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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5강 후기 '불량 병사'와 제국(2)

김요섭 2017.08.30 15:19 조회 수 : 201

아래 글에 이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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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핀 사례가 일탈이 저항이 되지 못하고 국가의 관리 아래 놓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독일 병사들의 태도는 일탈이 언제든 국가의 폭력과 공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관계와 남성성, 병사다움을 결합하는 남근중심적 군사주의는 일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독일 병사들 사이에서도 성관계, 특히 강간과 같은 강압적 성관계는 군사 문화 속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성 집단에서 가장 선호하는 대화의 주제였다.(쥥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 2015) 성적 착취를 정당화하고 심지어 권장하기도 했던 독일의 군사문화는 나치 국가가 추구한 ‘인종적 순수성’을 위협하는 일탈을 부추기기도 했다. 나치 국가는 법률적으로 다른 인종간의 성관계를 금지해왔지만 점령지 주민들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력수단을 가진 독일 병사들이 그런 착취의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 여성에 대한 성 착취가 만연했는데 이는 엄연히 나치국가가 금지한 불법이었기에 병사의 일탈 행위였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나치국가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성관계 이후 유대인 여성을 살해하는 경우가 흔히 빈번했는데 이런 살인은 국가에 의해 결정된 유대인의 운명(예정된 절멸)을 통해 정당화되었다.(쥥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같은 책.)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병사의 일탈 행동은 국가가 자행한 폭력을 일종의 기회로 삼아서 자신의 이득을 취할 수 있으며 국가와 자신 사이의 타협점을 설정함으로써 공모할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공모가 아니더라도 병사의 일탈은 국가의 폭력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장애 요인이 되지 않았다. 쥥케 나이첼의 지적대로 전쟁이 평시와 구분되는 사회적 상태라고 할 때(쥥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같은 책.) 사회적 일탈, 심지어 범죄가 한 국가의 사회적 작용에 동원되듯이(푸코가 근대 경찰국가에서 범죄가 관리되고 때로 동원된다고 지적하듯 말이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 2003) 병사의 일탈 혹은 범죄조차 국가의 외부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렇게 국가의 목표를 거부하는 행동들이 어떻게 다시 국가로 회수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분석이 유의미한 참조점이 되어준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대인 희생자들이 홀로코스트의 제도 속으로 어떻게 동원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는 유대인 사회가 자신들을 보존하기 위한 기존의 방식, 즉 유대인 집단의 사회적 유용성을 국가로 하여금 인지하게 하려는 노력이 어떤 효과도 보지도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대인들은 나치국가의 국가적 목표에 협력하고 그 실행의 필수적 단계로 자리함으로써(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부 유대인들의 희생을 허용함으로써) 전체의 생존을 도모했다. 그러나 파괴의 단계가 가속화될수록 유대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희생의 범위는 확대되었으며 자신들을 파괴하려는 체제의 일부에 더 긴밀하게 결합되어 갔다. 유대인의 유용성(특히 군수산업 분야에서의 전문 인력의 필요성)은 특수한 직능을 수행 가능한 집단 중 일부의 희생을 늦추고 그렇지 못한 집단을 제거대상으로 선명하게 나누었다. 바우만은 독일과 유대인 사이의 사회적 동원의 목표를 설정하는 주체에서 유대인들이 배제되었기에, 즉 ‘유대인 없는 유럽’이란 국가의 목표는 결코 조금의 수정도 없었기에 유대인의 유용성은 이를 달성하는 과정에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회적 목표를 설정하는 어떤 집단과도 연결될 수 없었으며 그들의 합리성은 나치 국가의 단일한 목표에 종속되었다. 바우만이 사회공학으로서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해결의 방안을 “다른 사회적 전망”을 주장할 수 있는 사회적 다원성의 영역에서 고민했던 이유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즉 국가의 목표, 혹은 이를 설정하는 정치집단 자체를 상대화할 수 없을 때 동원의 바깥이란 없다. 앞서 살핀 일탈의 사례들 속에서 나치국가의 목표는 언제고 암묵적으로 승인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탈과 저항의 경계선은 아마도 이 지점에 놓여 있으리라.

