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N웹진
'가까움’을 통해 이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글/꾸냥
『사유이미지』에서 벤야민은 ‘지식’과 ‘이미지’를 대비시킨다.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지식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은 수십억 개의 파도로 일렁이는 바다, 매 순간 뿌리부터 잎 끝까지 떨고 있는 숲, 구름을 이루기 전 들끓는 공기다. 이는 ‘가까움’이다. 우리는 이런 ‘가까움’을 잊어버리고 ‘멂’을 얻어야 이미지의 세계에 잠길 수 있고, 꿈 꿀 수 있다. 꿈(멂,이미지)은 움직임에서 모든 자극적인 가시를 제거한 것으로 수십억 개의 파도 대신 거울처럼 매끈하게 펼쳐져 있는 바다, 떨리는 숲 대신 말없이 육중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숲, 들끓는 공기 대신 구름 한 점 없이 영원히 푸른 하늘이다(사유이미지 p.223 멀리 떨어져 있음과 이미지들). 그러나 과연 벤야민이 ‘지식’이라 부른 ‘가까움’을 통해서는 이미지의 세계에 갈 수 없을까? ‘가까움’은 지식이나 사실의 영역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걸까?
<영화 Fly 중 브런들이 파리로 변화한 모습>
데이빗크로넨버그의 영화 Fly는 끔찍하다. 주인공 브런들은 전송기라는 기계를 발명하는데 이 기계의 한쪽에 스타킹을 넣고 작동시키면 분자상태로 쪼개진 스타킹이 컴퓨터 암호로 전송되어 반대쪽으로 이동된다. 무생물에 이어 원숭이를 이동시키는데 성공한 브런들은 자신이 직접 실험을 할 것을 결심하고 기계를 가동시킨다. 알몸의 브런들이 보이고 기계의 문이 닫히려던 찰나 파리가 한 마리가 기계 속으로 들어온다. 이로써 전송되어 나온 생물은 브런들과 파리가 유전적으로 조합된 ‘브런들+파리’다. 처음에는 전송이 성공한 듯 그저 인간 브런들로 보이지만 점차 힘이 세지고 단 것을 좋아하게 되다가, 이와 손톱이 빠지고 귀가 떨어져 나가며, 온몸에서 진물이 나고 살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문드러진 살점 사이로 뻣뻣한 털이 나고 벽과 천장을 탈 수 있게 되면서 결국엔 사람사이즈만한 파리로 변화하게 된다. 이 영화의 대다수 장면들을 차지하는 것은 브런들이 파리로 변해가는 모습들을 담은 징그러운 이미지들이다. CG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의 기술들이 발달한 현재지만, 20년도 더 전인 86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브런들이 파리로 변해가는 모습의 이미지는 디지털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아날로그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런 징그럽고 끔찍한 이미지들을 만들어야했기 때문에 영화 제작비의 상당부분이 브런들+파리 분장 값에 들어갔고, 그해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했다. 브런들+파리를 이렇게 공들여서 분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순간이동 기계를 소재로 한 SF 상상력도 아니고, 브런들의 연인인 조니와의 로맨스도 아니다. 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브런들의 신체가 계속해서 허물어져 내리고 바뀌어서 파리의 신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속살’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피부가 벗겨져 속살과 피와 점액이 뒤섞이고, 입에서는 연신 연유같은 소화액이 분비되고, 눈알과 귀는 떨어져나가는 영화 속 이미지들은 대부분 미디엄숏 이상의 가까운 화면인데, 이 역시 위의 목적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쓰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인간이 파리가 되어간다는 설정을 통해 보여준, 우리의 피부 아래 있는 피와 근육과 신경, 지방 조직들과 점액 같은 이미지들은 벤야민이 말한 ‘가까움’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 영화가 아니고서야 외과수술실이나 인체의 신비전에 가야 볼 수 있을법한 것들, 즉 ‘해부학’이라는 학문(지식)을 통해서나 볼 수 있는 ‘가까움’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크로넨버그는 ‘멂’이 아닌 ‘가까움’을 취했기에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자가 아닌 것일까? 영화감독인 그는 분명 이미지의 세계에 잠기고자 하는, 꿈을 꾸는 자다. 그는 다만 벤야민이 잊어야만 이미지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말한 ‘가까움’을 잊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이미지의 세계로 간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벤야민 스스로가 잊어야만 이미지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한 ‘가까움’이 벤야민 본인의 글 속에 ‘뿌리부터 잎끝까지 떨리는 숲, 구름을 이루기 전 들끓는 공기’ 등의 이미지로 묘사되어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벤야민 본인이 잊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정작 스스로는 ‘가까움’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왜 ‘가까움’을 잊어야만 한다고 했을까? 방랑자와 거지, 건달과 뜨내기들에게 기꺼이 선사된다고 배웠던 자연조차도 부유한 자의 서늘하고 그늘진 홀 안으로 침투해 들어올 때 볼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이탈리아 별장이 바다와 산의 전망을 한 번 보기 위해 처음으로 그 별장의 대문을 들어서는 자에게 가르쳐주는 무자비한 진실이다(사유이미지p.169 가난은 항상 손해를 본다) 위 인용문에서 나온 것처럼 날 것 그대로인 자연(가까움)보다 그늘지고 서늘한 이탈리아 별장 안에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자연(멂)이 아름답다, 진짜다, 이미지다, 라고 생각한 벤야민의 이미지에 대한 미적 ‘취향’때문이 아닐까? 폐허, 파괴, 오래되고 낡은 것을 사유하는 그가 이런 것들을 가까이서 보기보다는 멀리서 봐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프롤레타리아를 지향하지만 부르주아 유태인 아들로서의 가졌던 한계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면 이는 완전히 근거 없는 판단이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