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용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남의 관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제 성향과 편협함에 관해 생각해봤어요. 진리를 얻기 위해서 배후의 실재를 가리는 전설로 짜여진 커튼을 찢는 행위가 문학이라고 밀란 쿤데라가 말했다더군요. 그리고 그 커튼은 새로운 전설로 다시 짜인다고 해요.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많이 알지는 못해도 권 선생님처럼 인간다움이란 뭘까, 진리에 대해서 어떤 관점으로 접근해야 될까에 대해 종종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지, 윤리적(도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뭔지에 관해 질문하고 답을 구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생각은 세상-실은 사람-에 대한 분노와 연결되기 쉬운 것 같아요. 너와 나는 이미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라는 전제를 갖고 살려고 하지만, 사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사는 가치들을 모두 긍정하기는 어려운 법이겠지요. 그래서 저 또한 사람들의 생각들을 쉽게 불편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여기고는 특정한 사람과만 손잡는 '순수한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고,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능력이라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요...
맞는 말이에요. 타인에게 열린 태도를 가지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다움의 전제조건이겠죠. 저도 제가 전제한 잣대로만 판단하지 않고 열린 태도를 갖고 싶어요. 여러 진리들이 화음을 이루는 세상은 저의 소망이기도 하기 때문이에요. 아는 게 적어서 마치 인상비평처럼 되고 있는데(어쩌면 이런 태도도 '하나의 진리'에 대한 집착 때문일까요? 그래서 확신이 들지 못해서 스스로 어려움을 느끼는 걸까요?), 저의 문제의식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부나 권력이나 인기가 아니라 고통에서 해방된 세계에 대한 꿈(심하게 거창하지요ㅎㅎㅎ)인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확신을 갖더라도 나의 생각이 틀린 것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타인과 나 자신에 대해 듣고 말하고 공유하려는 태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더 인간적인 곳으로 만들 수 있고, 무엇보다도 그런 과정에서 제 자신이 더 인간적으로 되는 것이겠죠.
사실 내가 듣고 읽었던 말들은 체계가 잡힌 언어의 집으로 완성되더라도 내가 처음 들어서 배워나갔을 때부터 하나의 의견일 뿐이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망상이나 독백이 아닌 이상 생각-말-은 배움-대화-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또 그런 의견들이 한둘이 아니고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즐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만약 하나의 의견만 존재해서 진리들의 자리를 진리가 차지한다면 인간다움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해야겠지요.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합니다. 내가 하는 것보다 내가 하지 않는 것, 내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보다 내가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 것, 기다리지 않고 미리 결론짓는 것 등에 대해 닫혀있는 것을 저의 '꿈'에 대한 장애로 여기며 살려고 합니다. 어쩌면 제 '꿈'에 대한 이런 장애들은 제가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인정 등등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낫다는, 낫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리가 듣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대화의 끝에서야 비로소 등장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자신이 잠정적으로 믿게된 진리가 나중에도 그럴 것일지 열린 태도로 확인하고 기다릴줄을 알아야겠죠. 제가 열린 태도가 잘 안 돼서.. 바로 그렇게 살겠다는 건 구름 잡는 소리가 될 것 같으니 적어도 저의 '꿈'에 방해되는 것들 몇 가지는 안하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상대의 의도나 관점이 불순하다든가 서투르다든가 싶어서 자격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내 운명을 인질로 삼는 대화의 속성을 알아서 처음부터 나의 선입견을 세우지 않고, 등등. 이런 결심이 없으면 편협함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가발전하지 않을까 싶어요. 결국 독백이 아니라 진정한 대화-아직 이것이 뭔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는 누구든지 그 자체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한다는 말이겠죠. 다시 '인간다움'에 관한 꿈으로 돌아왔네요..
