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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채(鹿踩)

 

「지젝과 무의식의 정치학」 단편소설 수정본: 왕진희 (2018.7.27)

 

 

 

 

 

 

“한 달에 사천씩, 가만...... 일 년에 그니까 사억이 넘어?” 통장을 넘겨보던 금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통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드레스 룸에서 막나온 지영을 부러움과 감탄이 섞인 얼굴빛으로 쳐다보았다.

“지영아, 그 옷 너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

“그래?” 지영은 거울을 쳐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S백화점 아르마니 매장 매니저가 익숙하게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해주자, 지영이 눈짓을 하며 “저 베이지랑 블랙으로 같이 주세요.”

“고객님 머플러도 좀 전에 무척 잘 어울리시던데요. 같이 넣어드릴까요?”

“그래요”

지영과 금희는 센트럴 시티 안에 있는 S백화점 2층 명품매장에서 나와 지하층에 있는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고 근처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유학까지 다녀와 예술만 하던 네가, 어떻게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기업들의 세무컨설팅이며 주식이동과 가업승계, 기업공개인 IPO 증권사 업무까지 하니? 물론 전문가 영역은 네 말대로 각 전문가들과 서로 연계해서 한다지만”

“그러게, 말하자면 좀 길어. 정말 아이러니한 게 난들 이러리라고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니? 이것저것 원래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서 한 곳을 오래 파지 못한 것도 있고 나름 사정도 있었지.”

“그렇구나.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내키면 해줘.”

“그럴게, 홍대에서 미술학원을 하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서 우연히 영석이를 만났어. 9호선 신논현역에 있는 교보문고. 영석이는 원래 회계법인에서 회계사로 근무하다가 증권사 IB업무로 옮겼거든. 그런데 그 팀 본부장이 골드만삭스 한국법인 지사장으로 스카웃되면서 영석이를 같은 파트너로 데리고 간 거지. 그래서 영석이가 업무상 사모펀드 회사들을 많이 아는데 여차여차해서 그 중 한 회사를 나에게 소개시켜줬어. 그곳에서 근무하면서 내가 느낀 게 개인고객을 상대하기보단 기업이 훨씬 사이즈도 크고 보람이 있더라고. 그래서 기업전문회사로 적당한 시기에 옮겼지. 이 업계에 발을 담근 지 벌써 8년째네.” 지영은 캐모마일 차를 한 모금 더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곳 CEO들과는 달리 우리 회사 수장은 현장감각과 이론실무에 능통하시고 같은 업계에서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알아주는 대가시거든. 그건 너도 아니까 날 찾아 이런 게 만난 거고. 열심히 한번 해봐. 너 정도 경력과 눈빛이면 나보다 훨씬 더 잘 할 거 같아.”

금희는 설렘과 걱정이 교차되는 눈빛으로 고맙다며 의자를 바짝 더 당겨서 무척이나 궁금한 눈빛으로 지영의 다음 이야기를 재촉 했다. 지영은 새삼스럽다는 듯이 애정을 담은 부드러운 눈길로 살짝 쏘아보며 금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되기는 네가 내 통장을 봤듯이 돈도 많이 벌고, 그만큼 일만 하며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살고 있지. 우리 일이 기업의 ceo만 상대하고 또 그분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갖고 계시기에 대화하다보면 재미도 있어. 다만 업무강도나 밀도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상상을 초월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도 너의 회사에 입사가 가능할까? 같은 금융이라도 분야가 달라서 그래. 이 업계에서 십년을 넘게 근무 했지만, 지금은 S사 사내에서 교육만 담당하거든.

“괜찮아. 너 정도면. 좋은 자리는 원래다 인맥으로 먼저 채우잖아. 그 나머지를 공개채용하고.  우리 회사가 구조적으로 완벽한 지원을 해주고 교육시스템까지 잘되어 있어서. 가장 많은 예산을 직원 개개인의 능력 강화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붓거든. 내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회사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고속 수직 성장을 해서 지금은 계열사도 각각 분리되어 여러 개 있고 사내에 각 분야 고문들을 비롯해서 회계사, 변호사들은 물론 세무사만 500명이 넘어. 우리 하는 주 업무가 기업 재무제표 분석에서 재무 분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아냐. 그 안에 모든 솔루션과 해법의 실마리가 들어있거든. 처음엔 교과서적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하루에 열군데도 넘는 기업들의 재무제표를 들여다보고 실제 미팅에서 ceo와 면담으로 구체적인 질문이나 사정 등을 들으며 몇 년이 지나면, 스스로 신기(神氣)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세세한 정보를 분석하는 안목이 자연스레 생기거든. 보이는 숫자 몇 개로도 많은 것을 유추해서 면담하다보면 상대 ceo가 의아해하고 감탄하시는 분들도 많아. 더구나 공무원처럼 오후 5시면 공식 업무가 끝나는데 그때부터 기존 자료와 면담을 바탕으로 각 해당 전문가들과 다음 미팅 솔루션 연구나 자료 등을 만들다보면 매일 새벽퇴근은 기본이야. 이런 세월을 집중해서 몇 년 이상 하면 같은 전문가라도 다른 분야 전문가들이 오히려 답답해 보일 때가 있어. 통합적 사고를 잘 안하고 사지선다형 안에서만 해답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어 살짝만 문제가 비틀려 보이면 당황하고 창의적 사고를 잘 못하니까. 그리고 하다보면 현장 감각이 생겨서 업무가 점점 재밌어지거든. 중견기업 이상은 재무제표가 공시 되어있고 중소기업은 기업재무제표 신용정보원에서 보게 되어있어. 우리 회사의 업무가 보상도 크고 경쟁력이 있는 이유가 사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이나 중견 업체가 매출 천억이 넘고 영업이익 백억이 넘어도 제대로 된 변호사나 회계사 등 전문가를 사내에 배치해서 고용하긴 힘든 구조야. 실제로도 업체를 방문해보면 부장이나 이사가 주먹구구식으로 기업리스크를 관리를 하는 경우가 많아. 또한 중소기업은 재무재표 순이익이 1억이 조금 넘는 업체가 대 다수여서 연봉 일억이 넘는 전문 인력을 배치하기는 가능성이 희박해. 그러니 오너가 기업을 열심히 운영해서 뼈 빠지게 벌어도 리스크 관리 한번만 잘못해도 업체가 날아가는 수가 많거든. 실제로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수출로 먹고살잖아. 한 때 중소기업을 환율 햇지 해준다고 요즘 유행하는 가상화폐 열풍처럼 은행에서 권유한 ‘키코’라는 금융상품 유행으로 중소기업들이 멋모르고 가입했다가 소송까지 하고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고 망하거나 몇 년째 겨우 연명하는 업체도 많았어. 담당자는 압박감의 고통과 책임감으로 자살까지 하고. 은행에서 권유하니까. 더구나 환율위험을 햇지 해준다고 하니 믿고 싸인 했다가 내가 담당한 업체 중 가장 큰 규모였던 회사중 하나도 키코로 800억 넘게 손실을 보고 휘청휘청 했었거든. 백가지 기업의 각각 다른 백가지 넘는 고민들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하다보면 자금 유치는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와. 또는 자금이 필요한곳은 우리 회사에서 적극 투자도 해주거든. 우리입장에서는 쉽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중소기업 같은 입장에서는 크게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 내 생각에 우리 일이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개성에 맞고 만족한다면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너희 아버지께서 원래 섬유관련 회사를 운영 하지 않으셨어?”

“응, 맞아. 요즘은 규모를 확 줄이고 지금은 여성 브레지어에 들어가는 부속품 납품을 하는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시는데, 주요 매출을 담당하는 굵직한 납품업체가 문제가 좀 있어 힘드신가봐”

“그렇구나, 나도 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그런 상황이 뭔지는 알겠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며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스피커에서는 캐나다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의 중후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이어서 메르세데스 소사의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실내를 압도했다. 누구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위안을 받을 것임이 분명했다. 지영은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며 소사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반 고흐처럼 ‘자기 본성대로 자기 개성에 맞게 사는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하며 어느새 쓸쓸함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금희의 내밀하고 열정에 넘쳐 반짝거리는 눈빛과는 대조적으로 지영은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옷이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고통이고 병이 되는 듯 그녀에게는 다른 갈증이 있었다. 지영은 문득 ‘나를 붙잡아 얽매는 건 무엇인가‘를 스스로 자문했다. 전 세계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마음껏 붓과 펜으로 하루를 보내고 읽고 싶은 책도 무한정 볼 수 있었던 그 순간들이 그리웠다. 작업을 할 때면 오직 캔버스에서만 나는 사각 사각거리는 소리와 절대 고요, 간간이 들려오는 싱그러운 새소리의 반향만이 무아지경 몰입의 그 순간들을 간혹 의식하게 깨웠다. 지나간 순간들을 회상하며 무한한 열망이 온천수 솟구치듯 가슴을 휘적시는 것을 억누르면서 지영은 의식적으로 큰 한숨을 삼켰다. 맞은편의 금희는 뭔가를 수첩에 써내려가며 손과 온몸의 자태에 생기가 가득 넘쳤다.

 

 

 

유종은 아버지가 가구 회사 ceo로 큰돈을 벌었고 그의 어머니는 미술을 전공한 고관대작 딸이다. 부모님이 예술을 좋아해서 많은 골동품과 예술작품을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사들였고 몇 년 전에는 인사동의 이름난 전통 있는 화랑까지 인수해서 어머니와 큰 형수가 운영하고 있다. 굵직한 회사들과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주변의 거부들이 많았다. 유종은 회계사가 된 후 회계법인을 차려놓고 넓은 고급인맥으로 요즘 같은 불황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학 때부터 양성애자였던 그는 행동반경도 넓고 운동능력 등 체력도 친구들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건장하고 좋다. 키 크고 근사한 미남에 든든한 재력까지 갖추고 머리까지 받쳐주니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유쾌 남이다.

그런 유종에게 언제부턴지 미묘한 설렘이 생기기 시작 했다. 자신의 회계감사 업체 중 한곳인 중견 게임업체 김 회장이 불러서 동행한 골프에서 처음 만난 지영이 자꾸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안성 골프장에서 특별히 긴장되고 즐거웠던 그날의 라운딩을 끝내고 사우나를 하고 나온 그녀를 골프장 로비 프런트근처에서 마주쳤을 때였다. 지영은 도표 중 곡선의 아름다움과 함께 직관적으로 시각적 만족을 주는 기하학적 육체의 조화를 코발트 다크블루 정장으로 적당히 가렸으나 그모습이 유종에겐 어딘지 모르게 묘한 신비감을 주었다. 유종은 스쳐 지나가는 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리호리한 실루엣이 지닌 생기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와 함께 잘 어우러진 모습을 삼켰다. 마치 자연스런 살 붙음을 거부하지 않다는 듯 그늘 집에서 지영의 털털한 먹성과 대화 중의 재치 있는 유쾌함이 가끔 생각이 났다. 그 후로 일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몇 번의 만남을 가졌고 서로 잘 통하는 면도 많았다.

