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후기 (이제와서야...:)

2015.06.1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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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15강에서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읽었지요.


데리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에 영감을 받아

유령이란 무엇인가 고민합니다.

유령을 마주하면서 무언가 시간이 뒤틀려 있음을 깨달은 햄릿은 

'그것(thing)'이 진짜 아버지의 영혼인지 확신도 없이 그를 대신해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하지요.

왜 햄릿은 이렇게 무모한 약속을 했던 것일까요? 

데리다는 이런 햄릿을 두고 "신들려" 있다고 말합니다.

신들린 사람은 덮어놓고 믿어 버리고, 덮어놓고 일을 저지르지요.

그렇다고 그는 그 유령을 무시할 수도 없는데, 그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옆에 따라 다니기 때문입니다.

신들린 사람이 신을 부정하면 무병을 앓는 것처럼 이미 유령을 겪은 햄릿도 그와의 맹세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데리다는 유령의 이러한 독특한 임재, 즉 이미 곁에 있음(parousia)에 착안해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에 주목합니다.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Ein Gespenst geht um in Europa - das Gespenst des Kommunismus)" 

1848년 유럽에는 공산주의가 명확한 정치행위자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이 유령처럼 잘 보이지 않지만 서늘하게 느껴지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하여 "푸닥거리" 하려는 자본가, 교회, 왕당파 등의 '신성동맹'을 보고

맑스는 바로 이 유령이야말로 현실화시켜 정치적 세력으로 만들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햄릿이 유령을 보고 그것을 징후로 여겨 무언가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맑스도 "공산당을 선언함"으로써, 즉 수행적으로 유령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유령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식별할 수 없습니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또다시 어느 밤에 찾아오는 유령. 

그런 점에서 유령은 아무리 현실화시켜도 또다시 유령으로 돌아오는 무한한 잔여라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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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기가 느껴지는 <공산당 선언> 초판본의 첫 페이지. 당시 독일에서는 다 이런 인쇄체로 책을 냈다고 해요... 정말 너무하네요. 



이러한 유령의 움직임을 가리켜 데리다는 '장래(avenir)'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장래'는 먼 미래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래(avenir)'는 불어의 부정법 'à venir'에서 생긴 말인데, 명사에 이 부정법이 붙으면 앞으로 도래할 것임을 가리킵니다. 

블랑쇼의 유명한 책 <도래할 책(Le Livre à venir)>가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장래는 미래의 저수지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으로 흘러 들어오지만 결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장래를 데리다는 타자, 이질성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드시 어긋나고야 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를 이끌면서 거기로 향하게 하는 것, 그러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

이러한 시간 구조를 가리켜 데리다는 '이음매에서 벗어난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결과로서의 현재, 현재의 연장으로서의 미래가 붕괴해 버리니까요. 

혁명의 순간에는 이천년전의 로마도 호출하고, 꿈만 같은 유토피아도 현재로 끌어당깁니다. 

로마가 지금을 낳았다고 말할 수도, 지금이 반드시 그 유토피아로 가리라는 보장도 없이 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앞뒤로 땡겨쓰는 "신용대출"이야말로 현재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이러한 힘의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고 데리다는 말합니다.

그야말로 현재의 우리들은 결코 계산되지 않는 유령의 시간들을 떠안고 있으며

이것 하나만 믿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견고한 이음매가 채워져 있는 법적 책임의 귀속여부에 따라 정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타자를 위해 선뜻 자신을 내던지는 충실한 주체야말로 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1991년 소련이 망했다고 해서, 

앞으로 그 어떤 변화도 가능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다고 해서 후쿠야마처럼 

세상이 '쫑' 났다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마치 자본주의가 정의의 사도인 것마냥, 최후의 시대인 것마냥.

알 수 없지만 계속 그 존재를 어렴풋이 방사하고 있는 것들을 향해 정의를 투사해야 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으로 보입니다.


참, 뜬구름 잡는 이야기입니다.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을 읽을 때에도 어떻게 모든 시간을 총괄하면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로 나아간다는 것인지 

벙쪘었는데... 데리다도 역시나... 유령같은 남자에요. 

정정훈 선생님은 데리다의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타자에 충실한 주체성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주체성이라는 말이 계속 걸리네요. 

주체성은 주체의 의지, 그리고 거기에 따른 행위의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신들린 자에게 주체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24시간 신들려서 방언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신들림의 강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유령을 위한 정의를 충실히, 주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 그리고 이렇게 식별할 수 없는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속받아 맹세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저는 여기서 라클라우/무페의 '절합'을 떠올렸는데요,

데리다는 블랑쇼의 말을 인용해서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 자체를 '함께 유지하기'", 즉 이접에 대해서 말합니다.

절합(articulation) 역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접합하는 것인데요,

라클라우/무페는 이러한 절합을 통해서 적대의 선을 새로 구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명확한 적대의 선을 위해 수행되는 절합은 헤게모니를 위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요.

여성주의 운동과 기본소득 운동을 절합해 기득권에 저항하는 판을 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절합은 무언가를 잘라서 온전한 하나를 다시 구성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데리다의 '이접'은 이것과 많이 달라 보입니다. 

성공적인 절합 이후의 일은 어떨까요? 아니, 성공적인 절합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요? 

데리다는 절합되는 것들의 모순적인 성격들을 동시에 유지하면서 그것들을 비유기적 전체로 바라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기득권에 대한 적대의 선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서로에 대해 백퍼 공감을 못할 수도 있겠죠.

"우린 지금 함께 모여 있지만,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고 일단 뭔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여기 있는 거야. 왜냐하면 함께 있고 싶거든"

이런 게 데리다가 말하는 이접일까요? 

세월호 유족의 아픔을 결코 알지 못하지만, 동성애자가 아니며 그/녀의 고통에 동감하지도 않지만 

아니 감정이입이나 인간의 도리를 통해 화학적으로 하나가 되지도 않으면서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데리다가 제안하는 바일까요? 

동감이나 감응 말고도 "함께 서로를 유지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보자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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