폰으로 쓰는데 힘들군요.^^;; 어제 뒷풀이 자리에서 관심 어린 조언을 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반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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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어, 근래엔 인간이 인간다울 게 아니라 '동물다워도' 아니 오히려 '동물다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동물은 자본을 더 많이 축적하기 위해, 자기가 죽을 때까지 다 쓸 수 없는 자본만을 모으기 위해,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괴롭히거나 혐오하지 않잖아요... ^^; 인간이야말로 가장 절망스러운 존재가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듭니다. ㅎㅎㅎ
아, 언제나 그렇듯 장고 선생님 글 좋네요. 솔직함, 치열함, 반성, 고민, 자기언어 등등이 담긴 글이어서요. 저는 그 사람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글이 좋더라구요. ^^ 폰으로 이렇게 잘 쓰시다닛! ^^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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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감사드려요!^^ 사람이 변할 수 없다면 공부나 연대는 다 공연한 짓이고 괜히 할 이유가 없겠죠. 하지만 사람은 변하는 법이지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란 짐승과 초인 사이의 밧줄'이라는 니체의 말을 좋아해요. 인간에 관해서 설명은 다른 식으로 할 수 있겠지만, 제게 '인간'이라는 말은 저의 속 좁은 견해에 의하면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지식매판상과 자신의 주어진 조건을 당연한 것인양 생각하고 견디는 사람들에 대한 치료제나 백신과 같은 단어예요. 저는 점점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열성과 함께 '고유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떼어낼 수없는 것을 떼어내려하거나 합칠 수 없는 것을 합치려하는 것에 열을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푸코에게 20세기를 사는 19세기 인간이라고 욕먹었던 사르트르와 비슷하게 저 또한 '휴머니티'를 믿으니 21세기의 관념론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심정적으로도 그렇지만 인간이라는 관념을 버리고서는 실천적으로 너무나 무력해지기 쉽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바보 소리 듣더라도 이 시대 우상의 얼굴을 직시하지만 흐름을 거슬러야한다는 생각이에요.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휴머니즘의 가치를 옹호하는 용기, 저는 여기서 이 시대 휴머니스트의 일관성과 충실성이 지속될 희망을 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목적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예요.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세계-내-존재는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는 신념이 없는 삶을 저는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똑똑한 누군가는 '현실'을 잘 알아서 받아들이거나 견디고 살 수 있겠지만요. 선생님께서 말씀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맑고 밝고 평등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드물지요. 그래서 희망은 좌절이나 배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 쉬는 한 시도하고 시도하고 계속 시도해봐야겠죠!!^^ (저는 선생님과 달리 양심불량이라 희망 없이 사랑하는 건 안 돼요..ㅎㅎㅎ)
권 선생님으로 ‘호명’(혹은 ‘소명’)되었으니 댓글을 안 달 수가 없네요. ^^ 뒷풀이 자리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집에 와서 또 괜한 노파심에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은 한 게 아닌가 했어요.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장고 선생님 말씀처럼 차이를 끌어안는 건 참 어려운 일 같아요. 저 역시 제 안의 파시즘을 자주 만납니다. 그때마다 반성하지만 쉽게 달라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레비나스, 데리다 등은 타자의 철학을 말하지만 저는 우리가 과연 타자를 환대할 수 있을까에 깊은 의문을 갖고 있어요. 제가 하는 어떤 모임에서 저는 타자는 오히려 <곡성> 속 일본인에 가깝지 않냐는 말을 많이 했었거든요. 나와 외모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낯선 타자를 직면할 때 우리는 과연 마음을 열어 환대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에 비해 머릿속에 그려진 추상적인 타자를 사랑하는 일은 쉽죠. 심지어 저 멀리 해외에 사는 아동을 후원하는 일도 너무 쉽습니다. 내 옆에서 낯선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생경한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에 비해서요...
그럼에도 희망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계속 반성하고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크고 아름다운 무엇을 아직 갖지 못했더라도 너무 슬퍼하진 않으려 해요. 벤야민의 말처럼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