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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N 2016 인문사회과학연구원 - 강사 인터뷰

 


데리다와 철학적 (비)인간학

      



정리와 사진: 한샘, 충한, 지영

    




데리다 얼굴.jpg





Q. 일단 인문사회과학연구원(이하 인사원)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대개의 인문학 강좌는 강사가 자신의 지식을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죠. 수강생 입장에서 볼 때, 편하기는 해도 ‘남는’ 공부가 되긴 어려워요. 인사원은 그런 일방성을 벗어나서 강사와 수강생들이 소통하는 공부, 무엇보다도 ‘남는’ 공부를 지향하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입니다.^^ 저로서는 몇 해 전 이 자리를 통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강독을 진행했고, 작년에는 ‘정신분석과 분열분석’이라는 제목으로 한 학기를 끌어간 적이 있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다시 데리다로 돌아왔네요!

 





Q. 이번 강좌는 데리다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이름을 많이 들어보긴 했는데요, ‘해체주의’라는 키워드 정도밖에 모르겠네요^^; 데리다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런 질문이 제일 어려운 거 잘 알죠? 하하하;;;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우선 전기적인 얘기부터 해본다면, 데리다는 1930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어요. ‘정통’ 유럽의 백인은 아니에요. 딱 봐도 유럽 사람 같은 모습은 아니죠. 우리가 보통 접하는 데리다의 사진은 백발에 깊이 패인 눈두덩, 파이프 담배를 태우는 스타일리쉬한 모습인데, 그게 또 흑백인 경우가 많아서 사진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비유럽성’, 그의 타자성이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데리다는 학문적 이력의 초년기에는 사진을 잘 안 찍었다고 해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은 대개 중년 이후, 노년의 사진들이죠. 젊은 시절 사진을 안 찍은 이유는, 사람들이 사진만 보고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될까봐 그랬다는 군요. 알제리 출신이고 인종적으로도 다르기 때문에 이 사람 이야기는 별로 신통하지 않을 거야, 뭐 그런 편견을 막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더구나 전통적 사유의 기반을 ‘해체’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부터는 자신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팽배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듯해요. 극심한 차별까지는 아니어도 유럽 철학의 관문에 제대로 진입해서 자신을 알리는 데 버거움을 느꼈던 거겠죠. 철학자들의 사유를 논할 때 출신이나 인종 등은 주변적인 사실에 불과하겠지만, 실상 이런 주변성이라는 것, 혹은 타자성은 데리다 사유의 시작에서부터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1960년대 후반, 정확히 말해 67년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 세 권을 연달아 출판하면서 학계에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각인시킵니다. 당시 철학의 주류이던 현상학을 비판하고 전통적 형이상학에도 도전장을 던져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죠.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데리다의 사유는 <철학의 여백>(1972), <입장들>(1972), <산종(散種)>(1972), <종(鐘)>(1974), <회화의 진리>(1978), <우편엽서>(1980) 등을 통해 널리 확산되는데, 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에 자신의 분파들을 활발히 형성하게 되요. 여기엔 좀 역설적인 면이 있는데, 데리다가 미국에서 누린 인기는 기실 모국 프랑스에서 그 만큼의 환호를 받지 못했던 탓이 있었거든요. 어딘지 모르게 프랑스 철학계는 데리다에 대한 묘한 무관심을 보였다고 해요. 알튀세르니 라캉이니, 들뢰즈니...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동시대에 포진해 있었는데도 서로 별다른 영향관계를 맺지 않았고,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얻지도 못했죠(푸코와는 논쟁을 벌인 바 있고, 만년에는 알튀세르와 좀 가깝게 지냈다고는 하지만). 영어권이라고 다 같은 반응도 아니었어요. 미국에서의 환호성과 달리, 영국에서는 해체론에 대해 반감 비슷한 분위기가 서려있었다고 하거든요. 1992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주려고 했는데, 교수단의 반발로 취소된 이야기는 유명하죠. 아무튼 ‘유럽의 철학자’ 데리다는 정작 그 중심부에서는 이방인처럼 밀려나 있거나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었던 듯합니다. 이런 점들도 데리다 사유의 ‘주변성’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고, 우리 강의의 주제인 ‘타자성’과 연결지어볼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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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의 철학은 데리다 본인의 주변성과도 관련되어 있을 거예요~







 

Q.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소개해주세요.

