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닭을 피해다니느라 후기를 너무 늦게 올리게 되어 죄송한 씨앗입니다.

제가 강의에서 들었다고 믿는 것과 강의록에서 읽었다고 믿는 것에  대해 그냥 정리해 본다는 생각으로 쓰다 보니

어쩌다 너무 길어져서 오히려 민폐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180111목 <지젝과 함께 레닌을> 2강

 

- 왜 정신분석은 정치철학과 연결되는가?

‘정치’가 법, 제도, 규범의 영역을 가리킨다면, ‘정치적인 것’은 정치 외부의 것, 즉 이러저러한 규칙체계에 속하지 않는 것, 규범화되지 않는 것, 제도에 포획되지 않는 것, 법을 아무리 확장해 나가더라도 다룰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체제 자체나 혁명이 정치적인 것인데, 혁명은 기성 체제를 정교화하고 확장하는 것으로는 그 체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새로운 체제를 세우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정치란 혁명으로부터 체제를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치안 장치이며, 정치적인 것이란 그러한 치안의 질서에 복속되지 않는 것이다.

통상 사회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은 정치를 다루는 학문으로, 정치철학은 정치를 작동시키는 원리에 대한 학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할 때, 정치철학은 또한 정치에 의해 포괄되지 않는 것에 관해 사고하는 학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정치철학이 다루는 정치적인 것이란 사회적 상징작용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철학은 무의식적인 것을 다루는 정신분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 정치적인 것-무의식적인 것-혁명

우리는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서 상상하곤 한다. 소치 동계올림픽 당시 한국사회는 하나가 되어 한국 선수들을 응원했다.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각자의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전체로 묶일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사회라는 전체성을 상상하던 바로 그 시점에 우리는 하나라는 상상에 균열을 내는 것, 전체로서의 사회라는 믿음을 벗어나는 것이 불거져 나온 셈이다. 이처럼 우리가 외부에 존재하는 공통의 적을 상정하고 열광적으로 폭주하며 하나가 된 양 느끼는 그 순간에조차 늘, 우리 내부에는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다름이, 기존의 질서로 봉합될 수 없는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송파구 세 모녀는 한국사회의 법과 제도 그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죽음은 사회라는 상징적 범주를 넘어선 사건이 된다. 제도 안에서는 매개될 수도, 해결될 수도, 화해될 수도 없는 계급적 갈등을 가리키는 사건, 사회라는 초월적 총체에 대한 믿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내부의 적대를 가리키는 사건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내부의 갈등을, 내부의 적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인정하고자 하지 않는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론과 경찰은 이를 “묻지마 살인”이라고 규정했다. 이 사건의 원인이 여성혐오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강남역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시위를 조직해 나가던 여성들의 각성, 그 페미니즘의 정동에 대해 포착하고 사유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적인 것은 무의식과 연결될 수 있다. 무의식이란 우리가 포착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은 포착하기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페미니즘적 정동은 법과 제도가 포섭하기를 거부한 정치적인 것인 동시에, 그러한 정동의 존재 자체가 포착되고 의식되고 사유되기를 거부당했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상징계, 즉 가시적인 것이자 명명 가능한 것의 총체이다. 우리는 법, 제도, 규범 등과 같은 상징적 요소들의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갈 때 사회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때, 사회를 유지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은 법, 제도, 규범 같은 요소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다. 다시 말해 사회라는 상징계가 존속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실제 사회는 이러한 상징적 요소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사회적 상징체계라는 그물로 걸러지지 않는 것들, 명명을 거부당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적 시야에서 벗어나기를 요구당하고 그리하여 비가시성의 암흑으로 가라앉고 마는 것들이 사회 내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 무의식적인 것들이 때때로 불거져 나오면서 기존의 법·제도·규범 등으로는 봉합되지 않는 사회 내부의 적대를 드러내는 순간, 이 무의식적인 것들은 우리 사회가 잘 유지되고 있다는 사람들의 믿음에 균열을 내면서 정치적인 것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기존의 정치를 재검토하고 비판하도록 이끌고, 새로운 정치를 상상하고 그 실현을 희망하도록 추동하는 것이다. 이때 추구되는 새로운 정치는 기존의 정치로는 봉합이 불가능한 갈등을 해결해야 하므로, 기존의 정치와는 전혀 다른 정치, 완전히 새로운 상징체계일 수밖에 없다. 즉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는 길에서 우리는 기존 정치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혁명과 마주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 속에서 명명[상징화]되지 못하여 그 존재조차 의식되지 못하고 무의식적인 것으로서만 실재하는 정치적인 것이란, 실은 미래의 혁명이 잠재된 씨앗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철학으로서의 정신분석은 이러한 무의식적인 것-정치적인 것을 다룬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선, 무의식적인 것-정치적인 것을 산출하는 것에 관해 물을 수 있다. 즉, 한 사회는 그 사회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 유지된다고 한다면, 그렇게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사회가 작동하게끔 만드는 바로 그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다.

