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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ES 선언'에 앞서

 

해러웨이는 1985년 ‘사이보그 선언’에서, 우리는 무구하지 않은 현실 세계를 살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한편, 페미니즘, 사회주의, 유물론에 충실한 정치신화를 세우려는 노력이라 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해러웨이가 반려종들과 질문해가기를 통해 진정한 또는 현대적 유물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느꼈다.

 

이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반-과학, 반-기술에 대해 거부하는 동시에 순진한 기술이상주의도 거부한다. 그는 오히려 되묻는다. 과학이 지배이데올로기의 설득을 위한 실천의 장이라면,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은 왜 그것을 실천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느냐고. 즉,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은 더 나은 세상의 길을 과학에게 물어야 한다고.  

 

또한 해러웨이는 ‘문화(문명)는 자연을 착취하는 도구다’라는 이분법도 문제삼는다. 이전까지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의 생식성은 자연적인 것으로서 찬양하고, 남성의 생산성은 자연을 착취하는 것으로서 비난하는 구도였다. 하지만 강제적인 생식의 체계에 묶여 평생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제3세계 여성들에게도 이 구도는 유효한 것일까. 해러웨이에게 사이보그는 제3세계의 가부장적인 생식시스템에서 탈출한 자다. 이 ‘부적절한/마음대로 할 수 없는(inappropriate/d) 타자’야말로 사이보그였던 것이다.

 

해러웨이는 결코 기술이 최고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는 고정되거나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상황속에서 우리가 공조한 자연, 즉 techno science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군산복합체에 의해 양육된 자임을 고백한다. 

 

2.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넘어선 ‘자연문화’

 

techno science란 도구적 개념이 아니다. 기술을 호오로 구분하지 않고,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정의하지도 않는다. 상황적인 맥락안에서 유리한 힘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제인구달로 대변되는, 현대과학과 자연의 '화해' 메시지 안에 유럽으로부터 독립투쟁을 하는 아프리카를 삭제하는 것, 아마존을 강제로 빈 공간으로 만들고는 지구의 폐 내지 온실속의 에덴이란 이미지로 구성해내는 것은 결코 techno science가 아니다. 

 

아마존의 숲 사람들은 자연을 방어하는 자도, 대리하는 자도 아니다. 그들은 숲의 파트너로, 토지개혁, 기술개발, 보건의료, 시장경제 등을 주장한다. 숲과 숲 사람들이 절합적으로 관계맺고 있는, 사회적 자연속에서 발현되는 techno science란 이런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러웨이는 자연을 일상다반사라, 지구를 테라포밍된 테라폴리스라 명명한다. 지난 시간 Jolly의 AKO project 역시 이에 대한 적절한 예라 하겠다.

 

여기서 해러웨이는 절합 개념과 함께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는 행위자(당사자)의 지위에 서지 않으면 문제에 개입할 수 없는가? 상황적 지식을 통한 절합에, 대리가 아닌 방식으로 나는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그동안, 적어도 내가 인식하고 있는 복수종의 삶에 대해 speaker 또는 advocate로서의 역할을 자처해왔던 내게 이 질문은 미뤄왔던 고민을 상기시켜 주었다. 

 

3. MAKE KIN과 응답-능력

 

'DES(비스테로이드계 에스트로겐으로 과거 여성들의 유산방지제로 쓰이다가 비인간동물의 성장촉진제, 지금은 요실금 치료제로 쓰임)선언'으로 돌아가서, 해러웨이는 자신의 반려견 카이엔을 소환한다. 해러웨이 자신은 운전면허증으로, 카이엔은 마이크로칩으로 엮인 사이보그가 되고, 이 둘은 같은 사이보그로서 반려종이 된다. 더 나아가 DES를 통해 이것을 복용했던 여성들, 처방하는 수의사, 복용하는 카이엔, 복용시키는 해러웨이 등등을 모두를 DES와 엮인 사이보그 친족으로 호명한다. 이 중 어느 누구도 무고하지 않으며, 해러웨이는 이들 한 명 한 명을 호명해 매듭을 짓고, 잇기를 거듭한다. 

 

프리마린(암말의 오줌에서 추출하는 결합 에스트로겐으로 심장병 방지제로 쓰임)에 대한 이야기도 유사한 맥락에서 논해질 수 있다. 해러웨이 본인은 암말의 오줌을 마심으로써 결합 에스트로겐을 먹으면서도 정작 말과는 결합하지 못한 것을 수치스러워 하며, 이 수치심이야말로 책임에 대해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고 했다. PMU(임신한 암말 오줌)와 엮인 사이보그 친족들(말 목장주, 유방암 여성들, 과학자들, 활동가들 등)을 차례차례 호명하고, 구체적인 문제들과 매듭짓기를 시도한다. 

 

‘사이보그 선언’, ‘반려종 선언’, ‘DES 선언’으로 이어지는 이 선언series는 공통적으로 응답-능력을 요구한다. 내 고민에 대한 실마리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되기’가 아닌 ‘함께-되기’ 위해서는, 지구에서 함께 잘 살고 잘 죽기라는 일관성의 평면에서, 무구하지 않은 자로서의 책임감을 단련하고, 접촉가능면을 확장하고,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촉수를 바짝 세우고, 무엇보다 디테일한 응답-능력을 연마해야 한다. 무구하지 않은 자의 업보는, 지독히 고통스럽고 피로하고, 또 부지런해야 하는 일이지만, 결국 끊임없이 호명하고 엮고, 매듭짓고, 매듭의 기회를 만들어나가는 외에 달리 방법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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