 

‘디컨스트럭션’이란 곧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입니다. 구축된 것을 무너뜨린다는 뜻이죠. 그럼 ‘무엇을(what)’ 해체하느냐라는 질문을 곧장 낳는데, 그것은 사상사의 거대한 건축물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데리다가 평생 해체하고자 대결했던 사상가로는 마르틴 하이데거를 꼽을 수 있어요. 하이데거는 니체를 이어서 근대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재구축한 사상가라고 평가받죠. 신이라든지, 일자(the one)이라든지 고전 형이상학을 떠받치던 궁극적인 기원을 공격하고, 그 근거-없음(ab-grund)을 밝혀내는 게 그의 작업이어요. 하이데거의 경우, 존재자에 치중했던 형이상학을 존재에로 되돌리는 게 일종의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간단히 말해 데리다는 하이데거를 더욱 급진화하고자 했던, 하이데거 철학을 하이데거 이상으로 밀어붙이려 했던 철학자였어요. ‘존재’에 입각해서 구축된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실상 얼마나 기존의 형이상학과 유사하게 구축되어 있는지 밝혀내려 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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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얼굴의 하이데거 선생님(좌), 후설 선생님(우)





 

그럼 ‘어떻게(how)’ 해체하느냐의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 나옵니다. 사실 해체론의 본 모습은 그 방법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강철추를 매단 중장비를 동원해서 건물을 때려부수는 이미지와는 판연히 다르거든요. 데리다에게 해체란, 사상의 거대한 건축물 자체를 마구 때려서 무너뜨리는 게 아닙니다. 역으로 그 건축물이 기대고 있는 토대 자체의 근거-없음을 캐묻고, 토대의 무근거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거기 세워진 건축물도 무근거함을, 부조리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가령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해체를 수행하는 <기하학의 기원>(1962)을 봅시다. 후설은 의식의 순수한 본질을 캐내기 위해 우리의 일상적 의식을 제거하고자 했어요. 왜냐면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여러 가지 가치론적 의미들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죠. 가령 빨간색 포스터를 보고 좌파를 떠올린다면, 그건 사태를 순수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미 이데올로기를 통해 오염된 의식으로 보는 것이에요. 아무튼 의식을 깨끗하게 걸러내서 도달한 초월론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후설에게는 있었어요. 그런데 데리다는 그런 순수함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철학이든지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구성될 수밖에 없고, 언어란 여러 사람이 함께 역사적으로 사용해 온 도구이기에 오염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언어를 통해 철학을 할 경우, 어떻게 깨끗하고 맑은 순수 사유 같은 것을 걸러낼 수 있겠어요? 맑고 투명한 언어는 없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환경, 조건에 따라 특정한 의미론적 함축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언어에 기대는 한, 순수한 인식이라는 현상학의 이상(理想)은 몽상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해체론은 망치를 들고 통쾌하게 때려부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요. 오히려 어떤 사상이 기반하고 있는 토대의 부실함, 근거의 근거-없음에 주목해서 파헤치는 것이 해체주의라 할 수 있죠.

 

데리다가 해체론을 창안해서 20세기 사상의 큰 줄거리를 만들어냈던 게 사실이기는 한데, 그 행보에 편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그라마톨로지>로 대표되는 전기 데리다는 모든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그 근거에서부터 허물어뜨리는, 다소간 허무주의적으로 보일 정도로 급진적인 파괴작업에 매달린 것처럼 보여요. ‘디페랑스’, 즉 ‘차연’이라는 신조어가 대표적이죠. 반면 후기의 데리다는 그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실체적으로 사유된 모든 것들을 거부하던 전기와 달리, 후기에는 실체화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같은 개념들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사유할 것인가에 매달렸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신이나 일자 같은 것, 정의나 법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현실을 구축하는 사유의 궤적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 말입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 <법의 힘>(1994), <환대에 대하여>(1997) 등등... 1990년대에 접어들며 데리다가 정치에 관심을 보이고, 여러 사회적 실천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저술들은 해체와 그 너머를 깊이 고민해 보는 데리다의 문제의식을 엿보게 해 줍니다. 전통적 형이상학이나 존재론과는 판연히 다른 방식으로 그런 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죠. 이번 학기의 주제인 유령, 동물, 기계는 그와 같은 데리다 후기 사유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 열쇠어들이라 할 수 있어요.

