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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화요토론회 안내
주작인 (周作人)을 아시나요?
글/ 박혜정
주작인(周作人, 1885~1967)
중국 현대 문학! 하면 노신의 <아큐정전>을 금방 떠올리실텐데요. 중국에는 노신 말고도 훌륭한 다른 문학가들도 물론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노신의 동생 주작인은 노신과 함께 중국의 현대 시기 양대 산맥을 이루던 핵심 문학가 및 사상가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8월 17일에 있을 화요토론회에 앞서 주작인을 간략히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이 현대와 당대를 나누는 기준은 분야 혹은 학자에 따라 저마다 다릅니다. 현대 문학 분야에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전을 중국의 현대로, 그 이후부터를 당대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근대를 중국의 현대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중국은 1949년 이후, 문학을 포함한 예술과 생활의 모든 방면이 정치적으로 흘러갔던 것과 반대로, 그 이전 즉 인민공화국이 설립되기 이전인 현대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청말(清末) 이 후의 신구(新舊)와 동서(東西)의 갈등이 깊게 만연되어 있었던 때였는데, 그 속에서 많은 사상가들은 정치라는 것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노신을 비롯한 좌익 문학가들이 존재했었던 것과 동시에, 주작인을 필두로 하는 우익 문학가들도 중요한 위치에서 당시의 학계나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하면 공산국가를 떠올리듯이, ‘중국의 현대’하면 노신을 비롯한 계몽 지식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동양의 것과 과학적인 서양의 것이 혼재되어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자는 계몽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극단적인 태도를 지녔던 이유 중 하나는 그 동안 전통을 기반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개혁운동(양무운동(洋務運動,1861~1894),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1898))이 거듭 실패하자 잘못된 방법이라 여기게 되었고, 당시 개혁에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일본을 본받아 전통적인 것을 일체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국가차원에서 많은 청년들이 일본의 개혁을 공부하러 그곳으로 보내졌는데, 중국 현대사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인 노신도 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개혁을 공부하는 한편, 대륙에서 일어나는 가슴 아픈 일들을 주시하며 국가를 위해서는 우선 인민들의 계몽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들의 문장 중에는 대부분이 ‘투쟁’, ‘계몽’, ‘혁명’ 등의 붉은 이미지가 선명합니다. 중국의 현대를 대표하는 붉은 이미지! 그런데 어디에선가 은은한 파스텔톤의 문장들이 제 눈을 끌었습니다. 바로 주작인의 문장들이었습니다.
노신(鲁迅) 욱달부(郁达夫)
주작인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국에서는 그의 형인 노신과 함께 중국 현대 3대 문학가 중 1인으로 꼽힙니다(노신과 주작인을 빼고 나머지 다른 1인은 욱달부(1895~1945)나 호적(1891~1962) 혹은 모순(1896~1981) 등 주장하는 분에 따라 달라집니다. 때문에 노신과 주작인이 3대 문학가 중 1인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것은 더 큰 의의가 있다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주작인이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된 것도 1980년대 이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가 지금은 중국 현대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학자이자 사상가임에는 틀림 없지만, 1980년 이전까지 학계에서 묻혀있게 되었던 이유는 바로 친일파라는 오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 당시 일본의 문화에 많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일본 여인과 결혼을 하고, 또 다녀와서도 일본의 동경(東京)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르며 일본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는 등 친일적인 태도를 서슴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배우자는 의식은 있었지만 반일 감정이 깊었던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주작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매우 대담하다 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저 친일적인 행동이었을 뿐이었고, 그의 문학적, 사상적인 영향력 덕분에 이를 덮을 수 있었습니다.


호적(胡适) 모순(茅盾)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북경이 점령되는 때, 그의 친일적 태도는 정점을 찍어 ‘한간(漢奸:친일파, 매국노)’이라는 오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북경대학 교수였던 주작인은 다른 교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야 할 상황에 놓여졌지만 북경을 떠나지 않고 학교에 남아 일본의 점령을 받아들여 계속해서 학교생활을 했고, 심지어는 1938년 일본문화특무(日本文化特務)가 주최한 ‘갱생중국문화건설좌담회(更生中國文化建設座談會)’에 참석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오명의 첫 발걸음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주작인은 이렇게 일본이 개최한 회의에 여러 번 참석하여 친일행각을 보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주작인은 1980년 이전까지 학계에 완전히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80년대 이후 중국에 사상해방의 기운이 감돌게 되었고 정치적인 잣대에 의해 묻혔던 작가들이 재평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은 중국 현대문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부분입니다. 한국에서는 흔히 친일파라고 하면 앞으로도 씻을 수 없을 죄를 짊어진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우리나라 보다 더 심할 것 같았던 중국이 오히려 그들을 재평가 하는 모습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던 것입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평가는 주작인 뿐 아니라 중국의 혁명가 손문(孫文, 1866~1925)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복잡한 상황은 일단 빼 놓고, 손문은 일단 나카야마(中山)라는 일본식 이름을 매우 당당하게 사용했고, 일본을 경탄의 대상으로 바
손문(孙文)
라 보는 등 친일적 색채가 매우 짙었기 때문에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영웅으로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대륙 쪽이나 대만을 막론하고 손문을 국부(國父)라 칭하며 굉장한 영웅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혹시 중국인들은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손문이 하고자 했던 것이 ‘삼민주의(三民主義)’와 같은 인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순수한 마음을 인정했던 것이었을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주작인도 친일 행동이 분명하기는 했지만 그가 남긴 사상이나 문학 방면에서의 업적을 인정하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서 대우하는 것일까요? 주작인 연구가 서무(舒無)선생님도 그에 대해 “그 자신이 중국 신문학사와 신문화사의 일부(舒無, <周作人槪觀>, 1986)”라며 수많은 모순이 존재했던 20세기 중국의 현실에서 또 다른 방향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은 작은 일상 혹은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평소 알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모순적인 모습이나 뜻밖의 관용적인 태도에서 작고 큰 놀라움을 안겨주고는 합니다.
중국에서 주작인에 대한 연구는 재평가가 시작되는 1980년대를 시작으로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초기에는 형 노신과 비교를 하는 연구와 왜 친일행각을 벌였는가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작인만을 논하는 전반적인 연구가 진행되었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주작인의 세부적인 연구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과 주작인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가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1936년에서 44년 사이에는 마쓰에다 시게오(松枝茂夫)에 의해 모두는 아니지만 주작인의 문장이 번역되어 일본에 소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80년대 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그리 주목하지 않고 있다가 1980년대 중국이 재평가를 하기 시작한 이후로 일본에서도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여 다양한 논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로 연구가 활발해져서 중국현대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큰 욕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중국 현대 작가 하면 중국문학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도 ‘노신’을 떠올리는 정도와는 한참은 멀어 많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중국에는 계몽과 혁명을 외쳤던 작가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간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문학을 이야기한 주작인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우선 주작인에 대한 전반적인 것과 연구상황들을 소개하다 보니 친일이라는 한 쪽에만 치우쳐져 주작인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주작인의 생애를 통해 그의 사상이나 문학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보려 합니다.
* 이 글에 나오는 인명 및 지명은 한국식으로 표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핫. 잼있겠넹. 노쉰을 좋아하는 1人인데.. 흐미..기대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