 기준이 됩니다.


" 스스로 정치적 삶에 헌신하는 한에서,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스스로를 일차적으로 폴리스의 참여자로 보았다. 그리고 폴리스 자체는 시민들의 연대의 토대였던 질서와 정의에 대한 시민들의 공유된 관심에 의해 본지적으로 구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폴리스와 폴리테이아는 서로를 정의했다. 정치는 상대적으로 넓게 분포되어있는 시민들에게 생명력있는 내용이자 고유한 관심 형태가 되었다. 폴리스는 집과 정치와는 분명하게 구별된 시민들의 영역이 필요의(anakaia) 왕국과 분리된 영역이 되었다.


마이어에 따르면, 시민권의 이런 정치화 과정은 특정하게 그리스적이며 다양한 종류의 변경 및 배반과 더불어 그리스에서 서구 정치로 전파되었습니다.  마이어가 말하는 정치화가 오이코스와 폴리스 사이의 긴장의 장 속에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화와 탈 정치화의 양극적이고 대립적인 과정에 의해 정의되었습니다.

4. 니콜 로로가 [가족 안의 전쟁]과 [분할된 도시]에서 한 연구에서 출발해서 이 관점을 즉 그리스에서 내전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치는 오이코스에서 폴리스로 나아가는 조에의 거주지로서의 무정치적인 집에서 정치적 행동의 유일한 장소로서의 돗로 나아가는 긴장의 장으로 제시됩니다. 로로는 내전의 원초적인 자리가 가족에 있으며 이것은 똑같은 가족 똑같은 오이코스의 구성원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달리 저는 내전의 장소는 오이코스와 폴리스 가족과 도시 사이의 문턱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스타시스 즉 내전은 문턱을 구성합니다. 가정의 소속감이 시민권에서 정치화되고 거꾸로 시민권이 가족적 연대 속에서 탈정치화되는 통과점을 구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만 내전에서 어느 한 쪽 편에 서서 싸우지 않은 시민들을 아티미아(시민권리의 상실)로 처벌했던 솔론의 법이라는 특이한 문서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법률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내전의 상황이 정치화/탈정치화의 문턱임을 알 수 있다.

내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폴리스에서 추방된다는 것과 맞먹는 것이며, 오이코스에 갇히게 된다는 것과 맞먹는 것이다.

5. 사용 개념에 관한 철학적 성찰은 사라지고 있다. 283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질적 무위라는 관념인 아르기아라는 관념을 재빨리 내던진다. -반면 아감ㅁ벤은 직업[일]없이 살아가는 존재로 생각하는 존재, 달리 말해 어떠한 소명도 결여한 채 살아있는 순수한 존재, 어떠한 정체성도 어떠한 작업도 고갈시키는 존재 인간의 무위는 모든 활동으로 중단이 아니라 인간의 작업과 생산을 무위로 만드는 활동으로 이것들을 새로운 가능한 사용으로 여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좌파적 전통이 생산과 노동에 귀속시켰던 일차성을 의문에 부쳐야만 하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활동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무엇보다도 이 개념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지 여부를 물어야만 합니다.

284 근대 시대는 노동의 중지라는 부정적 형태가 아니고서는 무위를 구축적으로 사고할 수 없습니다. 무위가 사유되었던 방식들 중 하나는 축제 입니다. 유대교의 안식일 모댈애서는 본질적으로 생산적 활동 즉 멜라카의 일시적 중지로 간주됐던 축제입니다. 경제로부터 해방되고 중지된다는 사실에 의해서 정의된다.

