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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_1학기 인사원_불온한 페미니즘_기말 에세이

 

효영

 

 

 

 

서로의 이야기의 부분으로서의 행위자들(actants)이 함께 살기

-매킨타이어의 ‘통일된 이야기의 주체’와 해러웨이의 ‘중요한 타자성’ 개념 비교를 중심으로-

 

 

[요약]

정의의 문제를 대중화시켰던 마이클 샌델(M. J. Sandel)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각자가 서사적 존재, narrative-being이자 storytelling-being이다. 하나의 이야기의 구성으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알래스테어 맥킨타이어(A. MacIntyre) 역시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의 주체인 동시에 서로의 이야기의 일부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이 둘은 마이클 왈저(M. Walzer), 찰스 테일러(C. M. Taylor)와 함께 개인주의ㆍ자유주의에 기반한 영미전통에 반하여, 공동체 내의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모색했던 이른바 ‘공동체주의의 4인방’으로 불린다. 우리는 미국 태생의 백인 여성 과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다나 해러웨이(D. Haraway)에게서 역시 이야기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해러웨이는 우리가 우리의 기관, 세포, 유전자, 분자 안의 사회적ㆍ문화적 축적물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집을 짓고 사는 캘리포니아 땅이 원주민인 나바호족으로부터 강탈한 것임을 기억하고, 원주민들이 키우던 양을 몰아내고 호주와 미동부에서 메리노종과 함께 들여온 목양견인 오스트레일리언 셰퍼드인 자신의 반려견 카이엔의 몸 속에 흐르는 침략의 역사를 기억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가 없었다는 듯이, 무한한 미규정성으로부터 새로운 규정성을 스스로 구성하자고 결코 무책임하게(unresponsible) 말할 수 없다. 해러웨이가 이 지점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상호간의 연대와 협력을 위해 요청되는 기본적인 임무이자 선언으로서 ‘책임’과 ‘설명가능성(accountability)’이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맥킨타이어와 샌델이 지시하는 곳과 같은 방향에 자리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이야기를 결코 추상된 것으로 남겨놓지 않는다. 기발하고 유머러스한 관점으로 저마다의 구체화작업을 이뤄내는 수 많은 비유들을 만화, 광고, SF소설을 통해 끊임없는 ‘비유(figure)작업’을 도모하는 해러웨이는 그것을 자신의 무한한 자원으로 삼아 언제나 새로 쓰고, 다시 쓴다. 샌델과 맥킨타이어 등 현대 영미윤리학에서 이야기의 부분으로서의 우리 각자는 그 이야기를 한 줄기로 엮어낼 수 있는 통일성(integrity)을 통해 ‘전일적’이고 ‘유기화된’ 통일적 인격체를 형성함으로써 보다 나은 윤리적 존재로 고양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연과 문화 내지 자연과 과학은 물론 자신(self)의 안과 밖의 경계, 세포의 경계가 무화되는 지점에 집요하게 현미경을 들이대는 해러웨이의 관점에서는 수긍할 수 없는 논의이다. 본 에세이는 이러한 현대 영미윤리학의 전통적 위치에 있는 맥킨타이어가 제시하는 이야기의 부분으로서의 행위자와 해러웨이가 제시하는 행위자가 어떤 지점에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윤리를 지향토록 안내하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들어가며

관계맺기는 마주보고 눈을 맞추고 인사를 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악수를 청하고 내 이름을 말하고 상대의 이름을 묻는다. 무어라고 부를 수 있는 호칭을 획득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듣고 난처해할 때, 상대가 “just call me J”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미 한발짝 자기 쪽으로 우리를 초대한 셈이다. 그 때부터 질문은 다발적으로 매순간 창안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창안보다 습속을 택한다. 나이를 묻고, 직업을 묻고, 고향을 묻는다. 때로 그것은 좋은 매너가 아니라고 교육받은 우리는, 지금 상대가 어떤 데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어떤 일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한 가지 금지될 것은 그 사람의 성적정체성 내지 그 사람의 과거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것들은 물어지기보다 스스로 이야기할 때까지 공동의 시간을 쌓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혹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누구이든, 우리는 개의치않는다고 유쾌하게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현재의 시간 속에서 매순간 새롭게 창안되는 특이성 속에서만 우리는 더욱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윤리적 주체 내지 타자성의 성립이란 상대의 과거에 대한 세심한 고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는 두 명의 사상가가 있다. 한편에서는 현재란 차라리 과거의 모든 시간이 축적되어온 것이기 때문에 ‘두꺼운 현재’일 수 밖에 없는 그곳에 눈을 돌려보자고 제안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더욱 강하게 그처럼 과거의 시간이 축적된 것이 현재이기에, 과거라는 특수한 ‘무대’를 통해서만 우리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중요한 타자성을 화두로 공동의 미래를 이야기 속에서 구축하려는 다나 해러웨이이고, 후자는 윤리적 주체의 성립이란 이야기를 담지하는 주체로서 각자의 서사를 충분히 설명할 책임을 다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알레스데어 맥킨타이어이다.