그런데 최근엔 지영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몇 번 연락을 했는데 흐지부지 못 만난 것이다. 불길한 징조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눈빛은 어딘지 좀 우울해보였는데 걱정도 살짝 됐다. 그녀는 늘 알 듯 모를 듯 양파 같은 구석이 있었다. 양파처럼 겹과 결이 많다. 지영의 탄력 넘치는 흰 피부는 유종의 유독 까맣고 각질이 잘 생기는 피부와는 다른 뭔가가 있어 주눅이 들게 했다. 때로는 화려한 별장이나 외딴 쓸쓸한 오두막 같기도 하고 아름다운 최신 오페라 의상만큼 개성 있고 미묘한 그녀를 읽는 법을 배우는 건 꽤 까다롭다. 하지만 유종의 부드러운 감상의 선과 사랑의 안내도를 따라 지영은 차가운 듯 적절한 반응을 했다. ‘나에게 반응하지 않는 곳은 그녀의 뇌 회로가 꺼진 부분이야. 다행히 그녀의 사고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어. 부드럽고 다정하긴 한데 문제는 내가 다가간 만큼 내게 오지 않는 게 문제지’ 유종은 5월의 지옥같이 바쁜 종소세를 끝내니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났다. ‘바보같이 이 무슨 생소하고 비통한 심정이람?...... 이럴 때를 대비해서 토끼 굴을 두세 개는 기본으로 유지하고 파놨어야 하는데’ 너무 바쁜 건 핑계고 용서할 수없이 게을렀다고 생각한 유종은 최근 바꾼 페라리 켈리포니아 T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무심코 머리를 찧다가 ‘윽’ 하고 목을 감쌌다. 그는 회계법인 명의의 업무용 세단보다 최근 뽑은 자신의 페라리 스포츠카를 더욱 즐긴다. 그나마 한국의 정서를 생각해서 가끔 스포츠카를 타고 업체미팅을 가는 날은 해당업체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않고 멀찌감치 세워두고 걸어 들어간다. ‘이걸 타고 나갔을 때 사람들과 특히 여자들의 눈빛은 나를 더욱 흥분시키고 거인이 되게 하지. 이 정도 불편함 쯤이야 얼마든지 애교로 감수한다고’ 다 좋은데 유종에게 스포츠카는 세단보다는 뭔지 모르게 몸이 불편 한 것이 딱 하나의 흠이자 불만이었다.

2년 만에 지영과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에 반포 한강에서 바람이나 쐬자고 해서 저녁 6시쯤 만났다.

“유종! 잘 지냈어? 많이 달라졌다. 살이 좀 붙은 거 같기도 하고.”

“지영이는 늙지도 않는 거 같아, 여전히 예쁜데.”

“그래? 기분 좋은데. 배고프지? 손이 왜 이렇게 차 남자가?”

“차안에서 계속 에어컨을 켜고 있어서 그렇지. 머리했어?”

“머리? 그냥 뭐 항상 비슷한데.”

“비슷하긴? 항상 단발머리에서 지금의 달달한 살짝 긴 부드러운 웨이브는 대 변신이지!”

“흐흐 쑥스럽게.......유를 위해서 난 좀 일찍 도착해서 한번 둘러보고 좋은 카페도 알아놨지.”

“난 여기 처음 온다. 진짜 반포로 이사 온지 2년 됐는데도 말이야.”

“원래 그래. 김밥 사왔는데 음료수랑 같이 먹을래?”

“응, 지금 이 시간의 한강변이 날씨가 너무 시원하고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역시 탁월한 선택이야. 강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 지잖아. 나 살쪘어?”

“너? 많이 안 쪘어. 저 쪽으로 가자. 거기가면 음료수도 있고 파라솔에 잔디도 있고 좋잖아.”

유종과 지영은 나란히 걸으며 한강에 늘어서있는 현대적인 카페와 레스토랑을 지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지영은 참깨라면을 한눈에 찜하고는,

“라면!”

“라면? 아....... 그래, 그래. 국물이 있어야 하니까.” 함께 라면과 감자 칩을 사서 편의점에서 펼쳐놓 은 파라솔나무의자에 사이좋게 앉았다.

“어떻게 지냈어?”

“엄청 바빴어. 널 못 보는 사이 더 많이 바빴다. 일이 많으니까.”

“넌 뒤에서 밀어주는데도 많잖아.”

“어, 다 지인들 소개지 뭐, 표정이 평화로워 보여.”

“나? ㅎ~”

“다행히 차가 많이 안 막혀서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십분 정도 늦었어. 나는 이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어. 오너가 한말 또 하고 또 하고 답도 안 나오는 걸 가지고 계속 붙들고 늘어지니까.”

“아산에 무슨 회사인데?”

“건설.”

“건설? 요즘경기가 괜찮지 않을 텐데?”

“그렇긴 한데, 나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경기가 괜찮은 사람들이야. 돈을 벌어야 세금을 내니까.”

“그렇긴 하지. 자본주의에서 기존의 필요한 건설물이나 상품이 없어서 다시 만드는 건 아니잖아. 더 좋은 디자인과 편리성, 세련됨을 내세워서 비싼 가격에 팔고 기존에 갖고 있던 아파트나 상품은 다 싸구려 골동품으로 헐값에 버리는 게 생리잖아. 서울의 아파트는 재건축이라도 하지만 지방은 심각해. 공급이 넘쳐나도 계속 짓거든. 패션 시장의 유행도 그래서 만든 거고...... 현대인이 목숨처럼 들고 다니는 족쇄 같은 핸드폰도 같은 메커니즘 아냐? 근데 너 왜 자꾸 김밥 옆구리를 터트리니? 먹기 싫어서 데모 하는 거야? 이왕이면 좀 예쁘게 먹지. 젓가락질 똑바로 해!”

“내가 먹을 건데 나라고 김밥 옆구리 터트리면서 먹고 싶겠니? 나쁜 남자 좀 좋아해라.”

“나쁜 남자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어? 너도 생각을 해봐!”

“왜? 나름대로 매력 있다.”

“나름대로 매력 있으면 뭐해? 그게 끝인데. 인간은 있지 결국에는 인간성에 끌리는 거야. 다른 거는 순간뿐이고 다 지나가는 거지. 나쁜 남자는 잠깐 호기심이고. 잠깐 호기심에 던져져서 잊히고 싶어?”

“갑자기 굵은 소나기 목소리로 말 끝났나?”

“아니요.” 지영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먼저 하세요, 양보할게요.”

“나쁜 남자라는 게 처음엔 나쁜 남자인데, 반전의 매력이 있는 게 나쁜 남자야.”

“아 그래? 요즘 나쁜 남자의 정의가 그렇게 바뀌었어?”

“뿅 간다니까.”

“아 진짜? 그럼 그 반전의 매력이 뭔데?”

“알면 반전이 아니지.”

“그래? 나쁜 남자답네. 말하는 거 보니까.”

“하하하! 뭐 또 하수같이 그래 엉?”

“엉? 그런 거 몰라 나는. 아~하 그런 거 야한 거 말하는 거야? 식스 팩 이런 거?”

“하하~ 어어”

“울퉁불퉁 근육 그런 거? 얘들이 찾는 거?”

“그건 아니고”

“그럼 뭐야?”

“요가를 최근에 2년 정도 빡 세게 했거든. 자세히 보면 알거 거든.”

“오호 근육운동은 근육이 울퉁불퉁 나온다고 해. 요가는 뭐가 좋지? 남자한테?”

“아우~ 근육운동 그거는 보기만 좋지 실익이 없어. 요가는 내부근육하고 다르더라고 유연성하고.”

“아 그래? 남자한테 유연성과 내부근육이 좋아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알고 싶나?”

둘이서 마주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신나는 음악소리와 함께 한 서른 명의 젊고 발랄한 이 삼십 대로 보이는 마라톤 팀이 힘차게 앞을 지나갔다.

“그래서 2년 동안이나 끈기 있게 요가를 했단 말이야?”

“최근에 좀 빠져 있었던 게 요가였다고.”

“음 참 특이해 남자가 요가에 빠지는 게 쉽지 않아. 그치? 너의 이미지만 봐도 그렇고.”

“점점 추세가 강남을 필두로 남자들이 요가를 많이 하는 추세야.”

“그러니?”

“좋은 것 아냐?”

“그치 사실은 여자들이 아무리 좋다고 남자한테 권해도 안하는 것이 요가 아니야? 원래는.”

“가면 여자 밖에 없으니까 창피해서 그렇지 뭐.”

“아 그렇지. 요즘엔 세태가 바뀌어서 오히려 예쁜 여자 쳐다보며 운동하는 그 상황도 좋은 거지? 좋은 호르몬도 막 솟고.”

“그렇지, 그렇지. 요가는 원래 좀 했었고 해외사업을 좀 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단 거기 거래처들이 있어가지고.”

“아 기존 회사의 일을 봐주면서 진출 하는 거야?”

“어어 부동산도 좀 샀고.”

 

 

 

지영은 커다란 화면의 다이어리를 점검하며 화요일 있을 미팅을 생각했다. 일원동에 사무실이 있는 중동의 플랜트건설을 주로 하는 중견업체의 m&a와 그 업체 자회사의 주식소각문제로 H와의 접촉이 필요했다. 다른 금융회사도 많았지만 그동안 두 회사 사이에 많은 인연과 도움을 주고받았기에 더욱 그렇다. 맨 처음 H를 만난 건 (주)일성 연료펌프 주차장에서다. H는 약간 긴 앞머리가 바람에 살짝 흐트러지자 손으로 자연스레 머리를 옆으로 살짝 쓸어 올렸다. 순간 그의 그 모습을 지영이 봤다. 지영의 시선이 한참동안 고정되었고 이 마주침이 그녀의 몇 년을 붙들 줄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다. 시각이 인간에게 독립적 기능이 아니라 빛의 기능에 의존하듯 예정된 운명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거나, 고대 에피쿠로스학파의 클리나멘이 우연히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 날 두 시간 이상의 긴 미팅에서 지영에게 생각나는 건 그가 미팅도중에도 웨이브 앞머리를 간혹 쓸어 올리는 모습이었다. 늘 업무상 딱딱한 사람들만 만나다가 그의 색다른 모습은 지영에게 억누르고 있던 묘한 감성을 자극했다. 그동안 너무 건조한 생활을 했나보다 하고 당시는 무심히 넘겼고 그 첫 만남 이후 두세 번 더 업무상 봤지만 새까맣게 H를 잊어버렸다.

