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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의 글을 읽으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관찰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추상적 논리로 밀고 나가면 안 되고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해야하지 않나, 그렇지 않다면 무책임한 게 아닌가, 또 글을 읽으며 유일하게 읽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해봐야 하는가 등의 생각이 들어서 써봤어요. 그리고 그러면서 나는 이때까지 행복-마찬가지로 이와 함께하는 고통과 불행-을 좇은 게 아니라 공허해지려고 해온 게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비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무의미를 추구했었고 또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어요. 저라는 개인의 역사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도 있겠죠. 요즘은 이런 것들을 깨뜨려보려고 노력하지만요...

 

 

  “진정한 발견의 방법은 비행기의 비행과 유사하다. 그것은 개별적인 관찰의 지평에서 출발하여 상상적 일반화의 엷은 대기층을 비행한다. 그리고 다시 합리적 해석에 의해 날카로워진 새로운 관찰을 위해 착륙한다.”

  “인간의 정신성과 언어가 서로를 창출시켜왔다. ...언어의 출현을 주어진 사실로 간주하는 쪽에 설 경우, 인간의 영혼은 언어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섯째 날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언어를 주었고 그 결과 그들은 영혼이 되었다라고.” 그러나 “언어적 표현을 명제의 충분한 언명으로 본다면 이는 전적으로 경솔한 처사이다. ...일상의 언어는 그것이 가리키는 정확한 명제에 관해서 언제나 모호하다.” 언어는 실천적인 것이고 대중적인 것이다. 즉 언어는 삶의 유용한 도구다. “언어는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것이며 단지 원숭이의 정신성을 넘어선 평균적인 진보의 단계를 담지하고 있을 뿐이다. ...언어의 적절성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는 오류다.

  -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나의 이러한 청정범행은 전적으로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바로 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八支聖道]이니 그것은 곧 바른 견해(바른 관찰)[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 고타마 싯다르타

 

 

  눈빛, 사랑, 그리고 정의에 관하여             /           종헌

 

