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에 스피노자 떴어요 +ㅂ+

조회 수 2609 추천 수 0 2011.11.23 23:55:12
사루비아 *.225.55.27

오호

왠지 날짜도 맞추어서 뜬 느낌!!

반갑네요 ^-^



사람은 어느 날 영문 모르고 태어나 먹고 자고 마시고, 때로 기뻐하거나 슬퍼하다 소멸을 맞는다. 이런 한 평생이 너무 허망하다고 느껴 자연히 이렇게 묻게 된다. 인생에 어떤 숨겨진 최상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를 창조한 어떤 이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 아닐까? 창조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우리에게 심어놓은 이는 그 목적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세상 만물을 우리를 위해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들과 더불어 삶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목적과 그 목적을 창조한 이에 대한 학문이 생겨난다. 그 학문은 때로는 신학으로, 때로는 형이상학으로 불리며 인류의 역사에 개입했다. 그런데 이때 우리의 진정한 삶은 오히려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바로 지금의 삶은 최상의 목적보다 ‘열등한 형태’,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지면서 ‘부정’되는 것은 아닐까? 스피노자는 바로 이러한 편견을 교정해서 삶 자체를 긍정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다. 스피노자 연구가 델보스가 말하듯, 삶은 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 삶을 긍정하는 이성의 방식이 바로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스피노자는 1632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가고 있는 중인 신생 국가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유대인 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신학정치론』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상당한 번영을 이루고 전 세계가 감탄할 정도의 자유의 성과를 누리고 있다. 이 번창하는 도시에 모든 인종과 종파의 사람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분명 사상과 종교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네덜란드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네덜란드는 “국가의 목적은 자유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어떤 의미에선 배반하는 국가가 아니었는가? 대표적인 예가 드 비트 형제의 학살일 것이다. 군주제와 군국주의를 선호하는 칼뱅파에 맞서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네덜란드 공화정의 절정을 가져온 재상 요한 드 비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칼뱅파는 쉽게 대중들을 부추겨 요한과 그의 형제 코르넬리스를 학살했다. "극악무도한 야만(Ultimi barbarorum)!"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국민들 스스로 공화정을 저버리고 예속을 위해 싸운 것이다. 예속이란 주어진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타고난 삶을 부정하는 것, 바로 자기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일이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자유와 예속의 체험 모두를 통해 스피노자의 사유를 자극했다. 스피노자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당한 파문을 감수한 것,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 초빙을 거절한 것 등은 모두 그의 삶 전체가 예속에 맞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낸 하나의 작품임을 알려준다.

예속을 벗어난 자유의 철학을 주장한 스피노자.

 

 

 

 