업체 미팅 때문에 예정된 화요일 날 지영은 H를 1년 만에 다시 만났고 점심식사까지 함께 했다. 그날 식사도중 H는 다음 주중에 저녁식사를 제안했고 지영은 싫지 않아서 약속에 응했다.  지영이 H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s대에 초고속 승진에 든든한 뒷배경까지 있다고 듣긴 들었으나 별 느낌이 없었다. 일상이 너무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저녁을 같이 한날, H는 지영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저녁 식사시간에는 시종일관 재기 발랄한 엄청난 웃음을 선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사려깊이 지영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담동의 근사한 와인 바에서는 이루마의 서정적이고 달콤한 피아노곡 ‘Love me’를 H가 직접 연주해서 들려줬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라 지영은 깜짝 놀랐고 라이브 연주라 그런지 몇 배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마추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곡의 느낌을 잘 살려서 연주가 끝나자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 했다. 지영은 온몸에 감싸인 자신의 유리장막이 자기도 모르게 산산이 부서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H가 재능과 장점이 매우 많은 매력적인 캐릭터의 소유자임은 분명하나 지영과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과 관점이 달라서 가끔 논쟁이 붙으면 좁혀지지 않는 간극으로 서로를 힘들게 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사랑은 잔인한 면이 있어서 모처럼 지영에게 찾아온 꿈같은 사랑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이 떠나도 추억은 남는지 지영은 그때 들려준 피아노곡을 언제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가끔 그 곡을 일부러 들을 때마다 지영은 처음 그 느낌의 그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쓸쓸히 그녀를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지영은 H가 가끔 생각이 났고 그가 들려준 이루마의 ‘러브미’를 자기만의 감성에 맞게 쉽게 편곡해서 그녀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어릴 때부터 취미로 배워서 가끔 켜는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며 복잡한 심경을 달랬다.

사람이란 의식적인 꾸밈말보다는 무심코 한 말에 진심이 드러나는 법이다. H는 지영과 가까워진 후 어느 날 차안에서 무심코 자기는 ‘세상의 어떤 여자라도 세 번만 만나게 해준다면 다 자신 있다’고 했다. 온갖 정성을 다 바치더니 H는 순간 자만심에 우쭐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실수를 했다. 본심이 드러나기 시작 한 거다. 중대한 비즈니스에서나 정치에서도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중하게 일을 마무리 하는 리더가 있는가 하면, 일이 끝났다고 한 박자 당겨 기분 좋게 샴페인을 살짝 일찍 터트려서 그간의 노고를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범인(凡人)들이 다수인데 고만 고만한 인간들의 습성이라고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지영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후로 지영도 모르게 H가 점점 싫어졌다.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나 처음에 좋아했던 바로 그 이유가 돌이켜보면 싫어지는 이유도 되는 절묘한 상황이었다. 그가 쓰는 단어는 간혹 외설적이다 못해 원초적인 경악을 드러냈고 특히 무심코 한 말일수록 더욱 그렇다. 순수하거나 천진난만함과는 다른 원초적인 코드가 지영과 H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깊은 내면의 실재를 마주쳤을 때 아름다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매우 드물 것이다. 식물은 가까이 가면 향이나지만 인간에게서는 대부분이 악취가 난다. 지영은 퇴근시간에 H가 회사근처에서 기다리면 초조함과 설렘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다음 미팅 준비도 완벽히 해놓지 않고 뛰는 걸음으로 달려갔던 자신이 싫어졌다. 냉정하게 자기를 돌아보며 늦은 시간까지 업무만 하는 생활도 지쳤고 또한 다른 직종에 비해서 괜찮은 물질적 보상이 따라와도 지영의 마음을 진정으로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더구나 강도 높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까닭모를 하혈이 매일 조금씩 있었고 생리통도 점점 심해지는 것이었다. 그 분야의 최고의 의사를 찾아가도 원인도 병명도 별다른 처방도 내려주지 못해서 곤혹스럽고 걱정도 되었다. 점차 마음의 공허감은 깊어갔고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영은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남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한 타인과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깊은 공감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얼마나 자신과 타인들을 들여다보며 여유를 갖고 사색을 즐기며 살아봤는지 세월을 더듬어보니 처절하게 고통스러웠다. 일상이 매일 똑같았고 정해진 딱딱한 생활로 인해 자신의 정신이 피폐해지고 그럼에도 스스로 안주하는 것이 한없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나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즐길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서 유일하게 지영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강박증적 소비로의 도피가 그나마 순간적인 보상이나 즐거움을 주는 듯 했다. 하지만 쇼핑에서 1초의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만큼이나 여전히 자신과 타인에게도 관심을 주는 것을 두려워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영은 마음과 정신의 회로가 계속 옥죄여져서 이제는 오그라 들대로 오그라든 불구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단호하고 당당하고 확신에 차있던 자신에 대해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고 차츰 그녀의 내면에서는 자아의 깊은 아우성들이 수시로 터져 나왔지만 여전히 반복해서 애써 모른척했다.

 

 

 

토요일 오후이다. 지영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자신도 모르게 이수 교차로에서 신세계 강남점 쪽으로 순간 차 방향을 돌렸다. 강남고속 터미널 옆 백화점 입구보다는 늘 이용하는 메리어트 호텔 쪽 입구를 택했다. 호텔정문을 살짝 통과해서 우회전을 하면 바로 신세계백화점 명품관으로 연결되어 vip전용 발렛 파킹 서비스를 해준다. 한 시간 정도 둘러보며 종이 백 5개에 담긴 쇼핑으로 인해 기분은 살짝 흐뭇했다. 하지만 대학 다닐 때 학교와 오 분 거리여서 자주 갔던 런던에 있는 옥스포트 스트리트의 셀프리지 백화점을 생각하면 한국은 명품관이라 해도 눈에 들어오는 상품이 별로 없어 늘 찜찜했다. 나오는 길에 메리어트 호텔에서 머리도 하고 스파도 하니 한결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십분 정도 운전해서 집에 도착한 후 지영은 다음 주 있을 미팅 스케줄을 보며 준비를 하다가 새벽이 넘어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일요일은 분주했다. 영국에 있을 때 무척 친하게 지냈던 노리꼬라는 일본친구가 그녀의 남편윌리엄과 같이 방문을 했다. 최근에 노리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 자신이 키운 기초화장품 제조업체를 시세이도에 M&A 당하면서 거액을 번 뛰어난 사업가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화장품 메이크업제품 중 일부를 중국과 유럽시장에 진출을 모색하느라 국제변호사인 그녀의 남편 런던출신의 윌리엄과 바쁜 일정을 보내던 중 일부러 짬을 내어 한국에 잠깐 들린 거였다. 런던에서 노리꼬와 서로 옆방에 붙어살았던 지영은 많은 것을 함께 했고 같이 요리를 해서 식사도 나눠먹었다. 한국의 신 라면을 노리꼬는 특히 좋아해서 지영을 자신의 방에 초대해서 같이 키득거리며 많이도 나눠먹었다. 그때는 지영과 노리꼬에게 모든 것이 다 즐거웠다. 하찮은 얘기도 둘이서 나누면 드라마나 유치한 소설 한권이 뚝딱 만들어질 정도였다. 당시 그녀의 남친 윌리엄과는 같이 테니스도 하고 가끔은 윌리엄이 초청해서 사슴과 토끼가 자주 출연하는 골프장그린에서 신나는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인간에게 아무래도 먹는 정이 크긴 큰가보다. 셋이서 런던에 모인 각국의 음식을 맛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주말이면 지영과 노리꼬가 사는 홀랜드 파크 옆 노팅힐에 있는 노리꼬 소유의 크림색 아치 창문들이 고풍스런 미를 물신풍기는 4층 건물에서 전 세계의 다양한 직업의 친구들과 학생들의 파티가 열렸고 그 중에 가장 입담이 좋은 이탈리아 시실리 출신의 심장 전문의 로돌포는 춤과 매번 색다른 이벤트를 열어 그곳의 친구들에게 인기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매번 다른 패션 모자를 늘 즐기는 패셔니스타 노리꼬는 대리석 같은 흰 피부에 복숭아 빛 블러셔가 메이크업 포인트로 한 번만 그녀를 봐도 절대 잊히지 않는 매혹적인 눈빛과 성격의 소유자이다. 오랜만에 셋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기초화장품과 메이크업 신제품을 올 때마다 한 가방씩 지영에게 선물로 안겨준 노리꼬 내외와는 아쉬운 작별을 하며 공항마중을 했다. 지영이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지하 주차장에서 핸드폰을 보니 벌써 열시가 넘었다.

서둘러 돌아서서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나타난 벤이 스르르 옆에 멈추더니 지영을 순간 덮쳤다. 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하염없이 달렸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지영은 숨조차 쉴 수 없었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바위가 병풍처럼 끝없이 늘어서 있고 빙글빙글 도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파라고무나무 같은 것이 울창하게 빽빽이 서있는 밀림 같은 어느 입구이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비현실적으로 깊이조차 가늠하기 힘든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가 안도감과 동시에 깊은 두려움 같은 것을 주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듯 고요하고 소름끼치는 절대 고독만이 있는 외딴 곳이었다. 지영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느낄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주사를 맞고 있다는 사실과 엷은 노란색 액체가 어마어마한 양으로 둥둥 떠다니며 계속 몸에 주입되지만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의식은 흐릿했다. 몸이 묶여있지는 않았으나 꼼짝 달싹 할 수가 없었다. 잠깐씩 의식이 겨우 들 때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탈출할 수만 있다면.......벗어나고 싶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의식저편에서 계속 아우성을 치며 재촉을 했다. 아프다. 주사가 또 들어온다. 약물이 투입된다. “아니야! 아니야!! 안 돼!..........한참을 혼자서 자신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 거렸다. 으으....... 아....... 악!!! 지영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새어나오는 건 엷은 신음소리와 무기력한 육체뿐이었다. 나무들이 바위들이 더욱더 가까이 다가오며 몸은 그 암흑 속으로 계속 빨려 들어갔다.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겨우 힘없이 아 아 아 아 안.......돼.......공간에 둥 둥 떠다니는 온갖 사물의 환영들을 잡으려고 손을 휘휘 저으며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나 돌아오는 건 약간의 진통과 함께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살짝 열린 감색무지커튼사이로 여명을 알리는 푸른빛이 수줍게 들어왔다. 눈을 뜨면 바로보이는 자리에 있어도 평소엔 무심해서 눈에 잘 띄지 않던 고호의 해바라기가 압도적으로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점차 외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빛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창문과 투명한 벽을 통해 해바라기 그림을 향해 쏟아졌다.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였으나 지영은 찬찬히 그 그림을 응시하며 자신이 마치 고흐가 된 것처럼 신들린 손놀림으로 페인팅 했던 그 순간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맞은편 벽으로는 자신의 작품들이 은은하게 실루엣을 드러냈다. 드디어 익숙한 자기 방안이란 것을 지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분명히 확인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 꿈이었구나. 그런데 이렇게 생생할 수가 있다니’ 지영은 식은땀이 흘러 온몸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꿈속과는 반대로 지영에게 안심이 되는 그 무엇과 함께 해방감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실재를 들여다보는 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독, 죽음의 심연이라도 과도 같은 저 세계의 고통일 것이다. 그곳을 막 빠져나온 지영은 꿈에서 깬 후 안도감과 함께 이상하게 머릿속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면서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1시간 후면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 착륙이다. 마음도 몸도 뭔지 모를 해방감으로 더욱 차분해진 것이 아이러니 했다. 고대문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집트는 피라미드와 신전 등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아마존 강과 자웅을 겨루는 나일강 상류에서 하류의 삼각지까지 룩소르, 에두푸, 콤옴보 등을 구석구석 둘러보니 신비로운 이집트에 온지 벌써 이십일이 넘었다. 일행을 실은 여행객용 흰색 벤츠 벤을 타고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을 둘로 나누는 맑고 투명한 터키석 빛 파란색 바다 홍해의 휴양도시 후루가다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여정하는 배로 돌아가는 중이다. 끝없이 황량한 사막을 벌써 열 시간째 달리고 있었다. 사막 한 가운데 쭉 뻗은 직선도로 하나만 하염없이 펼쳐져 있었고 간혹 양쪽으로 보이는 모래에 검은 빛이 섞여 있어 모래의 색상만 다양하게 흰색, 노란색, 검은색 등으로 조금씩 바뀔 뿐 변화라고 곤 없었다. 매스컴에서는 자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지역에 무장한 탈레반 등이 나타나 사상자를 냈다는 보도가 많아서 걱정도 되는 긴장감 때문에 지루할 틈은 없었다. 지영은 손에 들고 있는 읽고 있는 책에 집중하며 간간이 긴장이 되는지 창밖을 주시했다.

