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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gem

구조적으로 코멘트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주신 코멘트에 대한 대답은 이 글을 완성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책의 서지 정보도 감사합니다. 참조해보고 저의 논의를 좀 더 입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몇까지만 쓰겠습니다.

 

후루야마에게 근본적 저항이나 외부가 없다고 하면 그렇습니다. 사실 일본군 병사였던 분들 중에서 중국귀환자연락회 등 몇까지의 사례를 빼고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일본의 68년 전후의 학생운동이 겨우 ‘가해자로서의 일본인’이라는 관점을 제시할 수 있듯 그들보다 윗세대인 전중파 사람들에게 ‘주체’ ‘책임’을 자각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을 터입니다.

 

저는 감히 그러한 ‘주체’나 ‘책임’의 영역에 서지 못했던 병사들의 사례를 들고 ‘위안부’문제를 재구성하려고 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배울게 없는 잘못된 사람들의 글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일까? 라는 문제제기를 시도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자신도 그 상황에 있다면 그럴 것같다’는 느낌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저항한 병사들보다 저항하지 못한 병사들이 훨씬 더 공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후루야마를 읽으면서, 그에게서 얻을 일이 있다면, (1) ‘운’에 ‘저주’를 기입한 것, (2) 누구도 정리한 바 없는 후콩 전투에 대해 집요하게 재구성한 것을 제기할 수 있다, 고 생각했습니다. 김요섭님이 지적해주신 “그저 운이라는 사유 중단의 수사”의 영역에서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지 나름 고민을 해보면서 도달한 게 이 두 가지입니다. ‘위안부’와의 교섭 장면이나 성적인 무능함에 대해서는 이미 후루야마에 대한 논의에서 진행된 바 있기 때문에 제가 새롭게 논의한 점은 아닙니다(물론 새롭게 부각시킨 점은 있습니다만).

 

약간 추상적인 말들의 나열이 되었는데, ‘잘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영역에서 얻을 일을 찾으려고 하고 싶었고, 그리고 그 영역에서 말이 나올 때에 와서야 겨우 우리에게 도달할 언어도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 가지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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