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간 글쓰기 주제로 택해진 '자기 자신보다도 진리를 더 사랑하여야 하며, 진리보다도 타자를 더 사랑하여야 한다'로 써보았습니다. 니체와 노마디즘을 공부하는 중이어서 결론이... ㅎㅎ
자기 자신보다도 진리를 더 사랑하여야 하며, 진리보다도 타자들을 더 사랑하여야 한다.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여야 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있었다. 진리는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므로 그 자체로 내재적인 명증성을 가져야 한다던가, 진리의 관념이 그에 대응하는 실재에 부합하느냐가 참, 거짓을 결정한다던가, 형식적으로 모순이 없는 판단체계이면 진리라던가 하는 등이다. 진리라는 것을 얻기 위한 철학자들의 고군분투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진리를 찾다가 포기해버린 그리스의 회의주의자들도 있었고, 명석 판명한 진리를 찾기 위해 의심을 방법적으로 사용한 데카르트는 자기만의 진리를 결국 찾고야 말았다. 근대에는 과학자들이 진리의 대변자로 등장하였다. 실험과 검증의 방법으로 도출된 자연의 법칙은 근대 이후 신학과 철학 대신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과학의 방식은 학문의 도처에서 사용되었고, 과학적 분석방법을 이용하기만 하면 너도나도 진리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소위 현대과학이라고 하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본 결과 우리는 과학이 자체의 합리성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학을 진리라고 말하기가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철학자들은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떤 가치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진리를 이성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가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 종(種)에게 있어 필수 불가결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이성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이다. 쌩떽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에서는 ‘인간을 위한 진리는 인간을 하나의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땅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오렌지나무가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는다면, 이 땅이 바로 오렌지 나무들의 진리이다. 이 종교, 이 문화, 이 가치척도가 인간을 충실하게 한다면 이 가치척도, 이 문화가 바로 인간의 진리’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삶의 과정은 생존의 과정이었고, 필요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면서 자신의 가치체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내 존재가 이미 타자들로 가득 차 있다. 신체는 셀 수 없이 많은 세포나 조직들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실제로 내 신체의 세포나 조직들 하나하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것들이 무생물이 아님에도, 살아서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나는 나의 정신을 잠시 동안도 지배하지 못한다. 생각은 멈추어지지 않고 분노의 감정은 아무리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 타인들과 의사소통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엄연히 나는 내 친구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나는 내 주변의 공기와도 소통하고, 물과도 땅과도 지금 글을 쓸 때에는 노트북과도 소통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진리는 타자들의 구성체인 인간존재, 타자들로 가득 차 있는 사회에서 형성된 가치체계일 것이다. 이미 진리는 타자들로만 구성될 수밖에 없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판단, 공동체의 진리는 그 시공간에서 구성되는 것일 뿐이다.
나 자신보다 진리를 사랑하여야 하고, 진리보다 타자들을 더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당위나 명령이라기 보다는, 진리라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타자들로 가득 차 있음을 이해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1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