 드디어 무사히 사막을 탈출해 해안가를 달린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다는 점점 검은 빛이 되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순간 무심코 바다 쪽을 바라보니 까만 바다에 달빛이 환하게 비추어서 반짝이는 하얀 비단 길이 열렸다. 그 모습에 넋을 잃고 무엇에 감전된 듯이 바라보다가 바다가 갑자기 지영의 눈앞에 밀려들어왔다. 지영은 덜컹 놀라며 엉치뼈 쪽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만져보려다 뭐지? 하고 머뭇거리는데 순간 온몸이 투명하고 끈적거리는 무엇으로 감싸졌다. 부자연스럽고 더듬거리던 육체가 이제는 서서히 자유롭게 날수도 있었고 헤엄도 치고 다녔다. 주변은 온통 환하거나 어둡고 이불을 들추듯 한 겹을 들어 올리면 바다가 커튼처럼 열렸고 닫으면 하늘이 되었다. 저 너머에는 낯설지만 왠지 친구처럼 친근해 보이는 아저씨가 하늘구름이 섞인 한 우주를 마치 빨랫줄에서 빨래를 개듯이 걷고 있었다. 그사이에 그 너머에 도대체 몇 겹이나 다양하고 넓은 우주가 존재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다채로운 우주들이 눈에 사진 찍히듯 계속해서 열리고 있었다. 한참을 유영하며 다니다가 얼음 기둥이 화려하게 높이 솟은 어느 바다에 멈추었다. 파란빛이 나는 얼음기둥에 몸을 비춰본 지영의 모습은 마치 캡슐에 쌓인 라멜라 같이 형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형체가 없는 듯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안개가 자욱한 얼음기둥에 사다리가 있었다. 그 너머로 올라가보니 커다랗고 신비로운 무지개 빛깔 다채로운 기운을 뿜는 은하수가 흩뿌려진 넓은 성채 같은 건물로 빨려 들어갔는데 어디선가 한줄기 희미한 빛이 나왔다. 그쪽으로 뚫고 들어가니 무슨 창고 같은 건물이 보였다. 지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살며시 열었다.

 

 

지영의 팔엔 수박 두 덩이가 들려있었다. 조르바 아저씨는 수박을 가장 좋아하신다. 이곳은 언제나 음악이 흐른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 b단조 ‘바비야르’ 2악장 〔유머〕가 흐르고 있었다. ‘바비야르’는 우크라이나에 침입한 파시스트 군대가 수십만 명의 유대인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했던 장소의 이름이다. 고독과 은둔의 대기가 몇 백 평의 공간을 감싸기도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지영은 원주에서 자신의 작업을 하며 자연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이곳 공기가 그리우면 온다. ‘조르바 아저씨랑 처음 대화는 음악으로 시작했었지’ 생각이나.

“조르바 아저씨 어떻게 하면 더욱 음악과 친해져요?”

“그럼 베토벤부터 시작을 해봐요.”

“베토벤이 교향곡 9개, 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 5개와 바이올린 협주곡 1개, 현악사중주가 16개,

첼로 소나타 변주곡과 피아노 3중주, 피아노 소나타, 이중에서 좋아하는 곡 한 개를 선택해서 외우면 좋고 아니면 흥얼거릴 정도로 들어보세요. 그러면 음악에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돼요.“

“베토벤음악은 그의 위대함을 히틀러가 자기와 동일시하며 독일인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려고 선동의 도구로도 가장 많이 활용했던 음악가이기도 하죠? 특히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요. 런던에 있을 때 로얄패스티벌 홀에서 열리는 클레식 콘서트를 밤마다 학생표 끊어서 많이 갔거든요. 학교 기숙사가 템즈 강변에 있는 세익스피어 글로벌극장 바로 옆에 있어서 거기서 연극을 보거나 클래식 음악을 들으러 자주 갔었어요. 친구들은 펍 같은 데에 가서 즐기고 춤추는 걸 좋아하는데 저 보러 참 특이 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휘자는 주로 누구를 들으세요? 교향악단은요?”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잘 안 듣고 주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나 낼손스, 첼리비다케의 지휘를 많이 들어요.”

“카라얀 dvd를 소장하고 있는 게 몇 개있고 특별히 좋아하는 연주가 있어서 영상이 지지직거릴 때까지 많이 들었어요.”

“카라얀이 지그시 눈을 감고 지휘를 하잖아요? 그래서 봉사거나 장사꾼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어요.”

“그가 클래식 음악을 녹음해서 대중화를 시킨 공로도 있는 반면 상업적인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나서 사람들이 비꼬는 거죠? 정말 늘 지그시 눈을 감고 지휘를 많이 하더라고요.”

“눈을 감고 지휘를 하면 본인 스스로는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높일 수는 있지만 오케스트라와의 교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렇겠네요.”

“리카르도 샤이도 말러는 잘해요. 사실 말러는 누가 지휘를 해도 다 들을 만 해요. 말러가 워낙 변덕스런 면도 있고요. 트럼펫 앞을 막아 여리거나 변형된 형태로 소리를 내기도 하고 또 많은 종류의 다양한 악기들이 동원이 되서 음악이 화려하기 때문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재미가 있어요.”

“저는 말러의 심포니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특히 좋아해요. 가끔 가슴이 찌르르 슬퍼질 때 자주 들어요. 부르크너도 전 좋던데요.”

“부르크너는 어마어마하죠. 흔히 신의 음악이라고도 해요. 신앙심이 매우 깊고 신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간 작곡가였어요.”

“맞아요. 부르크너는 알려고 분석적인 지식을 동원하면 망하는 음악가 같아요. 독일의 사상가인 루돌프 슈타이너가 ”안톤 부르크너의 음악은 진리를 위한 느낌이며, 이것을 이해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다“라고 했는데 과연 부르크너 음악을 이해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싶어요. 쇼스타코비치는 정말 인상적이에요.”

“그렇죠. 쇼스타코비치는 마치 깊은 산에 핀 야생화 같아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7번, 13번은 꼭 들어볼 필요가 있어요. 음악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첼리비다케나 볼레로의 지휘로 들어보시면 좋아요.

“네. 저도 지젝이 자신의 책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과 11번에 대해 언급한 것이 매우 흥미롭더라고요.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요. 당시 소련의 살벌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가 환희에 찬 의례적 사운드로 크렘린 궁을 만족시킨 언어를 표현한 거 같지만 사실 거기에는 미묘한 고독과 풍자의 죽음으로 가득 차 있잖아요.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음악을 듣는 수 천 명의 관중과 검열관들을 열린 죽음으로 인도하며 죽음으로서 그와 음악을 듣는 이들을 진정으로 살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맞아요. 매우 의미 있는 해석이네요. 음악을 들으려면 생활이 단순하고 체력이 좋아야 해요. 음악을 듣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외워서 음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어요. 같은 곡을 들어도 지휘자 악단은 전 세계에 수만 수천이 있는데 그 판단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자기의 음악관이 분명해야 그 판단이 가능해요. 둘째는 그냥 즐기는 것이 있어요, 유행가처럼 가볍게.”

“전 다양한 지휘자의 음악을 들었는데 젊고 활력이 넘치는 야닉 네제 세갱이나 넬손스, 사이먼 래틀등이 좋더라고요. 공연실황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 각 악기의 연주모습과 지휘자와의 교감 등이 콘서트 홀 합창석에서 지휘자를 마주보며 듣는 그 감동이 고스란히 상기되는 장점도 있는 거 같아요.”

“그렇군요. 20세기에는 카라얀처럼 주로 악보를 암보해서 지휘를 많이 했어요. 레코딩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한 거였죠. 예를 들어 그 이전 시기는 암보를 하고 싶어도 레코딩 기술이 없어 콘서트현장에 가서 많이 들어야하는 한계가 있어서 그래요. 악보만 암보하는 것과 레코딩기술의 발전은 차원이 다른 암보를 가능하게 했죠.”

“그러네요. 흥미로운 사실이에요.”

“아르루트 토스카니니가 암보로 무대에 섰는데 중간에 잊어버려서 그 무대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했어요. 20세기의 안보의 대가는 첼리비다케예요. 지휘가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저 사람은 암보를 해서 지휘한다는 느낌보다 음을 만들어 내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토스카니니는 150곡이나 암보를 했다니 신도 아니고 중간에 잊을 만 하기도 하지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음지에서 예술 혼을 불태운 첼리비다케는 동양철학과 음악심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해요. 카라얀을 향해 ‘젊은 음악가에게 심각한 독이 될 수 있는 본보기’라고 독설도 서슴지 않았죠. 그런데 지휘자가 암보 또는 악보를 보고 지휘하는 것에는 서로 차이가 많죠?”

“그럼요. 악보를 보고 지휘를 하면 온전히 집중해서 정교하게 지휘가 가능해요. 사람이기에 중간에 잊을 수도 있으니 그런 부담감이 일단 없다는 것도 장점이 될 수 있죠. 그래서 21세기 지휘자들은 악보를 보는 것을 오히려 선호해요. 여러 가지 이유로요.”

 

 

 

묵호로 훌쩍 떠나 오랜만에 바닷바람을 쐬고 온 지영은 신논현역 근처에서 친구들과 저녁 모임을 가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청량리에서 원주행기차를 타야했다. 경의중앙선이 있는 왕십리역에서 청량리 행 전철을 갈아 타기위해 마지막 남은 오르막 계단을 걷고 있었다. 바로 그때 좀 더 앞서서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어느 중년여인이 지영의 눈에 들어왔다. 한쪽으로 몸의 균형이 약간 기울여졌고 다리는 약간 절고 있었다. 그 중년여인은 등산복 차림이었고 등에 멘 등산가방 안에는 둘둘 말린 태극기와 약간 펼쳐진 성조기가 무심히 꽂혀있었다. 계단을 다 올라와 전철을 기다리며 서있는 중년여인은 한참을 서있어도 열차가 오지 않자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한 기색으로 왔다갔다 반복했다. 어디선가 걸려오는 전화를 계속 받으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열차가 오지 않자 중년여인은 뒤를 돌아보며 곁에 서있던 지영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어찌 20분이 넘게 기다려도 열차가 올 생각을 안 하네요.”

