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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들뢰즈, 이경신 옮김, 민음사

제5장 초인: 변증법에 반대해서

1 허무주의

허무주의의 첫 번째 의미는 무가치(a value of nil)이다. 사람들이 삶을 부정하는 가운데 삶은 무가치해지고 이런 비하는 항상 허구를 가정한다. 삶보다 나은 허구는 삶보다 우월한 가치들이고, 그것들의 효과인 삶의 비하, 부정과 연결된다. 그 이유는 우월한 가치들이 부정, 비하하는 의지를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에서 허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에의 의지이다. 허무주의의 두 번째 의미는 의지가 아니라 반동이다. 사람들은 우월한 가치들에 반대해 그것들 자체로부터 가치를 박탈한다. 첫 번째는 부정적 허무주의이고, 두 번째는 반동적 허무주의이다.

 

2 연민의 분석

무에의 의지는 반동적 힘들을 승리하게 한다. 무에의 의지 하에 보편적 삶이 비현실적이 될 때, 개별적 삶은 반동적이 된다. 반동적 힘들은 그들의 승리 속에서 증인, 주모자(leader)를 갖게 되지만 점점 이들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반동적 삶은 무에의 의지와의 동맹을 결렬 시키고 홀로 지배하길 원한다. 반동적 힘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의지의 자리를 대체하는, 그들 자신의 이미지를 투사한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반동적 허무주의의 최종 결과이다. 외부의 것에 의해 인도되기보다 수동적으로 소멸(passively fade away)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다른 방식의 언급이 신이 죽었다는 것이다. 신은 연민으로 죽었다. 연민이란 부정적 허무주의에 대한 관용이고, 반동적 삶에 대한 사랑이다. 반동적 삶을 사는 이들이 연민을 느끼는 자들이다. 그들은 신(증인)을 견딜 수 없고 그 자리에 자신을 놓는다. 그리고는 반동적 삶만을 인식한다. 이와 같은 신의 살해자들의 자손이 최후의 인간이다.

부정적 허무주의는 반동적 허무주의에 의해서 대체되고, 반동적 허무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에 이른다.

 

3 신은 죽었다

(1) 부정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유태교적이고 기독교적인 의식의 계기.

사람들은 삶 속이 아니라 내세에, 무 속에 삶의 중력 중심을 놓는다. 그리고 이는 반동적 삶의 찬양을 야기한다.

⓵ 유태의 신은 자신의 아들을 그 자신과 유태 민족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 죽음에 처한다. ⓶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늙은 신이고 태어나는 것은 새로운 신이다. 그는 고아로 태어나서 자신의 모습대로 스스로 아버지를 만들어낸다. ⓷ 사도 바울에 의한 왜곡.

(2) 반동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유럽적 의식의 계기.

반동적 삶이 본질적인 것이 됨에 따라 기독교는 가책과 원한의 무신론을 보급한다. 신의 의지 대신에 반동적 삶, 신 대신에 반동적 인간, 더 이상 인간인 신이 아니라, 신인 인간, 유럽인이다. ⓸ 신의 연민을 견딜 수 없는 반동적인 인간들에 의한 질식.

(3) 수동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불교적 의식의 계기.

예수는 반동적 삶에서 수동적으로 스스로 소멸하는 법을 배웠고, 반동적 삶에 쾌락주의를, 최후의 인간에게 고귀함을 부여했다.

4 헤겔주의에 반대해서

이러한 역사철학과 종교철학 속에서 헤겔의 관점은 반복된다. 하지만 니체는 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 죽음을 본래적 의미를 소유한 어떤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이 그것을 점유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헤겔에 의해서 해석된 예수의 죽음은 극복된 대립, 유한과 무한의 화해 등을 의미한다. 이런 변증법적 해석에 대해 니체는 세 가지 측면에서 반대한다. ① 변증법은 현상들을 전유(appropriate)하는 힘들의 성질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의미를 잘못 해석한다. ② 변증법은 힘들, 힘들의 질들, 힘들의 관계가 추동되어 나오는 현실적 요소(real element)를 잘못 해석한 다. ③ 변증법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항들 사이의 교대(permutations)를 행하는 데 만족하기 때문에 변화와 변형을 잘못 해석한다. 이 세 가지 모두 어떤 것이?(which)라는 의문에 대해 무지한 것에서 유래한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변해서 신이 되었고, 신이 변해 인간의 본질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인 자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신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노예이길 그만두지 않는 반동적 인간이다. 신인 것은 더더욱 변하지 않았다.

