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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영원회귀] 12강 예습글

유택 2018.12.06 07:43 조회 수 : 63

3장_영원회귀의 체험  2018-12-06

 

동일자의 영원회귀 체험 안에서의 망각과 회상

동일자의 영원회귀라는 사유는 기분의 흐름에 좌우되어, 어떤 영혼의 음조의 흐름에 좌우되어 돌연한 각성처럼 니체에게 찾아온다. 그것은 처음에는 기분과 섞여 있다가 그로부터 사유로서 추출된다. 하지만 그것은 계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계시안에서 망각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리고 특히나 망각이란 영원회귀가 계시되기 위한, 또 그 계시를 받는 인간의 동일성까지도 한 순간에 변모 시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동시에 그 원천이 아닌가? 망각은 영원한 생성과 모든 동일성들의 존재 안으로의 흡수를 포함한다. 회상은 영원회귀의 계시와 일치한다. 영원회귀는 어떻게 망각을 회복시키지 않는 것일까? 강조돼야 하는 것은 주어진 동일성의 상실이다.

 

탈선:

영원회귀가 내게 계시되는 순간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이기를 멈추고, 무수한 다른 나들로 될 수 있게 된다. 단, 내 자신의 기억 밖으로 일단 나오면 나는 이 계시를 망각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이 기억은 무엇인가?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후에 내 몸을 맡기는 필연적인 원환운동이다. 실제로 이미 영원회귀의 돌연한 계시가 나를 엄습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의 순간으로서 나 자신을 다시 의지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결정적인 한 번에 포기하는 것이다. 무rien는 여기에서 결정적인 한 번인 원환이다. 즉 세계에 도래한 모든 것, 도래하는 모든 것, 언젠가 도래할 모든 것에 적용되는 하나의 기호이다.  

 

지금 재-의지 되어야 하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어떻게 의지는 개입할 수 있는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에서 그것을 망각한다는 것, 그것은 원환운동의 고유한 본질 안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 삶 안에서 그 원환이었다는 것을 조금도 잊지 않을 때, 나는 또 하나의 삶(이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삶!)안에서 나 자신의 밖으로 내던져졌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시가 진실이기 위해서는 내가 그것을 망각해야만 했다! 니체는 동일자의 영원회귀라는 것을 지고의 사유로서만 아니라 또한 지고의 감정으로서, 최고로 고양된 감정으로서 말한다. 하나의 영혼의 음조가, 하나의 기분이 어떻게 사유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가장 고양된 감정(즉 영원회귀)은 어떻게 지고의 사유가 되는 것일까?

a)영혼의 음조는 강도의 파동이다. b)강도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 C)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감으로써 강도는 자신을 해석한다. d)강도는 강도라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e)의미를, 그러므로 의미작용을 만드는 요인은 다시 한번 강도와 그것의 다양한 파동들인 것처럼 보인다. f)기호는 무엇보다도 강도의 파동의 흔적이다. g)기호는 강도의 부재를 보여 줄 수도 있다.

강도가 자신을 의미하는 곳에 있는 지시작용들은 파도들의 정점에 서서 물거품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형상들과 같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우리가 사유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강도는 시작도 끝도 없이 움직이는 카오스에 복종한다.

이렇게 각자 안에서, 표면적으로는 각자에 귀속한 하나의 강도가 움직이므로, 그 강도의 밀물과 썰물은 사유의 유의미한 혹은 무의미한 파동들을 형성하는데, 이 사유는 실제로는 결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이고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유일하게 우리가 아는 것은 이 코드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호가 어떤 때는 가장 높은 강도의 정도에, 어떤 때는 가장 낮은 강도의 정도에 항상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모든 명제들의 주어진 자아이고, 나이다. 이 기호는 항상 변하는 파동의 한 흔적일 뿐이지만, 이 기호 덕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유하는 자로 구성하고, 사유로서의 사유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호, 그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회귀하는 것은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영혼의 높은 음조는 강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기원인 카오스를 자신이 만든 원환의 기호 안으로 재통합함으로써 비로소 가장 고귀한 사유가 되었다. 원환은 그 자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실존은 실존일 뿐이라는 말 이외에는, 의미작용은 강도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말 이외에는.