“그러게요, 출퇴근 시간을 빼면 경의중앙선 열차는 좀 뜸하게 오는 거 같아요. 급하게 어디 가시나 봐요? 가방에 성조기랑 태극기가 꽂혀 있네요.”

“아 네, 경남으로 집회를 가는 버스가 지금 청량리 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제가 늦어서 출발을 못하고 있어요. 교회에서 연합으로 가요.”

“대단하시네요. 이런 휴일 날 쉬지 않으시고요.” 지영은 설사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자기 고유의 정치관을 갖고 표현하고 활동하고 사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의미 있는 고차원적인 행위’라고 평소 생각하기에 ‘다름’이나 ‘안타까운 무지’를 무턱대고 경멸하거나 멸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시에 언젠가는 수구세력이 사라지고 건강한 보수가 대한민국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가 자신의 육체를 구성하듯 무엇을 듣고 보느냐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점령하게 된다. 가까이에서 보니 중년 여인은 눈빛이 어떤 신념으로 가득했다. 그게 신앙에서 오는지 정치적 견해에서 오는지 알 수는 없었다. 지영의 부드러운 마음이 은연중에 전달이 됐는지 중년여인은 좀 뿌듯한 낯빛으로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이번 4.27남북 정상회담 때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두고 김정은과 문대통령이 손잡고 웃으면서 가볍게 왔다 갔다 하는 쇼를 보고 있으니 이 나라가 걱정 되서 집에만 있을 수가 있어요? 죄 없는 우리 박근혜 대통령은 불쌍하게 감옥에서 저러고 있지. 역사가 나중에 꼭 제대로 심판할 거예요. 그래서 경남에 가서 집회라도 참석하려고요. 예전엔 하루 일당을 육칠 만원은 받았는데 요즘은 삼사만원 밖에 못 받아요. 점심도 주고요. 학생이신가? 학생도 집회참석 하러 나와요. 오늘도 젊은 사람이 꽤 많이 가요. 교회도 안다니시면 나오시고요, 우리 교회는 영등포에 있어요.” 중년 여인은 서둘러 등산가방을 들추더니 약간 구겨진 교회예배 전단지를 건넸다. 지영은 중년여인이 건넨 전단지를 말없이 받았다. 열차가 곧 들어온다는 안내방송과 함께 지영과 중년여인은 서로 눈인사를 나누며 하던 얘기를 멈추고 열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다시 급한 듯 전화가 걸려오자 중년여인은 잠시 잊고 있던 초조함으로 다시 돌아갔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며 열차가 곧 도착한다고 연신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혔다.    

 

 

 

 

7월 하순의 햇살이 눈부시게 따갑다. 지영은 치악산 밑 부곡리에 위치한 작업실의 창으로 가까이 손에 잡힐 듯 우뚝 솟은 초록의 산들을 바라보았다. 만 가지 종류의 초록의 향연이 느껴졌다. 산 밑에 터를 잡은 작업실은 여름에 특히 좋다. 집에서 나와 오 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치악산 향로봉 쪽 입구가 나온다. 입구부터 온갖 앙증맞은 보라색 달개비 꽃들이 무릎높이에서 허리까지 지천으로 널려있고 분홍빛 물봉선화도 여기저기서 지루하지 않게 반겨준다. 산죽이 널려있는 입구를 조금 걸어가면 부곡폭포가 0.6km나 이어지는데 계곡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시원한지 맑은 계곡물 소리를 듣노라면 매일 신선이 된다. 1시간 정도 걸어서 계곡이 끝나는 데 까지 산책을 한 지영은 특히 생강나무를 좋아한다. 다양한 나무들의 싱그러운 자태를 감상하며 생강나무 가지를 조금 꺾어 맛을 보았다. 달콤하면서 쌉쌀한 생강 맛이 났다. 전화벨이 울렸다. 금희가 근처 있으니 잠깐 들린다고 연락이 왔다. 원주우산산업단지 내 업체를 방문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어차피 금요일이라 차가 막히는 시간이니 지영의 작업실에 차를 마시러 온다 해서 지영은 서둘러 집으로 내려갔다. 현관 입구 옆에 우뚝 서있는 소나무 자태를 감상하며 지영은 마당에 있는 조그만 샘물에 손을 담갔다. 더위를 좀 식히고 있으니 특유의 검고 진한 눈썹이 먼저 눈에 띄는 금희가 지영과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방안 곳곳에 걸린 지영의 작품들을 바라보다 석류 빛이 나는 빨간색 오미자냉차를 내오자 금희는 얼른 받아서 목을 축였다.

“정말 시원한데. 몸에도 좋을 거 같아. 좋은 공기마시고 나무 많은데 살아서 그런지 더 얼굴이 맑고 건강해 보여 지영아.”

“그래? 행운이야. 실제로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사실 넌 나에 대해 잘 아니까 시골에 묻혀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나를 보며 좋아 보인다고 하지. 다른 사람들은 화려한 서울생활을 버리고 너처럼 고액연봉을 포기하고 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도 못해.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말이야. 너같이 도시에서의 멋진 생활도 좋겠지만 난 아름답고 화려함 보다는 결핍이 있는 삶이 팔딱팔딱 거려서 좋아. 여담인데 어릴 때부터 난 항상 마음속으로 반 고흐 같은 삶을 부러워했었거든. 그가 자신의 귀를 자르면서 까지 자신을 지켜내고 고독과 싸우는 모습들....... 그의 처연한 열정과 가난함 이런 것들이 나에겐 무척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했었지. 난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더라고.”

“그건 사람들이 화려한 결과만 보고 그 과정의 노력이나 고통은 보지 않고 쉽게 판단을 해서 그래. 난 항상 생각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맞아, 근데 좋은 소식 있는 거야? 이번에 본부장 승진물망에 올랐다며. 축하한다. 우연히 투자파트 서 대표한테 들었어.”

“하~ 돼야 되는 거지. 힘들긴 하지만 나한텐 이 일이 잘 맞는 같아.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운이 정말 좋았어.”

“단순히 운만 좋은 건 아니지. 네가 그 운을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만든 걸 난 잘 알지. 내가 겪어 봤으니까. 웬만큼 해서 그만한 연봉을 받는 건 아니잖아. 난 항상 네가 입버릇처럼 외치던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 매우 설득력 있고 가슴에 와 닿아. 그리고 입사하자마자 너의 눈부신 활약과 겸손함은 모든 동료들에게 귀감이 되었잖아.”

“뭘.......그건 내가 사회생활 초년에 비서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 거 같아. 덕분에 윗분들 성향을 잘 알게 되었고. 내가 모시던 분들이 기업인이나 훌륭한 정치가도 계시고 해서 정말 많이 배웠어. 난 그분들의 좋은 점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을 많이 했어. 그리고 난 성장배경이 남들처럼 순탄하지 않아서 고난과 늘 함께 했으니 웬만한 일의 스트레스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든.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낸 너와는 스트레스 관리능력이나 위기대처능력이 좀 남다른 거 뿐 이지. 그리고 엄마가 어릴 때부터 나한테 욕심이 많고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없다고 가끔 한 소리 하셨거든. 내 눈이 보통 눈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ㅋㅋ

“ㅎㅎ하~ 참 개인의 성향이 천차만별이고 개성이 다 다른 게 너무 당연하지만 정말 신기하지 않아? 난 좀 둔해서 지내고 보니 집안이 좀 힘들 때도 있었는데 그런 거 전혀 몰랐고 그냥 돈 같은 것도 캐비닛 같은 곳에서 그냥 필요할 때마다 무한정 꺼내 쓰면 되는 줄 알았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집과 사무실에 놀러 가면 캐비닛이 곳곳에 엄청 많았어.” 흐흐~ 둘이서 서로를 바라보면서 빵 터졌다, 지영이 홍삼을 꿀에 절여서 말린 것을 금희에게 조금 건넸다.

“금희야, 지난번에 봤을 때는 일만하느라 그랬는지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오늘 보니 생기가 넘치네. 혈색도 좋아 보이고. 산삼이라도 먹었어?”

“에구....... 말도 마. 너도 잘 알다시피 우리일이 늘 과로해야 되잖아. 나도 어느 날 보니 대상포진에 혓바늘은 다 돋고 당뇨까지 와서 고생 심하게 했어. 그래서 요즘은 업무상 골프를 가도 무조건 걷거나 뛰고 일하다가도 알람 맞춰 놓고 스포츠센터 가서 운동 꼭 하고 다시 들어가 일하고 그래. 그렇게 노력하니까 많이 좋아지더라고. 일도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건강관리가 최고 능력이 되잖아. 나 같은 경우는 너도 잘 알지만 명예욕이 좀 많아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자. 회사에서 야유회를 가서도 재미로 카드게임이나 오징어 낚아 올리기 대회하거든. 그런 사소한 경쟁에서도 반드시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얼마 전에는 필리핀에서 회사 간부들 세미나가 있었는데 골프장에서 드라이버 멀리 날리기 대결이 있었어. 내 실력으로 감히 할 수 없는 1등을 했잖아. 나도 깜짝 놀랐어. 너도 원래 별로인 내 실력 잘 알잖아. ㅋㅋ~ 물론 여자들은 여자 티에서 겨뤘지만 말이야. 사소한 게임이라도 지고는 못살아. 오죽하면 우리엄마가 나보고 딸인데도 늘 징그럽다고 했겠어?”

“호호~그래도 넌 뭘 해도 안 얄미워. 너의 온몸에 겸손함이 자연스럽게 배어있어. 그래서 남자동료들도 널 보면 존경심마저 든다고 했거든.”

“그것도 내가 엄청나게 훈련해서 닦은 거야. 비서생활 할 때. 남들이 보기에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게 만들려고 내 자신을 얼마나 달달 볶았는데.”

“암튼 난 너 같은 캐릭터는 처음 봤어.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모든 걸 다 갖출 수가 있어? 난 나보다 대놓고 그렇게 겸손하고 일 잘하고 현명하고 사회성 있고 리더십까지 갖춘 네가 도저히 넘사벽이라 의욕이 안 나더라고. ㅎ~난 일에 대한 기복이 있고 사회성도 별로잖아.”

“호홋~ 보기에만 그렇지. 난 정말 나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쪼면서 사는 것 같아. 잠시도 내 자신을 편하게 내버려두질 않거든. 난 내 모습이 물위에 뜬 오리 같아. 남들 보기에 우아해 보이지만 매 순간 매초를 남들이 보지 않는 물밑에선 오리발을 휘젓느라 늘 정신이 없거든. 난 네가 정말 부러운데.......지영이 넌 네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자기의사를 적극적으로 남 눈치 안보며 표현하고 살잖아. 난 반대야. 어떻게 보면 돈 버는 기계 같아. 내가 남편연봉의 5배를 버니까 남편이 직장을 그만 두더라고. 요즘은 초등학교 딸 골프선수 시킨다고 돈만 펑펑 쓰고 다녀. 골프꿈나무를 키우는 건지 아니면 자기 딸 핑계로 한량처럼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골프를 실컷 즐기러 다니는지 알 수가 없어.”