 

- 이데올로기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를 카메라 옵스큐라처럼 대상을 거꾸로 되비쳐 줌으로써 본질과 비본질을 전도시켜 버리는 것, 즉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허위의식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엥겔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기만과 억압의 도구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의 과학적 이데올로기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가 과학적이라면, 그 이데올로기는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진리라고 믿을 수 있는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후일 스탈린 시대의 소비에트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 이론화된다.

한편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이데올로기론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속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 위에 선 우리에게 태양은 500원 동전 크기로 보일 뿐이다. 이때 지구 위에 우리가 있다는 그 조건은 우리가 태양의 크기를 실제보다 작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태양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란 이처럼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으로서, 우리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명확한 앎으로서 주어지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앎의 출발점, 즉 사고의 틀로서, 정당화되거나 참이라고 입증되기 이전의 믿음 그 자체를 조형하는 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종교 불신의 시대, 신을 믿을지 말지를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던 시대에 파스칼은 신을 믿기 위해선 우선 믿어야만 한다고 했다.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믿음이 생길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이처럼 어떤 의식이나 절차 등을 통해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훈육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믿고 사고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믿음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지든 그 형태가 유지되도록 하는 틀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의식하는 믿음의 내용들 이전에 먼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그러한 믿음들에 부여되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1강에서 본 것처럼) 이와 같은 믿음의 방식 자체는 그대로 놓아둔 채 그 내용만 바꾸고자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농가의 벽에 걸린 마리아와 예수의 성상을 그저 레닌의 성상으로 바꾸기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믿음의 형식을 창출해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탈린의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트로츠키는 프라우다에 음주 습관을 바꿔라, 질서를 지켜라, 교회에 나가지 말고 학습을 열심히 하라 같은 내용의 사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일상생활의 혁명>으로 출간된 트로츠키의 이 사설들은 사실상, 러시아 전제정치라는 오래된 나무를 잘라버리고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나무를 심을 때 러시아 대중의 믿음체계를 새롭게 축조하고자 했던 시도였다. 새로운 사회의 의례, 일상생활의 공산주의적 의례를 제시함으로써 대중에게 새로운 사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그려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공산주의 혁명은 성공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 트로츠키는 러시아 정신분석의 중요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즉 트로츠키는 파블로프의 개 같은 생리학적·본능적 반응만으로는 인간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1991년 소비에트 붕괴 이후 주먹구구식 행정이나 강제수용소, 경제적 피폐 등 현실 사회주의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마르크스는 죽은 개가 되었고 레닌은 새로운 사회는 제시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임기응변에만 능했던 상황주의자라는 맹폭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2001년의 국제학술대회 <Lenin Reloaded>에서 지젝은 다시 레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할 사상가, 정세에 대한 판단가로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레닌을 반복하라”는 테제를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지젝의 행보의 배경에는 일당독재로 전락한 현실 사회주의를 경계한다는 명목 하에 사실상 현실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는 데까지 이른 서구 좌파지식인들의 이론적 경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다. 좌파지식인들에게 공산주의는 여전히 실현해야 할 이념으로서 남아있지만, 그러나 그 이념은 이제 당위로만 남은 채 현실정치에서는 실천적 힘을 전혀 갖지 못하는 일종의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로서만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바디우나 고진의 이론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들은 칸트가 이성의 구성적 사용을 금지하고 규제적 사용만을 허용했던 것처럼, 공산주의 이념을 이론 및 실천의 규제 원리로서 정립하고자 한다. 칸트가 이론이성의 기능을 현상계의 정돈과 통일에만 묶어두고 이를 넘어 이성이 영혼과 세계, 신과 같은 가상계에 접근하는 것을 독단적 형이상학이라며 금지했던 것처럼, 바디우나 고진에게도 공산주의의 이념은 단지 실천적 행위의 배후에서 실천이 추구해야 할 궁극목적으로만 제시될 수 있는 것일 뿐, 역사적 사회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과학적 사회주의를 이론화하는 일은 형이상학으로서 금지된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이처럼 공산주의 이념을 실천이성의 지상명령으로서, 말하자면 평등을 선험적인 규범-공리로서 취하는 윤리적 사회주의로서 규정할 때, 공산주의 이념은 실천과 유리된 철학적 과제로만 남게 된다.