니체의 기분들의 강도가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이 운동 중에서 가장 고양된 것이 신이라는 악순환의 기호를 달고 니체에게 다가온다. 니체가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 사물의 진정한 본질이란 사물을 표상하는 존재가 꾸며 낸 날조이고, 그것이 없으면 존재는 아무것도 표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영원회귀의 체험을 전달가능한 사유로 다듬기

차라투스투라의 치료약. 완료된 사실을 떠맡길 원함으로써 의지되지 않은 것을 재-의지하기. 그러므로 완료된 사실을 무수히 재의지하면서 그것을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기. 사건으로부터 ‘결정적인 한 번’이라는 성격을 빼앗는 책략. 이것이 질스-마리아의 체험(그 자체로는 비가지적인)이 성찰에 맨 처음 제공하는 술책이다. 성찰은 그렇게 의지를 축으로 전개된다.

재의지에서 자아는 변하고, 다른 것이 된다고. 여기에 바로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의 변화이다. 의지되지 않은 과거를 재의지하기, 여기에 ‘힘에의 의지’의 본질이 있다.

개인의 도덕적 행동의 변화는 의식적인 의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회귀의 체제 자체에 의해 규정된다. 악순환의 기호 아래에서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은(인간적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실존의 본성 자체이고, 그러므로 또한 개인적 행위의 본성 자체이다.

재-의지하기의 목표는 한 개인 안에 기입된 다수의 타자성이라는 것이다. 의지는 징벌로서의 실존이라는 표상으로부터 치유되어, 이제는 의지되지 않은 것을 재-의지함으로써 자신을 포획한 사슬을 끊고, 시간의 가역성안에서 힘에의 의지로서의, 따라서 창조적 의지로서의 자신을 알아본다.

‘위버멘쉬’는 힘에의 의지의 주체의 이름, 영원회귀의 의미이자 목적이 된다. 힘에의 의지는 의도가 없는 순수한 강도인 악순환의 영혼, 그것의 인간화된 호칭일 따름이다. 그 대신 이 교의의 신봉자인 개인에게 영원회귀로서의 악순환은 다수의 실존들이 연결된 사슬처럼 보인다. 하나의 ‘영원에서 또 다른 영원’에 이르기까지, 악순환은 자신이 현재 존재하는 것과는 다르게 선재했고, 그렇게 계속 다르게 존재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런 방식으로, 니체는 윤회의 갱신된 판본을 도입한다.

 

영원회귀와 전통적 운명론의 차이

니체는 운명론(숙명)을 사유하는 것을 원환의 차원에서 완료한다. 그 자체로서의 운명론은 성향 안에서 이미 확립된, 불가역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종료되는 하나의 연쇄를 전제한다. 악순환은 운명의 체험(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의 형태로)에 우연과, 하나의 사슬을 형성하는 무수한 계열들과 같은 우연의 무수한 조합들, 이 둘의 작용을 재통합한다.

 

어떻게 니체의 운명론이 의지의 배제에 의해 완성되는가

영원회귀의 사유가 이미 그 발전 안에서 자아의 동일성과 함께 의지의 전통적 개념을 폐기한 것은 확실하지만, 니체는 그의 운명론의 두번째 측면에 있어서 자신의 고유한 생리학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생리학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가 아닌 의지는 존재하지 않고, 이 관점으로부터 말하자면 의지라는 것은 근원적 충동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4장_데카당스, 비상飛翔, 무리짓기, 특이적 사례

네 가지 기준들의 기원으로서의 병적 상태들

데카당스

병든

약한

비상

건강한

강한

특이적

퇴화된 유형

교환불가능

이해불능

침묵

비언어

무리적

성공한 유형

교환가능

이해가능

전달

언어

무엇이 건강하고 무엇이 병들었는가라는 기준과 함께 또 다른 차원의 기준들이 개입하여 앞의 기준들과 결합한다. 그것은 무엇이 특이적이고 무엇이 무리적인가라는 것이다. 교환/전달 가능한 것/언어를 전제하는 것은 무리짓기이다. 언어는 무언가에 적용되는 것, 즉 종의 보존에, 집단의 지속에 기여하는 모든 것이지만, 개인에게는 특유한 기호들의 지속에 기여하는 모든 것이다. 언어는 의식의 범주들이다.

병적인 징후들을 건강의 징후들과 대립시키는 도식의 기원은 무리짓기의 기호들과 특이성의 기호들을 대립시키는 도식에 있다. 특이적인 것의 발언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언어가 이제부터 해야 하는 것은, 특이적 침묵의 영역을, 그리고 이 침묵 안에 있는 종으로서는 정말로 비가지적인 것, 즉 무리적 제도들이 요구하는 가지성에 비하여 비가지적인 영역을 확정하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특이적 사례는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예전의 존재조건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삶이 이 사유를 발명했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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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되는 것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병적 상태이다. 이 병적 상태는 체념과 굴종이라는 도덕적가치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니체의 관점에 의하면(세속적 도덕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적(적대적인 힘들의 침입)앞에서의 굴종과 체념은 약함과 동의어이다. 굴종, 체념. 이것이 전통적 도덕의 가치들이고, 특히 기독교적 미덕들이다.

