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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닉네임을 바꿨어요. 전에 이름은 의미부여하기 싫어서 아무렇게나 했는데, 저는 기호가 방사하는 빛을 좇아가지 않으면 못사는 인간인가 봅니다. 불필. 누구에게도 인정이나 이해를 바라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고, 나는 너보다 잘난 것이 하나도 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선언이기도 하고, 스스로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선언이기도 해요.

 

  2. 수업시간에 메시아를 개인의 차원과 집단의 차원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서 벤야민은 어떻게 생각했던지 궁금했던 것은, 개인 차원의 운동(수행)과 사회 차원의 운동(혁명)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봐서 그랬어요. 물론 벤야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제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생각은 그의 글에 비의적으로 느껴지는 문장이 많아서 나 같은 사람도 알아들을 말로 써주지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벤야민 읽기는 꽤 즐거웠어요.

 

  3. 오늘 퇴근하고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단지 생각으로만 가능한 것이고, 생각은 그렇게 현실적인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이 환상과도 같은 것을 치우면 이미 온전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요. 기분일 뿐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다시 언어를 붙잡으려고 하는 건 속세에 울분이 많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정말...ㅎㅎㅎ 하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사상가이신 정화 스님(^^;;100% 진심입니다)께서 전에 언어란 환과 같고 살아가는 매순간이 온전한 존재의 이유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분명 언어와 삶이라고 하는 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의문이면서 궁지이고 벽이 되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뭘까요? ...아마도 할퀴고 싸워도 금새 다 잊어버리고 내일이면 다시 놀게 되는 어린아이의 진실을 아는 것 아닐까요?

 

  4. 최유미 선생님께서 최근에 “생각은 손가락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쪽글을 쓰다보면 손가락이 머리로만 했던 단편적인 생각을 정리시키기도 하고, 똑같은 말이었는데도 ‘아니 이렇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정도의 깨달음을 주기도 하네요. 생각이 얼마 전의 생각과 부분적으로 달라지기도 하고요. 요즘은 생각을 할 때 생각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고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5. 벤야민은 세상이 좋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역사유물론자”로 규정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역사가 천사를 그리는 방식”을 집단적 차원에서 생각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국가나 공동체가 해체되는 우리 시대의 조건에서 필요한 건 주권자-개인의 연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무척 비관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낙관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해요.

  아무래도 (넓은 의미에서, 저 같은^^) ‘난민’에겐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역사가 있다면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단속적인 역사, 기대가 꺾이고 희망이 좌절되는 역사,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회만 있는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지금의 역사가 천사를 스케치하는 방식이겠죠.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라는 국가가 해야 할 세 가지 권력을 개인이 맡아야 하는 역사를 목도하고 있다면, 또한 ‘새로운’ 소비와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역사와 마주하고 있다면, 그런 역사를 어떻게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미 우리 시대가 천사를 낡은 것으로부터 몰아내는 폭풍들로 가득한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벤야민이 역사를 이야기할 때 말하는 새로운 천사라는 말도 제겐 낡아보여서, 더 새로운 천사, 새롭지만 통상적이지 않은 천사(?)를 누가 좀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새로운 천사를 하나의 인격으로, 개인으로 읽고 싶거든요. 벤야민도 지금 시대라면 그런 식의 '새로운 천사'를 생각해보지 않을까요?ㅎㅎㅎ 아무래도 지금은 다 때려치우고 ‘세상은 세상이고 나는 나다!’하고 사는 게 무척 적절한 대안이고 저항인 거 같은데요...^^

 

 

  혁명을 혁명하기            /             종헌

 

  희망을 희망해야하듯 혁명을 혁명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 벤야민이었을 것이다. 그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9번째 테제에서 새롭게 해석된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는 이런 모습이다.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벤야민은 당대의 통상적인 사회주의자가 그랬듯이 결국엔 좋은날이 올 것이라는 단선적인 진보의 도식을 거부한다. 그는 차라리 진보를 거부하고 진보에 저항하며, 지금 일어나는 파국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진보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것이고, 무언가를 향한 전진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의 탈출이다.

