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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한동안 쪼금 풀렸다가 다시 어제부터 갑자기 매서워진 강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루마니즘>과 <논리철학논고 읽기>의 겸직 반장 秋男입니다. 

 

1) <루마니즘>

지난 시간(1월 6일)에는 <사회의 사회>에서 영역본은 85쪽 넷째 문단(Presumably ...)부터 87쪽 첫째 문단(... communication)까지 

국역본은 180쪽 둘째 문단(추측하건대 ...)부터 183쪽 첫 줄(... 생기하는 것이다)까지 읽었습니다. 

두 쪽도 되지 않는 적은 분량 밖에 읽지 못한 건데, 다음 시간부터는 좀 더 진도를 뺄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읽은 부분을 정리하면요, 

 

세계 이해 변화의 네 가지 요인

1) 지구를 ‘의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폐쇄된 영역’으로 완전히 발견한 것. 유럽을 기점으로 지구 전체가 발견되고 커뮤니케이션 관계 속으로 통합되었다. 

2) 보편적인 세계 시간의 등장. 세계 어떤 지역에 있어도 다른 모든 지역과 동시성을 가지며, 전 세계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 모든 지역 시간을 세계 시간을 기준으로 환산할 수 있다. (서울이 10시이면 뉴욕은 전날 8시이다.) 

3) 기능 체계들로의 분화. 사회 체계는 더 이상 영토적 경계(공간)나 구성원/비구성원의 구별(인간 집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유한 기능을 통해 정의/통합된다. 기능적 분화는 하나의 단일한 보편적 장(場)을 전제한다. 

4) 시간 의미론이 과거/미래 도식으로 바뀌고, 과거(동일성)에서 미래(우연성)로 방향성이 이동한 것. 미래의 측면에서, 세계 사회는 자신의 운명과 협상해야 한다. 기능 체계들 간의 차이는 그 미래적 결과와 관련해서 의미를 갖는다. 

커뮤니케이션은 (1)‘사회 안에서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는’ (2)‘차이’이다. (1) 사회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로서 환경과 구별되며, 이는 외적 경계이다. 모든 하위 체계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로서 환경과 구별되며, 이 또한 외적 경계이다. 따라서 모든 하위 체계는, 커뮤니케이션 하는 한에서, (이에 따라 환경에 대해 외적 경계를 갖는 한에서), 서로 일치한다. (2) 모든 하위 체계는 서로 다른 코드와 프로그램을 확립하면서 서로 간에 구별되며, 이는 내적 경계이다. (내적 분화) 따라서 모든 하위 체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한에서, (이에 따라 서로 간에 내적 경계를 갖는 한에서), 서로 구별된다. 

커뮤니케이션은 기초적인elementary 작동으로서 자신의 재생산을 통해 사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사회는 그 정의상(‘포괄적인 사회적 체계’) 세계 사회로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에는 세계 사회가 함축되어 있다. 세계 사회는 커뮤니케이션 속에서(만) 출현하는 세계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재귀적 특성은 영토적 경계(국경)의 조건에도 적용된다. 첫 번째 국경이나 마지막 국경은 없다. 국경 뒤에는 항상 또 다른 국경이 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이웃하고, 스페인은 프랑스와 이웃하고, 프랑스는 벨기에와 이웃하고,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이웃하고, 네덜란드는 독일과 이웃하고 등등.) 

이번 시간(1월 13일)에는 영역본은 87쪽 둘째 문단부터(Apart from ...), 국역본은 183쪽 둘째 줄부터(불분명한 부분이 ...) 이어서 읽습니다. 

 

2) <논리철학논고 읽기>

지난 시간(1월 6일)에는 3.24 하나만 읽었습니다. 번호로 보면 이 명제는 단 하나이지만, 네 개의 문단에 일곱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길이가 있는 명제입니다. 

