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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_1학기 인사원 <아감벤의 정치철학>
효영 180409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

 (1)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내의 번호 붙여진 절 구분은, 괄호안의 숫자로 표기합니다.
 game and gambling, gaming machines, chess playing Turk, design by Wolfgang von Kempelen (1734 – 1804),  알파고에 버금가는 체스두는 자동기계. 이를 벤야민은 역사주의에서 역사적 유물론이 늘 이기게 되어있음에 대한 비유로 사용한다. 만약 역사적 유물론이 신학과 손을 잡는다면 승산은 더욱 높아진다.

 (2)역사적 유물론자가 알았던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가 향할 미래 속에 행복의 이미지가 있고, 다시 그 속에 구원의 관념이 은밀한 지침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역사적 유물론자들은 그에 대한 요구로서 주어지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의 중요성을 감지한다. 만약 헤르만 로체가 말하듯, 미래에 대해 아무런 부러움도 갖지 않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심성이라면, 이는 더욱 유의할 만하다. (3)벤야민이 ‘구원된 인류에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된다‘고 기술하는 부분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구원된 인류에게는 무엇이 역사의 대상이 될 만한가?를 선별하는 작업이 불필요하다. 과거로부터 축적된 매 순간순간이 (구원의 시점에서) 소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4)역사적 유물론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투박한 계급투쟁을 최일선에 둔다. 이것들 없이는 섬세하고 정신적인 것들도 있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신적인 것들을, 계급투쟁의 결과로 떨어지는 일종의 전리품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물어야 한다. 계급이 전복되었을 때, 우리는 지배자의 자리에서 다시, 역사의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려고 애쓰게 되지 않을까?
  (5)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획 지나간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 이미지안에 의도된 것으로서 현재에서 인식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뿐더러, 복원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진리란 달아나지 않는다는 말은 혁파된다.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달아난다. (6)그래서 벤야민은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가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위험의 순간에 예기치 않게 나타난다. 이것은 과거가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는 게 아니라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 즉 적그리스도적 전승을 극복하고, 다시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역사가에게만 우리는 메시아의 희망을 볼 수 있다. (7)역사적 유물론자라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진정한 역사적 증상을 붙잡을 자신이 없는 마음의 나태함, 태만에 근거하는 감정이입의 방식을 멀리한다. 역사주의적 역사가가 승리자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승리자에게 짓밟힌 자들, 무명의 동시대인들인들의 노역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 이것이 역사적 유물론자가 설정하는 자신의 과제이다.
  (8)예외상태가 상례임을 알았을 때, 우리의 과제는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된다. (9)그런데 이런 비상사태란,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폭풍처럼 세차게 불어오는 불강항력적인 힘으로 온다. 벤야민이 클레의 <새로운 천사>작품에서 역사의 천사를 보았을 때, 그가 상상한 천사 역시 이 거센 폭풍에 의해 미래 쪽으로 끊임없이 떠밀려간다. 벤야민은 이 폭풍을 진보라고 명명한다.
  (10)벤야민이 이 논문에서 추적하고 있는 사유 과정, 즉 역사적 유물론자들의 사유란, 촘촘한 파시즘의 그물망, 혹은 파시즘이 고수하는 역사 관념과의 대결이다. 파시즘이라는 익숙한 사고와 스스로를 구분짓기 위해서는 물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이는 불가피한 투쟁일 수 밖에 없다. (11)벤야민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패인도 이와 유사한 타협주의에서 찾는다. 시대의 물결을 타고 간다고? 노동이 모든 부와 문화의 원천이라고? 맑스는 무산계급을 노동력 이외에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 그렇기에 유산계급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잘 보았지만, 그의 노동 개념 역시 속류 맑시즘에서는 새 시대의 구세주로 치환되어버린다. 자연지배의 진보라는 밝은 전망 속에 사회의 퇴보를 가려버리는 이 같은 노동개념은 파시즘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벤야민은, 노동을 ‘공짜로 주어진’ 자연에 대한 착취로 소박하게 이해할 바에는, 차라리 자연의 품속에 가능성으로 잠들어있는 산물들을 출산시킬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노동의 건강의 의미를 드러낸다고 본다.
 (12)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에게 미래를 세대를 위한 구원자라는 역할을 부여했는데, 이 역시 벤야민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구원자라는 역할은 자손의 이상이라는 미래가 아니라 억압받은 선조라는 과거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가장 강력한 힘줄을 잘라내버린 것과 같다. (13)사회민주주의 이론은 3가지 진보 개념-①인류의 진보 자체, ②종료시킬 수 없는 진조, ③저지할 수 없는 진보- 역시 균일하고 공허한 시간을 관통하는 역사의 시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된다.
  (14)벤야민이 보기에, 역사란 구성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때 구성의 장소란, 위와 같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시간(Jetztzeit)으로 충만된 시간이다. 즉,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 현재로 불러내는 충전된 과거로서의 역사이다. (15)특히 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한다는 의식은 혁명적 계급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근 100년 사이의 달력은 이렇다할 흔적조차 없지만, 뜨거웠던 7월 혁명 시절, 역사는 시계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그날을 정지시키기 위해 시계 판에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는 한 목격자의 시의 한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16)이처럼 시간이 정지해버린 현재라는 개념, 벤야민은 이것이야말로 역사적 유물론자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현재에 대한 정의이자, 유일무이한 경험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기술이다. (17)이러한 역사적 유물론자의 태도를 역사주의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게 그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역사주의가 기술하는 보편사는 가산적인 방법으로, 공허하고 균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데 급급해한다. 반면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하나의 구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거기에는 생각의 흐름뿐 아니라 정지가 포함되고, 바로 그 정지의 순간(성좌, Konstellation), 긴장으로 가득찬 상황에서 메시아적 정지의 표지, 과거를 위해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이것이 역사의 여러 계기들 사이의 인과적 결함을 열심히 찾는 역사주의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유물론적 역사가들은 자신의 시대가 과거의 특정한 시대와 함께 등장하는 성좌구조를 포착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메시아적 시간의 파편들이 박혀있는 ‘지금시간’으로서의 현재의 개념을 정리한다. 미래 속의 매초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 (1940) 앞 논문과 내용이 중복되는 부분은 발제를 생략했습니다.(eg. 전통의 문제II(364쪽))