 

 

2. 서사적 존재

 

 

2.1 매킨타이어의 인간 삶의 서사적 구조에 대한 설명

매킨타이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practice’ 개념을 제시한다. 그를 위해 먼저 매킨타이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호머, 벤자민 프랭클린이 각기 제시하는 덕개념이 상이하다는 점으로부터 덕은 ‘사회적, 도덕적 삶의 특정한 특징들에 관한 선행적 설명’의 필요성을 도출한다. 가령 덕을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성질’로 간주하는 호머에게 덕의 개념은 ‘사회적 역할’의 개념에 대해 이차적이다. 덕을 ‘인간적인 텔로스의 성취’로 나아가도록 하는 성질로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라면 덕의 개념은 텔로스로 파악되는 ‘인간에게 좋은 삶’에 대해 부차적이다. 프랭클린에게 역시, 그는 ‘지상적 또는 천상적 성공을 성취하는 데 유용한 하나의 성질’이기 때문에, 덕의 개념 자체는 ‘유용성’에 비해 부수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이한 덕에 대한 정의를 두고, 그것은 고대 그리스(호머),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아리스토텔레스), 18세기의 펜실베니아(프랭클린)에서의 도덕구조가 그 자체로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매킨타이어가 이로부터 주목하게 되는 것은 각각의 덕개념을 성립시키는 데에는 어떤 ‘필연적 배경’이 요구된다는 것이고, 그로부터 그는 덕에 관한 핵심적 개념이 갖고 있는 ‘복합적, 역사적, 다층적 성격’을 도출한다.(McIntyre, 1997; 276)

여기서 매킨타이어는 세 단계의 논리적 발전과정-1)‘practice’에 대한 설명, 2)인간 삶의 서사적 구조에 대한 설명, 3)도덕적 전통의 구성에 관한 설명-을 제시하는데, 우리는 ‘이야기의 부분으로서의 행위자’라는 본 글의 주제에 부합하도록 2)인간 삶의 서사적 구조에 대한 설명에 국한하여 그의 논의를 살펴본다.

매킨타이어가 인간 삶의 서사적 구조에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어떤 사람의 삶에 있어서 덕의 통일성은 하나의 통일적 삶, 즉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되고 평가될 수 있는 삶의 특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McIntyre, 1997; 302)고 믿기 때문이다. 달리말하면 매킨타이어는 우리가 어떤 행위자의 행위를 판단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의 행위의 설명가능성을 그의 삶이 내재하는 하나의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전체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접하는 삶에서 인간행동의 동일한 부분이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거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철학적 논의가 아니더라도 일상적이다. 매킨타이어가 관련하여 제시하는 유명한 사례는 정원을 가꾸는 남성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하는 문제이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질문을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그는 땅을 파고 있습니다”, “그는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는 “그는 부인을 기쁘게 해주고 있습니다” 등등. 이는 각각 행위자의 의도와의 일치 여부나 행위자 자신이 의식하는가 여부에 따라 제각기 다른 위치를 점하는 설명들일 것이다. 이 행위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위해 매킨타이어가 제안하는 것은 ‘정원을 가진 가정’이라는 ‘특정한 유형의 무대장치’를 전제하는 하나의 의도를 탐색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매킨타이어가 ‘무대장치’를 ‘하나의 역사, 즉 개인적 행위자들의 역사들이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자리잡고 있어야만 하는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McIntyre, 1997; 303-304)이라고 명시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어떤 개인적 행위자의 역사와 시간 속에서의 그의 변화의 역사는 이 무대장치가 없이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매킨타이어는 인간 삶의 서사적 구조에 대한 탐구가 곧 개인의 삶이 담지하고 있는 역사성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덕에 관한 고찰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가령 정원을 가꾸는 남성의 행위는 ‘주기적 가사활동’뿐 아니라 ‘결혼의 역사의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인간 삶의 서사적 구조에 대한 고찰없이 우리는 어떤 행위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매킨타이어는 ‘의도들, 신념들, 무대 장치들에 선행하여 또 이들과는 상관없이 규정되어야 하는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다.’(McIntyre, 1997; 305-306)라고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2.2 해러웨이의 역사성을 담지하는 이야기의 주체들