대중들이 쉽게 빠져드는 예속이 스피노자를 사로잡았던 주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한 사람의 허영을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영예라 믿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도 사람들이 넓은 의미에서 미신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 대중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미신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미신이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약한 지성과 강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지성은 앎을 획득하는 능력인데, 앎이라는 것은 늘 원인에 대한 앎이다. 결과의 인식 자체는 늘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한다. 가령 살해된 시체를 앞에 두고 살인 사건에 대해 인식한다고 해보자. 단지 시체(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앎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원인)를 알아야 우리는 참다운 인식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지성이 약할 경우 상상력이 잘못된 원인을 고안해낸다. 가령 어떤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하자. 벼락의 원인인 기상현상을 지성이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 이렇게 미신적 원인을 고안한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고, 신이 그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자연법칙이 상상력을 통해, 징벌을 내리며 복종을 강요하는 공포스러운 신의 도덕법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어떤 타인이 이 신의 명령에 위배될 때 그는 ‘증오’의 대상이 되며, 내가 신의 명령을 위배할 경우 나는 ‘죄의식’의 대상이 된다. 예속적 법의 탄생과 더불어, 삶에 대한 긍정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주어진 삶을 부정하는 두 방식인 증오와 죄의식이 차지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이런 식으로 상상된 원인을 신에게 귀속시키는 일이 여러 종교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신을 통치자, 입법자, 왕, 자비롭고 정의로운 자로 상상하고 거기에 복종하고자 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자기 모습대로 신을 상상하고 복종한다. 그리고 이러한 복종은 정치적 지배력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군주가 오로지 그에게 계시된 신의 명령에 따라서만 명령을 내린다고 믿으면 사람들은 더욱 더 군주의 지배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예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상상적 원인을 근절하고 지성을 통해 적합한 원인을 인식하는 것, 즉 합리적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다. 만물이 그 안에 담겨있는 자연(이를 스피노자는 신으로 이해했다)에서 우리는 어떤 합리적인 질서를 발견할 수 있는가?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비난 당한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자연 안에는 우리 신체 및 다른 사물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공간을 차지하는 사물들의 질서가 있다. 또 자연 안에는 우리가 하는 생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사물들의 질서에 대응하는 관념들의 질서가 있다. 다르게 말하면, 자연에는 사물들의 질서가 담겨있는 ‘연장(延長)’이라는 형식이 있고, 관념들의 질서가 담겨있는 ‘사유’라는 형식이 있다. 그러므로 자연(곧 신)과 그로부터 생산되어 나온 개별자들은 ‘공통적으로’ 연장과 사유라는 형식을 통해서 존재하며, 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신은 한낱 우리의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다(지혜롭고, 덕이 있으며, 권세를 지녔고… 등등). 아울러 연장과 사유라는 이 두 형식 속에 자연과 인간이 들어있을 뿐, 두 형식 가운데 어떤 것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육체(연장)를 단죄하는 고대 이래의 모든 사고방식은 근거를 잃는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영혼이 육체의 정념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등등.


자연(신)이 지닌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정서를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사랑’이라 불렀다. 신이 지닌 질서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자는 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 결코 복종할 수는 없다. 복종은 명령하는 이의 의지를 고려하는 일인데, ‘의지’를 지닌 신이란 상상의 소산이지 인식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태양에서 빛이 나오는 것과 같은 필연성을 통해 참된 인식에서 나온다.” 기쁨의 정서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 사랑의 정서에 힘입어 우리는 능동적으로, 또는 ‘자유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안의 질서(인과관계)를 인식한 자는 그 인식의 필연성 때문에 자연의 일부인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뿐 그 질서를 거슬러서 예속 상태에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의 정서와 예속의 상태에 익숙한 시대에 스피노자는 이러한 긍정과 자유의 철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때로 그 위험은 스피노자에 대한 살해 기도로 찾아오기도 했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난과 증오로 밀려오기도 했다. 익명으로 펴낸 [신학정치론]은 그에게 큰 위협을 안고 돌아왔으며 주저 [에티카]는 생전에 출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스피노자는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들뢰즈의 표현)라고 불린다. 우리가 사회적 제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억압과 공포와 부정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면서 예속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때마다 철학자들은 스피노자의 책들을 다시 펼쳐 든다.





 

 http://navercast.naver.com/philosophy/dailythink/2922




댓글 '3'

봄봄

2011.11.24 00:24:54
*.106.85.248

네이버도 우리휘하에 있는거였군요 아하하핳하하하

미숙이

2011.11.24 11:55:34
*.34.44.109

아하핳;

진백

2011.11.24 13:37:30
*.37.152.179

2011년의 책은 당연히 <글쓰기 생각쓰기>나 <논증의 탄생>이 될 줄 알았습니다. <E>를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이렇게 뒤집히는구나'  그런데 <신학정치론>이 제 생각을 다시 뒤집습니다. 반전 또 반전. Azo철학의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인 '반전'을 제 일상에서 목격합니다.

 

'철학자들의 그리스도' (들뢰즈)

 

상상상 푸코는 다를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 1976,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란 말은, 곧 'Azo의 세기가 될 것'이란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한에서, 들뢰즈의 표현을 따라 푸코를 '철학자들의 세례자 요한'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Azo는 갔습니다. 이제부터 푸코의 5주간입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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