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_철학.예술 :: 철학과 예술 분야의 칼럼입니다!


을 위한 주석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의 만남

이지은

 

 

“나는 …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베트남에 있는 한국 대사관 앞에 가서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데모를 하세요. 저도 돕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한국군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베트남 여성에게 건넨 말이다. 나는 이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글을 쓰려고 다시 찾으니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보아 온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뒤져도 좀처럼 내 기억과 같은 장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운동사를 담은 <25년간의 수요일>에서 본 것 같다고 했고, 그제서야 나는 내 기억 속의 영상이 어쩌면 문자를 토대로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착각의 이유를 더듬어 보자면 아마 나는 <낮은 목소리 3>(변영주, 2008)의 한 장면을 저 문장과 섞어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도 같다. 용수 할머니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같은 필리핀 ‘위안부’ 여성과 신나게 춤추던 그 장면을.

 

이용수할머니.png
필리핀의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과 만난 이용수 할머니 (영화 <낮은 목소리 3> 중에서)

무엇이 나에게 그토록 선명한 기억을 남겼을까. 내게 하나로 각인된 두 장면. 그것은 어떤 삶이 자신과 닮은 다른 누군가의 삶을 끌어안는 장면이었다. 나는 두 삶이 너무나 비극적이었기에 몹시 마음이 쓰라렸는데, 할머니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부둥켜안고, 씩씩하게 웃으니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다. 국가도 민족도 뛰어 넘은 이들의 만남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우물쭈물 하였다.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른 대상과 싸우고 있는 남이 아니라 비슷한 비극을 짊어진 동지고 자매였다. 물론 이렇게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장을 걷어내고 생살에 새겨진 같은 상처를 알아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에 법적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무려 2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일본 정부는 법적인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고 있고, 일부 극우 인사는 그나마 인정했던 ‘도의적’ 책임마저 부인하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는 식민지 역사의 상흔이 부착되어 있어, 이 항의는 때때로 극단적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사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가장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사안이 되었다. 그런데 ‘삶’이라는 시작점에서부터 ‘정치’라는 거대한 단어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놓이다 보니 둘을 함께 보는 눈들이 점점 줄어든 것 같다. 어느새 ‘정치’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다든가, 불가역적으로 ‘합의’ 할 수 있다는 발상들. 생살에 새겨진 상처는 완료되거나 합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내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목격한 것은 거창한 단어들이 아니라 삶과 삶이 만나는 장면들이었다. 가장 먼저 한국 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윤정옥 선생의 일화는 이렇다. 1943년 윤정옥은 대학 1학년 열일곱 살이었다. 여자 정신대, 학도병, 강제 징용 등 흉흉한 말들이 떠돌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군복 입은 사람이 와 학생들을 지하실에 몰아넣고는 네모반듯한 종이에 지문을 찍으라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윤정옥은 ‘정신대’에 끌려갈까 두려워 학교를 자퇴했다. 해방이 되고 그녀는 강제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기다린다. 그런데 학도병 갔던 사람, 강제 징용 갔던 사람, 보국대 갔던 사람 다 돌아오는데 여자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한다. 그때 사라진 친구들, 동년배의 여자들을 찾아 나선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다.      

 

빨간기와집.png

가와다 후미코, <빨간 기와집>(꿈교출판, 2014)


가와다 후미코는 배봉기 할머니를 무려 10년 가까이 인터뷰 한 끝에 <빨간 기와집>을 썼다.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다. 할머니는 1944년 가을 오키나와의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온 후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고, 해방이 된 뒤에도 그곳에 남았다. 종전 후 오키나와는 미국령이었는데, 1972년 일본으로 복귀되자 할머니는 불법체류자가 되어 강제퇴거 대상에 올랐다. 할머니는 특별 체류 허가를 받기 위해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관의 취조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위안부’로 끌려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와다 후미코는 전쟁 때 군 ‘위안부’로 오키나와로 끌려온 한국 여자가 특별 체류 허가를 받았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나선다. 1977년 12월 5일, 가와다 후미코가 기억하는 배봉기 할머니와의 첫 만남이다.


가와다 후미코는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던 즈음 싱글맘으로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래 후미코가 여성의 ‘성’과 그것을 거래하는 성매매에 관해 관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배봉기 할머니의 삶에서는 특히 아시아 여성의 기구한 운명을 보았던 것 같다. 두 삶의 무게를 달아 맬 수는 없지만, 가와다 후미코에게 배봉기 할머니의 삶은 그녀가 견뎌야 할 여성으로서의 삶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곱 살부터 민며느리로, 식모로 남의집살이를 시작하여 ‘여자 소개꾼’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가 되기까지, 곡절 많은 배 할머니의 삶에서 후미코는 아시아 여성의 비슷한 운명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배봉기할머니.png