우리는 개인의 삶이 담지하는 서사적 구조 내지 역사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찰을 사이보그 페미니스트로 가장 잘 알려진 해러웨이에게서 동일하게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유기체와 기계의 합성물인 사이보그를 여성이라는 인간에게 도입한 「사이보그들을 위한 선언문: 1980년대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적 페미니즘」(1985)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실험용 쥐, 유전자 실험, 태아, 흡혈귀 등 류(類), 종(種)간의 경계를 넘나들고 교란시키는 사이보그 가족에 대한 사유의 저변을 지속적으로 확대시켜왔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오랜 반려견과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dog)’라는 특수한 사이보그 가족에 대한 고찰을 섬세한 필체로 그려낸 바 있다. 무엇보다 그가 ‘개-인간’의 관계를 성실하게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중요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에 전념할 것을 약속하는 윤리와 정치를 배우고자 하는 탐구는 각 견종들의 핏속에 흐르는 종의 역사성을 탐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Haraway, 2007; 2) 그는 이를 푸코의 『감옥의 탄생』에 대한 패러디로 ‘개집의 탄생(the birth of the kennel’이라고 명명한다.(Haraway, 2007; 7)

해러웨이의 반려종, 카이엔의 혈통인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가 담지하는 역사성을 하나의 사례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는 양을 치는 목양견이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오스테일리안 셰퍼드는 ‘미합중국 서부 목장견’으로 불려야 한다. 이들의 기원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바스크(Basques)의 양치기들이 작은 개들을 3등 선실에 데리고 옴에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해러웨이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적다. 오히려 이 목양견들은 혼혈의 무리였다. 스페인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문명화를 위해 양의 방목을 강제적으로 장려했다.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온 ‘츄로(Churro)’라는 양은 17세기 이미 뉴 스페인의 목장과 부락을 지탱하는 대들보였다. 이 양을 손에 넣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교배를 거듭해 토착환경에 적응시켰다. 츄로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인 페이블로(Pueblo), 나바호(Navajo)족의 양들로 알려진다. 1850년대에는 골드 러시에 몰려든 사람들의 식량용으로 츄로가 서부에 유입된다. 나바호 츄로는 목초, 물도 적게 먹고, 사람 손도 덜 들고, 고품질의 양모와 고단백 저지방의 고기를 낳는 품종이었다. 그러나 참혹하게도 미국 육군은 원주민들의 저항에 대한 징벌로서 츄로 대부분을 학살한다. 1930년대에는 미국 정부는 가뭄에 대한 대책으로 나바호족에 소속된 양을 지정된 비율로 사살하고 다닌다. 1970년대에 이르자 나바호 양은 450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목양견에 관한 기술은 스페인 선교사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해러웨이는 전한다. 그러나 나바호족은 양을 사육하는 일의 일부를 개들에게 담당하게끔 하였고, 이 개들이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의 발생과 관여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이처럼 오스트레일리안 쉐퍼드의 역사성을 쫒아, 호주와 미국의 백인들이 양의 이동을 어떻게 통제하고 사살했으며, 그에 따라 가축보호견으로서의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의 역사 역시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밝힌다.(Haraway, 2008; 97-107)