 






Q. 강의 제목이 <데리다와 철학적 (비)인간학>입니다. ‘(비)인간학’이라고 하는 말이 낯설게 보이는데요. 인간학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또 (비)인간학이라는 건 무엇인가요?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것은 학제화된 철학의 한 분과죠. 대학에는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수업이 개설되어 있기도 하고, 그런 제목의 교재들도 많습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특히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을 다룬다는 점에서 유용하고 필요한 학문이기도 하죠. 다만 데리다의 관점에서 볼 때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것은 다분히 근대의 인간학, 특히 데카르트적인 ‘나’에서 기원한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를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비판적이고 겸허한 태도로 개진되어 있다고 해도,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구별과 배제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사유거든요.

 

가령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를 예로 들어 봅시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있죠. 저 명제를 통해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모든 철학의 출발점에 놓습니다. 어떤 다른 조건을 따로 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위치에 올 수 있는 것은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가 아니에요. 인간 아닌 것은 저 자리에 올 수 없지요. 근대적 사유의 기원에는 생각하는 나, 즉 코기토(cogito)가 단독적으로 주어져 있지만, 실상 코기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코기토 아닌 것들이 배제되어야 했습니다. 바꿔 말해, 데카르트적 자아는 인간 주체만을 암묵적으로 허락하고 있었고, 인간이 아닌 존재, 사유할 능력이 없다고 간주된 모든 비인간적인 것들을 밀어내고서야 성립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무엇인가(A)를 밀어내야 어떤 것(B)이 생겨날 수 있다면, 더 먼저 있는 것은 A와 B 가운데 어느 쪽일까요? 비인간일까요, 인간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학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비인간들이 요청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철학적 (비)인간학이란 이런 인간중심적 사고에서는 보이지 않는 타자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학 자체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조건으로서 비인간의 영역을 살펴보자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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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의 조건으로서의 비인간에 대해 질문해 보자구요~






Q. 데리다가 주목했다고 하는 세 가지 이미지, 즉 유령, 동물, 기계라는 이미지가 흥미를 끕니다.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데리다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살짝 맛만 보여주세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조건은 인간 아닌 존재를 밀어내는 것이라고 말했죠. 그럼 인간 아닌 것을 규정짓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가령 합리성에 대한 믿음 같은 게 그렇지 않나요? 유령은 합리적 인식에서는 배제되는 대표적인 무엇이 아닙니까? 과학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근대적 사유에서 유령은 도대체 사유의 대상이 아니죠. 과학의 영역 바깥에 있고 증명할 수 없기에 말할 건덕지도 없는데 어떻게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유령은 허구(fiction)를 지향하는 소설 같은 곳에서나 등장하죠. 문학을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로, 달리 말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꾸며낸 것으로 삼아 과학이나 철학에서 분리하려던 역사에는, 이렇듯 유령적인 것을 인식의 한계 너머로 밀어내버린 사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인간으로서의 유령은 고작해야 허구를 본령으로 삼는 문학에서나 서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데리다가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철학적 작업을 수행했던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비인간, 즉 타자성이라는 것은 뚜렷한 실체라기보다 희끄무레한 형상이고, 학문적 인식 너머에 있는 것으로 표상되어 왔습니다. 동물의 이미지도 그렇죠. 데리다가 마지막까지 천착했던 주제가 동물이라고 해요. <짐승과 주권>이라는 세미나 강의록이 계속 발간되는 중인데, 이번 강의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될 듯합니다. ‘생각하는 나’, 즉 순수 사유가 배제해 버린 것 중에는 순수 육체성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동물이 있죠. 동물은 사유하지 않기에 비인간이고, 비인간이기에 열등하고, 인간적인 대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구제역이 유행할 때 손쉽게 살(殺)처분 같은 것들이 행해지는 현실을 보세요. 수십 만, 수백 만 마리의 소나 돼지들이 도살당해 매몰당하죠. 정유정 작가의 <28>(2013) 같은 소설을 한번 살펴보세요. 동물이 불쌍하다는 차원과는 좀 다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다른 종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어떻게 수행하고 또 정당화해 왔을까? 홀로코스트와 비교해 볼 때 살처분은 어떤 점에서 다르고 또 같은가? 그 궁극적인 대답은 동물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과연 그것이 얼마나 온당한 답변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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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기계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인간은 꽤 오래 전부터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과는 같지 않은, 존재론적 위계가 다른 존재에 대해 공상해왔고, 그런 것을 만들어 낸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가령 ‘인형’은 그런 기계의 오래된 판본일 거예요. 우리 시대는 이런 문제의식이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습니다.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유사해질 수 있는가, 혹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가를 물을 때, 인간이 인간으로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죠. 알파고 신드롬이 그걸 잘 보여주지 않나요. 기계에 대한 매혹과 두려움의 근저에는, 우리 인간은 기계와 다르고 그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무의식적인 믿음 같은 게 깔려 있어요. 인간은 이성이나 감성, 혹은 어떤 점으로 인해 기계와 같은 인공물보다 우월하다는 거죠. 그런데 실상 인간은 이성이나 감성, 또는 무엇으로든 보다 완벽한 존재로서 기계를 항상 상상하고, 그렇게 되고자 욕망해 오지 않았나요. 인간 자신보다는 열등하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이 더욱 인간적이 되거나 초인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믿음. 영화 <Her>(2013)에 나오는 운영체제(OS) 사만다를 보세요. 그녀는 인간보다 열등한 프로그램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우월한 초인간적 기계일까요? 혹은 인간과 위계의 사다리를 놓고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존재일까요?