이 명제에 대해 제가 메모한 것을 프린트하여 세미나 회원들께 나눠드리고, 그 글을 읽어가며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7시 20분 조금 넘어서 세미나를 시작하였는데 거의 11시 쯤 되어서야 끝났었죠. 열띤 토론의 시간이었습니다. 

후기는 부족한 메모 글로 대신합니다. 

 

<3.24> 복합체를 다루는 명제는 그 구성 성분을 다루는 명제에 대해 내적인 관계를 지닌다. / 복합체는 오직 그것의 기술(記述)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으며, 이 기술은 맞거나 맞지 않거나 할 것이다. 어떤 복합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명제는 그 복합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거짓이 될 것이다. / 어떤 명제 요소가 어떤 복합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은 그 요소가 나타나는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불확정성으로부터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명제에 의해서는 아직 모든 것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일반성 표시는 실로 어떤 원형을 포함한다.) / 어떤 복합체의 상징을 어떤 단순한 상징으로 요약하는 일은 정의(定義)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 

‘복합체를 다루는 명제’ : 거의 대부분의 명제가 복합체를 다루고 있다. 단순체를, 즉 대상을 다루는 명제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대상을 현실적으로 지각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뿐 아니라 원리적으로도 가능한가? 명제에 대응하는 것이 대상(곧, 단순체)이 아니라 사실(곧, 복합체)임을 감안한다면, 모든 명제는 예외 없이 단순체가 아니라 오직 복합체만을 다룰 수 있는 게 아닐까? 만약 단순체-대상을 다루기 위하여, 그것을 기술(명제는 오직 기술밖에 하지 못하므로)하려고 하는 순간, 기술 자체가 지닌 어떤 본성으로 인해 그런 (기술의) 시도는 가로막혀 버리는 게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은 (놀랍게도) 단순체를 다루는 명제도 가능하다고 본다. 곧바로 이어서 ‘그 구성 성분을 다루는 명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단순체) a, b, c로 구성된 사실(복합체) A가 있다고 할 때, 대상 a를 다루는 명제는 가령 이렇게 표현될 수 있으리라. “A에는 a가 포함되어 있다.” “A는 a로 이루어져 있다.” “a는 A의 구성 성분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명제는 단순체 a를 다루는 명제인가? 복합체 A를 다루는 명제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그 어느 쪽으로도 볼 수 있어서 애매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단순체 a를 다루는 명제라면, 복합체 A에 대한 언급은 생략해야 되지 않을까? A를 언급하지 않은 채 a를 다루는 명제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복합체의 구성 성분’ : 복합체는 무조건 사실(또는 사태)인데, 그 구성 성분은 반드시 단순체-대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복합체가 사실인 경우에는 구성 성분은 사태도 가능하고 그보다 덜 복합적인/더 단순한 사실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복합체가 사태인 경우에는 구성 성분은 오직 대상만 올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구성 성분’이란 용어를 일반적 의미로 쓰는지, 엄밀한 의미로 쓰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2.0201에도 ‘복합체들의 구성 성분들’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 명제의 전후 맥락이 단순체인 ‘대상’을 논하고 있는 부분이라서, 이 ‘구성 성분’은 덜 복합적인 것들--사실, 사태, 대상--을 가리키기 보다는 단순한 것--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문맥상 적절할 것 같다. 앞선 명제들 중에서 ‘구성 성분’이란 용어가 나온 명제는 오직 2.0201뿐이고, 이 명제는 그 구성 성분을 ‘대상’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일단 잠정적으로는 여기 3.24에서의 ‘구성 성분’도 마찬가지로 ‘대상’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간주하기로 하자. 

‘내적 관계’ : ‘내적/외적’이란 표현은 2.01231(‘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대상의 내적 속성을 모두 알아야 한다.), 2.0233(“그것들[동일한 논리적 형식을 지닌 두 대상]의 외적 속성을 도외시한다면”) 뿐이다. 3.24는 대상 차원에서의 내적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명제 차원에서의 내적임을 말하고 있다. 두 명제 간의 관계가 내적임을 말하고 있다. (정확히는 ‘한 명제가 다른 명제에 내적 관계 안에 서 있다’고 말한다.) 