  낡은 천사는 개인이 갖고 있는 통념 내지 상식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엔 많았고 지금은 적은, 진보를 꿈꾸는 통념적인 천사들은 역사의 법칙에 따라 상대적으로 박탈당한 대중들이 필연적으로 계급사회에 저항하는 투사가 되어 마침내 자유의 왕국이 오리라는 기대를 가진다. 이 천사들은 착취와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불만을 ‘사회주의적’으로 드러낼 것이라는 필연성을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고정된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대개의 경우 통념은 우리가 경험하고 상상하는 삶이나 세계가 변치 않고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하는 것인데, ‘진보주의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낡은 천사를 벤야민이 말한 “역사유물론자”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이 충분히 혁명적이지 않은 혁명가들이 적어도 두 가지를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된 인간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체제는 긍정되거나 부정되는 것이라는 이분법에 대한 믿음. 낡은 천사는 기존의 체제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그 체제를 이루는 가치에 동의하고 있다는 가정에 반대하여 그런 가치를 가진 체제에 의해 구성원들이 강요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한 사회의 구성원을 체제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식의 이분법으로 말한다는 것은 부차적인 듯하다. 정말 따져봐야 할 것은 우리가 사회의 규칙을 통념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는 진정한 혁명이 도래할 수 없다. 흔히 정의내리듯 혁명을 적대와 계산으로 가득한 세계와 단절하여 차별 없고 평등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체제를 부정하는 이들이 말하는 평등은 그것이 아무리 급진적이고 비판적일지라도 이것의 가치는 부르주아 문화에서 온 것이고 따라서 소유권 안에서의 평등일 뿐이다. 아버지의 법 안에서의 평등이므로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이런 혁명은 오히려 체제를 수호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복지국가의 이념이 그런 것 아닌가? 낡은 천사는 인간을 소유의 울타리 안으로 가두며 그런 조건 속에서만 실천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낡은 천사는 해방을 위해 개인들의 지속적인 비교와 박탈을 원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개개인은 욕망과 소유를 자극받고 점점 '평등'해지면서 혁명적인 것과는 반비례 관계가 된다. 이를 보면 부정의 정신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고 과거 지향적이며 기존의 체제를 강고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지는 않는가 의심된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말한 새로운 천사는 어떻게 혁명을 혁명하는가. 통념적인 평등 너머의 세계에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차별과 불평등이 사람들을 사회주의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예언이 틀린 것처럼 생각되고, 오히려 차별과 불평등은 영속적인 상황이 되리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예언처럼 들리는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새로운 천사는 우리가 가진 생각을 근본부터 따져 묻게 하고 사회주의에 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길 요구하는 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머니에 관하여 급진적이어야 할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정한 주체로서 급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만들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든 ‘왜?’라고 의문을 던지는 것만큼 혁명적인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이, 특히 현실의 생활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문을 불쾌감이나 모욕감으로 느낄 누군가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식과 자유를 행사해서 익숙한 지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럴 만큼 열린 태도를 가지고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이득임을 또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천사는 우리를 고귀한 자의식을 가진 영혼으로 만들고, 타인들과 삶을 공유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대로 들어가도록 유혹한다. 이로써 우리의 감각은 예민해지고 우리는 이전의 경험을 초월해 새로운 경험의 지층에 서게 된다. 벤야민은 이러한 초월을 메시아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혁명이 이러한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벤야민을 읽으며 메시아적 세계가 언제나 막막한 대지 위에서 고립된 소수의 인간에게만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은 단지 기분만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정리하고 이해해서 하나의 일관된 생각으로 만든다. 그런데 세계-내-존재로서 우리에게 경험들의 집합은 하나를 초과하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선택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생각들의 경쟁 속에서 메시아적 세계에 관한 생각은 밀려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적 세계는 도래한 현재 이후에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고, 과거에서 원인을 찾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즉 메시아적 세계는 ‘현실적인’ 경험에 속하지 않고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필연성을 떠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천사는 실증주의(혹은 실용주의)를 거부한다. 실증주의는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도 강하게 그를 필연성의 의지에 못 박는다.

  지금까지 메시아를 꿈꾸고 실천했던 역사는 불평등과 소외에 대한 반작용의 역사였다. 낡은 천사들은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지의 땅을 피해 확실하게 안주하는 피난처로 향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렇게 필연성을 증명하려는 욕망은 비참과 소외로부터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소외와 비참에 의해 깊게 패인 상처에 매인 사람이 메시아적 세계를 어떻게 도래시킨단 말인가? 메시아적 세계가 통상적인 시간성과 필연성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고 구속하는 과거의 기억에 매인 낡은 희망을 단호히 놓아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메시아적 희망을 희망해야하지 않을까? 어쩌면 급류에 휩싸인 사회, 휘몰아치는 파도에 모든 것이 휩쓸리는 사회인 지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을 계기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까지의 역사는 혁명과 자유와 진보를 말했지만 실제로는 노예 상태로 이끈 역사였다. 하지만 벤야민의 말처럼 예외상태가 상례이고 우리의 진정한 과제는 비상사태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천사들의 지평을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천사들은 우리의 창조적 의지가 허약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우리를 넘어설 것이다. 하나의 메시아적 세계는 다른 메시아적 세계의 어깨를 타고 무한히 넘어설 것이다. 메시아적 세계는 ‘현실세계’를 결코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탐사하지 못한 새로운 땅은 영원히 정복되지 않을 것이고 매혹적인 모험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기만하는 천사들과 천사 아닌 것들이 새로운 천사에게 가하는 비판, 나아가 다른 새로운 천사가 가하는 급진적인 비판은 오히려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메시아를 기다릴줄 모르는 사람에게 폭도나 정신병자로 취급당했던 사람은 이제 그들에게 진실하고 참된 것이 무엇이고 무책임하고 병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현실적인’ 세계를 사는 다수의 사람들은 메시아적 세계라는 ‘비현실적인’ 고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며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한다. 벤야민이 살았던 시기의 낡은 망령들 또한 자유와 책임을 방기하면서까지 모든 이들이 믿고 안주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견고한 것을 원했다. 그러나 현실이 비현실과 투쟁하고 억압한 역사가 증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메시아적 세계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저 너머에 분열된 채로 언제나 떠있을 것이다. 인간은 저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구하는 존재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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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 칸트 인간학 8강을 마치고 현옥 2023.05.07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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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 [푸코의 말과 사물] 9강 발제 ~ 3,4절 file 동현 2023.05.03 25
1455 푸코 말과사물 제9강 7장 재현의 한계 5-6절 발제 file 박소원 2023.05.03 34
1454 칸트 8강 쪽글 file 담묵(상혁) 2023.05.01 38
1453 칸트7강후 쪽글(6강 쪽글을 대신할 학부~발제문도 함께) 진(소나무) 2023.05.01 30
1452 [칸트의 인간학] 7강 쪽글 여여 2023.05.01 19
1451 [칸트의 인간학] 5-6강 쪽글 누혜 2023.05.01 29
1450 칸트 7강을 마치고 현옥 2023.04.30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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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 [푸코의 말과 사물] 8강 질문 현진 2023.04.28 23
1447 [푸코의 말과 사물] 8강 쪽글 file 동현 2023.04.28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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