이와 같이 지젝은 ‘철학적 정치’로서 유리장 안에 진열된 공산주의 이념을 다시 꺼내 현실에서 검증되어야 할 이론적 가설로서, 동시에 지금-여기를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재배치하도록 이끄는 실천적 힘으로서 검토하고자 한다. 바디우는 공산주의를 <공산주의자 선언>에 의거하여 ①계급철폐를 통한 평등의 실현, ②억압국가의 철폐, ③사회와 노동의 새로운 조직화를 추구하는 하나의 가설로서 요약 했다. 이에 대해 지젝은 공산주의를 플라톤으로부터 중세 천년왕국운동 및 자코뱅과 레닌, 마오쩌둥으로 이어지는 맥락 안에서 살핌으로써 이 흐름 안에서도 끈질기게 존속되어 온 ①엄격한 평등주의적 정의, ②처벌적 테러, ③정치적 주의주의, ④민중에 대한 신뢰라는 불변항을 공산주의의 가설로서 도출해내고, 가설을 현실의 장에 던져 넣어 경험적 실험을 통해 검증하고자 했다. 이때 공산주의는 그 진리치가 입증되어야 하는 이론적 가설인 동시에 이러한 가설을 현실에서 실험하도록 이끄는 실천적 이념으로서 기능한다.

지젝에게 공산주의를 현실에서 실험한다는 것은 바디우처럼 공산주의를 실천의 영원한 이데아로 추앙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의 실제적인 사회적 적대에 대응하는 운동으로서, 즉 현실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운동으로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공산주의란 현재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는 마르크스의 규정에 부합하는 것이다. 또, 지젝에게 공산주의가 실천적 이념으로서 기능한다고 할 때 공산주의는 과학법칙 같은 객관적 진리라서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허위의식 같은 거짓이라서 간단히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오히려 그것을 믿기로 선택하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그 진리치가 드러나게 되는 철저하고 순수한 주의주의적 효과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라는 이론적 가설을 현실의 사회적 적대에 대응하는 운동으로 이끌어내는 힘은 공산주의라는 실천적 이념을 맹목적으로 믿는 행위의 광기에 있다. 이러한 맹목과 광기가 이론과 실천 사이의 심연을 메꾸는 것이다.

 

- 레닌을 반복하라.

지젝이 “레닌을 반복하라”고 할 때, 무엇을 반복한다는 것일까? 실패로 귀결된 혁명을? 이미 죽은 레닌의 정신을? 더 이상 볼셰비키는 존재하지 않는데, 볼셰비키적 이념을? 그 답을 하기 앞서 먼저 반복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 살펴보자.