정리한다면, 유령, 동물, 기계는 인간을 구성하기 위해 밀어내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밀어내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요청되어야 했던 타자의 이미지라는 거예요. 그런 타자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실체화시키지 않고 사유할 수 있을까, 여기서 비인간, 타자의 본질이 무엇이냐와 같은 질문은 적절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것이란 대체 어디까지냐? 인간의 한계, 인간이라는 존재를 담아내는 극한의 경계선을 짚어봄으로써 알아낼 수 있을 거에요. 물론 비인간은 인간을 생각하는 것처럼 명확한 실체를 갖지 않을 수 있어요. 어쩌면 흔적처럼, 오직 흔적 같은 불명확한 이미지로만 상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적 인간학의 해체는, 인간 외부의 초월적 존재를 묻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선을 물음으로써, 인간과 맞닿아있는 비인간의 이미지를 검토함으로써 시작되리라 기대해 봅니다.

 






Q. 강의 소개에 철학과 문학, 예술과 비평에 관심있는 학인들을 특별히 언급하셨는데, 유령, 동물, 기계 같은 타자의 이미지들이 그런 분야와 많이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겠죠?

 

물론입니다. 예컨대 데리다는 예술 분야에 많은 언급들을 남겼어요. 사진이나 건축에 대해 작업도 했고,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죠. 문학은 말할 것도 없답니다. 데리다가 자기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첫 번째 손가락에 꼽은 것이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였거든요. 그런데 사실 데리다는 문학적 글쓰기와 철학적 글쓰기에 차이를 많이 두지 않았어요. 문학을 철학하듯, 철학을 문학하듯 했던 사람이죠. 자유롭게 왕래했다는 의미 정도가 아니라, 실상 사유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는 문학이든 철학이든 분과적인 차이란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오히려 그에겐 사유의 운동으로서 글쓰기 자체가 중요했다고나 할까요.

 

어떤 점에서 보면 ‘문학인가 철학인가?’ 라는 질문 자체가, 타자를 만들고 그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태도일 거예요. 철학과 문학이 서로에게 타자가 되는 것은 근대적 대학체제의 산물이거든요. 아무튼 데리다가 문학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인 이유는, 철학이 갖는 사변적 특성을 넘어서고자 했기 때문일 겁니다. 데리다는 이미지가 사유의 경계를 돌파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주목합니다. 앞서 말했듯, 근대적 사유에서 비실체적인 것으로서 유령은 사유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죠. 이때 사유는 논리와 합리로 무장한 근대적 지식을 가리킵니다. 존재증명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기에 존재론적으로 이미 배제되어 있던 셈이죠. 이런 유령적인 것을 소환하고, 그 유령적인 것이 우리의 현실적 세계에 얼마나 많이 침투되어 있는가, 나아가 비인간인 유령들로 둘러싸임으로써만 인간적인 현실이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게 바로 문학이란 말입니다. 동물과 기계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의 시선에는 포착되지 않는 비인간적인 것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항상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밀어내야 했던 대표적 형상인 동물과 기계를 불러내는 작업에는 문학이 탁월한 지도가 됩니다.







