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제가 후기를 써야 했군요. 뒤늦게 공지사항 표를 보고 화들짝 놀랐어요. 이번 주 발제라 후덜덜 하고 있는데 후기까지... 못 본 척 넘어가려다 뒤죽 박죽인 머리 속을 정리 할 겸 하여 지난 시간에 나왔던 질문 위주로 정리하겠습니다.
*이것임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thinking...하는 이 순간도 개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이루는 이 순간의 계절, 대기 상태,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어떤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건적 개체화한다는 의미로 이해... 때문에 특정한 개체가 되도 그것 아래에(?) 잠재성이 남는다. 이런 들뢰즈의 사유는 기존 철학사적 입장에서 보면 마이너적이겠지만 사실 동양철학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고. 변쌤도 지적했는데요... 그런데 정말 들뢰즈 말을 따라가다 보면... 그러게. 그 말이 더 내 삶의 실제에 가깝고... 정말 심하게 말하면 그래야만 설명되는 것들이 많은데... (내 자신은 고정된 주체도 없고 이 세계는 매 순간 바뀌니까) 이 ‘이것임’을 단박에 이해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를 것을... 어찌된게 참 더디죠...그만큼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습관의 벽이 커서겠죠?
* 카오스모스 : 코스모스vs카오스라는 대립구조가 아니다.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질서, 점선적인 질서가 그대로 다 현행화 되는 건 아니지만.. 미세한 미분.. 상태로 아직 분화되지 않은 것. 예술은 카오스 모스를 구성하는 것이다.
* 초월적(transcendent) 경험과 대상의 범위를 넘어선 실체/초월론적 (transcendental 선험적 先驗的) 대상들 일반에 관한 우리의 선험적 개념을 다루는 모든 인식
들뢰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인식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인식’ 이라는 칸트의 초월론적(선험적)장을 가져온다. 여기서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구성 능력. 많은 것들 중에서 무엇이 그것을 인식하게 했느냐.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을 인식하게 한 외부에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면 그것을 있게 한 우리의 구성능력(수동적, 능동적 종합)이 있었기 때문...
여기서 스피노자의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이제까지 엄연히 신체가 존재하는데도 소외시켰던 신체 소외의 역사를 돌아보고... 우리의 신체가 얼마나 도약할 수 있는지 실험!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역행involution (이때 문학의 역량, 회화의 효과는 유기적 형태의 능동적 능력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93p)
유기체화 되도록 한 능력이 어떤 것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원래 그것을 만들었던 힘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100퍼센트가 다 어떤 것을 만드는 힘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은 힘도 있을 것이고 하나의 유기체로 표면화 되지 않은 힘들... 이런 비유기적 힘들은 늘 잉여로 남아 있다. 우리가 예술을 하고 싶다면, 혹은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보고 싶다면 바로 이 잉여로 남은 비유기적 힘들로 역행해야 한다.
* 아르또 (99)
‘아르토는 분열증자인 시인이 아니라, 자신이 시적으로 추구했던 실험에 그 스스로 사로잡혔기에 분열증자이다’(104)‘언어 자체에도 기관없는 신체가 있다. 랑그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표현질료 자체를 소수화 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바꿔 말하면 랑그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표현 질료 자체를 소수화 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겠죠... (이번 주에 읽을 소수 문학을 예고하고 있는듯...ㅠ)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 시간부터 매주 이야기 나오고 있는 미분...
* 미분 differential, 微分 /분화 differentiation, 分化
미분(未分)이 아니라 미분(微分)이다. 우리가 기존에 가진 인식 체계(변쌤이 석쇠라고 그림 그렸지요^^ 또 베케트는 어쩔 수 없이 자꾸 찢어지는 ‘작은 양산’이라고도 했습니다)로 보면 아르토의 시나 프랑겐슈타인, 오리너구리는 ‘아무 쓰잘데 없는 것 혹은 위협인 괴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격자무늬를 넘어서 격자무늬 아래의 수많은 점선들끼리의 만남으로 이것을 본다면? 사실 우리가 고정돼 있다고, 포텐셜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 똑.같.아. 안.변.해.하고 생각했던 것들 모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 이것들이 어떻게 만나서 Δy/Δx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는... 물론 이렇게 이리저리 만나는 순간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따라 그것은 또 어떤 것(?)으로 개체화되지만. 그럼에도 아직 현행화되지 않은 수많은 차이들이 또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
들뢰즈의 예술론은 매일 매일이 예술의 신비를 보는 듯 합니다. 예술이란 이렇게 탄생하는 게 아닐까요. 때문에 예술가가 작품을 탄생시키고 나면 그 손을 떠나 길게는 수 천년 동안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이쪽까지 날라오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예술가의 의도를 벗어나. 혹은 그가 의도했던 것 보다 더 풍부하게 창조되고요. 예술가가 표면화 하지 않는 것도 그 안에 이글이글... 들끓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조금 더 견디기 혹은 잘 살기 쉬워 질 것도 같습니다. 저 세계 너머 천국 뭐 이런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다른 가능성들’에 대한 믿음. ‘저 너머를 사유’해야겠다는 숙제 같은 게 생기니까요.
지금은 들뢰즈 이 양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지만. 어찌 하다보면 아주 잠깐이라도 마주치는 날이 오겠지요. 금요일에 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