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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비장애인중심주의(Animals and Ableism) (*1) 

                                        스나우라 테일러(Sunaura Taylor)
번역: 이마즈 유리
덧댐: 큰콩쥐
원문링크: https://animalsanddisability.wordpress.com/

 

몇 년 전 관절굽음증(Arthrogryposis)이라는 장애를 가진 여우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 또한 그런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 여우는 "쩔뚝거리는 걸음걸이와 병에 걸린 듯한 생김새" 때문에 사냥꾼이 쏜 총에 맞았다고 한다.
이 중증장애를 가진 여우는 근육량도 보통이고 뱃속에 이미 소화된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는 "변형된 다리로도 사냥하고 먹이를 구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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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어미 여우는 발목을 잃었다. 세 발로 걷는다. 남편 여우도 죽었지만 혼자 사냥해서 새끼 다섯마리를 잘 키워 독립시켰다고 한다.>

 

           이 사냥은 안락사(mercy killing)로 받아들여졌다(물론 사냥꾼은 다른 여우도 그보다 못한 이유로 쏘겠지만). 
           하지만 이 여우는 실제로는 부족함 없이 삶을 영위했다. 겨울인데도 적당히 살집이 있고, 음식도 잘 먹었으니까.
           사냥꾼은 장애에 대해서, 맞서 싸워야 하는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어떤 죽음보다 나쁜 것이라는 편견의 틀로 보고
           여우의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가정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장애가 있는 신체에 대해 뿌리 깊은 선입견과 편견을 지닌 채 살아간다.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비장애인중심주의(ablism)는 인간을 넘어서 동물로까지 투영될 정도다.
그러한 예는 병들고 다친, 장애가 있는 동물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고 말하는지 언뜻 떠올려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비장애인중심주의적인 숱한 표현이 동물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죽는 게 낫다(better off dead)"는 말로 여우가 사살되었지만,
이것은 애완동물의 안락사나 동물을 이용한 농업(animal agriculture)의 논의와도 같은 맥락에 있다.
장애가 있는 동물은 한편으로 늘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와 함께 감동을 자아내는 존재(inspirational animal)로 그려지고,
이런 식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오늘날 인기를 더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 예로, 2011년 영화 <돌핀 테일>에서는 꼬리를 잃은 돌고래가 보조기를 달고 다시금 수영을 배우는 실화가 그려진다.
다른 예로, 앞발 없이 두 다리만 가지고 태어난 개 페이스가 걷기에 성공한다는 이야기도 많은 인기와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페이스는 <오프라 윈프리>를 비롯해 수많은 프로그램에 등장하며 역경을 이겨내고 “감동을 주는” 동물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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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영화 <돌핀 테일>(2011)에서 꼬리에 보조기를 단 돌고래         우: 두 다리만 가지고 태어난 개 Faith

 