다시 후루야마 고마오의 ‘불량 병사’로 돌아와 일탈과 저항 사이의 좌표 속 어디에 그가 자리했는가를 살펴보자. 후루야마는 운의 논리를 통해서 병사로서 주체화되지 않는 자기 논리를 전개한다. 전쟁 속의 모든 사건을 선택이 아닌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 즉 책임질 필요 없는 우연의 산물로 여긴다. 병사로서의 책임 없음은 제국이 병사에 요구하는, 전쟁의 필연성과 희생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일탈이다. 그러나 한편 책임 없음은 국가의 요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 정당화 수단으로 쓰였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유대인 학살에 갑작스럽게 동원되서 혼란스러워했던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음(모든 책임은 결정권자, 즉 상부에 있음)을 강박적으로 확인했고(크리스토퍼 R.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책과함께, 2010) 스탠리 밀그램의 심리학 실험에서 증명되었듯 가혹행위를 정당화는 핵심적인 심리적 기제였다.(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에코리브르, 2009) 실행자와 결정권자를 분리하고 실행의 단계를 세분화하여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 제노사이드를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한 근대의 제도적 조건(관료제)이라는 바우만의 지적(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을 생각하더라도 ‘책임 없음’을 뒷받침해주는 사유에서는 어떤 위험성을 느끼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군대에서, 나는 어떠했는가. 운이 좋게도 나는, 포로를 죽이라, 라고는 명령받지 않았다. 그러나. 가령, 명령을 내렸다면…….”는 후루야마의 소설 속의 무기력한 주체의 발화는 책임 없음의 사유가 가진 무력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 ‘불량 병사’는 책임지지 않음으로써 결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명령이 내려오던, 그게 포로에 대한 살인일지라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운에 대한 후루야마의 사유는 관료제적인 태도와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바우만이 설명한 관료제적 구조는 실행자의 책임은 분산되고 최종결정권자에게는 책임이 집중된다. 반면 후루야마의 ‘운’ 개념에서는 일본 제국의 지도자들조차 책임을 질 수 없다. 지도자조차 운에 좌우되는 개인일 뿐이다. 그는 인간을 개인의 층위에서 평등화하고 다시 그 개인은 운이라는 외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 존재로 객체화한다. 이러한 개인화는 국가의 가부장인 천황 아래 위계화 된 국가의 국민이란 규정을 교란한다는 점에서 일탈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국가를 인간의 선택에서 분리하여 고정된 실체로 만들어 놓는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지도자들을 규탄하겠다고 흥분조로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나타났지만 어떤 기준으로 전쟁지도자를 정한단 말인가. 나라를 저주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라는 기구이기 때문에 저항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기구인 국가는 저항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후루야마의 언명은 그의 일탈이 끝내 저항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라는 기구이기 때문에 저항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언술에서 국가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대상으로, 저항을 통해서 변형될 수 없는 고정적 실체로 분리되어 나간다. 즉 그는 국가를 인간의 바깥에 둠으로써 동원의 외부를 상상할 수 없게 한다.

후루야마가 국가를 인간의 행동 바깥에 자리하도록 한다는 의심은 병사의 운에 대한 서술에서도 암시된다. 그는 전장에서 병사가 마주하는 여러 상황 뿐 아니라 명령도 ‘운’의 문제로 치부한다. 운이라는 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에 국가의 명령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명령은 권력자의 결정이며, 특히 일본군에 만연했고 후루야마가 근심했던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는 외적 조건 속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현장 지휘관들의 권한 아래에 놓여있던 것이었다. 명령이 내려오는 일은 병사 개인으로써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명령하는 지도자에게는 결정의 문제이며 ‘국가라는 기구’ 역시도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일본 지도부 사이의 지속된 혼란이 보여주듯 인간의 투쟁 속에서 결정된 결과였을 뿐이다.