‘복합체를 ... 지닌다’ : 이 문장의 주어(... 명제)와 보어(... 명제)의 순서를 정반대로 바꿀 수는 없을까? 그래서 ‘단순체를 다루는 명제는 복합체를 다루는 명제에 내적 관계 안에 서 있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까? 이 문장의 주어와 보어는 서로 자리를 바꿔도 무방한 것일까, 아니면 반드시 본 명제의 순서대로만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일까? 만일 순서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지금 명제와 같은 순서로 표현을 하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2.0201에 의거하여 우리는 ‘복합체를 다루는 명제가 단순체를 다루는 명제로 분해될 수 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는 주어와 보어의 순서를 바꾸는 일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어떻게 단순체 명제를 복합체 명제로 분해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단순체가 분석될 수 있겠는가? 분석은 (3.201에 의해) 항상 더 복합적인 것에서 더 단순한 것으로 분석하는 것인데 말이다. 2.0201로부터 추론한 이 내용을 윗 단락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용해보자. 

  ‘복합체를 다루는 명제는 단순체를 다루는 명제로 분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명제는 뒤의 명제에 내적 관계 안에 서 있다.’ 이런 추론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는가? 만일 문제가 없다면, 3.24의 처음 문장은 주어와 순서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복합체 명제가 단순체 명제로 분해된다면, 그런 한에서, 복합체 명제는 단순체 명제를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분해가 된다면, 그것은 자기 밖에 있는 것, 자기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분해되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언제나 그것이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들로만 분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복합체 명제는 단순체 명제를 자기 안에, 곧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내적 포함 : 이는 일종의 동어반복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어떤 것을 자기 바깥에서 포함하고 있는 역설적인 경우 같은. 가령 부모는 자식을 자신들 바깥에서 포함하고 있다.) 

  복합체 명제는 단순체 명제를 내적으로 포함한다. 그렇다면 전자는 후자에 내적 관계 안에 있는가? 똑같이 내적 포함에 근거하여 후자가 전자에 내적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우선은 ‘A가 B에 내적 관계 안에 서 있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단 이는 어떤 상호 대칭성 내지 쌍방향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A와 B는 내적 관계 안에 있다’와는 다르다. 그것은 비대칭, 일방향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비대칭, 일방향이라면, A는 B에 대해 내적으로 관계하지만, B는 A에 대해 반드시 내적으로 관계하지 않아도 된다. (대칭, 쌍방향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복합체 명제는 단순체 명제를 자기 안에/내적으로 포함하고 있지만, 단순체 명제는 반드시 오직 저 특정한 복합체 명제에만 귀속되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단순체 명제는 특정의 복합체 명제에 반드시 내적으로 귀속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단순체 명제는 반드시 (그것을 포함하는) 복합체 명제에 내적 관계 안에 서 있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단순체 명제는 복합체 명제에 외적 관계 안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아무런 관계 안에도 서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3.24의 첫 문장에서의 주어(복합체 명제)와 보어(단순체 명제)의 순서는 텍스트에서 쓰여진 그대로 쓰여야만 한다, 순서를 바꿀 수 없다. 

‘복합체를 ... 지닌다’ : 언어 차원에서의 내적 관계는 궁극적으로 현실 차원에서의 내적 관계에 근거하고 있지 않을까? 이 점은 위의 논의에서 여러 번 암시되었다. 복합체-사실이 단순체-대상을 자기 안에/내적으로 포함한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궁극적으로는 2.1514, 2.1515에 의해 이름과 대상 간의 짝짓기--이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지점에서 명제와 현실은 접촉한다--에 근거하여) 명제와 사실 간의 대응 관계를 주장한다. 현실 차원에서 복합체가 단순체를 내적으로 포함한다면, 이와 대응 관계에 있는 언어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복합체-명제는 단순체-명제를 내적으로 포함해야만 할 것이다. 