흔히 우리는 동물에게 비장애인중심주의뿐 아니라, 장애라는 개념자체를 투영하기도 한다.
동물들이 그들의 신체적이고 인지적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실상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리가 하나 없는 강아지의 차이를 다른 강아지가 감지할까? 다리를 저는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와 다른 점을 알아챌까?
여러 흥미로운 증거들을 통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몇몇 동물들은 동료가 어떤 식으로든 다를 경우에 그 다름을 이해할 줄 안다는 것이다.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쿠낫쿠루라는 이름의 침팬지는 인간에게 사육되는 침팬지 중 유일하게 뇌성마비를 가졌는데,
과학자들은 같은 무리의 침팬지들이 이러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쿠낫쿠루를 다르게 대하고,
나이 많은 수컷 침팬지들도 공격적인 태도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장애'라는 말의 의미와 용법은 인간에게 여전히 매우 고유한 것이며 인간의 문화에서 수세기에 걸쳐 정의되고 만들어져왔다.
흥미롭게도 쿠낫쿠루는 뇌성마비에 의해 "고통받는"다고 묘사되는데,
그의 웹사이트에서 그를 묘사하는 말 중 3분의 2 이상이 그가 얼마나 "특별"하고 "감동적"인지를 표현하는 데 쓰인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 그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취약성(vulnerability), 약점(weakness),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등
여타의 자연스러운 가치를 여러 방식으로 부정하고 곧잘 ‘적자생존’의 논리를 덧씌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나는 연구를 통해 자연에서 장애를 가지고도 살아남은 동물들의 예,
생김새가 다른 동료에게 도움이 필요함을 실제로 인지하는 동물의 예를 놀랍도록 많이 발견했다.
원숭이, 코끼리, 개, 돼지, 그리고 오리와 거위, 닭까지 동물들이 장애를 가진 동료를 돕는 예는 많다.
동물행동학자 마크 베코프(Mark Bekoff)는 많은 동물이 정의감을 가진 것을 밝혀냈고, 그를 위시한 많은 연구자들 역시
동물의 윤리를 탐구하며 동물들이 제 무리 가운데 다치거나 장애가 있는 존재를 어떻게 돕는지 뒷받침하는 사례를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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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로 번역된 마크 베코프의 책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나는 일련의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비장애인중심주의는 과연 모든 동물에게, 그러니까 장애가 있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인간은 동물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된 논리로 인간과 동물의 능력과 특징을 비교해왔다.
인간이 뛰어난 이성과 복잡한 감정을 지니고 이족보행으로 자유로운 두 손을 갖게 된 종인 데 반해,
동물은 특별한 기능이나 능력이 없는 종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장애인운동 활동가가 장애인들, 즉 이성과 신체적 독립성이라는 능력이 없는 자들의 권리를 옹호할 경우,
이러한 논의는 비인간 동물에게 어떤 귀결을 초래하게 될까?

 

역사적으로 동물은 서양문명에서 흔히 의식이 없는 자동기계 혹은 충동만 있고 영혼은 없는 짐승으로 간주되었다.
과학에 의해(그리고 많은 놀라운 연구에 의해) 동물에게 확실히 감정이 있다(feel)는 것을 점점 부정하기 어려워지면서,
과학자와 철학자는 동물에게 없는 인간의 여러 능력에 천착하여 동물을 활용할 정당한 근거를 찾으려 했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자기를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단어와 문법을 사용해 소통하고, 미래를 계획할 줄 안다 등등.
하지만 이미 그와 같은 예들이 모두 다른 종도 공유하는 능력임이 밝혀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야 말로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특성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이마저 다른 영장류들, 나아가 개나 쥐들(쥐들을 간지럼을 태우면 매우 즐거워한다)과 공유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종의 동물이, 인간이 목표지점으로 정한 곳에 다다르고 있을 뿐 아니라,
랍스터에서 침팬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동물이 한때 과학자와 철학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동물들은 지각이 있고(sentient), 동물도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벨베(Michael Berube)를 인터뷰했을 때 그가 나에게 말해주었듯,
"지난 500년간 우리는 어떤 발견 후에 ‘맙소사, 동물들이 우리 예상보다 바보였어’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모든 발견은 그 역방향으로 이루어져온 것이다."

 

동물들의 고통과 착취를 허용하는 문화적 규범과 제도, 그 가치 자체가 비장애인중심주의에서 생겨났다.
동물의 지능과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부터 본디 비장애중심주의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동물을 끊임없이 비장애인중심주의적이고 특히 신경전형적(neurotypical) 인 렌즈로 판단해왔다(*2).
이는 많은 이들에게 정신장애인과 신체장애인의 능력을 부당하게 평가하게 만든 렌즈와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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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섰다 앉았다를 평생 반복하며 좁은 '스톨' 안 에 갇혀 지내야 하는 공장식 축산으로 사육되는 돼지들>

 