 과거를 현재 속에 투사하는 것, 즉 과거 속으로의 감정이입은 실증주의적이다. 이러한 역사가 지니는 실증주의는 역사 속 사건의 진행에서 어떤 법칙을 찾아내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현재화의 거짓 생동성을 통해 역사에서 나오는 ‘비탄’의 메아리를 모두 제거하고 역사를 현대적 개념의 역사 아래 종속시켜버린다.

 {17a
 맑스는 계급 없는 사회의 관념 속에 메시아적 시간관을 세속화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사회민주주의가 이 생각을 이상으로 떠받들고, 신칸트주의에서 이것이 무한한 과제로 정의되었을 때 불행은 시작된다고 벤야민은 기록한다. 혁명적 기회의 시간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사랑방처럼 취급할 때, 그 의미는 왜곡된다. 벤야민이 보기에 사실 매순간은 혁명적 기회를 동반한다. 다만 각각의 역사적 순간의 독특한 혁명적 기회는 그 때까지 닫혀있던 과거의 어떤 특정한 방을 열고 들어갈 힘을 통해 확인된다. 이것이 벤야민이 뜻하는 메시아적 행동이다. 그것은 맑스가 그리듯 단계적으로 전향하여 도달하는 최종목표가 아니다. 이것은 거짓된 구상이다. 그 반대로 그것은 차라리 진보의 중단, 자주 실패했지만 끝내 이루어낸 중단에 가깝다. 그래서 벤야민은 혁명을 세계사의 기관차에 비유했던 맑스의 경구를 뒤집어 말한다. 아마 혁명은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최후의 심판일은 과거를 향한 현재이다. 그때그때 다루는 시대를 전사와 대결시키는 일, 그리하여 현실적인 현재와 역사를 연대하는 일 그것이 역사를 기술하는 이의 일이다.