모든 변증법은 반동적 힘들의 한계 안에서 움직이고, 허무주의적 관점에서 진화한다. 허구를 현실적인 것에 대립시키고, 허구를 반동적 힘들이 승리하는 수단으로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허무주의이다. 이는 새로운 사유방식, 감각 방식을 창조하는 데 무능한,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사유다.

 

5 변증법의 화신들

변증법의 사변적 동력은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다. 그러나 변증법의 실천적 동력은 소외와 소외의 제거(suppression), 소외와 재전유이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대신하는 유적 인간을, 바우어는 자기의식을 제시했다. 마르크스 또한 이전 사상가들의 한계를 지적하며 프롤레타리아 단계를 제시했지만 역시 변증법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슈티르너 역시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자아를 내세웠지만 이는 변증법의 진리가 허무주의임을 보여줄 뿐이다. 헤겔의 부정적 허무주의, 포이어바흐의 반동적 허무주의, 슈티르너의 극단적 허무주의.

 

6 니체와 변증법

니체의 긍정적 임무는 초인과 가치 전환이라는 두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인간이 어떻게 보존되는지가 아니라 어떤 것이 인간을 극복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극복하는 것은 보존하는 것, 전유, 재전유와 대립한다. 가치 전환은 현행 가치들과 대립하고 변증법적 사이비-변형과도 대립한다. 하지만 니체의 초인이 변증법적 인간보다 진화한 것은 아니다. 초인은 본성상 인간과 다르고, 자아와도 다른, 새로운 감각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7 우월한 인간(the higher man)의 이론

『차라투스트라...』의 4부는 우월한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인물들(예언자, 두 명의 왕, 거머리를 가진 인간, 마술사, 마지막 교황, 인간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자, 자원한 거지, 그림자)을 다룬다. 우월한 인간의 양면성은 반동적 본성 및 유적 활동이다. 우월한 인간은 반동적 인간이 그 속에서 자신을 우월한 것으로 표현하는 이미지이고, 그 속에서 문화나 유적 활동의 산물이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8 인간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인가?

이 질문에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훤씬 더 심오하다> 라고 답해야 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힘들은 그것의 대립자를 요구하는 반동적 힘들로 보인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방문객들에게 실패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 실패는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달성한 목적 자체가 본질적으로 실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월한 인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우월한 인간이 실패하는 이 지점에서 초인이 성공을 이룬다고 제시하는 해석들도 거부해야 한다. 초인과 우월한 인간은 목적과 그들을 생산하는 심급, 두 측면에서 본래적으로 다르다(differ in nature).(당신들 우월한 인간들이여,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이 잘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음 질문. 왜 유적 활동, 그것이 본질적으로 실패한 것인가? 그것은 허무주의와 결탁하는 반동적 힘들을 훈련시킨다. 그 속에서 능동적 힘들은 긍정하는 힘에서 분리되어 반동적이 된다.

우월한 인간은 반동을 능동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반면, 차라투스트라는 가치들을 전환 시키고, 부정을 긍정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우월한 인간들의 계획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본질적으로 실패하지 않는) 조건들은 본성을 변화시키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이고 초인의 요소이다.

 

9 허무주의와 전환: 집약적 지점

부정의 요소 속에 머물러 있는 한, 가치들을 변화시키거나, 신을 죽여도 소용이 없다. 가치들이 파생되는 요소 자체를 변화시킬 때 가치를 전복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허무주의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가 문제이다. 전환(transmutation)이 일어날 때 허무주의는 완성되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 의해 극복된다. 전환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낡은 요소를 파괴한다. 전환에서부터 행하는 것이 어떤 타협도 없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비판이다. 하지만 이는 전환이 그것들의 결과들에 의해서 아니라, 전환 자체가 왜 허무주의적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허무주의, 무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의 성질일 뿐 아니라 힘에의 의지 일반의 인식 이유이다. 힘에의 의지가 허무주의에 의해서 알려질 때, 힘에의 의지는 우리에게 그것의 양상들 중 오직 부정의 형태로서만 인식됨을 알려준다.(If nihilism makes the will to power known to us, then conversely, the latter teaches us that it is known to us in only one form, in the form of the negative which constitutes only one of its aspects, one of its qualities) 우리는 힘의 의지를 인식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 사유한다. 마찬가지로 힘에의 의지로부터 인식하는 것은 고통과 체형이지만, 힘에의 의지는 기쁨, 행복이다. 힘에의 의지의 다른, 알려지지 않은 성질은 긍정이고 이것이 힘에의 의지 일반의 존재 이유이다. 이렇게 새로운 가치들이 파생한다. 즉,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우선 서로 증오해야 한다.

