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후기

2015.04.27 21:53

은선 조회 수:243

바디우 투사의철학 


아카데믹한 목록들을 무시한다면 철학을 정의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묘사적이고, 또하나는 정립적이다. 질 들뢰즈는 묘사적 방식의 사례를 이룬다. 철학적 노동을 벌거벗긴 뒤, 그로부터 철학 자체의 고유한 특질들을 도출시키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정립적 방식의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철학은 존재에 대한 사고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조건들에서  철학이 진리를 창조할 수 있음을 부정한다. 바디우가 철학에 귀속시키는 것은 네가지 공정에 의해 생산된 진리들의 공동 가능성을 유일하게 보장하는 일이다. 반면 그 네가지 공정만이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고, 그러한 한에서 철학의 조건들이다.


1.과학 2.예술 3.사랑 4.정치


이 구분된 영역에서 환원불가능한 것들을 전체화 하는 것을 악이라고 본다. 내가 이해하는 한 바디우는 순수성을 강조하며 바디우에게 병사는 어떤 순수의 형상이다. (95)를 보면 오늘 지난 20세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고전적인 혁명적 정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테제는 우리가 고전적인 혁명적 정치 너머에 우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내가 표현적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전적인 관념에서처럼 정치적 투쟁들 봉기들 혁명들은 구조적 효과들이 아니라 계기들이라는 점 그 계그를 포착하고 정황들을 명명하는 것은 우리의 몫 이라는 점 등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계기 정치적 투쟁들은 사회적 모순들을 표현하고 집중시킨다. 그것이 봉기가 순수하게 단독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이유이다. 봉기가 순수하게 단독적인 것은 그것이 계기, 순수한 계기이기 때문이고 봉기가 보편적인 것은 마침내 그 계기가 기보적인 일반적 모순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바디우, 병사의 형상


우리는 비인간적인 것의 위험하고도 풍요로운 요소 안에서 인간성 자체의 너머에 존재하는 이 인간성의 상징적 재현을 창조해야만 한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재현을 영웅적인 형상이라고 부른다. 지난 20세기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영웅적 방향 설정의 세기였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배치 전체는 위기에 처해있다. 그 위기의 징후들 하나가 낡은 전통들의 복귀와 죽어버린 옛 신들의 부활이라는 외양이다.


78 오늘날의 이미지들 에서 우리는 전사에 대한 향수에 주목하는데 이는 허무주의적인 개인주의의 압력으로 병사의 형상이 붕괴되었음을 알리는 기호이다. 84 결국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병사란 진리에 포획되는 순간의 인간 존재가 갖는 세 가지 근본적인 특성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은유라는 점이다. 우선 그것은 모두를 위한 예이고, 보편적인 전달이다.


89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병사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무언가를 창조하는 또한 몇몇 영원한 진리들을 창조하는 데 참여하는 인간 동물들의 능력에 과놘 두 가지 매우 중요한 특성들을 보여주는 현대적 상징이었다. 우리는 이 두가지 특징이 무엇인지 알고있다. 첫째 병사의 형상에 있어 그 창조란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지 않은 채 집단적이고 내재적일수 있다는 것 둘째 그 창조란 시간 이후가 아닌 시간 그 자체 안에서 영원하다는 것.


90 병사의 시적 변형은 또한 그 형상의 종말이 화려하게 시작됨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명확해진다. 민주주의적인 병사의 시대와 귀족적인 전사의 시대는 확실히 지나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역사의 평온한 종말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정반대로 우리는 혼란 속에 폭력과 불의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단적 행동을 위한 새로운 상징적 형식들을 창조해야만 한다. 우리는 새로운 태양을 달리 말하면 새로운 정신적 배경을 찾아야한다. 우리의 발명이 갖는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태양은 어디에 있건 배경" 이기 때문이다.



95 정치:비표현적인 변증법

97따라서 나의 목적은 오늘 단적으로 정치적 변증법의 비표현적인 관념, 즉 대중의 행동이 고유명으로 넘어가는 그런 유형의 이동을 금지하는 관념으로 통하는 길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념 안에서 혁명적 정치는 더 이상 사회적 모순들의 집중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집잔적 행동을 움직이게 하고, 그 행동을 사유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그와 같이 정치적 과정은 객관적 현실의 단독적 표현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현실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그것은 표현의 과정이 아니라 분리의 과정이다.


