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아희 속에 피어난 사제
새해가 되면
집안 어른께 세배를 했다.
세배 돈이 큰 돈 일 때
어머니는 늘 잔 전으로 바꾸셨다.
아이는 큰돈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대학을 갓 들어가
고아 애들과 함께 예배와 공부를 했다.
몇 년간 모두들 지쳤다. 그리고 다들 떠났다.
교육의 효과가 전혀 없었기에
마지막 남은 선생마저 떠나려 할 때에
한 말썽꾸러기 학생이 울면서 그를 붙잡았다.
더 이상 가리킬 힘이 없다고 선생은 말했다.
그 학생은 아직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과자가 먹고 싶을 때 더 이상 과자를 훔치지 않는다고
과자를 먹고 싶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그는 울면서 말했다.
그때에도 원 교정에는 흰 눈이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시인의 변론: 위 시를 통하여 하이데거와 브렌타노 그리고 후설의 시학에서 보여준(만일 이 삼인의 존재론이 시운율로서 이렇게 시학적 환원으로 설명 될 수있다면 또 그것이 읽고 있는 독자로부터 허락 된다면) " 있다"의 형이상학 존재론적 운율, "이다" 의 논리적인 의미론적 운율 과 " 이라" 의 언표적인 통사문법적 운율의 차이가 들어날 수 있으리라 확신 합니다. 최근 나중에 발견한 일인데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일평생을 시작하다 세상을 떠난 한국시인이 김춘수라는 시인이더군요. 물론 이상과 특히 김수영의 존재시학과는 다른 뉘앙스로 그의 시정신을 필자는 보는 데요. 어쨌든 이러한 그는 그의 시력인 즉물시-관념시-무의미시(=존재시)라는 김춘수시인의 자기시학적 흐름에서 병치은유라는 독특한 이미지-리듬-이야기비유법을 통하여 자기만의 시지음을 행한 시인이였음에는 분명해보입니다. 물론 그의 모든 평생의 쓴 시는 매우 훌륭한 시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허나 역시 그도 철학자가 아닌 문인으로서 하나의 시쓰기 한계관점인 다시말해서 철학과 문학과의 경계지점인 존재-의미-문법의 날카로운 시어들 사이의 차이 관계를 낼 수있는 시작품들의 입지점들이 빈약해 보는 는 것같습니다.
물론 그의 시대가 지금의 포스트모던을 지나 탈모던 시대에 이를 현재의 21세기 시죽음과 시와 비시의 시대에 다 다른 것을 감안 한다면 이같은 필자의 해석은 무리가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시인 김춘수의 시적인 문제의식은 브렌타노-후설-하이데거의 철학적 존재시와 문학적 운율수의 논쟁가능지점과 연관 되어 있슴은 분명해보입니다. 단지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후세인이 이 관계를 명백히 증명해 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 졸시는 아마도 김춘수 시인이 병립적으로 시도했었던 병립비유법인 그림-리듬-,무-의미의 병치비유법을 각 행마다 연마다 동시에 작동시키고 있습니다. 이 그림-리듬-무의미의 병치은유를 필자는 위시에서 동시에 작동시키면서 그것을 마치 옷이 꼭 맞을 때에 안 입은 것과 같이 그 몸의 움직임이 날아 갈 듯 경쾌하듯이 김춘수시인과는 다르게 필자의 시의 움직임은 결국 이 세 병치비유가 시의 아름다운 진실 만을 위해 사라지고 맙니다. 이 사라짐을 주목해 주세요. 이 언어-의미-존재운율의 시 속에서 사라짐을 볼 수 있는 독자가 말라르메가 그렇게도 시를 통해서 찾고자 했던 언어를 통하여 자유하게 되는 절대 사유의 무사유의 순수한 시 지평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위 시분석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