배봉기 할머니
(사진 출처: 길윤형, 「위안부 최초의 증언, 고 배봉기 할머니」, <한겨레신문>, 2015.8.7.)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모아 놓은 어떤 책에는 열리는 따옴표만 있을 뿐 닫히는 따옴표가 없다. 할머니들의 말투, 목소리의 떨림, 말과 말 사이의 끊어짐. 이 모든 것들을 문자로 표현하려 했던 편집인들의 취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배봉기 할머니의 49재가 열리던 1991년 12월 6일, 김학순 할머니는 어떻게 알았는지 배 할머니의 추모식에 1만 엔 조의금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날은 우연히도 김학순 할머니가 도쿄지방재판소에 최초의 위안부 피해 보상 소송을 청구한 날이었다. 어느 기자의 말을 빌리면, 그렇게 배봉기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에게 “바통 터치”를 하고 떠났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규명과 일본 정부의 법적 사과 촉구. 운동의 구호는 거대한 제국과 국가를 향해 겨누어져 있지만 이 문장을 만들어 낸 것은 삶과 삶의 만남이다. 배 할머니는 전쟁 때 한 일이 부끄러워 고향에 못 간다고 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소를 만든 것은 민간 업자라는 일본 정부의 거짓말에 분노하여 역사의 증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배봉기 할머니에게 보내는 조의금에는 어떤 마음이 담겼을까. 종전 후 일본에 남았던 일본군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 할머니의 투쟁을 도왔던 사람들은 재일조선인 여성들이었다. 그들 사이의 삶의 끈은 또 무엇이었을까. 사라진 친구들의 삶을 추적한 윤정옥 선생, 베트남 여성들에게 한국 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라고 격려하는 이용수 할머니, 일본인 ‘위안부’ 여성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야마시타 영애 선생. 견해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들은 모두 삶을 마주한 사람들이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가 길어지고, 학문적 논쟁이 과열되다 보니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언어의 미로 속에서 표류하게 된 것도 같다. ‘화해’를 명분으로 할머니들의 삶이 아무렇게나 잘라 붙여지기도 한다. 단언컨대 ‘과거’와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불가역적’인 것은 과거다. 위로금 대신 내 청춘 돌려달라는 할머니의 말에 누가 답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미래’와의 화해일 뿐이다. 할머니의 삶을 증명하고, 다시는 누구의 땅에서라도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미래와의 화해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삶’을 만나야 한다. 내 삶과 그 삶을 연결하는 일, 또 하나의 따옴표를 여는 일, ‘바통 터치’ 하는 일 말이다. 여기 최초의 따옴표이자 아직도 닫히지 않은 따옴표가 있다.

* 이 글은 웹진 <문화다>에 실렸던 글입니다. 

*수유너머 104 여름 강의 <'위안부' 문제에 던지는 다른 질문들>에서 함께 고민을 나누어요.

 *강의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http://www.nomadist.org/s104/LectureAD/16050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7 자유인의 공동체와 노예의 공동체(3)(이진경) [2] file Edie 2017.10.05 1318
126 자유인의 공동체와 노예의 공동체(2)(이진경) [13] file Edie 2017.10.03 2054
125 자유인의 공동체와 노예의 공동체(1) [4] file Edie 2017.09.24 3234
124 애니메이션 혹은 기계적 영매에 대하여 (이진경) file Edie 2017.09.14 2197
123 [이슈] 이재용 재판을 톺아보며 [3] 누혜 2017.09.09 393
122 무모한 자들의 공동체(이진경) file Edie 2017.08.21 2753
121 [이슈] 우리는 인공지능과 함께 살 수 있을까? file compost 2017.08.17 736
120 전체주의와 공동체(이진경) [15] file Edie 2017.07.23 3969
» [이슈] 삶을 위한 주석: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의 만남 file Edie 2017.06.23 604
118 [이슈_장애, 그리고] 발달장애인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지음, 『그래, 엄마야』, (오월의 봄) 수유너머웹진 2016.12.28 43
117 [이슈_4040] 촛불시대의 정치선동 수유너머웹진 2016.11.28 27
116 [과학X철학 토크박스] 현상학이 과학에 답하자면 [1] 수유너머웹진 2016.10.05 35
115 [과학X철학 토크박스] 지금 현상학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수유너머웹진 2016.09.02 56
114 [이슈_4040] 마녀들의 밤, 그리고 "다시 만난 세계" [1] 수유너머웹진 2016.08.18 22
113 [이슈_4040] 사드와 꼬부기 수유너머웹진 2016.07.20 21
112 [이슈_4040] "안전사회"의 완성 수유너머웹진 2016.06.22 19
111 [이슈_장애, 그리고] 장애운동의 기록과 당사자성 - 제14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토크쇼 "기록의 후예들" 수유너머웹진 2016.05.27 139
110 [이슈_4040] "문제는 노동이야" - 경제민주화와 최저임금 수유너머웹진 2016.05.24 26
109 [이슈_장애, 그리고] 장애와 노동의 불편한 동거 -김도현, “장애인은 대한민국의 시민인가”, <창작과 비평>, 171호, 2016년 봄호 수유너머웹진 2016.04.24 58
108 [이슈_지안의 난독일기] “유니온 세대”의 불가능성 수유너머웹진 2016.04.03 27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