 새 테제들B
 역사적 인식은 역사적 순간에만 유일하게 가능하다. 반대로 모든 역사적 순간들을 공통분모로 환원하려는 보편사의 관념은 이러한 한 순간에 대한 인식을 실행하지 못한다.

 새 테제들C
 역사가 매끈하게 미끄러지듯 진행된다면 우리는 진보에 대해 예기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란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수천가닥으로 흩어지고 헝크러진 머리다발처럼 어떤 역사도 특정한 장소를 갖지 못한다. 지난 역사에서 벤야민은 진보보다 차라리 니체적 영원회귀를 발견한다. 신화적 숙명이 재현하는 영원회귀는 또한 형벌로서의 세계, 그 형벌의 영원함을 통해 드러난다.

 새 테제들H
 보편사를 그렇다고 다 부정할 일은 아니다. 아닐 때도 있다. 구성적 원칙에 의해 서술되는 보편사는 반동적이다. 구성적 원칙은 보편사를 부분사들 속에서 재현하는 것을 허용한다. 가령 산문의 이념은 보편사의 메시아적 이념과 합치한다. 앞선 논문, 14절에서 역사란 구성되는 것,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구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고 할 때의 ‘구성’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반동적’이라는 의미는? ‘보편사가 메시아적 이념과 합치한다’ 혹은 ‘메시아적 세계는 보편적이고 완전한 현재성의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 비로소 보편사가 존재한다.’고 할 때, 보편사란, 앞서 서술되었던 역사적 유물론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하나의 법칙으로 역사적 사건을 환원시켜버리는 보편사와 다른 보편사를 뜻하는 것일까? 벤야민은 보편사를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새 테제들K
 혁명이란 기관차가 아니라 오히려 비상 브레이크라고하는 벤야민은, 구원 역시 진보를 막는 경계선의 방어벽이라고 서술한다. 메시아적 세계의 보편사란, 축제로 보낸 역사, 완전한 현재성의 세계와 같다. 이 메시아적 세계의 언어란 문자의 사슬을 폭파한 해방된 산문, 일종의 에스페란토어와 같이 존재한다.

 서문
 벤야민에게 있어 신학이란 압지가 더 이상 빨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머금은 잉크와 같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신학적인 개념을 갖고 기록하려고 해선 안되지만, 반면 非신학적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것 역시 금지된다(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방법론적 물음들III
 역사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시선이란? 마치 맑스의 이론에서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이 옛 생산수단의 형식에 지배를 받듯, 보다 빠른 진보는 그만큼 빠르게 나타나는 한 시대의 고대적 얼굴을 나타낸다.

 {전통의 문제 I} 정지상태의 변증법
 근본적 논리적 난관: 사건들의 연속체로서의 역사에 대립하는 것이 불연속체로서의 전통이라면, 전통이란 가상일까? 이 가상의 항상성이 만들어내는 전통 속의 연속성
 근본적 논리적 난관: 억압받는 자들의 역사가 불연속제체라면, 그리고 이러한 불연속성에 대한 의식이 혁명적 계급의 독특한 점이라면, 로마공화정을 2,000년만에 다시 불러낸 프랑스혁명에서 발견되는 연속성이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의 설명: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는 이러한 연관이 순탄하지 않다. 즉 어떤 역사적 선례로 없다. 이로 인해 벤야민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연속체의 관념이 모든 것을 편준화하는 반면, 불연속체의 관념은 진정한 전통의 토대이다.’ 즉 연관이 있다면, 과거로부터 현재로 전해지는 역사의 연속성이 아니라, 이러한 새 출발의 감정과 그로부터 비롯하는 전통 사이의 연관일 것이다.(372쪽 참조)
 

 인식가능성의 현재(서문(361쪽) 참조) 
 역사가는 과거를 향한 예언자란 무슨 뜻인가? 한편으로 이는 멀리 떨어진 과거에 자신을 전치시키는 가운데, 그 과거를 여전히 미래로서 통용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함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자신의 시대에 등을 돌린 역사가가 그의 예언적 시선에서, 예전 세대들의, 더욱더 깊이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정점들을 보고 점화됨을 뜻한다. 벤야민의 의도는 후자에 있다. 튀르고가 “정치라는 것은 현재를 미리 예언하는 데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할 때, 그것은 곧 간단없이 변화하는 사태들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뒤늦게 알 수밖에 없다는 현재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있다. 과거의 현재화, 이것이 벤야민이 강조하는 진정한 역사기술의 현재성이다. 