국가와 명령을 운으로,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외부로 환원시키는 사유는 현실을 선험적인 조건으로, 자연화 한다. 후루야마는 불량 ‘병사’로서 군과 병사의 태도를 의문시하고 조롱할 수 있지만 병사로 동원되었다는 사실,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전쟁과 국가의 동원, 그 거시적 사건 속에 자신이 편입된 것은 운, 즉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선험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후루야마는 (주체로서)병사되기의 규율을 일탈해서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제국의 병사라는 관념적 틀 속에서 갇히지 않은 ‘병사’의 목소리를 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재현한 ‘병사’와 ‘불량 병사’ 모두 제국의 병사로써 전쟁에 복무하고 있으며, 국가의 명령을 (내면의 불만과 갈등이 있을지라도)서슴없이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의 정상적인 일부분이었다. 즉 후루야마의 ‘불량 병사’란 ‘불량 병사’로서 병사가 아닌 것이 될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다시 제국을 전쟁을 하지 않는 국가 혹은 이 다른 사회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닫아버림으로써 제국을 영구한 기계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으로써 내면화한 인간의 자리에 놓였다는 우려를 거둘 수 없다.

국가, 그리고 그 국가의 현실을 자연화하는 일을 다시 후루야마가 마주한 위안부들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되묻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후루야마는 징용을 당했다는 위안부의 입을 통해서 다시 운의 논리를 반복한다. “운이요. 위안부되는 것도 운이요. 병사, 총알에 맞는 것도 운이요. 다 운이요.” 유곽을 즐겨 이용했으면서도 위안소를 가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되묻는 후루야마는 유곽과 위안소 사이에 자신이 느낀 어떤 경계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유곽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전장에서의 사건들, 「하얀 논」에서 버마인 여성에 대한 고문을 도왔던 경험조차 문학적 섹슈얼리티의 한 부분의 놔둘 뿐이다. 유곽과 전장, 유곽과 위안소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가능했던 성관계의 격차, 성적 착취와 가혹행위의 간극은 고민의 대상에서 사라지고 감각으로서의 섹슈얼리티만이 떠오른다. 징용에 대한 위안부의 증언이 가지는 유곽과 위안소의 경계, 국가가 성을 동원하는 주체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는 징용의 서사(성병 통제를 위해서 식민지의 화류계 여성의 동원을 배제하려고 했던 일본군의 정책을 고려한다면(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군대위안부』, 소화, 1998) 징용의 서사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경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그저 운이라는 사유 중단의 수사를 통해서 소거된다. 이 모든 것은 운일 뿐이며, 그 운을 통제하는 국가란 대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을 뿐이다. 평시의 유곽과 전시의 위안소 사이에 놓인 다른 국가의 모습은(화류병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교육하는 국가와 이를 제공하고 동원하며 권장하는 국가) 가시화되지 않는다.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후루야마의 재현 속에서 ‘불량 병사’는 병사이기를 거부할 가능성도, 전쟁하는 국가를 거부할 가능성도 고민하지 않는다. 불량 병사는 끝내 (제국의 규범적 병사되기의 내면화가 아니라) 직무로써의 ‘병사’이기를 거부하지 못하여서 저항이 아닌 일탈의 자리에 남는다. 일개 ‘병사’일 뿐인 그들에게 전쟁과, 제국에 맡서는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과도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병사와 제국 이외에 어떤 상상력도 남겨두지 않는, 변화에 대한 사유를 닫는 일은 위험하다. 후루야마가 참전했던 바로 그 전쟁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사유 없음은 곧 국가의 가공할 폭력이 인간을 동원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아이히만 재판’의 재판부는 국가의 합법적 명령을 수행한 아이히만을 처벌하면서 국가의 명령을 부당하게 느끼면서도 그 임무에서 벗어나려는 어떤 노력조차 하지 않았음을 처벌의 근거 중 하나로 삼았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운을 통해서 국가와 병사가 된다는 것에 대한 사유를 멈춘 후루야마 고마오의 시선에 수긍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치룬 전쟁의 교훈을 그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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