크기변환_IMG_1719.JPG  같이 읽어야 읽을 수 있어요^ ^






 

 

Q. 재미있어 보이긴 하는데,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데리다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데 저도 들을 수 있을까요??^^;

 

데리다, 하면 <그라마톨로지>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죠. 워낙 출세작이어서 그럴 텐데요. 그런 책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후기의 사유를 접할 수 있느냐는 질문들을 저한테 이미 하고들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입문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전기 데리다의 사유는 수업하며 조금씩 정리해 드릴 것이고, 후기의 사유는 또 다른 점에서 새로운 출발점이 되느니만큼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초면’일 거라고 생각해요. 어려워도 한 걸음씩, 다른 학인들과 함께 공부하는 ‘강제력’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조력자가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이번 학기의 주요 과제는 타자성의 이미지들 즉 유령, 동물, 기계에 관한 데리다의 사유를 짚어보고 공부해 보는 데 있습니다. 차연이나 에크리튀르 같은 주요 개념들은 제가 소개하고 읽을 만한 자료들을 제시하려고 해요. 겁먹지 마세요!

 

물론 데리다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번역된 책들이 그다지 가독성이 높지 않아요. 거의 미로를 헤매는 기분일 때도 있죠. 하지만 다른 철학자들은 아닌가요? 어떤 철학을 공부해도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게 마련이잖아요. 제가 학인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저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지금 다 알고 깨우치고자 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중에 혼자 마주하게 될 두 번째 독서를 위한 시간이라고. 이번 학기에 데리다를 아주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실제로 손에 남는 게 별로 없을 수도 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의문부호만 늘어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나 그런 의문부호들이야말로 언젠가 다가올 두 번째 독서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디딤돌이 될 겁니다. 한번 읽은 책을 두 번째 볼 때는, 그 내용을 이해했든 못했든 이미 한번 가봤던 길이기 때문에 어디에 암초가 있고 어디가 물살이 빠른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잖아요? 게다가 책 여백에다가 살짝 낙서나 단상이라도 적어 놓았다면, 그걸 되짚으면서 예전에 본 것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다시 가기 위해 지금 가보는 길이라 생각하면 좀 더 편하지 않을까 싶네요. 더구나 친구들과 함께 가는 길이니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도 있을 겁니다! 자 걱정은 그만 내려놓고 이제 가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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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최진석


수유너머N 회원이자 문학평론가. 러시아인문학대학교 문화학 박사.

잡다한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며, 

문학과 문화, 사회의 역설적 이면을 통찰하기 위해 오늘도 게으른 독서를 실천한다.

함께 지은 책으로 <국가를 생각하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와 <해체와 파괴> 등이 있다.







강의 신청은 여기로!  http://www.nomadist.org/xe/i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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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 [화요 토론회] 10월 25일 "합성생명의 등장, 바이오해커의 활동" (발표: 김훈기) file 수유너머N 2016-10-14 1074
406 [강사 인터뷰] "맑스주의의 새로운 전선들"의 강사 정정훈 인터뷰 2탄! (10월 7일 개강) [1] 수유너머N 2016-10-02 1471
405 [화요토론회] 10/11 "데이터사회 비판과 역설계의 구상" (이광석 선생님) file vizario 2016-09-30 1416
404 [강사인터뷰] "맑스주의의 새로운 전선들"의 강사 정정훈 인터뷰 1탄! (10월 7일 개강) file [1] 수유너머N 2016-09-29 1160
403 [화요토론회]기계와 인간의 새로운 공동체를 위하여-(샐프)후기 수유너머N 2016-09-28 784
402 [가을강좌 강사인터뷰] 알랭 바디우의 「 존재와 사건」 읽기 - 장태순 선생님 file 수유너머N 2016-09-23 5533
401 [화요토론회] 9월 27일 "기계와 인간의 새로운 공동체를 위하여" (발표: 최유미) file 수유너머N 2016-09-22 1019
» [인사원 강사인터뷰] 데리다와 철학적 (비)인간학 - 최진석 선생님 file 수유너머N 2016-08-26 2001
399 [강사 인터뷰] 토요인문학 : 장소성의 정치철학, 심아정 선생님 인터뷰 2탄~ file 수유너머N 2016-08-1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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