힘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을 생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오해를 자초하는 인간유형으로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이다. 힘은 그것이 증대될 때마다 균형을 깨야만 한다. 힘은 증대되지 않을 수 없다. 힘을 구성하는 풍요로움은 애초부터 어떤 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닌 것 이상을 원하는 자의 본성 자체에 있다. 이 풍요로움은 그래서 언제나 불충분하므로 사람들은 그것이 증가되고 극복되기를 원한다.

힘은 스스로에게 저항할 수 없을 뿐, 모든 것에 저항한다. 힘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힘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이고, 도발당하지 않기 위해 도발하는 것이다. 힘은 자신이 힘이길 원하고, 자신을 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런 까닭으로 힘에의 ‘의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힘 안에서 의지가 사라지는 그런 단계가 있다. 의지는 작인하고만 관련된다. 힘은 삶에, 코스모스에 속하므로 상승과 하강에 따라 작인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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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개인적 삶의 ‘건설적인’ 이용방법을 더 강조하고, 그러한 이용이 자주 실패하는 것을 도덕적 명제의 기원으로 삼는다. 영원회귀의 체험의 순간에 니채는 이 영원회귀를 복수성의 원리로서 즉 변모(일련의 다른 개인들을 주파할 필요성)의 원리로서 찬양한다. “개인도 없고, 종도 없고, 동일성도 없다. 있는 것은 단지 강도의 상승과 하강 뿐이다.”

 

5장_영원회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시도

 

영원회귀의 황홀은 명증성을 지니는 동시에 그 내용상 설명의 가능성도 지닌다(개인적 동일성의 소멸과 주파해야 할 일련의 개인들). 그러므로 그것은, 사유로서는 선재에 기반을 둔 변모의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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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로의 경향이 삶 자체의 긍정 속에서 무르익기 위해서는 운명론을 극한까지, 능동적 허무주의로까지 밀어붙여야 했다.

 

니체에게 있어서 영원회귀의 사유는 광기의 예감을 포함할 것인가?

이 사유가 두려운 동시에 고양감도 주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것, 이 사유 자체를 획득했고, 그것을 하나의 계시로서 획득했다는 사실이 있다. 이러한 사유를 누가 받아들이 수 있는가? 착란적 지성이다. 니체 틀림없이 이 사유를 품은 이후 자신이 미쳐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과학에 도움을 청해, 자신이 단순한 환영의 포로가 아니라는 논증을 과학에서 기대한다.

영원회귀의 사유가 니체를 고양시키는 동시에 공포를 떨게 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루가 해석하는 것처럼 같은 고통을 끝없이 부활시키는 사유가 공포가 아니라, 악순환의 기호 아래 이성을 잃는다는 사유가 공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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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가 정서의 원초적 형식이라는 것, 다른 모든 정서들은 단지 그것의 형태들에 불과하다는 것. 개인적 ‘행복’ 대신에 힘을 설정하는 것도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은 더 많은 힘을 열망한다. ‘쾌감’은 힘이 획득됐다는 느낌이 징후, 의식적 상태의 차이, [또는] 의식의 단계의 차이에 불과하다. 살아 있는 것이 자기 보존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다.삶에의 의지는 더 문제가 안 된다. 삶은 힘에의 의지의 독특한 사례에 불고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힘에의 의지의 이런 형식으로, 즉 삶에의 의지라는 형식으로 이행하고자 한다는 것은 완전히 자의적인 주장이다. ‘정신’도, 이성도, 사유도, 의식도, 영혼도, 의지도, 진리도 없다. 모두가 다 소용없는 허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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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는 여기에서 지식의 대척점이 될 것이다. 지식이 만약 힘과 더불어 증대한다면, 그것은 종의 보존을 주요한 목표로 삼기에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목적도 방향도 없는 생성의 표현으로서의) 영원회귀는 목적으로서의 지식을 ‘불가능하게’ 하고, 지식을 수단의 수준에서 항상 유지한다. 영원회귀는 강도의 상승과 하강의 기원이다. 영원회귀는 의도를 이 강도로 환원한다.

