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부터는 주권이 아닌 폭력에 대한 논의를 살펴본다. 폭력에 관한 논쟁적인 두 저작을 중심으로 폭력론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확인하였다. 하나는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폭력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폭력을 옹호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렌트의 공화국의 위기폭력론에서 폭력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우선 파농은 식민지 상황이 폭력으로 정초되었기에 억압되고 타자화된 식민지인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현상인 탈식민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적대적 대립 속에서 이루어지는 탈식민화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무엇보다도 파농은 탈식민화란 인간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며, 과도기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오로지 전면적이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대체만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의 성공여부는 사회 전체의 변화와 결부되며, 이러한 변화는 식민지인의 상황 그 자체에서 의도되고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식민화는 초자연적 힘의 소산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과정의 산물이며, 식민지 상황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의문에서부터 출발하여 현실에서 이를 실현해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파농은 탈식민화를 폭력적 현상으로 사유함으로써, 식민지 현실에서 수단으로서의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에 아렌트는 폭력과 권력의 상호 연루를 당연시 하는 정치적 맹신에 대한 견제 입장에 서있다. 특히 아렌트는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당시의 주류적 흐름에 반대하면서, 정당한 목적을 주장하면서 폭력을 사용하였던 사례가 가져온 참상을 지적한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나 독일의 전체주의, 소련의 스탈린주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결부시켜 사유할 경우에는,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의 이원성을 논의하면서, 권력으로부터 폭력을 끊어내고, 권력은 집합적 행동과 공적 토론에 입각하여 형성되는 것으로서 인민으로 구성되는 정치공동체의 현존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달리 말해, 아렌트는 권력은 목적 그 자체이므로 따로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으나, 폭력은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에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구분하면서, 권력이 폭력을 사용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권력은 약화되며 끊임없이 폭력을 사용하는 상황에 빠져들게 되어 폭력이 권력을 대치하는 전도의 위험성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과학과 기술 영역에서의 발전은 전쟁수단의 발달을 가져오며, 이는 자체적으로 생명력을 가져 끊임없이 발전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본다. 따라서 핵무기의 탄생은 이러한 폭력 수단의 자체적 발달의 필연적 귀결이며, 그 결과 폭력 자체가 목적으로 추구되며, 인류의 종말에 예견되는 극단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아렌트는 인류가 다시금 그리스-로마 전통에서 유래하는 공적 영역으로서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 이성에 기반 한 공적 영역에서의 토론과 모임에 기초하는 정치, 폭력을 배격하고 권력 그 자체가 추구되는 정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폭력은 이성에 기초한 공적 영역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리하여 새로운 시작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든다고 보는 시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파농은 이러한 아렌트의 폭력에 대한 시각과 달리, 폭력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오직 폭력적인 탈식민화를 통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식민지 인민들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식민지 민중으로서는 폭력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폭력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폭력의 행사는 그들을 거대한 폭력의 유기체로 묶어주며, 집단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통합된 민족으로 결속하게 해준다. 이렇듯 원주민의 폭력은 집단적 차원에서는 민중을 단결시키며, 개인적 차원에서는 원주민에게서 열등감과 좌절, 무기력을 없애주고, 용기와 자존심을 되찾게 해주는 정화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요컨대, 파농에게 폭력은 아렌트의 경우와 달리, 민중의 의식을 깨우고 단결하게 해주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힘이다. 하지만 여전히 파농에게도 폭력은 탈식민화를 위한 도구이며, 목적 그 자체로 사유되고 있지는 못한다. 또한 아렌트도 목적으로서의 권력을 위해서 폭력이 목적 그 자체로 추구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하며, 따라서 폭력은 수단으로서 여전히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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