“하하 그러니? 설마......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산층의 뿌리가 다들 부동산 투기 부자들이잖아. 그런데 너처럼 능력껏 노력하고 실력으로 버는데 얼마나 대단하니?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요즘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 다 돈과 관련된 것이 많아서 너무 안타까워. 그 놈의 돈이 뭐 길래. 남여사이도 사회에서도 만나서 제일먼저 탐색하는 게 결국엔 경제적인 부분이잖아. 아예 대놓고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서슴지도 않고. 스스로도 속물근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자본주의사회에서 당연하거 아니냐고 오히려 당당하잖아. 내가 회사에서 일할 때도 다들 잘나가는 기업가들이니 뭐가 부러울까 싶잖아.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런데 실제로는 안 그렇더라고. 내가 관리하던 회사 중 가발제조업체인데 순이익이 매년 안정적으로 몇 십 억대야. 개인 빌딩도 선릉역 근처에 두개나 있어서 그분 개인 현금자산 중 일부와 기업유보금중 일부를 내가 유치해왔는데 그 회장님은 연세도 좀 있으셨지만 무척 점잖으신 분이셨어. 그런데 어느 날 나와 대화도중 무심결에 그분이 몇 천억 대 부자가 정말 부럽다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깜짝 놀라서 말도 안 된다고 했더니 그 분이 자기는 몇 백 억대 부자밖에 안 된다는 거지. 난 정말 그 이유가 궁금해서 여쭤보니 희미하게 웃으시며 대답을 회피하셨어. 저렇게 많은 자산과 넓은 집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데 몇 천억 대 자산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부러우실까? 나에겐 숙제로 남았지. 결국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부의 액수에 비례한 사람들의 관심과 존경, 복종, 부의 권력 이런 것이었어. 이정도 가져도 이렇게 가족들과 사람들의 부러움과 대우를 받는데 그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면 자신의 현재보다 더한 몇 십 몇 백배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은 거지.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그 종말이 뭔지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재벌 3세의 작태잖아. 재벌 3세들의 전횡을 봐봐. 삼 사 십대 재벌 3세들이 머리하얀 회사에 몇 십 년간 충성해온 사장 급들에게 무릎 꿀리고 골프채까지 휘두른다지. 일상이 욕이고 악을 쓰고. 인간의 욕망이 적절히 정신적인 가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결국에는 인간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지.”

“그러게....... 그래서 지영이 너 같은 예술가가 필요한 거 아니니? 세상 사람들이 나처럼 죄다 돈에 미쳐 돈돈하고 살아봐. 세상을 어떻게 단 하루하도 살 수가 있겠어. 너 같이 산소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있어서 그나마 세상이 굴러가는 거지. 물질에 어느 정도 초연하고 당당한 존재들이 뿌려놓은 가치들이 이 세상을 환기도 시켜줘야지.”

“사람이 어떤 정점에 가보는 건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거 같아. 예를 들면 부와 가난. 이런 거를 충분히 누리거나 겪어보지 못하면 평생 부자를 부러워하며 진정한 부가 뭔지를 모르고 물질을 항상 동경하는 부질없는 삶을 살게 되고, 반대로 가난을 진정으로 겪어보지 못하면 그들을 멸시하고 깊은 공감을 못하고 가난이나 고난이 주는 힘도 느껴보지 못하잖아. 학문도 어중간하면 상대의 말의 깊이를 느낄 수도 제대로 판단도 할 수 없고 들어도 귀머거리고 보아도 까막눈이잖아. 사실 요즘은 귀머거리 까막눈보다는 어중간한 난독증이나 사이비 지식인들, 이데올로그들의 전횡이 더 무섭기는 하지만. 사업가 아버지 덕분에 오르락내리락 삶을 산 것도 돌이켜보니 의미가 있었고 너처럼 훌륭한 친구덕분에 좋은 클리나멘도 하니 이 얼마나 행운이야? 자본주의에서 일부러 돈을 경멸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다 돈만 쫓는 맹목적이고 속물근성이 넘치는 사회에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네 말대로 의미가 있어. 무엇보다 정말 신중한 자기 경제관을 갖는 것도 중요하고.”

“맞아. 내가 입사하기 전에 넌 나의 롤 모델 이였어. 그런 네가 그렇게 관둘지는 몰랐어. 물론 네가 좋아하는 일하면서 지내는 지금모습이 훨씬 좋아 보이긴 하지만. 울타리 없는 세상에서 맘껏 뛰어노는 사슴처럼 말이야.”

“ㅎㅎ~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마음이 여유롭게 사는 지금이 좋아. 타인의 목소리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더구나 세상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는 주변인들....... 있어도 잘 보이지 않고 목소리를 내도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사람들. 사실 그러면서 내가 정신적 위로를 많이 받았고 몸도 마음도 많이 건강해 졌거든. 예술가들의 성향이 전위적인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거 이전에 사람과 삶에 대한 따듯한 공감과 관심이 아닌가 싶어. 사람이 예민해지고 뭔가를 꽤 뚫어 보면 괴로움이 많아. 눈에 안 보이는 것도 보게 되고 들리지 않은 목소리도 듣게 되니까. 물론 내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닌데....... 그런 말이 이상하게 요즘 공감이 되더라고. 꿈이나 환상 같은 것도 잘 들여다보면 자신의 내면을 깊이 알 수가 있어. 그게 예지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집착하는 이유가 자기가 모르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게 결국에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고 하니 예언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되는 거지.”

 

 

 

한 달에 한번 주말이면 서울에서 크로키 팀이 내려와 지영의 작업실에서 누드크로키를 한다. 모델도 서울에서 같이 내려와 두 시간 정도 집중해서 크로키를 마치면 음식도 해먹고 마당에서는 겨울이면 모닥불도 지피고 평소에는 바비큐도 열린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지영의 사촌으로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린 최호오빠의 절친 G가 크로키 멤버여서 인연이 됐다. 다양한 직업의 각자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어서 저녁을 먹고 토론이라도 벌어지면 밤을 꼬박 새우게 된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서 차가 막히기 전에 간다고 다들 세수도 못하고 눈 비비며 서울로 쏜살 같이 떠나버린다. 벌써 십년가까이 얼굴을 보니 이제는 가족처럼 서로 친하고 자연스럽게 속내를 잘 알게 되었다.

오랜 만에 전시회 일정으로 서울 나들이를 한 지영은 크로키 멤버인 G를 역삼동 언덕이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카페에 먼저 도착한 지영은 정원이 예뻐서 카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잔디밭을 거닐었다. 나무들과 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G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약간 팔자걸음을 한 G가 굳은 표정으로 걸어오다가 지영을 보자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지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G는 어릴 때 추억이 생각이나, 지영이의 하늘거리는 드레이프 풍 원 숄더의 검정색 원피스를 보자마자 가까이 다가가서 치마를 살짝 쳐드는 시늉을 했다.

“못됐어!”

“하하하! 미안”

“초등 때 학교에서 놀고 있으면 훼방 놓고 도망치는 개구쟁이 녀석들하고 똑같아!”

“아~ 그래가지고 내가 몰표 나와서 반장됐잖아. 내가 그런 애들 그땐 다 막아 줬거든.”

지영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눈을 흘기자 G는 웃으면서 안으로 안내하며 편백나무 향이 나는 테라스 정원이 있는 카페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둘은 창가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앙증맞은 연보랏빛 꽃들과 장미과 조팝나무인 하얀 설유화가 조화롭게 핀 뜰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G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아왔다. 둘은 빨대로 조각얼음을 빙글빙글 돌리며 커피 색상과 꽃들을 이리저리 감상하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두서없이 하다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영이 먼저 뭔가 생각난 듯 얘기를 했다.

“하기야 아버지가 경찰이셨으니 얼마나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을 겪으며 막내아들에게 인생의 많은 노하우를 전수해 주셨을까?”

“다른 건 모르겠고 아버지와 함께 나살던 부산에 있는 서면을 나갔는데, 그 뒷길에 양아치들 많거든. 구루마 같은 거로 팔고 하는....... 아버지랑 같이 나들이하면 아버지한테 ‘아이고 형님 나오셨습니까?’ 인사를 꾸벅꾸벅 하면 어린마음에 우쭐했지.”

“아버지도 설마 양아치? 흐흐흐~ 미안, 농담이에요.”

“아니지 아버지는 거기를 다 관리하는 사람이었던 거지. 내가 깜짝 놀랐지. 아버지 저 아저씨들이 왜 아버지한테 인사하는 거예요? 물으니, 아버지가 저 새끼들 내가 감옥소에 다 넣으려다 참았다. 하하하~”

“우리 아버지는 사업을 하셔서 제 눈엔 항상 멋진 지휘관 같으셨는데 그런 것만 나한테 전수해 주셨나?”

“내가 언젠가 지영의 작업실 마당에서 인간의 정의가 뭐라고 얘기 한 거 생각나?

“갑자기 생뚱맞게....... 뭐라고 했는데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렇지. 불완전하다는 의미를 조금 더 내가 보충한다면 인간은 비논리적인 종교와 이성적인 논리를 동시에 갖고 있는 동물이야. 비논리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인간은 별 수 없는 그냥 알고 보면 동물이라는 거지. 예쁜 여자 보면 발딱 서고, 근데 그게 나쁜 거야? 아니야 인간이 갖고 있는 인자일 뿐이야. 그런데 그런 걸 가지고 이러면 안 된다 등등 의견이 갈리는데 왜 인간을 퍼팩트 하게 만들려고 해? 아니야? 아침에 일어나면 발기해 있는 게 인간이야.”

“그럼 여자는?”

“여자도 마찬가지지 그냥 인간 아니야? 좀 더 잘나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완벽한 걸 요구할 필요가 없어. 예쁜 여자가 여성 인권 운동하는 거 봤어? 못 봤어.”

“봤어요. 제 눈엔 다 예쁘던데요. 못생긴 여자만 여성인권 운동을 한다? 그럼 잘생긴 남자는?”

“잘생긴 남자는 다 힘이 있고 잘살고 있기 때문에 못생긴 남자들이 꼼짝 못해.”

“잘생긴 남자는 힘이 있고 못생긴 남자는 힘이 없다? 말이 안 되는 거 아시죠? 그리고 예쁜 여자는 힘이 없고, 못생긴 여자는 힘이 있다는 얘기예요?

“아니지, 예쁜 여자들은 다 남자 품에서 잘 살고 있거든. 내 얘기는 남자와 여자는 그냥 다른 존재라는 것이야. 남자와 돌고래처럼.”

“아, 여자와 거미의 차이요? 요즘 직장에서 선배가 상사한테 많이 치였나보네. 갑자기 남자여자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시고. 남자들은 어디서 당한 거 그런 식으로 풀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지 모르겠어요. 암튼 그 남자도 결국 돌고래에서 나왔으니 결론은 같네요. 여성인권운동으로 불과 지난 몇 십 년 만에 여성인권이 많이 신장한 것도 사실 아니 예요?