그러나 전환이 한 요소를 다른 요소로 대체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왜 완성된 허무주의인가?(transmutation nihilism) 앞서 말한 허무주의의 단계를 살펴보면 반동적 힘들이 무에의 의지와의 동맹을 파괴한 이후 무에의 의지는 반동적 힘들과의 동맹을 파괴한다. 이것이 사람에게 불러일으키는 성향이 니체가 말하는 자기-파괴, 능동적 파괴이다.

 

10 긍정과 부정

이 때 니체는 왜 부정을 긍정(affirmation)과 뗄 수 없는 것으로 제시하는가. (1) 자기 자신만큼 어마어마하고 무제한적인 부정이 직접적으로 뒤따르지 않는 긍정은 없다. (2) 엄청난 부정이 자신을 앞서가도록 하지 않는 긍정은 없다. 부정으로부터 분리된 긍정은 항상 ‘예’라고 말하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르는 나귀의 긍정이다. 이제 부정은 긍정하는 힘이 되었고, 긍정 그 자체의 존재 방식일 뿐이다. 그렇기에 니체는 반동적 힘들 속에서의 부정인 원한과, 긍정하는 힘의 존재 방식인 공격성을 구분했다.

 

11 긍정의 의미

왜 순수 긍정은 두 부정을 포함해야 하는가. 나귀의 긍정은 왜 거짓된 긍정인가. 나귀의 장광설에서 두 요소를 구별해야 한다. 한 가지는 우월한자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긍정에 대한 예감(apprehension)이다. 다른 한 가지는, 긍정의 본성에 대한 오해이다.

나귀는 무거운 짐을 지는 낙타와 같다. 나귀의 긍정은 짐을 지고 책임을 떠맡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현실)에 복종.

니체의 철학은 존재, 인간, 수락의 공리들에 대립된다. 세계는 참되지도, 실재(현실)적이지도 않다, 다만 살아있다. 살아 있는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며, 다양한 힘들 아래서 실현되는 거짓의 의지(will to falsehood)이다. 그것은 평가하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 또한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차이를 향유하는 의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짐을 떠맡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들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12 이중의 긍정: 아리아드네

니체가 제시한 존재에 대한 새 이론, 긍정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최초의 긍정(생성)은 존재이지만 그것은 두 번째 긍정의 대상으로서만 존재이다. 그래서 모든 힘 속에서 긍정은 이중적이다. 니체의 저작에서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차라투스트라의 두 마리 짐승, 독수리와 뱀.

(2) 성스러운 부부, 디오니소스-아리아드네

영원회귀는 생성과 존재를 최대한으로 접근시키고, 그것은 서로를 서로에 의해 긍정시킨다. 그리고 접근을 행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긍정이 필요하다.

(3) 미로 또는 귀들.

 

생성, 다수, 우연이 그들을 대상으로 삼는 두 번째 긍정에 의해서 생성은 존재이고 다수는 하나이며, 우연은 필연이다.

 

13 디오니소스와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가 본질적으로 정의하는 것, 그것은 가치들의 전환이다. 그의 역사(story)는 허무주의, 악마와의 관계 속에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더불어 부정은 그 힘과 성질을 상실한다. 또한 어떤 관점에서 그는 영원회귀의 원인이고 초인의 아버지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영원회귀의 전제조건(precondition)과 관련해서 그렇다. 영원회귀는 그것을 조건 짓는 원리의 관점에서는, 전환에 의존한다. 그러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원리의 관점에서는 전환이 영원회귀에 의존한다.(From the perspective of the principle which conditions it, the eternal return depends on transmutation but, from the perspective of its unconditioned principle, transmutation depends more profoundly on the eternal return) 차라투스트라는 아리아드네의 조건부 약혼자이지만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의 어떤 조건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약혼자이다. 그는 영원회귀의 원인이지만 그것의 결과를 산출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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