98 오늘날의 표현적 변증법, 그것은 법의 보수적 차원과 욕망의 창조적 차원 사이의 관계다. 나는 비표현적인 변증법의 영역 안에서 실재적인 정치적 진리가 법과 욕망의 대립 너머에 위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106 명백하게 중요한 것은 욕망이나 창조 또는 창안의 문제이지, 결코 법이나 필연 또는 보존의 문제가 아니다. 코헨에게-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에게서 마찬가지로 다수성과 집합들의 순수한 보편성은 정확한 정의나 명료한 기술의 편에서가 아니라 비 구성 가능성의 편에서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다. 집한들의 진리는 유적이다.


욕망과 유적 속성의 영역.


107 그러나 정치적인 분리가 문제인 것은 전혀 아니다. 법의 편에 있는 사람들과 마주하여 자신이 욕망의 편에 있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다. 정치적 투쟁은 직접적으로 유적 속성과 구성 가능성 사이의 투쟁이 아니다. 그러한 사고 방식은 순전히 형식적이다. 중요한 것은 고전적 관념에서 혁명적 전망이 결코 순수한 욕망의 편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혁명적 욕망의 내용물이란 법과 욕망 사이의 분리된 관계의 종식을 재현하는 유적인 인류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바디유와 진리는 새로움과 연결된다.109 그런 것이 첫 번째 입정이다 두번째 입정은 불법적이기는 하지만 유적인 무언가를 법 너머에서 탐색하는 것으로서의 욕망이라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말하는 것은 정치적 보편성이란 언제나 새로운 관념의 발전, 사회적 현실의 새로운 결합의 발전이란 것이다. 그것은 실천적 과정이며 어떤 유적인 것을 창조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두 번째 관념 속에서 정치적 과정은 언제나 어떤 유적인 것의 국지적 창조이다.


유적인 것으로서의 삶 전체의 일부를 찾거나 또는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언제나 무언가 독재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루소가 자유의 전제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늘날 그것은 오히려 평등의 전제이다. 정상적인 욕망이라는 이념에 반대하여우리는 언제나 이름 없는 것의 실존을 긍정하는 욕망의 투사적 이념을 옹호해야 한다.


* 모든 집합에는 공백을 포함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문제는 공백이 드러나는 순간이 온다. 이것을 사건이라고 말한다.




랑시에르: 정치, 동일시, 주체화



랑시에르에게 몫의 분배와 평등의 관계는 정치와 연결된다. 데모스의 개념은 근대의 PT와 연결되며 이러한존재들은 몫이 없는 자들이며 치안적 질서가 분배한 자리를 이탈하면서 가능하다. (지금은 프레카리아트 계급과 연결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또한 즉 불가능한 동일시가 하나의 정치의 계기가 된다고 본다. 

"우리 모두는 독일계 유대인이다" 이 68의 구호는 몫없는 자들과 동일시 하려고한다. 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프랑스인으로부터 벗어난데에 ,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있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사이에 있음 -un in between 함께 있음을 이야기 한다. 그리하여 데모스는 평등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정치적인 것(Le politique)란 무엇인가?


정치적인 것은 이질발생적인 두 과정의 마주침이다.

첫째는 통치의 과정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공동체로 결집하여 그들의 동의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자리와 직무를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을 바탕을 둔다. 이 과정을 치안 이라고 이름지을 것이다. 


둘째는 평등의 과정이다. 그것은 아무나와 아무나 사이의 평등 전제와 그 전제를 입증하려는 고민에 이끌리는 실천들의 놀이로 이루어진다. 이 놀이를 가리키기에 가장 적합한 이름은 해방이다. 해를 다루는 것은 치안 과정과 평등 과정이 마주치는 보편적 형태임이 틀림 없다. 



자코토: 개인들의 지적해방만이 유일하게 가능하다. 이 말은 곧 정치 무대는 없다는 뜻이다. 단지 친안의 법칙과 평등의 법칙만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 무대가 존재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정식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치안은 평등을 해친다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인 것이란 평등의 입증이 그 위에서 해를 다루는 형태를 취해야 하는 무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 항이 있다. 치안 해방 그리고 정치적인 것, 만일 우리가 그것들의 뒤얽힘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해방 과정에 정치(La politique)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 세 항을 치안, 정치 그리고 정치적인 것으로 구별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해를 다루는 가운데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라 할 것이다. 