  인간의 생명력이 눈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했던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일말의 진실을 보았던 것이지 않았을까? 어떤 생명이든 살기 위해서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여온다. 식물은 수분과 양분이 있는 쪽으로 뿌리를 뻗고 햇빛이 있는 쪽으로 가지를 뻗는다. 운동기관이 있는 동물도 마찬가지로 먹이를 향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동물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한 지점이 있다면 인식활동의 중심이 시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기관 중 특히 눈으로 본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 혹은 두껍고 질긴 가죽은 없지만 인간은 눈을 이용한 생각으로 삶을 꾸려나가고, 나아가 그런 양상으로 분별력과 호기심 갖는다. 일반적으로 동물은 생존과 번식의 욕구로 눈에 불을 켜지만, 인간은 새로운 인식의 지층으로 나아가기 위해 눈을 번뜩인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력은 눈빛에서 드러나는 지적 호기심으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나 또한 나를 호기심으로 가득하게 만드는 사람이나 문제를 만난다면 그에 빠져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눈빛이 또렷해진다. 마찬가지로 내가 추구하는 무언가를 무력하거나 시시한 것으로 굴복시키는 사람이나 상황을 겪는다면 눈빛이 죽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욕구의 만족에서, 나아가 자신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시키는 것에서 행복해지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을 추구할 때 동시에 만족시키기 어려운 두 가지 욕구를 발견한다. 하나는 공동체 내에서 안정과 유대를 느끼고 싶은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요구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새로워지려는 욕구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양면성에서 순수하게 하나만을 선택할 수는 없는 듯하다. 우리는 항상 이미 타인과 함께하며 다양한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낀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중요한 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존중받으면서 동시에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은 죽음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죽음의 이유는 비합리적이고, 불규칙적이고, 불분명하고, 불확정적이고, 불가해하다. 언뜻 알 것 같으면서도 결코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죽음. 그것에 대처하려 해도 별달리 도리가 없다. 우리는 그것이 언젠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닥쳐온다는 것을 안다면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계획이 얼마나 피상적이었으며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죽음 앞에서 역사는 없다. 우리가 겪은 것은 단지 우리의 기억 속에 들어있는 파편적인 사건이었고 이를 소급적이고 인과적으로 연결해 이야기를 만들어왔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사랑도 마찬가지 아닌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때와 장소를 알려주지 않고 어느새 닥친다. 우리에게 닥쳐온 사랑은 한바탕 욕망의 광풍으로 불안과 공포를 잠깐 잊게 할 뿐 불확실하고 두려운 미래에 삶을 저당잡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동시에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으며, 장미를 원하지만 가시 없는 장미를 상상한다. 때문에 사랑을 합리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 시대는 갖가지 경험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쉽게 붙인다. ‘금사빠’로 불리는 사람의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더라도 오래 지속하고 헌신하는 낭만적 사랑은 이제 낡은 것이라고 말해야한다. 낮아진 사랑의 기준으로 사람들은 파트너 관계나 하룻밤의 잠자리에도 사랑이라는 말을 붙인다. 우리에게 사랑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고, 기술인 사랑은 반복할수록 더 숙달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도구적 지식이자 양적인 차원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자, 다시 한 번!’이라고 생각하며 새롭게 반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의 본성을 더 모르게 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의 밧줄이라면 동물행동학에서 설명하는 사랑의 이유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실상에 무지한 것은 무능한 것이고, 무능한 것은 괴로운 것이며, 무능이 반복된다면 이유도 모른 채 습관이 된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댄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낯설고 부재한 것이며 사랑에서 만족을 얻으려면 믿음, 용기, 절제 등의 성격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 드물게 된 우리의 문화에서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보기 힘들다고 냉소했다. 앞서 말했듯 죽음과 비슷하게 사랑은 나의 의도나 리듬에 얽매이지 않는 타인에게 휘말리는 것이고, 완벽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구 속에서 우리의 가능성의 지평은 넓어지고 새로워진다. 이렇듯 사랑은 자유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자유가 미래를 알 수 없듯이 사랑 또한 불안하고 위험한 것일 것이다. 어떤 이유로 우리 시대에 사랑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드물다고 프롬이 슬퍼했는지 이해가 간다. 영속적이기보다는 일시적인 것을 원하는 시대정신을 가진 사회에서 간단하지 않은 사랑, 노력해야 하는 사랑, 짧은 경험 이상의 사랑은 정신의 노동이며 다른 욕망의 문을 닫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자 억압적이고 귀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욕망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욕망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욕망은 타인을 붙잡아매어 먹어치우려는 충동이다. 타인의 타자성을, 힘을 빼앗아 없애버리려는 본능적 욕구인 것이다. 우리의 욕망에 따라 타인은 나의 입맛대로 변해야 한다. 욕망은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의 응답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타인이 나의 욕망을 쉽게 만족시켜주지 못할 경우 그는 쉽게 내팽개쳐진다. 욕망에게선 파괴와 죽음의 냄새가 난다.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결국 자신조차 죽음으로 향하는 방향성이 보인다. 반면에 사랑은 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특정한 한 인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사랑은 타인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 즉 의심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한 채 돌보는 것이다. 타인은 과거도 미래도 알 수 없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지대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을 잊고 타인에게로, 나와 다른 한 세계로 도약하려는 결단이다. 욕망의 끝에서는 나 외엔 존재하는 것이 없지만, 사랑의 끝에서는 다른 세계를 이유로 일어나는 어떤 완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간을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그대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와만 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그대가 예술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예술적인 교양을 갖춘 인간이어야만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 그리고 자연에 대한 - 그대의 모든 관계는 그대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그대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의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라는 맑스의 말이 아직도 꿈과 희망인 세계다. 이 세계에서 타인은 타인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얼마만큼 만족시켜주는가에만 관심을 가지는 소비자나 구경꾼으로서만 다가온다. 여기선 하나뿐인 독특한 존재로서의 타인이 보이지 않는다. 소비와 욕망이 끝을 모르고 치닫는 시대, 사랑에 대해 무지한 세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인간의 따뜻한 유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

  영화 <엘리펀트>는 사랑하는 인간이 아니라 사랑받는 인간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부재하는 사랑의 잔혹함에 관한 영화이고 때문에 사랑과 윤리가 무엇인지 우리를 슬픔 속에서 생각하도록 만드는 영화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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