285 비정립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 축제란 없으며 인간의 작업을 무위로 만듦으로써 시작하지 않는 축제란 없습니다. 축제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가치와 권력들의 비활성화로 현시됩니다.
286

7. 구성적 권력에서 비정립적 역령으로 오늘날 근본적 존재론적 물음이 작업이 아니라 무의라면 하지만 이 무의가 작업을 통해서만 전개된다면 그에 상응하는정치적 개념은 더이상 구성적 권력과 구성된 권력 사이의 불가피한 변증법으로 재등장 할 것이다.
동시대의 정치적 성찰에서 마리오 트론티는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려고 하지 않은 채 '비정립적 역량'이라는 생각을 언급했다. 주체서의 식별을 본질저인 정치적 요소로 여기는 전통에서 출발한 그는 이 말을 정치적 주체성들의 황혼기와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라는 글에서 비정립을 사유했다. 법을 비정립하는데에서 그리고 그와 더불어 법이 의존하는 것들이고 그것들  역시 법에 의존하는 모든 권력들과 더불어 법을 비정립하는 데에서 종국에는 국가권력과 폭력을 비정립하는데에서 새로운 토대가 마련된다.

비정립적 폭력이란 무엇일까? , 법을 비정립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위적이고 비정립된 권력 만이 완벽하게 중립화됩니다. 벤야민은 비정립적 권력을 소렐이 단순한 정치적 파업에 대립시켰던 PT총파업에서 식별했다. 정치 파업에서 노동의 중지는 폭력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노동조건의 외면적인 수정만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플롤레타리아트 총파업에서의 노동의 중지는 폭력을 결여하고 있다. 심지어 이것은 "노동조건의 외적 양보와 몇가지 수정 이후에 노동을 재개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완전히 변혁된 노동 국가에 의해 강요되지 않은 노동만을 재개하려는 결단을 내포합니다. 이는 이런 종류의 파업이 야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실현하는 전복입니다.

유도한다 유발한다와 성취한다의 차이가 법을 완전하게 비정립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법을 언제나 재창조하는 구성적 권력과 법을 종국적으로는 비정립하면서 즉각적으로 새로운 현실을 개시하는 비정립적 역량 사이의 대립을 표현한다.

파괴적이지도 구성적이지도 않는 비정립적 전략의 예는 바울의 예입니다. 메시아와 법의 관계를동사 카타르 게인으로 표현한다. 이 말은 무위로 만든다. 즉 비활성화한다는 말이다.

메시아의 신앙은 그러니까 법을 폐지하지 않고서도 바로 법의 이 인위성을 중립화하고 무위로 만들어 버린다.


291 ***

아나키즘적 전통과 20세기 사상은 이 비정립적 역량을 사유하려고 했으나 둘다 실패했다. 역사적 선험을 비정립하기 위해서 역사적 선험으로 돌아가려는 적실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노력이다. 예술적 아방가르드와 우리 시대의 정치운동의 실천 상당 부분도 작업의 비정립을 수행하려는 그 어떤 정당성도 결여되어 있는 만큼 훨씬 더 억압적인 권력의 재창출로 귀결되긴 했지만 말이다. 오직 삶의 형태에서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형태만이 구축적으로 비정립적이다.

296 그리하여 우리는 서구 철학의 전통이 관조적 삶과 무위에 할당했던 본질적인 기능을 이해한다. \정치와 예술은 과제도 아니고 작업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언어적이고 육체적인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생물적이고 사회적인 작동이 무의가 되고 그 자체로 관조되는 차원이다.





남겨진 시간 4

은선 정리

아포스토로스라는 말은 사자 파견된 자를 지칭하며 이 경우에는 구세주 예수 및 신의 의지로 인해메시아적 고지를 위하여 파견된 자를 말한다.
샤리아는 법률상의 개념이다. 소정의 임무를 위하여 파견된 인간을 말한다. 샤리아에는 '어떤 인물의 사자는 그 인물과 동일하다' 대리인에 의한 법적 결정의 제귀결은 위탁자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라는 랍비의 결률이 적용된다. 로마법과 유사한 격률이다. 팔레스티나의 공동체는 셰루힘을 디아스포라의 공동체에 파견했지만 설령 임무가 종교적인 성격의 것이었더러다고 늘 그 임무는 한정된 것이였으며 그 인물에게 과도한 요구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예언자

