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 허연/ 민음사)
제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무렵이였을 겁니다. 방바닥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발을 까닥거리고 있자니, 우리 아부지가 한마디 하시더군요.
<발바닥이 불그스름한 걸 보니 우리 딸 아직 어리구나.>
시간이 어느새 흐르고 흘러, 이제 울 아부지의 '어린 딸'은 발바닥에 굳은 살을 '덕지덕지' 붙이고 사는 30대 여인이 되어버렸지요.(ㅋ) 격정적인 사랑이나 정념 가득한 삶도 언젠가부터 다 시시하고 치기어린 '어린 얘들의 것'마냥 느껴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버린게지요.
숨쉬기도 힘들만큼 삶과 사랑이 고통스럽다고 가슴을 움켜쥐다가도, 어느 순간 '밥을 먹고 똥을 누며 살아가야한다'는 일상을 직시할 때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드는 것은 울 아부지의 그때 그 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라린'부인처럼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기를 거부하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 속 주인공들처럼 스스로 고통을 '후벼파며' 그 끔찍한 늪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는 인물들을 두고 흔히들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 필요가 있나? 라고 의문을 던지지만, 그렇게 쉽게 정리해버리고 무미건조하게 생을 지속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것이지요.
오늘 세미나에서 보라님께서는 오네긴의 허무는 <총체적인 허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지에 의해 선택하는 허무>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오네긴의 태도 역시 지극히 낭만적이라 볼 수 있겠지요. 이 연장선상에서 '낭만주의의 경계를 뛰어넘고 싶다는 것' 역시 낭만주의적 열정에 휩싸여있는 자아를 표현하는 또다른 표현방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지독한 니힐리스트가 되겠다.>라고 백날 결심해봤자, 이 역시 제 안의 낭만(?)을 표현하는 수식어에 불과한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격정과 정념의 낭만주의적인 고통을 쉽게 던져버리기 보다는 그 속에 계속 휩싸여 사는 편이 낫겠다고... 수도하듯 하루하루의 감정을 꾸역꾸역 버티며 사는 편이, 굳은 살을 덕지덕지 붙이며 사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오늘이였습니다. 더불어 오늘 세미나에서 '올해 목표는 낭만주의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던 이유이기도 하구요. ^^;
이상 오늘 세미나 후기였습니다. 보라님께서 후기를 보시고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하실듯 하네요. ㅎㅎ




"발바닥 불그스름하니 우리딸 아직 어리구나" 아버님 말씀이 마치 싯귀같군요^^
열정어린 삶을 사는 것만큼 열정없이 살기도 힘겹기는 매한가지가 아닌가 싶군요. 그래도 니힐리스트 보다는 낭만주의자가 (한번)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ㅎㅎ 올해 목표 도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