“그래가지고 올려놓고 여자들한테 다 투표권을 줬더니만 여자들이 반 정도는 저 새끼가 잘생겼느니 못생겼느니 투표를 하니 마니 그 타령을 하고 있어요.”

“그래요? 전 처음 듣는 얘기네요.”

“내 생각에 반은 그래요.”

“못 봤는데......”

“지영이가 안 그렇다고 있잖아 대부분이 다 안 그런 게 아니 예요.”

“전 솔직히 잘생긴 남자한테 별로 관심 없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안 돼. 우리한테 옛날에 얘기 한 게 있어. 내 친구이기도한 지영의 사촌 최호오빠도 같이 있었잖아”

“그냥 여러 가지 조건 중에 하나 갖췄으면 하는 거지 솔직히 잘생긴 남자보다는 좀 매력이 있고 철학이 있고 이런 남자가 낫지 않아요?”

“봐봐~ 옛날에 수영선수 금마 멋지다고.”

“언제요? 누구누구??

“그 담에 골프코치 멋지다고 다 자기 입으로 그랬었어.”

지영은 멋쩍은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쪽 검지 손으로 머리를 계속 꼬며 대답을 했다 “그게 뭐요? 그냥 거기서 끝인 거죠.”

“봐~, 거기서 성장을 한 거야.”

“뭔 성장이요?”

“정신적으로. 근데 그렇게 안하는 여자들이 태반이야. 그라고 끝이야. 그라고 유증민이가 못생겼다고 표 안 찍어.”

“유증민이 뭐 못 생긴 건 아니죠. 못생겼어요?

“아니야, 가족모임 때 식구들한테 내가 물어봤거든. 꼴배기 싫데.”

“못생겨서요?”

“어! 남자가 무슨 그렇게 쪽 제비 같이 생겼냐고.”

지영이 한참을 어이없이 웃었다.

“그니까. 유증민이 얘기 하는 거는 관심이 없어. 그냥 쳐다보면 기분 나쁘데. 그런 남자 대통령되면 안된데.

“그런 분도 있구나!”

“반 넘어요!”

“설마, 무슨?”

“그래서 내가 조금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여자들은 투표권을 안줘도 된다고 생각해. 그런 여자가 너무 많아.”

지영이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정색을 하며

“여보세요! 많이 난감하네요!”

“그래서 그런 거 까지도 안을 수 있는 잘생긴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G는 통쾌한 듯 박장대소를 하고서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살짝 눈치를 살피며 조용해진다.

“문대통령!”

“문대통령은 잘 생긴 건 아냐.”

“괜찮죠, 그 정도면.”

“발음이 새요. 말도 가끔 어눌하고요”

“논어에도 나오잖아요. 얼굴 낯빛을 환하게 꾸미고 말을 요리조리 잘하는 교언영색 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 한명도 없다고.”

“누가 눈웃음치래?”

“내면에서 우러나온 따듯함과 눈웃음도 구별 못해요? 여성들만 탓할게 아니라 남자들 책임도 있는 거 아니 예요? 결혼하는 순간 여자들은 가사 일에다 자녀 돌보랴 시댁 챙기랴. 남편들은 늦게 들어오지, 그러니 아내들은 드라마나 보고요.”

“언제 누가 드라마 보라고 했는가?”

“솔직히 여자들만 탓할 것도 아니죠. 다 남편들이 아내들을 방치만 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아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남자들은 보고 듣는 게 많아 늘 생각에 발전이 있지만 여자들은 활동범위나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어서 변화라든가 자아성찰이 쉽지 않잖아요. 저 같으면 투표권이 어쩌고저쩌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보다는 같이 손잡고 주말 같은 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그런 거 옆에 끼고 유적지라도 돌아보겠어요. 자연과 함께 오감이 활발하게 자극받고 숨 쉬고, 살아있는 역사도 같이 깨우치고요. 얼마나 외롭고 공허하면 드라마보고, 낮잠 자고, 급기야는 우울증에 빠지고 그러겠어요?”

“예쁜 애는 그래도 돼. 못생긴 애가 그러고 있으면 때려죽이고 싶지.”

“아니?...... 무슨 개그콘서트 대사 같아. 웃기려고 그러는 거죠? 이건 단지 남자와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는 거의 자식이 있잖아요. 그 부모의 철학과 행동이 자식한테 다 고스란히 영향을 미칠 텐데, 남편은 그런 아내가 있으면 절대 방치를 하면 안 되잖아요.”

“그니까 남자들이 얼마나 힘들어? 다 관리하고 챙겨야 돼.”

“남자는 그 대신 한 달에 한 번씩 마술에 안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열정과 에너지를 아내에게 쏟아야지. 얼마나 불쌍해요 여자들은. 뭘 흘겨봐요! 맞는 얘기지.”

“몰라! 좌우지간 웃긴 거야. 이래 얘기 하면 안 되지만 여자들은 투표권을 다 뺏어야해.”

“워워~ 장난이죠? 갈수록 위험한 남자네. 집안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 예요? 누구를 증오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거나?

“어떻게 알았지? 죽을 맛인데. 요즘 집안이 쑥대밭이야. 처남이 애초에 딴 살림 차린 것도 잘못이지만 두 부부가 같이 가관도 아녀요. 요즘 소송이 붙어서 나만 이리저리 신경 쓰고 죽어나거든. 양쪽 집안이 좀 대단해? 무슨 이혼소송가지고 상대가 김앤장에 의뢰해서 붙었지 뭐야? 젠장. 내가 볼 때 아까 반이라고 했지? 40프로는 돼. 주위에 한번 다 물어봐.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 찍었나 한번 물어봐.”

“기회 되면 한번 물어볼게요.”

“그 이유를 들어봐야 해.”

“근데 박그네 효과 때문에 거의 다 문 대통령을 얘기하지 않을까요?”

“그니까 왜 찍었나 한번 물어봐요. 그담에 왜 딴 후보는 안 찍었나 물어봐.

“알겠어요. 누구 찍었어요?

“유증민!” 가장 논리적이야. 그니까 기본기가 서있는 사람이야.

“그게 다예요?”

“그럼 대한민국의 정치하는 사람이 기본이 제대로 서있으면 되지 뭐가 필요해? 디테일 한건 있잖아, 전문가들이 하면 돼.”

“심석정은 어떻게 생각해요?“

“심석정은 나한테 걸렸으면 박살났을 거야. 세상을 퍼팩트 하게 만들려고 자꾸 달려드는 여자야. 아니라니까! 인간세상은 퍼팩트하지 않아! 심석정 얘기로 하자면 정말로 있잖아, 아무 짓도 안하고 노는 사람들도 다 먹여 살려 줘야해. 그럼 죽어라고 일하는 사람들은 뭐야?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길 하고 있어. 알다시피 내가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선 사람이야. 투자회사가 자본주의 최첨단이야! 제일 앞이야. 여기 끝에서 저기 끝까지 내가 다 가본 사람이야. 잘 생각을 해야 해. 단지 기업들이 갖고 있는 서로 준비한 약정이 뭐냐면 100을 팔아가지고 30이 남으면 비정규직을 정규직 다해줘. 근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경쟁력이 100팔아가지고 5를 남긴다니까. 그런데 비정규직을 정규직 시켜가지고 국민연금에 의료보험 들어주고 뭐 들어주고 뭐 들어주고 비용을 회사가 다 해줘. 그럼 회사가 망하란 얘기야.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정규직까지 없어져야해. 대한민국의 경쟁력이 약한 나라라니까.”

“그건 대기업들이 늘 상 하는 얘기고요.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현금 유보금 쌓아놓고 낙수 효과 이런 거 안 하잖아요. 옛날 조선시대에도 마름이란 게 있었잖아요. 갑자기 생각나네요. 기업의 입장에서 늘상 그들이 원하는 리포트나 써주는 애널리스트 출신 아니랄까봐.......ㅎ너무 염두에 두진마시고요.” 지영은 슬쩍 웃으며 G를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럼 생각하는 어떤 대안이 있으세요?”

“정말로 기초과학이나 소재과학 이런 거를 키워야지. 그래가지고 국가 전체 부가가치를 키워야 돼. 내가 스칸디나비아 3국을 갖다 왔잖아. 그 나라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대? 돈을 많이 버니까 그 사람들이 세금을 많이 내고도 소비도하고 먹고 살 수 있는 거야. 왜? 산업이 부가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런 산업들을 만들 생각을 해야지.”

“그래서 예를 들면 그런 부가가치 있는 산업을 키워서 탄탄하게 해놓고 여력이 되면 그때 비정규직 정규직 없이 다 똑같이 정규직해도 된다는 얘기요?”

“쉽게 얘기해줄게 ‘김복남 포장마차가 한 달 동안 장사를 해서 30프로 남는다’ 그러면은 알바생 쓰는데 부담을 느끼겠어, 안 느끼겠어?”

“안 느끼죠.”

“근데 지금은 부담을 느끼겠어, 안 느끼겠어?

“느끼죠, 경쟁도 치열하고. 또 무슨 백종웬 같은 인물이TV에서 인기몰이하고 골목상권도 싹쓸이 하는 것도 안 좋아 보여요. 중소도시에도 이마트 같은 거 어마어마한 규모로 하나만 들어오면 재래시장 쪽에서 장사하는 가정들은 해체되고 이혼하는 부부도 많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누가 재래시장이나 골목상권 살린다고 비 오는 날 일부러 우산 쓰고 현금 챙겨서 일일이 장 보러 다니지 않잖아요. 생각 있는 시장과 성숙한 지역주민들의 합의하에 ‘지역 화폐’ 같은 걸로 활성화시켜서 불편해도 구조적으로 지원을 하지 않는 한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꽤 뚫고 생각이 있는 사람도 ‘편리함’ 때문에 재래시장 이용 같은 것이 ‘실천’이 안되는 게 사실이고요. 그니까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고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30프로 정도 이익이 남는다면 그때 가서 정규직 고용이 다 가능하다는 얘기예요?”

“나라가 이만큼 벌어들이는 법파가 되면 다 정규직 시켜주지 왜 안 시켜주겠어. 힘들어서 안 시켜주는 거야, 힘들어서. 그 담에 노조들이 난리를 쳐서. 노조도 틀린 거야. 왜냐하면 직장폐쇄하면 다 집에 가야된다니까.”

“한 총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민노총도 아주 문제가 없다고 할 순 없죠.”

“물론 내가 얘기한 게 다 잘했다는 게 아냐. 잘못얘기 한 것도 많아.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노동자들이 있잖아 쉽게 말하면 이런 거야. 우리가 현상들을 잘 봐야해. 100명중에 80명이 열라 열심히 해. 50명중 40명이 대청소하면 열심히 바닥 닦고 청소해 10명은 뭐하냐? 놀아. 맞지? 10명 노는 놈 까지 다 먹여 살리자는데 심석정이야. 그건 틀린 얘기야.”