‘복합체가 주어지다’ : ‘주어지다’의 의미는? 적어도 우리 앞에 감각적으로 현시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원리적으로, 우리는 순수하게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 어떤 복합체를 지각할 수 있을까? 복합체에 대한 지각은 이미 어떤 사고 행위를 전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세미나실에 10명의 사람이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지각하기 위해서라도, 감각 뿐만 아니라 감각한 바에 대한 사고 역시 요구된다. (이는 이미 칸트가 우리의 경험 및 인식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주장했던 바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어지다’는 문자 그대로 ‘우리 앞에 주어지다’로 이해해도 된다. 복합체가 ‘복합체로서’ 우리 앞에 주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 행위가 필요하다, 곧 명제에 의한 기술이 필요하다. (3.1에 의해 사고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명제이므로.) 

‘오직 ... 만’ :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복합체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오직 그것을 기술하는 명제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 대한 감각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감각적 지각이 없다면 현실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을 테니까. ‘오직 ...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감각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술-명제와 대립적-모순적 관계에 있는 명명-이름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복합체는 그것의 명명을 통해서는 전혀 주어질 수 없다. 아니, 그 전에 복합체는 도대체 명명할 수가 없다. 3.144는 상황은 기술될 수는 있지만 명명될 수는 없다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복합체는 명명될 수 없으므로, 그것의 이름도 역시 불가능하다. 복합체는 오직 기술만 될 수 있으며 그래서 그것의 명제만 가능하다. 역으로 단순체는 (3.221에 의해) 오직 그것의 명명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맞거나 맞지 않거나’ : 복합체의 기술은 그것이 기술하는 복합체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할 것이다. 복합체를 기술하는 데도 복합체에 맞지 않게 기술할 수 있다. (2.222에 의해) 명제는 (정확히는 명제의 뜻은) 그것이 기술하는 사실에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역시 2.222에 의해) 명제가 사실에 일치하는 경우에 그 명제는 참인 명제가 되고,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그 명제는 거짓인 명제가 된다. 

‘할 것이다werden’ : 영어로는 미래 조동사 ‘will’. ‘할 것이다’를 생략하고 그냥 ‘맞거나 맞지 않는다’로 써도 될 것을 굳이 이렇게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복합체의 기술은 복합체와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2.223에 의해) 그 기술이 맞는 기술인지 맞지 않는 기술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그 기술을 복합체와 ‘비교’해야만 한다. 복합체-현실과 비교하기 전까지는 기술이 그 자체로는 맞는 기술, 즉 참인 기술이 되는지, 맞지 않는 기술, 즉 거짓인 기술이 되는지를 미리 확인할 수가 없다. (2.225에 의해) 선험적으로 맞는, 즉 참인 기술이나 선험적으로 맞지 않는, 즉 거짓인 기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념적으로 봐도 비트겐슈타인이 표현 ‘맞다stimmen’을 사용한 이상, 그것이 맞아야 하는 또는 맞지 않아야 하는 어떤 다른 대상이 이미 전제되고 있다. 어떤 것은 그 다른 것 없이 자신 혼자서 맞거나 맞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도 이미 비교 대상을 전제하는 개념인데, ‘맞다/일치하다/적합하다/어울리다stimmen’은 더더욱 그러한 용어이다. 

  ‘~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 (3.221에 의해)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그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를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무엇에는 대상도 올 수 있고 사실도 올 수 있다. 따라서 복합체를 다루는 명제도 가능하고 단순체를 다루는 명제도 가능한 것이다. 3.24는 ‘복합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명제’를 말하고 있다. (앞에서 단순체 명제는 복합체 명제에 내적 관계 안에 서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더 앞부분의 논의에서 사실 A를 언급하지 않고 대상 a만 언급하는 명제가 과연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만일 대상 a를 다루는/대상 a에 관하여 이야기하는/대상 a와 관련 있는 어떤 사실을 기술하는 모든 명제가 반드시 사실 A를 언급해야만 한다면, 단순체 명제 역시 복합체 명제에 대해 내적 관계 안에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필연적 구속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실 A를 언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단순체 명제는 복합체 명제에 대해 자유롭다.) 이 명제는 복합체를 (바로 앞 문장과 관련하여) ‘기술’하는 명제이다. '~에 관하여 이야기하다’와 ‘~을 기술하다’는 사실상 같은 의미이다. 