비장애인중심주의를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가치 절하로서 이해한다면, 동물은 비장애인중심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논할 수 있을까?
결국 동물은 "장애화된 사람들(disabled people)”이 아니다.
(그럼: 역주)비장애인중심주의를 ‘비장애성의 관철 (perpatuation of abledness)’ 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비장애인중심주의가 비인간 동물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질문에 크게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동물은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열등하고 가치가 낮은 존재로 간주되고, 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무능력과 차이 등의 여러 기본적인 이유로 학대 당한다.
또한 정상의 몸을 지닌 인간이라는 특권화된 이상 때문에 동물은 분명히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이상적 기준에 따라 평가받은 동물들이 숱하게 잔인한 처사를 받더라도 그것은 정당화된다.
인간이 신의 이미지를 본떠 창조되었다는 것을 비롯하여, 진화의 정점(자연의 걸작)에 있다는 발상을 보더라도
우리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은 비장애중심주의를 근거로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장애중심주의에 의해 영속화되고 특권화되는 정상적 신체는 장애가 없을 뿐 아니라 동물의 모습을 띠지도 않는다.

 

동물은 비장애인중심주의가 유지하는 가치관과 제도 등의 형식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비장애인중심주의는 독립성, 생산성, 자율성, 유익성의 의미를 한정된 관념 안에 가둔다.
비장애인중심주의에서 다양한 제도와 규범이 창출되고,
이것들은 무엇이 자연스러운지에 대한 이해를 제한하며 정상성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생산성, 탁월성, 유익성, 효율성 등의 특징과 속성, 제도와 규범을 진단하고 위계 짓고 가치를 매긴다.
다시 말해 비장애인인중심주의는 본질적으로 동물을 음식물로, 연구수단으로, 착취해도 되는 노동자로 여기게 하고,
단적으로 말해 인간이 이용해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비장애인중심주의는 또한, 장애인의 차별과 주변화가 당연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신화가
동물의 억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정상화함으로써 동물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장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당연시되는 인식에서도 볼 수 있다.
피오나 캠벨(Fiona Campbell)이 말하듯, "비장애인중심주의적 체제는 집단적 주관성(collective subjectivity)이라는 큰 동굴(caverns)로 이어져 있을 만큼
장애에 대해 뿌리 깊은 부정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장애 개념이 ‘본디 부정적인 것’으로서 생각되고,
그것이 이탈에 대한 자연화된 반응으로서 간주될 정도이다."

 

