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제전범법정에 대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어제 김군자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17살에 끌려가 자살기도만 7차례, 3년 간 하루 40명을 상대했다. 죽을 고비 끝에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다시 만났지만 가족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남자는 3개월을 함께 살았다가 아이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 아이는 5개월 만에 숨졌다. 할머니가 말하는 살아 생전, 살아서 받을 수 있는 사과를 생각했다. 이제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뉴스를 보기 전, 나는 authority에 대해 쓰고 싶었다. 어떤 권위,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권위를 부여하는 더 상위에 존재하는 권위는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그 권위는 정말로 권위의 정당성을 가진 실체성을 갖는가? 권위를 인정하고 따름으로 인해서 권위가 생겨난다면, 처음부터 그 권위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때 권위와 종속 모두 불변의 문제가 아닌 게 된다.. 같은 거. 뭐 좋아하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권위성을 부여받은 역할 고정에 물음을 제기하고 정해진 결과를 던져주는 정해진 ‘주인’이 아닌 것을 알게 될 때 나타나는 시선이다. 어쩌구저쩌구..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처럼 반응react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행동act하는 존재로서 주체적인 변화다. 이런거.
이미 완료되었다고 생각되었던 판단이 ‘재심’처럼 다시금 회부되어 authority의 정당성을 검증받는다고, 너무나 견고하게 정해두고 있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수많은 순간들에 대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선 하나를 얻게 된다고. 그것은 아주 연약하고 간단한 ‘그러지도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 하나로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데리다의 ‘탈구축deconstruction'이 바로 그것이다. 해체된 것은 새로운 것을 구축한다. 모든 무너진 곳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이것은 새로운 의미의 창조이며, 새로운 자아의 탄생, 새로운 세계의 재편이다. 하나의 회복은 모든 것을 회복시킨다. 여성전범법정의 감동 그러니까 Reformulation, recontextualization, reconstruction... 어쩌고 저쩌고.. 말은 다 좋다. 그러나 고통의 이름 앞에 이 모든 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처벌‘과 ’보복‘은 다르다고 했는데, 과연 제대로 된 처벌은 가능하단 말인가.
주디스 허먼의 '고통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장을 여러번 읽으며 글을 쓰던 중이었다. 명명되는 순간 치유가 시작된다.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일은 역사를 재발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제대로 명명되지 않았던, 명명되고도 이름이 자주 바뀌었던, 명명의 순간에도 여러 겹의 겹쳐진 의미와 말들로 혼란스러웠을 살아남은 자들의 치욕을 생각하면 그 오랜 시간을 홀로 둔 것에 마음이 저 끝까지 무거워진다. 말은 다 말이다. 확장하고 나아가고 개념을 생성하고.. 그래도 말이다. 언어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너무나 날것 그대로의 실상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계속해서 어떻게 ‘연루’되어야 하는가. 무거운 맘이 더욱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연루된 이상 그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거 그거 하나만 지금 확실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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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연루된 이상 그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보니,
'위안부' 문제가 은정님께도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건들이 우리를 한 발 뒤늦게 찾아올 때,
그것은 여러 결로, 그리고 여러 겹의 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의 이름 앞에 이 모든 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라는 은정님의 질문을 보면서
몇 년 전에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이라는 책을 동료들과 함께 읽을 때
제가 던졌던 비슷한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비대칭적인 권력의 배치 상황에 신체가 노출되는 과정을 몰입해서 상상하다보니,,,
그런 상황에서 말이, 언어가,,,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저의 생각을 동료들에게 피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저는 불가피한 폭력과 마주한 '찰나'에 한정해서 언어의 무기력함을 언급했던 것 같습니다.
폭력은 그것이 감행되기 전에 이미 작동하는 것이고,
그 후로도 줄곧 피해자들에게 들러붙어 있는 것일텐데 말이죠,,,
'압도적인 폭력에 대해 말이 무슨 소용이겠냐'는 은정님의 심정엔 저도 공감하지만,
그러한 심정을 갖는 것조차도 저에게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에 의해서 우리의 말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사전에 제압된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너무나 날 것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언급하셨던 우리의 세계는 동시에 언어로 분절되어 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통에 누가 어떻게 이름을 붙이는가?라는 문제는 허먼의 말처럼 역사적인 작업이고,
피해자들의 세계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먼의 말대로 피해자들의 고통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회복의 가능성을 갖는다면 말이죠.
폭력에 굴복한다는 것을 합리화하지 않는, 굴복할 지언정 무언가 깡그리 굴복시킬 수는 없는 어떤 잔여.
'앙금'이나 '얼룩'처럼 싹 다 녹아들거나 깨끗하게 동일화되지 않는 존재들의 말이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은정님 후기를 읽으니 마음이 복잡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혹은 우리가 그녀들의 고통에 '연루'되는 하나의 방식은
우리 앞에 던져진 그 말들을 주워담고,
'그 말들과 함께 그 말들에 대해서' 무언가 나의 목소리를 겹쳐서 발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보복과 처벌 사이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서성이던 피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했는데,
아카데믹한 표현으로는 깔끔하게 정리될 수 없는
무수한 망설임과 주저함의 순간들이 피해당사자들에겐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원고를 수정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로서는 패배를 합리화하는 말이 아닌 그녀들의 말, 우리의 말들을 계속해서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피해 당사자의 말과 그것을 듣거나 기록하는 자들의 말 사이에는 어떤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을 것이고,
사실 그 '간극'이야말로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연루'되기 시작하는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은정님도 그러한 간극 속에서 말이 갖는 무력함을 느끼셨던 건 아닌지,,,
사실은 저또한 피해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그런 무력감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는 걸 고백하고 싶네요.ㅠ ㅠ
오늘 만나서 더 얘기해 보아요. *^ ^*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