중요한 결론 하나가 나온다. 정치는 한 공동체의 원리 법칙 혹은 고유함의 현실화가 아니다. 정치는 아르케를 갖지 않는다. 정치는 엄격한 의미에서 아나키적이다. 민주주의는 아르케를 갖지 않으며 척도도 없다. 데모스의 행위 즉 아르케인이 아닌 크라테인의 독특함은 원초적 무질서나 오산을 증언한다. 


데모스는 공동체의 이름이자 동시에 그것의 분할의 이름이며 해를 다루는 것에 대한 이름이다. '인민의 정치'는 자리와 직무에 대한 치안적 분배를 해친다. 왜냐하면 인민은  언제나 그 자체보다 더 많거나 더 적기 때문이다. 그것은 치안 질서를 혼란에 빠트리는 하나 더의 힘이다. 


내가 보기에 정치적 성찰과 행위가 마주한 작금의 난국은 정치를 한 공동체의 고유함의 현시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116 해방의 정치는 고유하지 않은 고유함의 정치이다. 해방의 논리는 타자론이다. 

117 정치적으로 유일한 보편이란 평등 뿐이다 평등이란 현실태로 만들어지는 한에서만 존재하며, 보편성의 효과를 낸다. 


정치에서 보편성을 실효적으로 만드는 방식은 하나의 논쟁적인 입증 하나의 사례. 하나의 증명을 담론과 실천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거기서 진리의 자리는 토대나 이상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토포스(논거/장소), 곧 논증 절차를 통해서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118


프랑스여성도 프랑스인인가? 이러한 정식은 '부조리한'문장들이 노동자는 노동자이고 여성은 여성이라는 식의 단순 긍정보다는 평등 과정에서 훨씬 더 생산적일 수 있다. 이 문장들은 단순히 사회적 불평등의 책략들을 그 자체로 폭로하는 논리적 균열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균열을 하나의 관계로 절합하고, 논리적 비 장소를 하나의 논쟁적 증명의 장소로 변형할 수 있게 해준다.평등의 사례들을 구축하는 것은 현실태로 존재하는 정체성의 작업이라거나 한 집단의 종별적 가치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주체화 과정인 것이다.


**주체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soi)- 정체성이 규정되어있는 것 가 다른 자기와 관계를 맺어 하나(un)를 - 데모스 형성하는 것이다. 데모스는 과정이다.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119  주체는 사이에 있는 것, 둘-사이에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사이에 여러 이름들 지위들 혹은 정체성들사이에 인간성과 비인간성 시민성과 그것의 부인 사이에 도구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말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지위 사이에있는 한에서 함께 있기도 한 사람들에게 고유한 이름이었다. 



대타자: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또한 타자론 곧 타자성에 대한 세 가지 규정에 따른 타자의 논리이기도 하다. 첫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결코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 긍정이 아니다.그것은 항상 동시에 치안 논리에 따라서 고착된 타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122 인민이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거대 서사는 그 자체로 다수의언어 게임과 증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서사라는 개념 역시 문화라는 개념만큼 논란의 여지가 있다. 둘 모두 논쟁의 줄거리를 하나의 목소리가 되게 하며, 이 목소리를 한 신체의 현시가 되게 한다. 그렇지만 정치적 주체화의 삶은 목소리와 신체의 거리 두 정체성들의 사이의 틈새로 만들어진다. 서서와 문화라는 개념들은 주체화를 하나의 동일시로 끌고간다. 평등의 과정은 차이의 과정이다. 그렇디만 차이는 다른 정체성의 현시나 두 정체성 심급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차이가 현시되는 장소는 한 집단의 고유함이나 그 집단의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논증의 토포스이다. 


그리고 이 토포스가 전시되는 장소는 틈새다. 정치적 주체의 장소는 틈새 혹은 균열이다. 이름들 정체성들 혹은 문화들 사이에 있음으로서 함께 있음.


'평등이란 그 테이블에 나오게 하는 것' - 서로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관계, 귀족과 평민이 같은 존재론적 층위에서 같은 무대에서 대화할 수 있는 동등함을 증명함이 평등이다. 



*


1. 역사는 생산 관계와 생산력의 모순에 의해 진행된다. : 구조운동 -> 파국론의 모순에 이르름 -> 


2.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 주체의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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