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의 주제는 '정치-북치고 춤추게 하라' 였습니다.
첫 시간 배움(학)은 학문을 익히는 차원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차원이 아닌 세속적 삶에서 '물'에 나아가는 것. 관계속에서 '~되기'라 하셨습니다.
두번째 시간 다스림(정치)을 감응이라 하셨을 때, 이 또한 지난 시간의 관계속에서 '되기'와의 연장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계속에서는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듯이, 공자 또한 보편적 답을 하지 않았듯이.. 공자가 세속적 삶 속에서 구체적 사안에 대해 제자들에게 답한다는 것은 감응한다는 것이고, 이 또한 '되기'라면 공자는 묻고 답하는 모든 과정에서 '학'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1대 1 관계에서는 감응 또는 되기가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주체이자 객체, 목적이자 수단인 존재라 해도 적당히 맘 편해지는 중간의 타협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가 되는 걸텐데.. 아마도 '사랑' 같은 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데 군주와 같이 다수를 상대하는 자리에서는 어때야 할까.. 군주에게 필요한 건 온갖 모순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 그 역량의 문제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북극성' 이면 될까.. 글귀로만 보았을때는 북극성은 고고해 보였지만, 실상은 온갖 모순을 견디면서 동시에 전체를 보며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아가며 새로운 균형을 창조해내고 있었던건 아닌지...
머릿속에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실상 현실의 모순에서는 제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지 알기에 마음은 무거워지네요..
수업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후기로 적으려니 이 또한 쉽지는 않네요..
그래도 논어를 이렇게 접하게 되어 무척 기쁠뿐입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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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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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본
진정 사랑을 아시는 소라 쌤. 쌤과 논어를 읽게되서 저도 기쁩니다.
공자는 정치는 통치가 아니라 상호적으로 서로 예로 맺어진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위정편에 있는 글인데, 어떤 사람이 공자는 왜 정치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공자는 시경에서 부모를 잘 모시고 형제들과 우애있게 지내는 것도 정치라고
했는데, 꼭 벼슬길에 나가는 것만 정치이겠는가 하고 대답합니다.
뭐 이 문장을 자신을 써주지 않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애써 스스로 위로하는 말로도 읽을 수 있지만, 뭐 굳이 그렇게 읽을 거야 있나요?
공자는 정치를 제도나 법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관계가 발생하는 곳에는 당연히 정치가 있지요.
지금의 우리는 공자의 말을 더 밀어 붙여서 온갖 동물들, 식물들, 사물들, 로봇등등 이종들과의 정치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마냥 기쁠 뿐이라니.....
군자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