'자연스러움(nature)'이란 동물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가장 오래되고 공통된 논거이다.
이런 논의는 자연의 순환과 거기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낭만적인 선언을 비롯해서 지속 가능한 농업에 대한 자세한 논의까지 폭넓게 걸쳐있다.
그러나 장애학이 자연스러움과 정상성의 논의들을 문제시해왔듯,
우리는 동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엇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지에 대한 논의들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연에 대한 우리 이해는 인간의 문화와 편견과 떼어내 이야기할 수 없으며,
동물에 대한 인간의 유구한 지배라는 역사적 패러다임으로 이해할 경우 특히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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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낳을 수 없는 수평아리들은 태어나서 얼마되지 않아 감별된 후, 산 채로 갈려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또한 비장애인중심주의는 그것이 독립과 의존 등의 관념을 영속화시킴으로써 동물에게 영향을 끼친다.
'의존'이라는 말은 인간이 동물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 중 하나다.
이와 관련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 가운데, 최근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그리고 조엘 셀라틴(Joel Salatin) 같은 이의 작품이 이를 현저히 보여준다.
농부이며 저명한 작가인 휴 핀리-휘팅스톨(Hugh Whittingstall)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영향을 끼치는 모든 생물 가운데 우리가 고기를 위해서 키우고 도축하는 동물들만큼 우리에게 깊이 의존하는 존재도 없다.
그러니까 종으로서의 성공, 개체 단위에서의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의존’이라는 말은 화려한 수사적 도구일 뿐이다.
이는 동물을 이용하는 측에서 듣기 좋고 공감적이고 배려가 넘치는 말이지만, 인간의 배려를 받는 측을 지속적으로 착취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장애학 학자와 활동가들은
장애인을 소외하고 그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충분히 평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의존'이라는 비장애인중심적인 개념을 비판해왔는데,
이처럼 내 작업도 동물의 의존성(animal dependency)이라는 개념 또한 마찬가지로 문제적이라고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가축화된 동물(domesticated animals)과 야생동물(wild animals), 그리고 우리 인간 사이에는 상호의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혹은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도움을 알고, 가치를 매기고, 존중함과 동시에 그들의 살아갈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인간을 위해 매년 살해되는 50억 동물 중 상당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도록 말 그대로 ‘제조’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기, 우유, 계란이라는 "무언(mutant)"의 생산자로 키워지는 것이다.
내가 가진 장애, ‘관절굽음증’만 보아도 이는 일찍이 많은 공장식 축산농장에서 발견되었고,
'쇠고기 잡지(Beef Magazine)' 2008년 12월호 주제가 된 일도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장애를 가진 것이 우리로 하여금 동물들에 대해 더욱 쉽게 배려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 우리가 그들과 얼마나 닮았는지 말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존재가 비좁은 철창에 갇혀 한낱 대상으로 취급당할 때, 우리는 거기 갇힌 자들이 지각 있는 존재임을 상기하는 것을 택할 수 있다.
우리는 공감하는 것을 택하고, 이러한 억압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처럼 비추는 산업과 권력구조에 반문하는 것을 택할 수 있다.
반(反)비장애인중심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공감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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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중심주의를 되묻는 것은 다른 존재의 삶에 대한 상정(assumption)을 되묻는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은 억압적인 규범과 불평등한 권력 구조를 특권화하는 정치, 사회, 역사, 경제적 구조를 따져 묻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장애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다른 억압 당한 집단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가 이 지구를 공유하는 인간 이외의 동물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1) 이 글에서는 'ablism'을 '비장애인중심주의'로 통일적으로 번역해보았다. 그런데 'ablism'은 'able(할 수 있는)'과 'ism(주의)'가 합쳐진 말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능력주의'로 표현할 수도 있고, 또 테일러가 이 말을 비인간 동물에게도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고려해서 '인간'을 뺀 '비장애중심주의'로도 번역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능력주의'로 번역하면, '장애인 차별'에 대한 저항의 맥락이 사라지고 너무 일반화되어버릴 우려가 있고, 이 글에서도 살짝 언급되었듯이 우리는 비인간 동물에게 있어서의 '장애' 개념에 대해 전혀 모른다 (적어도 종에 따라 '장애' 개념도 다를 것이고, '비장애중심주의' - '비장애개중심주의'? '비장애돼지중심주의'? - 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그것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을 고려해서, 우선 우리 인간종의 세계에 있는 차별을 가리켜, 문제화시키는 말로서 'ablism'을 '비장애인중심주의'로 번역했다. 이런 인간세계에서의 폭력성이 비인간 동물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2) 신경전형적(neurotypical)이라는 표현은 자폐 스펙트럼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자폐증 커뮤니티에서 만들어졌다. 많은 경우 이와 함께, 전형적인 신경발달은 하나의 신경발달에 불과하다고 보는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라는 표현이 주장되고, 또 운동의 맥락에서 쓰이기도 한다.

 

* 위키피디아에서...

신경전형인(Neurotypical)은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 자폐증인 사람들이 비자폐인을 부를 때, 내지는 신경질환이 없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자폐 스펙트럼(Autism spectrum) 또는 자폐범주성장애(ASD)란 자폐증에서 아스퍼거 증후군, 서번트 증후군등의 증상이다. 지적장애가 수반되지 않는 자폐성장애이다. 전반적 발달 장애를 구성한다. 장애인복지법에서는 자폐성장애를 장애로 인정하므로, 자폐범주성장애도 자폐성장애인으로 장애인등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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