“하지만 인간은 개성과 능력이 다 달라요. 그리고 만약 자식 중에 장애로 태어난 자녀가 있다면 그렇게 똑같은 말씀하실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노는 10명중 한명의 창의적인 천재가 세상을 먹여 살릴지 어떻게 알아요?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 환경적응론인데 사회학자 스펜서가 인간 사회에도 자연 진화론을 대입시켜 ‘인간 진화론’을 주장한 것이 ‘우생학’으로 빠져 결국 나치와 같은 파시스트들과 그걸 묵인한 독일 국민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열등한 인간들을 제거해서 순수한 혈통만 남기고 죽여야 한다는 것과 궁극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을까싶네요. 더구나 점점 AI(인공지능)가 모든 걸 대신하는 앞으로의 세계는 더욱 그렇고요. 자신의 눈높이에서 왜 못하냐고 상대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일반사람들의 성향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 저 놈이 잘산다고 해서 내도 똑같이 잘 먹고 잘살아야한다고 왜 생각을 해? 그러고 돈 없다 소리한다고. 그건 아니 다는 거지.”

“하지만 똑같이 H사 공장에서 일하는데 앞바퀴노동자는 정규직이라 연봉 1억을 받아요. 뒤쪽 바퀴를 끼우는 노동자는 비정규직이여서 겨우 월150만 원 정도 받는다면?”

“정규직이 너무 많이 받아가서 비정규직이 생긴 거야. 정규직을 없애야지.

“정규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정규직노조의 이익만 찾는 일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권익만 내세우고 심지어 비정규직은 노조에 가입도 안 시켜주잖아요.”

“홍이 하는 얘기가 그거 아냐? 강경노조 없애야 한다고. H자동차 노조가 파업하면 안 돼. 연봉1억씩 받는데 무슨 파업을 해? 그러고 수당 더 올려 달래. 집단 이기주의가 우리나라는 너무 커. 딴 세대가 죽는 건 아무 상관 안 해.”

“그건 분명히 문제가 있죠. 그런 구조는 바꿔야하죠. 보이는 것과 달리 그 이면에 기업에서 조장하는 것도 있고요. 그니까 싸잡아서 정규직 비정규직 이분화 시킬게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서 개선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중견기업이상 대기업 같은 큰 업체 오너들을 대하다 보면 느끼는 게 많아.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어떤 면에서요?”

“저렇게 생각을 하고 사니까 저만큼 재산이 생겼구나하고 생각을 해. 보통사람들이 아니야.”

“재벌 3세들은 완전 생각이 없고요?”

“그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불합리하거나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없었어요?

“그런 것들보다는 오너와 노동자의 차이는 직원들은 내만큼 고민을 안 하다는 거야. 자기만큼 고민을 안 하는 거지, 결국은 자기가 고민을 제일 많이 한다는 거야. 직원들이 잘 때 자기는 일어나서 고민하고 앉아있다니까.”

“그건 당연하고요. 그것도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체에나 해당되지. 대기업은 직원이나 임원이 일을 다 하는 구조고요. 대기업회장이나 재벌3세 중에 이 나라에서 속내를 알고 보면 제대로 된 사람거의 없잖아요. 아니아 항공보세요. 회장이 한 달에 한번 시찰 나가면 직원들이 울면서 안겨야하는 단체 리허설까지 하고 사내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요. 큰 업체 오너들과 자기철학이라든가 하는 사담을 잘 안 나누죠? 워낙 비즈니스로만 만나니까요.”

“개인적인 철학은 얘기할게 없는 게 노는 놈이 가난한건 당연하거 아냐? 부지런한 놈이 가난한건 고쳐야해. 근데 게으른 놈이 가난하게 사는 걸 그걸 왜 고쳐?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인간은 뭐야? 논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인 종교를 갖고 있는 동물이야. 동물의 세계를 한번 봐봐. 진짜 삐구리 같은 동물들이 있어. 평생 삐구리처럼 살다 죽어. 그거도 한 번 못하고 죽어.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야. ‘인간의 존엄성’이란 말을 갖다가 붙이는 바람에 일이 복잡하게 된 거야, 지금. 그냥 최저 생계비로 밥 먹고 살게 해주면 되는 거야. 기본소득은 무슨. 그냥 동물의 세계에서도 겨우 먹고 살다가 죽어. 동물의 세계에서는 좀 있다 바로 죽어버려. 그렇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도움을 준거라니까. 딸리면 그냥 딸린 대로 사는 거야. 왜 자기 머리가 모자란 걸 탓 안 해?”

“말씀하신 삐구리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아감벤이 말한 호모사케르도 끌어안는 게 진정한 정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출산율도 늘리면서 노인복지와 특히 청년층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죠.”

“인구수는 안 많아도 돼. 그건 잘 못 생각한 거야. 틀린 산수야. 한명이 노인 20명분을 벌면 되잖아. 20배를 벌면 되잖아. 고부가가치 산업을 해야 한다고 이 사람아.”

“좋은 얘기지만 너무 이상적이죠. 수익 잘나는 공기업을 지난 십년간 보수 정권에서 많은 부문을 민영화 시키고, 사실 이 같은 불경기에도 공기업 흑자는 어마어마하잖아요. 정치가 근본적인 역할을 잘해주고 구조적인 장치도 제대로 만들어 삽질 안했으면, 지금 메르켈의 독일정도는 대한민국도 살아야 정상이죠. 실제로 그런 분석도 나왔었잖아요. 생각 없이 치열한 노력을 안 하는 바보들이라서 수익률이 5프로 정도밖에 영업이익을 못 내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지금 고부가가치 산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맨 날 죽겠다 하면서 7프로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난리가 나잖아요. 0.5~0,1프로 정도 떨어지는데요. 근데 경제란 확장기도 있지만 어떤 산업도 계속해서 고성장만을 할 수는 없어요. 아무리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재화는 계속 넘쳐나지만 소화하는 인구수가 한정이 되어있고 수용할 수 있는 산업도 시절에 따른 한계가 있고요.”

“걱정하지마세요. 인구가 다 줄어요. 할배들 다 돌아가셔요. 우리가 인구 오천 만 명이 꼭 유지되어야할 이유가 어딨어? 뭐하게? 근본을 생각해야 해요. 한사람이 얼마를 번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자꾸 생각을 하면 안 돼. 한 사람이 세 배를 벌면 되잖아. 그거를 위해서 국가가 해야 하는 작업들이 많다니까. 그래서 기초산업이나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워서 전체 파이를 키워서 나눠먹자고 하는 거 아냐? 그래 쓰잘 대 없이 쌀농사 짖지 말고.”

“어엉.......? 에너지산업과 먹거리. 특히 주식은 국가가 지원을 해서 철저히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아요? 국가차원의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수입식품 GMO에 대한 ‘완전표기제’도 실시해야 하고요. 지금 농촌은 토종 씨는 찾아볼 수 없고, 매년 씨앗을 다시 사야하는 GMO가 다 장악해서 문제가 심각해요. 우리 몸이 유전자 조작식품 섭취로 낯선 성분이나 독소로 가득 채워져서 면역반응을 동원하느라 간과 면역기능이 혹사당하고 최근주변에 암 환자가 너무 빈번하게 발생해서 매우 의아하고 그 폐해가 심각한 것이 피부로 느껴지거든요.”

“유전자 조작식품(GMO)은 섭취를 줄여하 해. 하지만 핀란드 가서 소고기 먹어봤어? 스웨덴은 소를 안 키워. 개 네는 다른 거 수입해서 먹고 살지. 생선이랑 고기도 싼데서 수입해서 먹고살고. 청정구역에서 키운 소만 수입을 한다니까. 자급률이 뭐 그리 중요해? 싼데서 수입해서 먹지.”

“그래서 어느 시기에 글로벌 농업회사에서 단가를 확 높이면 어떻게 돼요? 수입에만 의존해서 농지는 다 없어졌고요. 공장에서 당장 막 찍어 낼 수 없는 식량은 환경과 세월이 필요한데, 더군다나 글로벌 농업회사는 대개 미국 등 최강대국이라 협상에서도 늘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 같은 약소국은 그 불합리를 다 떠안는 구조잖아요. 지금현재도 우리식탁에는 고독성 제초제를 뿌려도 죽지 않는 GMO 콩, 고추, 감자 등으로 만든 두부, 식용유, 고추장, 된장, 간장 등이 다 점령하고 있어서 심각하게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데요.”

“소 안 먹어도 살아요.”

“그거 말고 쌀은요? 밀 값도 높이고.”

“쌀이 왜 높아지지? 쌀 생산하는데 버글버글 해.”

“아니 어느 국가가 항상 쌀만 고정해서 생산해요? 그 나라도 고부가가치 산업을 안 하고 계속 가난만 하라는 법이 있어요? 그리고 가난한 국가일수록 사실 글로벌 농업기업이 이미 다 접수해서 운영하거나 정부 뒤에서 조정하는 실질 운영 주체잖아요. 콩고를 비롯한 아프리카와 남미 등의 실질거 대농장들 운영주체를 보면 알 수 있죠.”

“그 정도 조절할 정도는 된다. 전 세계에서. 걱정 안 해도 돼요. 경쟁력 없는 한우. 소한마리가 차 한 대 값되는 그런 나라가 어디 있어? 그런 소를 왜 키우지? 미쳤지.”

“소 대신 콩이나 두부를 먹으면 그만이고 생존을 위협하는 쌀과 밀 등 주식물과 바른 먹거리에 대해서 얘기 하는 거예요.”

 

 

 

가을에 있을 전시회준비로 지영은 며칠째 과로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오전, 오후 하루 종일 페인팅 작업에만 열중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오랜만에 머리도 식힐 겸 집근처 계곡에 올라가 넓은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원한 물소리와 맑은 공기가 그간의 피로를 씻어 주었다. 멀지않은 곳의 바위 틈새에서 커다랗게 피어난 두 개의 원추리 꽃이 바위들과 선명하게 대비가 되어 지영의 눈에 들어왔다. 지천으로 바위만 있는 환경에서 어떻게 저런 힘든 환경을 뚫고 꽃까지 피웠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고난을 온몸으로 이긴 긍정과 열정의 당당함이 시들어 가는 낙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빛났다. 그러고 둘러보니 근처 곳곳의 바위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아 고귀한 자태를 뽐내는 저 노송들도 어찌 하루아침에 컸겠는가.

내려오는 길에는 상큼한 숲의 향기가 지영의 온몸에 스며들었고 가슴가득 더한 활력을 얻었다. 푹신한 흙을 밟을 때 마다 지영의 마음이 끝없이 보드랍고 포근해졌다. 앙증맞은 길동무인 갓버섯과 계란버섯도 수줍게 고개를 살짝 내민다. 어느새 집 앞 입구에 다다르니 멀리 산들의 들쑥날쑥한 능선들이 층층이 겹겹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살짝 가늘게 뜬 눈으로 길게 바라보니 희로애락 주기율표같이 일정한 패턴으로 오르락내리락 정신이 없는 것이 삶의 모습들과 비슷해보였다. 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작업실로 사뿐히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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