105 예언자란 무엇인가? 야훼의 숨결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자신의 것이 아닌 언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사람이다. 예언자와 사도는 구별된다. 106 유대교에서 예언이란 그 기능을 정의하고 그 형태를 한정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을 화법이나 시간 속에 제한하려고 하는 다른 세력들과 영속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힘 또는 긴장과 같은 것이다.  랍비의 전승은 어떠한 정당한 예언도 기원전 587년 최초의 성전파괴로 인하여 종료된 이상적 과거의 한계 속에 가둬두려고 한다. 107 예언자는 본질적으로 그의 미래와의 관계를 통해서 정의된다. '언제까지'는 예언자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고할 때마다 고지는 언제나 현재하지 않는 올 때에 관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예언자와 사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사도는 메시아의 도래를 시점으로 말한다. 이 시점에서 예언은 침묵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예언은 지금 진실로 성취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폐쇄를 향한 내적 긴장상태에 있다는 것의 의미이다. 언어는 사도에게 그리고 메시아의 사자에게 이행되며 그것의 시간은 더이상 미래가 아닌 현재인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로에게 있어서 메시아적 사건을 위한 전문적인 표현은 '지금 이때 ho nyn kairos'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바울로는 사도이지 예언자가 아닌 것이다.

묵시록적

메시아적 시간과 종말론적 시간과의 혼돈이 발생하고 있다. 미래로 향하고 있는 예언이 아닌 시간의 종말을 관조하는 묵시는 메시아적 고지에 대한 가장 방심할 수 없는 오독이다. 묵시자는 최후의 날 분노의 날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그는 종말이 완수된 것을 보고나서 자신이 목격한 것을 기술하는것이다. 이에 비해 사도가 살고 있는 시간은 종말이 아니다. "메시적인 것은 시간의 끝이 아니라 "끝의 시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사도의 관심사는 최후의 날 시간이 끝나는 순간이 아니라 수축하며 끝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또는 더욱 적합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시간과 종말과의 사이에 남아 있는 시간인 것이다.

유대교의 묵시문서의 전승과 랍비의 전통은 두 가지의 시간 또는 두 가시의 세계의 구별을 인식하고 있었다. 창조에서 종말까지의 세계의 지속기간을 지칭하는 오람하제와 오람하바, 도래하는 세계, 종말이후에 계속되는 무시간적인 영속성과의 구별이다.
그리스어를 통한 유대교의 전통에 있어 두 가지의 아이온 또는 두 가지의 코스모스가 구별되고 있다.
'이 아이온, 이 코스모스'와 '도래하는 아이온'이 그것이다.

하지만 메시아적 시간 사도가 살고 있는 시간, 사도가 유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란 오람 하제나 오람하바도 아니며 묵시록적 종말도 아닌 남겨진 것이다.

만일 메시아적 구분, 또는 아펠레스의 절단으로 인해 시간의 분할 그 자체가 분할된다고 한다면, 이들 두 시간의 사이에 남아있는 시간인 것이다. 


110 메시아적 시간은 세속적 시간의 일부이면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변질시키는 수축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위의 도식에서 이러한 이종성은 점선을 통해서 불충분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아펠레스의 절단의 이념을 문제 삼아 메시아적 시간을 두 시간 사이의 분할 자체를 분할함으로써 그 안에서 분할을 초월한 하나의 남겨진 것을 도입하는 구분으로서 표상하는 편이 훨씬 엄밀한 것이 될 것이다.

111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들의 시간표상이 공간적인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한 일반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종말과 메시아적 시간과의 혼동은 바로 그 역력한 일례인 것이다. 시간을 하나의 직선으로 표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절대적으로 사고 불가능한것이 된다. 반대로 시간의 현실적인 경험에 관하여 반성해본다면 거기에서는 무엇인가를 사고가능하게 하지만 엄밀하게는 표상불가능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메시아적 시간을 두 아이온 사이에 위치시킨 선분으로서 표상한다면  이미지로서는 명확하지만 남아있는 시간과 끝나기 시작한 시간의 경험에 관해서는 그 어떠한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표상과 사고 사이 그리고 이미지와 경험 사이의 이러한 절단은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 이 애매함을 피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표상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112 조작시간

조작시간 기욤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은 시간의 경험을 지니지만 그 표상은 갖지 않는다. 때문에 그것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질서에 속하는 구축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하여 문법은 동사의 시제를 현재라는 절단에 통해서 나누어진 과거와 미래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 무한의 직선으로서 표상되게 된다.