 변증법적 이미지
 역사가 어떤 이미지를 동반하는 텍스트라면, 미래란 그 이미지의 세부내용을 드러내보여주는 강력한 현상액과 같다. 그래서 벤야민은 역사적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라는 프랑스 극작가 호프만스틸의 문구를 빌려온다.

 비판들
 우리가 어떤 공통의 척도를 승인하지 않을 때, 모든 영역에서 가능한 진보란 없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맑스는 이러한 진보 이론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는데, 그는 대신 진보를 프롤레타리아의 전개양상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진보의 척도로서의 또 다른 기준의 제시일까?


 A
 <출애굽기>에는 신의 현전의 징표로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등불이 나온다. 벤야민은 이 등불을 빌어, 진정한 역사적 존재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 전등은 구원된 인류의 이미지, 최후의 심판일에 점화될 불꽃과 같다.
 공허하고 균질한 시간의 전개에서 해방된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관념은 역사주의의 가장 중요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을 뒤흔든다. 
 첫째, 보편사의 이념을 타격한다. 인류의 역사를 한 줄로 꿰어내는 보편사란 사유의 게으름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적 언어의 이념이 무너지기 전이라면 신학적 토대 또는 논리적 토대가 있었지만, 19세기에서 보편적 언어란 일종의 에스페란토어일 수 밖에 없다. 에스페란토어가 무정부의자들이 19세기 말에 창조한 것(역사가 오래 안됨)이자 최소한의 문법규칙으로 간소화한 의사소통형식으로서, 어떤 거대한 역사적 기원 또는 대단한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보편사란 에스페란토어와 같다는 말은 보편사가 에스페란토어처럼 어떤 전통적인 기반이나 역사적인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형성된 허구에 불과하다는 의미일까??
 
 둘째, 역사란 서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란 생각을 공격한다. 맑스가 <자본>에서 보여주었듯, 그 어떤 서사도 배제한 채, 강철같은 이론에서 우리는 인류의 이해관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 구성이라면 유명인에 대한 기억보다 더 어려운 작업, 무명인에 대한 기억을 기리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가장 어려운 적, 승리자에게 감정이입하기를 배격하기이다. 역사에 점철된 수많은 투쟁은 승리자, 지배자, 그들의 전리품으로서 작성된 문화, 이런 것들을 역사적 유물론자는 공격한다. 대신 그 승리자, 천재들과 함께 살았던 무명의 동시대인들을 기록하는 작업, 그로부터 역사를 결을 거슬러 솔질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따라서 벤야민은 진정한 역사기술이란 대상을 역사적 진행 과정으로부터 폭파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위험의 상황에서, 역사의 주체에게 어떤 갑자기 나타나는 이미지(결코 경과가 아니라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제시되기에 비자의적인 이미지)가 있고, 그 때 역사가의 역능은 그 때 그 때 빠진 위기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에 달려있다. 이 때 주체란 선험적 주체가 아니다. 가장 많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이다. 벤야민은 말한다. 역사적 인식은 오로지 그 계급을 위해 있으며, 그것도 오로지 역사적 순간에만 있다고.
 더불어 진정한 역사기술은 과거에 대한 구제의 충동을 갖는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구제는 결코 유산으로 가치평가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벤야민이 보기에 그러한 방법은 과걱 실종되는 것보다 더 불행하다. 오히려 구제는 특수한 종류의 전승으로부터 가능하다. 그것은 곧 이미 흘러간 어떤 것이 지금과 만나 섬광처럼 성좌구조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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