길게 인용했지만, 실제로 해러웨이의 이러한 작업은 그레이트 피레니즈(Haraway, 2007; 55-57), 리트리버(Haraway, 2007; 66-71) 등을 고찰하는 데서 이어진다. 이는 통상적인 개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즉 ‘인류의 이동이나 교류의 모든 역사, 테크놀로지의 성질, 야생의 의지,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관계’(Haraway, 2007; 26)에 관심이 있는 견종의 쇠락이나 발전을 검증하고, 개의 습성은 유전에 의한 것인지 훈련에 의한 것인지 등을 밝히려는 작업과 비교하였을 때 더욱 유의미함이 부각된다. 해러웨이는 ‘이런 과학적 설명은, 우리들이 반려종이라는 관계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 걸까?’라고 묻는데, 돼지를 물리치고 개는 가축이라는 최초의 영예를 입었다든지, 늑대를 잡아와서 인간이 길들인 가축이 개였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은 개-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유효한 상호설명의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개와 인간의 복잡한 ‘공진화(co-evolution)’이다. 해러웨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분은 그에게 있어 역사성의 탐구가 어떻게 ‘타자성’의 문제에서 윤리적인 하나의 실천으로 작동하는지를 가늠케 한다.

 

 

다른 앎의 실천에 바탕을 둔 사람들과는 어떻게 ‘합승(get on together)’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특히. 정치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 도덕적으로도, 어느 한 특면에서도 손쉬운 문화상대주의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 ‘합승’이 가능하게 될까? 혹은 차이를 중시하는 데에 전념하고 있는 포스트콜로니얼세계에서 일반적인 앎은 어떻게 함양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창발적인 실천, 즉 조화할 수 없는 많은 행위체(agencies)나 생활양식이 있을 때, 각각이 계승한 전적으로 이질적인 역사와,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동의 미래와의 양쪽에 대해서 설명책임을 다하는 식으로 그것들을 그러모을 수 있는 일, 즉 섬세한 현장작업이다. 나에게는 그것이야 말로 ‘중요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의 상징이다. (Haraway, 2007; 7)

 

 

 

 

3. ‘덕의 정립’을 위한 통일된 이야기의 주체 ‘중요한 타자성’을 위한 실뜨기

앞선 2절에서 우리는 매킨타이어와 해러웨이는 덕에 대한 고찰 내지 윤리적 실천의 문제로서 행위 주체가 담지하고 있는 서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명한다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최초의 문제의 출발점이자 궁극적인 도달점을 각기 ‘덕의 정립’과 ‘중요한 타자성’의 문제로 각기 설정하고 있는 두 사상가는 서사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도 상이한 방향을 지시한다.

 

 

3,1 다양성에 대한 관점

하나는 ‘다양성’에 대한 관점이다. 매킨타이에게 다양성이란 덕의 개념이 불완전하게 작동할 수 있는 일종의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치부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해러웨이에게 그것은 궁극적으로 중시하고 전념해야 할 헌신의 속성으로 다뤄진다.

가령 매킨타이어는 덕들에 관한 개념으로 충만된 인간의 삶이 ‘불완전할 수 있는 세 가지 방식들’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삶은 무엇보다도 너무나 많은 갈등과 너무 많은 자의로 가득차 있을 수 있다. 선들의 다양성을 토대로 한 덕의 설명의 장점은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행하지 않은 방식에서, 비극적 갈등의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나는 일찍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규율을 잘 지키고 덕있는 어떤 사람의 삶에서조차 한 복종의무는 이 방향을 가리키고 또 다른 복종의무는 저 방향을 가리키는 수많은 모순적 상황들을 산출할 수 있다. (...) 덕들의 삶이 끊임없이 선택들에 의해 단절된다면, 어떤 실천에 내재하고 있는 선들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개인적 선택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다양한 선들이 상이하고 양립불가능한 방향들을 요구한다면, 나는 이 경쟁적 요청들 사이에서 선택하야 하기 때문이다.(McIntyre, 1997; 297)

 

 

매킨타이어는 우리의 삶이 수많은 갈등과 수많은 자의로 가득차 있기에, ‘선들의 다양성’을 토대로 덕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러한 점에서 그 설명의 우위를 획득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기술로부터 우리의 덕 역시 그러한 현실을 따라야 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이러한 현실에 대한 기술을 우리의 덕들에 대한 개념으로 충만된 인간의 삶이 불완전할 수 있는 방식을 고찰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매킨타이어에게 이는 왜 덕이 ‘하나의 통일성으로 파악된 선을 구성함으로써’ 일상을 초월하는 ‘텔로스’를 가져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의 설득력있는 근거로 작동한다.