‘그 복합체가 ... 될 것이다’ : 어떤 복합체를 기술하는 명제가 거짓인 명제가 되는 조건은, (바로 앞 문장의 내용에 의해) 그 명제가 그 복합체와 맞지/일치하지 않을 때이다. 복합체는 어쨌든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분명히 실재하는 하나의 현실, 실재하는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복합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명제가 반드시 현실/사실과 일치하게 이야기한다는 보장은 없다. 사실과 다르게, 틀리게 묘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이 명제가 맞지 않게/그르게 기술하고 있는 그 복합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명제가 맞게/옳게 기술하고 있는 복합체만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더 정확히 말해보자. 명제는 복합체를 기술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명제는 가능한 복합체를 그 현실의 복합체에 투영/투사한다. 정확히 말하면, 명제는 가능한 복합체를 투영함으로써 현실의 복합체를 기술하는 것이다. 명제가 어떤 복합체에 대한 명제가 되는 것은, 명제가 그 복합체의 어떤 가능성을 현실의 복합체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영이 없다면 명제는 명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명제에 의해 투영된 가능한 복합체, 가능한 상황을 (3.11에 의해) 우리는 ‘명제의 뜻’이라고 불렀다. 명제는 명제인 한, 가능한 상황을 투영하는 한, 언제나 어떤 뜻을 갖는다. (비록 그 뜻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고 (2.222에 의해) 바로 이 명제의 뜻을 (명제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실재하는 복합체와 비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명제의 뜻, 곧 가능한 복합체와 일치하는 현실의 복합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3.24대로 말하면 “그 복합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명제는 거짓인 명제가 된다. 거꾸로, 가능한 복합체와 일치하는 현실의 복합체가 존재하는 때에만, 그 명제는 참인 명제가 된다. 

  이로써 우리는 3.24에서 왜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라nicht unsinnig”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다. ‘무의미하다’로 번역된 독일어 ‘unsinnig’는 명사 ‘Sinn’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그리고 명사 ‘Sinn’은 ‘명사의 뜻’이라고 말할 때의 그 뜻에 해당하는 독일어 원 표현이다. (이 ‘Sinn’은 국역본[3.203]에서 ‘의미’로 번역된 독일어 ‘Bedeutung’과 구별된다. 따라서 unsining를 ‘무의미하다’로 옮긴 것은 용어의 일관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정확하고 엄밀한 번역어는 아니다. ‘뜻’과 ‘의미’를 체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논고>에 따라 일관되게 옮긴다면, ‘무의미하다’보다는 ‘뜻이 없다’가 차라리 좀더 낫다. 물론 역자가 그 점을 몰라서 ‘무의미하다’로 번역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명제는 뜻이 있다. Sinn이 있다. 따라서 뜻이 없지 않다. unsinnig하지 않다. 그리고 뜻이 있는 한에서, 즉 그 뜻을/그 가능한 상황을 투영하고 있는 한에서, 명제는 또한 그 뜻을 현실과 비교하여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굳이 이와 같이 <뜻이 없음>과 <거짓>을 구별하고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비트겐슈타인 관점에서 말하면 그 두 가지를 ‘혼동하는’) 철학자/논리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뜻이 없음>과 <거짓>을 같은 것으로 볼 경우, 혼동할 경우에 나타나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당연히 ‘우리는 거짓인 명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거짓임에도 충분히 그 뜻을 이해하고 있는 명제와 수도 없이 만나고 있다. 두 가지를 혼동하는 철학자들은 바로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명제의 뜻>이란 개념을 사고한 데는, 이런 철학사적 맥락도 관련이 있다.