 

네 개의 단편들

자신의 수준을 유지하려 하지 않고 증가하거나 감소하기만 할 수 있는 힘에의 의지라는 이 개념은 여기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는 에너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힘은 자기의 보존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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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성장을 구성하는 것은 더 작은 힘으로 최대한의 것을 얻는, 항상 더 아끼며 끊임없이 계산하는 경제이다. 이 경제의 이상은 최소지출의 원칙.. 세계는 어떤 지속 상태를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만이 유일하게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세계의 정점을 평형상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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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규칙에 따라서, 규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사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그것은 허구다). 법칙이란 없다. 각각의 힘은 매 순간 결론을 끌어낸다. 힘 양자는 행사하고 저항하는 작용에 의해 정의된다. 무관심한 힘 양자는 없다. 이 힘의 양자는 본질적으로 폭력에의 의지이자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다. 자기의 보존은 문제가 아니다. 각각의 원자는 모든 존재 안에서 활동한다.

계산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단위들’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단위가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단위의 개념을 우리의 ‘자아’ 개념(우리의 가장 오래된 신조)에서 빌렸다. 우리 자신을 단위로 여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사물’이라는 개념도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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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상태가 결코 달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정되지 않는 공간에서는 균형이 달성될 것이다. 힘의 어떤 한정된 순간에 그 힘들의 새로운 분배의 절대적 조건이 주어진다. 힘은 움직일 수 없다. 변화는 본질에 내재하고, 따라서 시간성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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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가 없는 어떤 변화도 구상할 수 없다. 하나의 힘이 다른 하나의 힘을 잠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변화라는 것을 확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에너지의 항상성 뿐만 아니라, 최대한의 소비 절약. 따라서 힘들의 핵심으로부터 출발하여 더-강하게-의지하는-것이 유일한 현실을 구성한다. 자기의 보존이 아니라 찬탈을 의지하는 것, 무언가의 주인, 더 큰 것, 더 강한 것이 되기를 의지하는 것. 쾌와 불쾌의 감정이 없다면, 다시 말해 힘의 증가와 감소의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힘에의 열망을 가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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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음조의 강도와 에너지의 운동은 서로가 서로의 전거가 될 수 있었다. 힘의 밀물과 썰물, 그것은 목적도 의미/방향도 없는 악순환에 의해 지시된다. 에너지도 강도도 지속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지 증가하고 감소하고, 상승하고 하강한다.

유기체들의 운동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유기체들에서도 여전히 힘이 증가한다고 한다면, 그 힘은 전체의 지속으로서 실현된 의미/방향과 목적이라는, 하나의 실현의 기쁨 안에서 완결된다.

모든 사물들의 영원회귀의 체험으로부터 출발하여 니체가 탐구한 것, 그것은 의도로부터 강도로의 갱신이었고, 목적도 의미/방향도 없는 에너지가 그것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우리는 개인 이상의 존재이다. 게다가 우리는 사슬 전체이며, 사슬의 모든 미래들의 과업들을 책임지고 있다.”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의 불균형은 이렇게 균형의 끊임없는 파괴를 원한다. 에너지는 항상 목표를 초과한다. 에너지가 항상 목표를 초과한다면, 그것은 목표는 에너지 자체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니고, 힘이 최대한으로 축적된 수준에서 힘은 반드시 이 최대한이 의미하는 바와는 반대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할 뿐이라는 말이다. 에너지가 달성된 목표를 넘어선다면, 그것은 또한 에너지가 그 자체로서 자신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수단이 목적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용된 수단들은 추구된 목표에 의식이 부여하는 의미 자체보다 중요하고, 목표의 무의식은 의식적으로 정해진 목표보다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수단들에 대한 의식은 어떤 목적에 대한 의식보다 우위에 서고, 의식이 되는 것은 수단들밖에는 없게 된다. 따라서 의식이라는 조각은 삶의 전개와 연장 안에서 추가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악순환은 자신과 다시 만나기 위해 언제나 도주하는 것이 본질인 신이다.

힘은 무의미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무의미한 것은 그로 인해 최대의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이 줄어들수록, 해석은 늘어나고 의미는 많아진다.

양적인 에너지의 이론으로부터 도출된 근본적 사유, 즉 힘의(의도의 관점으로부터는 해석불가능한 힘의) 무의미, 니체는 그것을 그가 주권구성체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니체가 주권구성체들에게 균형파괴의 법칙을 의식할 것을 촉구하면서 니체의 글은 더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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