반면 종간의 교차, 잡종과 교란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해러웨이에게 다양성은 사태의 최초부터 분명하게 주어져 있는 사항이다. 가령 해러웨이는 우리가 분명하게 분리된 것으로 파악(prehension)하는 자연과 문화, 신체의 내외부, 네크워크 기술진보의 명암 등 조차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자연은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자원도 아니지만,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되는 무한한 생명을 낳는 어머니와 같은 것도 아니다. 수많은 종들이 거쳐간 멸종의 역사가 드러내듯 자연 역시 탐욕적이며, 탐욕의 대가는 순수한 자연이라고 표상되는 자연 역시 동일하게 치루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류의 그간의 행적을 두둔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해러웨이는 그렇다고 그 반대편에 자연이라는 순수성을 배치하는 것 역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트워크 역시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연결된다는 식의 낭만적인 서사로 낙관되어서도 안 되지만, 어느새 우리 삶을 좀먹고 지배해버리는 공포스러운 기술이기에 모두 다 차단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되어서도 곤란한다. 일종의 보디가드 군단들과 같은 신체의 면역 시스템은 자기(self)에 기반하는 것이지만, 자가 면역질환은 이 면역시스템에 있어서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의 경계가 왜 의미론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자기와 타자는 그것들의 합리주의적인 대립적 성질을 잃고, 근본적인 연결이라는 개념이 예기치 않게 방어되는 자기의(self) 핵심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란과 교차, 혼란과 잡종의 출현 속에서 해러웨이는 ‘양극적 대립’으로서의 지난한 정치를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 즉 ‘차이와 청취의 미덕을 전제로’ 새로운 ‘경계-만들기’와 ‘영역-만들기’를 제안하고자 한다.(Haraway, 2006; 165)

 

 

3.2 통일성에 대한 관점

다른 하나는 ‘통일성’내지 ‘총체성’에 대한 관점이다. 앞서 살폈듯, 매킨타이어의 덕 이론이 겨냥하는 바는 ‘전체적 인간삶의 선, 즉 하나의 통일성으로 파악된 인간삶의 선’의 구현에 있다. 반면 해러웨이는 언제나 ‘전체’ 내지 ‘통일’ 대신 ‘부분’을 택한다.

앞서 매킨타이어가 정원가꾸는 남성의 사례를 통해 어떤 행위자의 행위를 ‘무대장치들의 역사성’ 속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점을 보았다. 이는 곧 행위는 ‘의도적인 것,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의 상호관계’를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매킨타이어는 이로써 ‘특정한 종류의 설화적 역사는 인간행위를 규정하는 데 있어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장르’라고 주장한다. 관련하여 그는 요리의 비유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여섯개의 달걀을 들어서, 그것들을 그릇에 깨어 넣는다. 그리고 거기다가 밀가루, 소금, 설탕 등등을 섞어 넣는다” 등 일련의 과정으로서 어떤 요리 레시피가 제시될 때, 그 핵심은 ‘하나의 연속과정 속의 가능한 요소’로서만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McIntyre, 1997; 307) 그가 느닷없이 어떤 남성에게서 “일반적인 야생오리의 이름은 히스토리쿠스 히스토리쿠스 히스토리쿠스입니다.”라는 발언을 들었을 때, 그 언어행위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 편입되어야지만, 즉 그가 그 이전에 “당신은 혹시 통상적인 야생오리의 라틴어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사람과 자신을 혼동했든지, 그 남성이 일종의 정신요법으로 낯선 사람들에게 말걸기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었다는지 하는 이야기속에 편입되어야지만 이해가능해진다고 하는 사례역시 동일한 함의를 갖는다.(McIntyre, 1997; 308-309)

즉 매킨타이어는 어떤 행위를 성공적으로 규정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 특정한 일화를 일련의 ‘설화적 역사들의 콘텍스트 속에 세워놓아야 한다’(McIntyre, 1997; 311)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매킨타이어가 핵심명제라고 제시하는 부분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인간은, 그가 만들어내는 허구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와 실천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동물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이야기들의 화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이야기들 통해 그와 같은 화자가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핵심적인 물음은 그 자신의 창시자적 성격에 관한 물음이 아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나는 이에 선행하는 물음, 즉 “나는 어떤 이야기 또는 이야기들의 부분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때에만, 대답할 수 있다. (McIntyre, 1997; 31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에 구현되는 행위자의 삶의 통일성 내지 총체성은 반드시 요청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제시된다. 행위자가 이야기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 삶을 구성하는 행위와 경험들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우리가 행한 것, 우리에게 일어난 것, 또는 질문이 제기되기 이전의 삶의 시점에서 우리가 체험한 것에 관해 특정한 설명을 해달라는 요청에 열려있는 것’(McIntyre, 1997; 321)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킨타이어에게 인격적 정체성이란 ‘어떤 이야기의 통일성이 요청하는 성격의 통일성에 의해 전제되는 정체성’에 다름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러, 덕을 구현하는 이야기의 주체로서의 행위자에게 ‘책임을 지는 사람’일 것, 즉 그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총체성으로 답하여 책임을 질 것,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역시 책임을 묻고, 그들에게 물음을 제기할 것이라는 요쳥을 던진다. ‘그들이 나의 이야기의 한 부분인 것처럼, 나는 그들 이야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McIntyre, 1997; 321)

