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몰적인 것을 반동적 힘으로, 그리고 분자적인 것을 이로운 성향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177) 그럼에도 불구하고, " 들뢰즈와 과타리는 물질. 생명. 문화의 장을 횡단적으로 연결하는 뤼이예의 구분을 받아들이지만, 뤼이예의 관심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쟁점을 이에 부여한다. 몰적인 것은 질서와 종속을 지향하며, 분자적인 것은 '탈약호화'와 사회적 해방을 지햔한다. 몰적인 것이 권력의 강제적 부과를 의미한다면, 분자적인 것은 저항의 힘을 표현한다" , (178)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다소 모순된 진술인 듯한 이 문장들은 뤼이예를 수용하는 들뢰즈 과타리의 방식에 관한 다음 문장의 언급에서 오해 해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뤼이예의 이론에서 작동한 몰적 질서는 단지 인과적 모델화에 해당하는 것"(178)이었을 뿐인데 비해, "구성된 구성체는 분자적 운동(주체집단)이 해체하는 지배, 질서. 질서 유지(종속집단)의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들뢰즈와 과타리는 구성된 (몰적)집합과 (욕망하는) 분자적 구성체를 구분하기 위해서 뤼이예의 논증방식을 취하여 이를 사회 정치적으로 이중화한다. 뤼이예가 순수한 통계학적 의미의 군중 현상으로 이해한 것은 이제 집단 현상이 되어, 군중을 분할하고 동질화하는 지배 역량에 복족하는 군중들의 종속화하는 정치적 함의를 띄게 된다" (179)
즉, " 뤼이예의 이론에서 물리적 신체(개체)는 단순히 통계적 조직"(177)으로서, 분화과정의 "구성체의 평면"과 대응되며, 이는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는 말한 "개체화의 충동과 강도적 미분의 양태 구분과 일치한다" (178) , 이것은 다시 과타리의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대립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들뢰즈는 이를 두 유형의 다양체의 구분에 통합한다.
" 물리적이라 할 몰적인 것은 ~ 양적 다양체에 속하지만, 미시물리학적인 분자적인 것은 단일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 창조적 분화가 가능한, 실체적이고 질적인 진정한 다양체에 부응한다 " (178)
정리하자면, 이와 같은 양적 다양체와 질적 다양체에 통합된 물적-분자적 관계는 " 몰적인 것"을, 단순히, 물리적인 작동을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 실재하지만 순수하게 통계학적인 질서 현상들, 종속 집단의 투여, 집합과 개인, 신체와 주체에 관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몰적인 것이 "군중을 분할하고 동질화하는 지배 역량에 복종하는 군중들의 종속화하는 정치적 함의를 띄게 되'는 지점이 여기다.
튜터가 "몰적인 것'을 실체가 없는 것으로서, 분자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만들어 내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설명했을 때, 그것은 몰적인 것이 통계학적 질서 현상들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 통계적 현상들은 뤼이예의 말마따나 '개체화'를 전개시키는데, 이는 들뢰즈 과타리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배치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튜터의 말이다.
여기서 다시 확인해보아야 할 것은, 몰적 집합과 분자적 구성체를 구분한 것이 둘 사이의 본성적 차이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사이의 관계는, 반동적, 혹은 이로운 '성향'의 차이로 규정할 수 없다. 오히려, "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이 두 유형의 선과 영토성의 방식들은 현실적으로 공존한다( "이것은 동일한 기계들이다")(179) 따라서,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의 차이를 "두 분류 대상 사이에 설정된 차이가 아니라 , 현실이 실행되는 두 층위, 두 유형의 인식론적 분석 사이에 설정된 차이" (177)이다. 따라서, " '집단현상'을 통해 포착된 기계들이나 '미시적 독특성'을 통해 포착된 기계들 간에 '본성적 차이'는 없으며, 독특성이 물적인 선에서 집단에 따르느냐 아니면 집단이 분자적 선에서 독특성에 따라느냐에 따라", (180) , 다시 말해 " 우리가 이를 미분의 잠재적 양태와 연결하느냐, 지층화의 역사적 양태와 연결하느냐에 따라, 동일 현상에 대한 다른 양상들을 함축한다" (196)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튜터가 "여기서는 ~ 자신의 집단 현상에 포착된 사회적 기계들이며, 저기서는 ~ 하위 미시적 독특성에서 포착된 욕망하는 기계이다" (179)를 설명하면서 몰적 형식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분자들 간의 관계이지만, 이 분자들이 탈코드화의 여백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모든 욕망하는 기계"를 몰적 층위와 탈코드화의 층위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2. " 독신자 예술가의 초상은 독특성을 구성하는 강력한 요소, 즉 가족적이지 않은 비인격적 비주체적 독특성으로 예술가를 변용시키고, 천재의 개인적 개체성을 해체한다" (181) 는 문장의 상세한 설명 요청에 대해
튜터는 말한다. '독신자'되기를 개인되기와 혼동하지 말라고... '독신자'란 "집단의 경계에 위치한 특이한 자"로서 사회적 기계에 포섭된 인칭적, 인격적 개체성을 포기한 자로 이해해야 한다. 가족관계에 포섭되지 않는 자로서의 '독신자'라는 말은 오이디푸스적 권력 모델에 대한 저항적 함의도 갖고 있다. 즉, 정신분석학에서의 가족관계의 지배성을 공격하고자 한 말이다. 따라서, 독신자 되기는 '만인되기'이다. "아르토가 우리를 구했다"는 말은 독신자 예술가로서의 아르토가 "개인적 개체성을 해체하는" 만인되기를 통해 서구적 이성의 한계를 상대화하여 볼 수 있게 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몰적 질서와 분자적 질서라는 두 질서의 구분을 통해 정신 분열증 개념은 분자적 과정과 억류된 정신병 환자의 심리적 붕괴-이제 몰적인 것에 속하는 -라는 두 문턱 혹은 두 상태로 확고히 분배된다." (180) 과 관련하여 분자선의 긴장된 힘을 포획하는 것으로서의 '예술'과 광기의 관계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요청한 데 대해,
튜터는 말한다. 한 편의 시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한 명의 시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블랑쇼가 시를 시인에 앞서 온 것이라 말했을 때의 의미가 그러할 것이다.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감각의 수준을 벗어나야 먼저 와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맥락을 강조한 것이리라. 물론 , 시와 시인의 관계는 보다 미묘한 '긴장'을 형성한다. 예술가가 기관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 예술 행위의 전제일 텐데, 이 기관없는 신체가 암적인 것이 될 위험성도 있다. 아르토는 지각의 한계체험까지를 실험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분열증은 사회관계로부터의 '탈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탈주'적 행위로서 아르토가 광기에 빠진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대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몰적인 것을 지나 분자적 단위까지 내려가 본 것이 아르토가 아닐까? 랑그로부터 탈주를 감행하여 보다 분자적 층위에서 흐름이라고 할 말한 것을 포획하려 했던 아르토적 시도들 말이다.