‘명제 요소’ : 이 요소는 단순체인 ‘이름’인가? 이 명제의 첫 문장에서 ‘복합체의 구성 성분’을 우리는 잠정적으로 ‘대상’으로 해석하였다. 복합체에 구성 성분이 있듯이 명제에도 요소가 있다면, 그리고 구성 성분이 대상이라면, 그 요소는 대상에 대응하는 이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논리적으로 추론한 것이 아니라 문맥상으로 추론한 것이라서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일단 이 경우에도 잠정적으로 명제 요소를 (‘대상’에 대응하는) ’이름’이라고 하고 논의를 진행시켜 보자. (물론 이 요소가 그것이 속한 명제보다 범위/영역이 더 작음은 확실한 사실이다. 복합 명제의 경우에 그 요소는 그보다 덜 복합적인 명제, 요소 명제, 이름 셋 다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이 세 가능성을 같이 고려하면서 3.24를 해석해도 무방할 듯 싶다.) 

‘가리킨다’ : 이 표현은 독일어로 bezeichnet인데, 영역본은 둘 다 signifies로 옮겼다. 독일어로 이 단어는 실제로 ‘지시하다, 가리키다’는 의미가 있다. 영어 signify는 ‘의미하다, 뜻하다, 나타내다’는 의미를 갖는데, 독일어와는 약간 의미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낱말이다. 

‘하나의 명제 요소가 하나의 복합체를 가리킨다’ : 사실은 요소가 아니라 그 전체인 명제가 (또는 바로 이어지는 문장의 문맥으로 보건대 복합체를 기술하는 다수의 명제들이) 복합체를 가리켜야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지시하거나 나타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령 사람의 어떤 특징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지시하는 경우와 같은. 이는 분명히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다. 부분적인 언어로 전제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 그러나 이어지는 논의를 보면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됨이 드러난다. 여기서는 현실적인 사례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논리적 분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요소가 나타나는 명제들’ : 명제 요소를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는 또 하나의 문헌적/텍스트상의 근거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바로 ‘나타나는’, 독일어로 ‘vorkommt’이다. 이 표현은 2.012, 2.0121, 2.0122, 2.0123에서도 나왔다. 모두 인용해보자. 2.012 : “사물이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wenn das Ding im Sachverhalt vorkommen kann).” 2.0121 : “사물들이 사태들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wenn die Dinge in Sachverhalten vorkommen können).” 2.0122 : “그것[사물]이 모든 가능한 상황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한(insofern es[das Ding] in allen möglichen Sachlagen vorkommen kann).” 2.0123 : “그것[대상]이 사태들 속에서 나타날 모든 가능성들(sämtliche Möglichkeiten seines[den Gegenstand] Vorkommens in Sachverhalten).” 인용한 명제들에서 ‘나타나다’는 현실 차원에서 대상과 사태 간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표현이라면, 3.24에서 ‘나타나다’는 언어 차원에서 명제 요소와 명제 간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표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두 경우 사이에 어떤 구조적 유사성을 추론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런]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불확정성’ : 바로 이전 명제인 3.23에서 ‘확정성Bestimmtheit’가 언급되었고, 이 명제에서는 그 반대말인 ‘불확정성Unbestimmtheit’가 언급되고 있다. 확정성은 ‘뜻의’ 확정성이다. 명제의 뜻은 확정될 필요가 있다. (뜻이 확정되지 않는다면 명제의 참/거짓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제의 참/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면 결국 학문이 성립 불가능하다. 학문은 세계에 관한 진리를 다루는 것이니까.) 그리고 뜻이 확정되기 위해서는 단순 기호, 곧 단순체-대상을 의미하는 기호인 이름이 원리상 가능해야 한다. 이것이 3.23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불확정성도 <명제 뜻의> 불확정성이다. 3.23에 따르면, 명제 뜻의 불확정성은 궁극적으로 단순 기호인 이름의 가능성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점이다. 명제 요소가 단순 기호, 곧 이름이라면, 이 요소는 원칙적으로 복합체를 가리켜서는 안 되고 오직 단순체를 가리켜야 만 할 것이다. 복합체를 가리키는 것은 명제 요소가 할 일이 아니라 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명제 자체가 할 일이다. (단순히 텍스적인/문헌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내용적인 이유에서도 명제 요소를 단순 기호/이름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는 점을 점점 시사해주고 있는 듯 하다. 특히 3.23과의 연관성에서 이 대목을 해석해야 할 경우에 더욱 더 그러하다.) 이 요소가 나타나는 명제들은 뜻이 불확정적이다. 그 이유는 이 명제 요소가 단순체를 가리키는 요소가 아니라 복합체를 가리키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의미하는 이름이 아니라, 사실을 기술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명제 요소라고 했지만, 복합체-사실과 연관이 있는 이상, 그것은 실제로는 또 하나의 명제에 불과하다. 명제는 원칙적으로 그 궁극적 구성 요소인, 단순한 기호로서의 이름으로까지 분석될 수 있는 경우에만, 뜻이 확정이 된다. 이름으로까지 분석될 수 없는 명제는 확정된 뜻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복합체를 가리키는 어떤 기호를 (이 기호는 복합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단순 기호가 아니라 복합 기호이다) 자신들의 요소로 가지고 있는 명제들은 확정된 뜻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제 셋째 단락의 첫 문장을 해결했다. 명제의 요소가 여전히 단순체인 대상에 관여하지 않고 복합체인 사실에 관여하고 있다 함은 그 명제의 뜻이 불확정적임을 내포하고 있다. 