통상 우리는 과거를 이미 결정된 것,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의 과거란 명사나 동사 등을 동원해 가시적으로 명명할 수 있는 어떤 사태들의 연쇄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들 사이사이에는 메워질 수 없는 공간이 있다. 우리는 감각한 모든 것을 의식에 두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을 무의식에 저장해 두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이 잔해들은 먼 훗날 문득 새롭게 의식에 떠올라 과거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처럼 과거는 완벽하게 재현될 수 없기 때문에, 현재라는 시점에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고 할 수만은 없다.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역사의 천사는 후진한다고 했다. 역사유물론의 천사는 역사의 잔해들 사이에서 혁명의 동력을 길어내는,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발굴해내는 고고학자와 같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통상 현재가 자유롭게 열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상 현재는 바로 직전까지 과거의 사고나 행동, 조건 등에 의해 강하게 제약되어 있다. 나는 1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산다는 조건, 병약하다는 조건, 백수라는 조건 등 다양한 조건에 제약돼 있었으므로, 지금 당장 내가 갑자기 화성행 유인탐사선을 타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1917년의 레닌이 놓여 있던 ‘현재’ 역시 마찬가지로 무수한 조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문에 1917년은 반복될 수 없다. 1917년의 혁명은 이전까지의 수많은 조건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므로, 그 모든 조건을 2018년 지금 여기에 다시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될 수 없다. 그렇다면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1917년 그 혁명의 시점을 다양한 요인들이 집결된 x라고 한다면, 이 x라는 순간은 점이 아니라 어떤 지형이다. 이 x는 다양한 사태의 흐름들이 집중되어 폭발한 지점으로서 하나의 ‘사건’이라 부를 수 있으며, x로 집결된 흐름들의 지형을 ‘정세(conjuncture)’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는 반복될 수 없으므로, 레닌을 반복하고자 하는 우리는 x에서 그 지형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사실들)을 기각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과거의 사실들을 기각하고 나면 남는 것은 무(無)뿐이다. 우리는 (무의식이 그렇듯이) 이러한 무에 대해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 작동방식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이 무는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조건으로서의 무이다. 즉 이 무는 실현되지 않은 역사로서 역사의 ‘만약’을 가정하게 하는 것, 역사의 이면이자 역사의 무의식인 비(非)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명박산성을 타고 넘어 갔다면 어땠을까? 비폭력이 옳았다는 지금 우리의 자화자찬은 어쩌면 현재의 상태를 자족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자족하기 위해 ‘만약’을 무로 낙인찍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이프니츠는 전지전능한 신의 예정조화에 따라 현재의 우주가 최선의 우주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신분석에서는 가능한 무수한 우주들 간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현재의 우주가 최선이라고 믿는 것은 다만 내가 그렇게 믿기로 했기 때문일 뿐이다. 어떤 우주가 최선인지를 정하는 것은 신과 같은 초월적인 외부 존재가 아니라 오직 나의 믿음뿐이다. 그렇다면 실현되지 않은 비역사들을 우리가 부정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지금-여기에 있는 것은 여기로 오기 위한 조건들을 차곡차곡 밟아 왔기 때문일 뿐, 지금-여기가 최선일 이유는 전혀 없다.

역사유물론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역사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역사를 형성하는 이러한 조건들의 연구로서 생각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다만 생산양식은 조건에 의해 발전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역사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그 행로는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 뿐, 그 방향이 정해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는 역사에 대해서도 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건은 현재를 규정하고 제약한다는 점에서는 닫혀 있지만, 동시에 잔해가 뒤섞인 과거라는 점에서 열려 있기도 하다. 이러한 조건을 탐구하는 일이 곧 정세의 분석이다.

레닌을 반복하라는 것은 레닌과 똑같이 혁명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어떤 목적론적인 가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다만 지금-여기라는 사건의 정세에 대해 어떻게 새롭게 틀짓기 할 수 있을 것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해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세를 분석하여 발굴해낸 유력한 조건들을 현재와 연결시킴으로써 무의식적 충동들을 격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현재의 조건에서 곧바로 시작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를 열어서 보이는 조건과 안 보이는 조건 모두를 계속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보이는 데 있지 않다. 우리가 안 보고자 하는 곳에 보아야 하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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