반면 통일성 대신 부분을 언제나 강조하는 해러웨이는 이러한 지점에서 분명히 매킨타이어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취약하고 상처 입은 지구(vulnerable and wounded earth)’, ‘사는 것만큼이나 죽는 것으로 가득 차고, 시작하는 것들만큼 끝나는 것들로 가득찬 복잡한 역사들’ 속에서 해러웨이는 하나의 회복을 위한 실천으로 ‘실뜨기(string figures)’를 제안한다. 그것은 손에 손을 걸고 패턴을 받고 전하며 주고받기의 리듬을 통해 플레이된다. 우리는 언제나 실을 떨어뜨리고 실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실패 속에서라도 유효한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물론 이는 ‘화해나 복구’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부분적 회복(partial recuperation)’이자 ‘친하게 지내기(getting on closer)’에 전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서 ‘부분’은 중요한데, 그것은 어떤 전적인 조화 내지 질서를 향해 완전한 회복을 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를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 하기’라고 칭한다.

해러웨이는 일관되게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내파시킨다. 이 관점에서, 실뜨기를 ‘이야기(stories)’의 측면에서 조명하고, 다시 이를 ‘사변적인 우화만들기’인 동시에 ‘사변적인 현실주의’로 결부짓는 점은 흥미롭다. 여기에는 이중의 꼬임이 엿보인다. 순수하게 이성의 작동에 의존하자는 사변성이 우화만들기(fabulation)에 불려들어갈 때, 그리고 다시 이 우화가 현실의 매듭을 풀고 맺는 행위 속에서 우리의 함께 ‘살기와 죽기의 실천들을 실현’할 때, 사변성은 기이하게 가장 현실적인 것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SF다. SF는 단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인 동시에 과학적 사실(science fact)이자 실뜨기(string figures)를 위한 기호(sign)이다. 그만큼 SF의 배경도 남다르다. 어원부터 잡종인 테라폴리스(terra땅+polis도시)에는 ‘불확정한 성별들과 장르들’, ‘만들어지고 있는 종류들’, ‘의미있는 타자성’으로 가득차 있다. 이곳은 human이 아닌 ‘흙 속의 일꾼‘으로서 guman을 위한 세상이다. 해러웨이가 ’다른 문제들을 생각하기 위해 어떤 문제들을 사용하느냐가 문제‘라는 스트라선(Strathern)의 말을 인용하듯, 사변적 우화는 그 ’이야기들이 어떤 worlds를 만드느냐, 어떤 worlds가 이야기들을 만드느냐‘의 문제와 결부된다. 혹은 이자벨 스탱겔스(I. Stangers)가 보이듯, 어떤 결정이든, 그 결과를 낳을 자들이 있는 곳에서 이뤄져야 하고, 사변적 우화 는 바로 이곳에서 이뤄져야 한다. 액터 내지 플레이어들 역시 사변적 우화 내지 실뜨기에 앞서 선행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종들의 세상의 subject만들기와 object만들기의 얽힘의 결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들을 ‘보통의 조우 속의 존재자들(beings-in-encounter)’로 사유한다.