8장 감각의 폭력성
1. 형태와 형상
" 형태는 뇌에 호소하고 의식적 지각의 중계에 의해, 작동하며. 결국 상투적인 감각-운동적 대응을 낳는 상투적이고 고착되고 보편화한 이미지, 즉 클리셰로서 기능한다. 반면, 감각으로 옮겨진 감각적 형태인 형상은 걸작을 규정하는 충격과 폭력적 감각을 생산하면서 신경계에 충격을 준다" ( 215 )
튜터는 말한다. 이 문장에서 형태는 '형식'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형상-질료 모델이다. 들뢰즈는 형상-질료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모델을 뒤집는 시몽동의 변조모델에 의거하여 형상과 질료의 관계를 뒤집는다. 질료는 형상의 부차적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재료 자체를 통해 , 감각되지 않았던 힘들은 감각적인 것이 된다" ( 214)는 점에서 선차적이다. " 엄격히 말해 오직 힘들만이 존재하며, 형태는 힘들의 어떤 생성이다" ( 215) . 형태(형식)이 감각과 관계할 때, 그것은 재료를 통해 형태로 구성된 것(구상성)이 아니라, 형상을 감각적으로 출현시키는 것으로서, "질료와 형태의 조합으로 귀결되지 않는 전혀 다른 개체화"(214) -힘의 포획-이다. 즉 , "형상은 개별적 형태로 주형된 어떤 신체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모든 돌발적 충동들, 기관없는 신체의 비유기적 생명력에 이르고자 분투한다" (215) , 즉 " 들뢰즈가 형상이라 부른 것은 그림 속에 자리잡은 머리 혹은 신체, 즉 인물이라기보다, 세 회화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변용시키는 보이지 않는 역동적 유희들, 즉. 고립. 기형화. 산포의 힘들이다. " (216)
2. " 세계의 시간에 존재할 것, 바로 이것이 지각 불가능함. 식별 불가능함, 비인칭적임이라는 세 덕목들을 연결한다" (202)
튜터는 말한다. 세계의 시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연대기적 시간(Cronos)에서 벗어나 생성의 시간(Aion)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개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몰적 형식을 넘나들어 '이것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3. "구상을 넘어서는 것은 매우 다양한 경로를 통해 행해진다. 과거의 회화는 유기적으로 조직된 신체의 좌표 아래로 해방된 현전성과 탈조직화한 신체들이 지나가게 함으로써 이를 성취했다. 현대회화는 독특한 두뇌성을 보이는 추상의 길과, 베이컨이 길을 연 구상적이 아닌 형상적인 길, 즉 형상의 길로 양분된다" (221) 에서 "해방된 현전성과 탈조직화한 신체들이 지나가게 함"이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튜터는 말한다. 엘 그레코의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에 보면 지상에서의 모습은 다분히 재현적이지만, 천상에서는 "해방된 현전성과 탈조직화한 신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들뢰즈는가 신의 이름으로 재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천상의 이미지'를 그리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구상성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4. 그리고 남은 문제에 관해
튜터는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실험'이다. '실험'이 선언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침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실험'에 관한 보다 자세한 '변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실험'은 설명되어야 할 것이기 이전에 각자에게 '영속적인 과제'로 남겨져야 할 숙제이기에, '변명'은 잠시 유보한다. ( 다음 시간에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정리한 자 주)
-------------------------------------------------------------------------------------------------
혼자 메모한 것을 정돈한 것이기에 정리는 소홀하고, 내용은 부정확합니다. 그러나, 두 분 발제자의 깔끔한 정리와, 저의 성급하고 잘못된 이해를 새삼 일깨워준 질문자들의 문제제기들, 그리고 저의 무모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은 튜터의 충실한 설명과 안내는 간단한 정리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더 많은 배움을 주었습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들 감사합니다.





우와와와!!!!!! 발제문 못지 않은 후기입니다!!! 친절하게 그림까지~~~~
저는 지난 시간에 태준건님의 질문 덕에 꼬였던 것이 풀렸었어요 ^-^;;
ㅎㅎ또한 매 시간 한 번씩은 주시는 웃음선물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