------------------  현재 -----------------
과거                                                  미래


113 그리고 이 표상은 이것을 기욤은 '시간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다-불충분하다. 왜냐하면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 구성된 시간을 우리들에게 제공하지만 사고 내에서 구성되고 있는 시간에 관해서는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지 못한다.

기욤은 조작시간을 시간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마음을 지닌 시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언어가 그 동사체계를 조직하는 것은 앞의 직선도식 너무 완전하기 때문에 빈곤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구성된 조작시간에 관련시킴을 통해서 이다. 이처럼 기욤으누시간의 연대기적 표상을 복잡화 시켜 그 위에 시간 이미지의 형성과정에 관한 표상을 투영하고 크로노제네틱한 표상이라는 3차원의 새로운 표상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6 '이제부터는' 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으로서의 메시아적 시간을 지칭하고 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일반적으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질적으로 서로 상이한 것으로서 대치되지만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양자를 대치하는 것 또는 대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양자의 관계를 문제시하는 것에 있다. 우리들은 카이로스를 말할 때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 수축되고 단축된 크로노스일 뿐이다.


파루시아

118
바울로는 메시아적 시간을 두 시간으로 나누고 있다. 부활과 파루시아 즉 시간의 긑에서의 예수의 임재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역설적인 긴장이 발생한다.

메시아적 안티노미(이율배반)은 무엇하나 성취될 수 없는 '유예속에 살고 있는 삶'으로서 정의된다.
'우대적인 실존이란'이라고 그는 적고 있으며 '결코 진정한 만족을 발견할 수 없는 긴장' 이라고 마찬가지로 궁지에 몰린 상태라는 것은 메시아적 시간을 일종의 경계영역 또는 '두 시기 사이의, 즉 새로운 아이온의 시작을 규정하는 파루시아와 오래된 아이온의 종말을 규정하는 파루시아 사이의 과독적 시간
 
임재에 대한 바울로적인 해체가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조작시간이라는 전망으로부터이다.

121
카프카의…. 메시아는 그 도래의 날이 아닌 겨우 그 다음 날에 최우의 날이 아닌 최후의 최후의 날에 도래한다는 것이다. 파루시아를 파악하기 위해서 파루시아를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이 때문에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일 수 있다.

139
세스티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튜포스론적 관계에 부합되는 어운의 고지와 재취득의 기교적인 매카네를 통하여 크로노지컬한 시간을 메시아적인 시간으로 변용하는 구제론적 장치이다. 시가 그 끝을 위하여 취하게 되는 시간에 한에서 경험하게 되는 변용이다.


6장

237
바울로의 편지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라는 우리들의 전통에 있어서 메시아니즘의 최고의 두 텍스트가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둔 근원적인 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며 하나의 성좌배열적 관계를 형성하고있다는 공통된 사실로부터 우리들은 바로 오늘, 그 '독해가능성의 지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독해가능성의 지금' 혹은 '인식가능성의 지금'이란 순수하게 벤야민적 해석 원리를 정의하고 있는 거으로 그것은 모든 작품이 모든 순간에 문한의 소진되지 않는다는 의미와 그것이 놓여 있는 역사적 시간적 상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간으하다는 의미의 이중적인 의미로서의 무한한 해석이 되고 있다.
238
이미지란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의 성좌배열적인 관계 속에서 지금과 전광처럼 결합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이미지란 정지된 변증법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과거와의 관계는 단순히 시간적인 것이지만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과 지금 사이의 관계는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적이다. 변증법적인 이미지군만이 진정으로 역사적인 것이다. 읽혀지는 이미지 즉 인식가능성의 지금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모든 독해의 기저에 존재하는 위기적이고 위험한 순간의 각인을 최고도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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