그러나 실뜨기는 어디서나 동일하게 플레이되지 않는다. 19C 말 20C 초, 민족학자들의 수집은 각개각색의 실뜨기를 제시한다. 서로 마주보는 방향으로 달리는 코요테라는 이름을 갖는 나바호 족(Navajo)의 실뜨기는 왜 해러웨이가 실뜨기를 주요 개념으로 제시하면서도 cat’s cradle이나 jeux de ficelle라는 단어를 택하지 않았는가를 보여준다. 나바호족의 실뜨기 속 마주보는 두 마리의 코요테들처럼 매듭은 ‘분기해야 하고 테라폴리스 속의 많은 접합 부분 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일부 나바호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나바호족의 실뜨기란 일종의 ‘세계의 건전한 관계들을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패턴(화)’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실뜨기를 ‘순진무구한 일반적인 제스처’라기 보다는 ‘가차없는 역사적인 관계적 우연성 속에서의 위험한 제안’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더 살만한 cosmopolitics를 구성하기의 위험들과 기쁨들로 가득하다.’

 

 

4. 나가며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그리스어 데인(dein)과 앵글로색슨어 아테(ahte)에는 본래 “해야한다(ought)”와 “빚이 있다(owe)” 사이의 명확한 구별이 없다.(McIntyre, 1997; 183) 어떤 사람의 덕은 ‘빚’이라는 어원을 내포하는, ‘책임’으로 사유되었다는 것이다. 호머가 나타내는 일종의 영웅사회, 그 사회에서의 정체성은 ‘책임’을 나타낸다.

샌델이 ‘우리의 삶은 서사적 탐색과도 같다’(Sandel, 2014; 326)고 했을 때, 또는 매킨타이어가 ‘인간은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동물’(McIntyre, 1997; 318)이라고 말했을 때, 이들은 같은 방향을 지시한다. 이는 어떤 문제의 전회인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대신 “나는 어떤 이야기 또는 이야기들의 부분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이야기 개념’과 ‘행위의 개념’ 사이의 연결고리로서의 ‘이해가능성(accountability)’ 개념을 결부시킨다. 하나의 서사의 담지자로서 행위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일적으로 구성할 ‘책임’, 그로부터 타인에게 충분한 ‘이해가능성’을 제공할 ‘책임’, 동시에 동일한 그것을 다른 행위자들에게 요청할 ‘책임’을 갖는 것이다.

‘이야기(story)는 이데올로기보다 더 크다. 거기야말로 우리들의 희망이 있다’(Haraway, 2007; 17)고 해러웨이가 말하는 것 역시 무엇보다 그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비로서 접근하게 될 ‘설명가능성’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동시에 해러웨이는 그 이야기가 드러낼 역사성의 한계 역시 놓치지 않는다. 앞서 2.2절에서 살펴본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의 사례는 ‘어떤 때는 수용되어서 잘 사역되고(used), 어떤 때는 학대(abused) 받’는 한 반려종의 이야기의 일부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언제나 ‘이 역사를 한 마디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 따위는 하나도 없다.’(Haraway, 2007; 14)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해러웨이는 우리가 ‘자신과 다른 생물종의 ’현재의 형상‘을 만질 수 있다’고 믿는다. (Haraway, 2007; 37-38) 때문에 이것은 차라리 물음의 전환이고, 이야기로부터 ‘이해가능성’을 더듬어 가겠다는 전념인 동시에, 그러한 역사성을 ‘육체에 계승’하고 있는 타자성(otherness)에 대한 실천의 일환이다.

해러웨이가 ‘페니미니스트가 탐구하는 것은 오히려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고, 누가 행동하고 있고, 무엇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것. 어떻게 하면 현실 세계의 행위자들이 조금이라도 비폭력적인 모습으로 서로 설명책임(accountable)을 다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것이다’(Haraway, 2007; 7)라고 말할 때, 그리고 매킨타이어가 ‘나는 책임을 지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에 책임을 묻고 또 그들에게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이 나의 이야기의 한 부분인 것처럼, 나는 그들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고 말할 때, 두 사상가는 분명 그러한 이해가능성 내지 설명에의 책임에서 공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내문헌

다나 해러웨이,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민경숙 옮김, 동문선, 2002

___________, 『겸손한 목격자@제2의 천년_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_만나다』, 민경숙 옮김, 갈무리, 2006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1997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명철 옮김, 와이즈베리, 2014

 

 

국외문헌

Donna Haraway, The Companion Manifesto: Dogs, People, and Significant Otherness, Prickly Paradigm Press, 2007

_______________, When Species Meet,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

_______________, “The Promise of Monsters”, The Haraway Reader, Routledge, 2004

_______________, “Playing String Figures with Companion Species”, ’Staying with Trouble, Duke University Pres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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