  문장이 쓰여진 순서의 문제도 있다. 우리는 A<명제 요소가 복합체를 가리킨다>는 점을 B<그 요소가 나타나는 명제들 속에 있는 뜻의 불확정성>으로부터 볼 수 있지, 그 반대로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A를 볼 수 있는, 알 수 있는 근거는 B에 있다. B로부터, B 때문에, B에 의거하여 우리는 A를 보게 된다, 이해하게 된다. 명제가 뜻이 확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이로부터 그 명제 요소가 여전히 복합체와 관련된 것임을, 즉 단순 기호가 아님을 추론할 수 있다. 이로써 3.23도 더 정확히 해명할 수 있다. 단순 기호의 가능성의 요구는 뜻의 확정성의 요구이다. 앞의 요구의 진정한 의미는 뒤의 요구에 있다. 일차적으로 뜻을 확정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단순 기호가 원리상 (그리고 실제로도)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라 말이다. 

‘이러한 명제 ... 않다’ : 그 요소가 여전히 단순체가 아니라 복합체를 가리키고 있는 그런 명제는 명제 안의 모든 것을 아직 확정하고 있지 않다. 확정된 면이 어느 정도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전부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확정되려면, 반복해 말하듯이, 그 요소가 단순체-대상를 가리키는 단순 기호-이름으로까지 분석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명제 안에 단순 기호-이름이 포함될 수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전까지는 뜻의 확정성은 여전히 요원한 일이 된다. 

‘우리는 <안다>’ : ‘안다’에 강조 표시가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앞 문장의 ‘볼 수 있다’가 힌트가 될까? 보다와 안다는 거의 같은 말이니까. 여전히 못 풀겠다. 

‘(일반성 … <포함한다>)’ : ‘원형’은 단순체를 가리키는 명제 요소-단순 기호와 관련이 있는 표현일까? 하나의 단순 기호-이름에는 하나의 단순체-대상이 대응한다. 그 반대로 똑같다. 하나의 단순체-대상에는 하나의 단순 기호-이름이 대응한다. 한 대상을 의미하는 이름은 오직 하나 뿐이고, 이름도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의미할 수 있다. 대상 O가 있다면, 이 대상은 오직 이름 N에 의해서만 가리켜질 수 있다. 다른 이름들이 그 대상을 의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이름 N 역시 오직 대상 O만 가리킬 수 있지, 다른 대상들을 의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이름에는 하나의 대상이, 그리고 하나의 대상에는 하나의 이름이. 그야말로 ‘상응’ 관계이다. 

  일반성의 기호는 이와 전혀 다르다. 하나의 이름에 대해 수많은 대상들이 지칭될 수 있다. 한 이름이 다수의 대상을 지칭할 수 있을 때, 한 명제가 다수의 사태를 지칭할 수 있을 때, 그런 이름과 명제를 우리는 일반성의 기호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일반성의 기호조차 자신 안에 일대일 대응하는 원형--단순 기호,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원형을 포함하지 않으면 일반성의 기호의 그 일반성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까지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일반성의 표시도 뜻의 확정성을 필요로 할 것이다. 확정된 뜻을 갖지 않는 일반성 표시는 하나의 표시로서 가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확정된 뜻을 갖기 위해서는 일반성 표시는 자신 안에 단순 기호인 어떤 원형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원형’이란 표현을 쓴 것은 ‘일반성’과의 의미상의 대비 때문으로 보인다. 일반성은 원형이니 파생형이니 하는 차이들을 모두 추상해버린다. 일반성 하에서는 원형, 파생형의 구별이 사라진다. 일반성이 출현하기 위한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원형은, 다수의 대상들을 가리키는 하나의 일반적인 이름이 출현하기 위한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하나의 대상만 가리키는 하나의 특수한 이름은, 일반성 표시가 어떤 확정된 뜻을 갖기 위해서, 자신 안에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 요소인 것이다. 

‘복합체 상징을 ... 표현될 수 있다’ : 가령 인간의 정의를 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 정의는 이성과 동물로 이루어진 어떤 복합체를 인간이라는 하나의 단순한 표현으로 요약, 압축하고 있다. 

  복합체 상징을 단순한 상징으로 요약하는 일은 앞 문장의 일반성 표시와도 조금 (아니 많이)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일반성 표시는 해당하는 사례들을 일일이 전부 나열하는 것이 너무 번거롭고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편리성을 위하여 만들어진 표현 방식인데, 위의 요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성적 동물’로 부르는 것보다 그냥 단순히 ‘인간’이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이 요약은 일반성 표시의 한 경우/사례가 아닐까? 

  복합체 상징을 단순한 상징으로 요약하는 것은 가능한데, 이는 아마도 ‘상징symbol’의 특성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사실 이 상징은 상징에 대한 상징이다. 상징을 상징하는 상징이다. 보통의 상징이 현실의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말이다. 상징은 그 대상을 현실에 있는 사실이나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그 사실과 대상에 대응하는 명제와 이름--이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상징들이다--에도 상징의 힘은 뻗어나갈 수 있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는 일종의 자기지시성 또는 재귀적 특성--루만의 용어--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언어(사고)는 물론이요 언어(사고) 자체에 대한 언어(사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의’ : 확정된 뜻을 갖고 있는 기호의 대표적인 경우. 뜻을 확정하지 못하면 정의는 불가능하다.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영어도 그렇고 한자어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그 말의 의미가 ‘뜻을 한정하다’가 아닌가? 복합체 상징을 단순한 상징으로 요약/압축하기 위해서도, 복합체 상징의 뜻은 확정되어 있어야 한다. 복합체 상징의 확정된 뜻에 기반하여 그 상징을 요약/압축하는 단순한 상징의 뜻도 확정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뜻이 확정된 단순한 상징에 대하여 정의가 성립할 수 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는 정의에서 ‘인간’ (단순한) 상징의 뜻은 ‘이성적 동물’ (복합체) 상징의 확정된 뜻에 의해 확정된다. 그리고 ‘이성적 동물’ 상징의 확정된 뜻은 오직 ‘이성적 동물’ 상징을 궁극적으로 구성하는 단순 상징, 단순 기호, 이름이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이번 시간(1월 13일)에는 <논고> 3.25부터 계속 독해합니다. 

 

그럼 오는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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