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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2016년에 캠브릿지 대학의 사라 프랭클린이 진행했다. 프랭클린은 해러웨이의 오랜 독자이자 팬이다. 2016년에는 다나 해러웨이의 새 책들인, “Manifestly Haraway(Minnesota,2016)”와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Duke, 2016)”이 출간되었는데, 이 인터뷰는 “Staying with ~”의 출간 직전에 이루어졌다. 사라 프랭클린은 이 인터뷰를 통해서 해러웨이 작업의 몇 가지 핵심적인 주제와 핵심 용어들, 그리고 그녀의 글쓰기 실천들을 탐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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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과 함께하기: Donna Haraway 인터뷰  (Staying with the  Manifesto: An interview with Donna Haraway) 

Sarah Franklin (University of Cambridge)
Theory, Culture & Society 0(0) 1–15 

 

 

번역: 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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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오케이, 첫 번째로 질문하고 싶은 건 시리즈 제목입니다. 이 책(역주:Manifestly Haraway를 말함)은 post-humanities series 에서 출간되었죠. 예전에 당신이 말하기를, ‘포스트-휴먼(post-human)’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유보적이라고 했습니다. 이 용어에 관해서 조금 더 말해 주시겠습니까? 왜 유보적인지, 그리고 왜 유용하지 않은지도?

 

해러웨이: 난 ‘포스트-휴먼(Post-human)’이 전혀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흔히 향상된 우주 전쟁 및 후기 우주 경쟁 타입의 인간, 인간의 최종적 궤적을 위해서 지구를 떠나가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것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 용어입니다, ‘포스트-휴먼(post-human)’이란 말은.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과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post-‘라는 접두사는 휴머니즘의 역사들, 의미들, 가능성들, 폭력들, 희망참에 관한 시험과 조사의 일종의 표지이죠. 휴머니즘은 너무나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 결코 전적으로 비판적으로 느끼지는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것은 너무나 많은 풍성한 작업들을 거둬들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난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는 용어에는 편치 않은데요, 그 용어가 사람들과의 협력, 우정, 연합에 관한 일종의 확인으로서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죠. 그리고 나는 러스틴(Rusten Hogness, 해러웨이의 파트너)이 제안한 용어, ‘com-post(퇴비)’를 아주 선호해요. ‘휴먼(human)’이란 용어에 관해서 – 물론, 그것은 어원상으로는, 백만가지(그런데, 백만은 아니죠), 방식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호모(homo-)‘를 향해 갈 수 있죠. 나는 이 근본적인 단어가 남근 숭배적인 캐릭터인 ’호모(Homo)’의 비극적인 발기위축이라는 우화를 의미하게 하고 싶어요. 본질적으로 ‘Homo’는 남성(Man)’이죠. 바짝 쳐들었다가 푹 떨어지는 비극적인 발기위축의 ‘남성(Man)’말이에요.

‘호모(homo-)‘라는 말의 근원은, 일종의…, 나는 그것을 인간예외주의를 표시하는데 사용하는데요, 나는 그게 인간(human)의 일종의 특이성의 한 종류인데, 근본적으로 남성적인 것이라 생각해요. 이 카테고리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경험적인 사건들이 어떻든 간에 말이죠. 그건 근본적으로 유럽적이죠, 사람들의 언어들과 민족성들과 피부색이 어떻든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것은, 공명하는 모든 것에서, 식민지화의 용어(colonizing term)입니다. 나는 ‘homo-‘라는 말이 그걸 의미하도록 둡니다. 반면에 똑같이 우리는 인간(human)을 쉽게, 정말로 더 쉽게, ‘부식토(humus)’의 방향으로, 흙속으로, 복수종속으로 데리고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지구의 생물적이고 비생물적인 작용과 세속적인 것들, 지구 안에 있고 지구에 관한 것들, 그리고 지구를 위한 것들 속으로도 데려갈 수 있죠. 부식토는, 지구를 양육할 자들을 위해서, 흙 속에서 그리고 퇴비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com-post(퇴비)’라고 할 경우, 그것은 농담 이상이죠. 역시 농담이긴 하지만 말이죠. 그것은 카테고리들에 관해서 너무 심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자, 카테고리들이 이 세계의 복잡성과 가볍게 만나도록 두는 것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식토(humus)’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용어이고, 퇴비 속에서처럼, 서로 함께 만들고, 서로 함께 되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함께입니다.

이것이 ‘반려종(companion)’이란 말이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반려종들 속에서, 함께하기(companioning with)입니다. 애완동물들이 또한 종종 반려종이긴 하지만, 그건 애완동물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함께하기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함께 하기, 식탁에 함께 하기에 관한 것입니다. 퇴비 속에서, 우리는 식탁에 함께 합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지구로 돌려보내게 할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죠. 나는, ‘퇴비(compost)’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이유는 그 말이 삶과 죽음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퇴비 속에 있다면, 유한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관한 물음들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울하고 비극적인 방식으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퇴비 속에 있다면, 우리의 육신을 지구로 돌려보낼 자들은 퇴비를 제작 중이 있는 거죠.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에서 그건 정말로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런 것이 일어나게 해야 해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은 지나치게 이론적인 담론들에 묶여있어요.- 엄청 중요한 것들이죠. 생명(Live)를 만들고 죽음(die)를 만드는 이슈들. 누가 간단히 처분할 수 있고, 누가 중요한지에 관한 물음들 말이에요.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표지 하에서 정말 너무나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난 단지 퇴비에 의해 그리고 퇴비와 함께 작동되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러스틴도 아침 식사를 하면서 농담처럼 제안하기를, 우리에게는 인간성(human-ities)대신에, humus-ities(부식토성)이 있다는 거예요.

프랭클린: 예, 아니, 나는 Humiversities(역주:Universities + Humus 인 듯함.)가 좋아요.

해러웨이: 학계를 퇴비에 데려오니까 아주 다르게 들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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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그런데, 퇴비(compost)는 나의 질문 리스트에서 아래쪽에 있었지만, 우리가 이 토픽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퇴비(compost)는 당신이 아주 일찍부터 써온 많은 것들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어법인 듯합니다. 그것은 땅과 깊이 관련된 어법이고, 예측 불가능한 그리고 예측 가능한 상호 작용들에 관한 것이고요. 그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고,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하는 인간의 공생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은, 당신이, 일종의, 일상적 윤리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엇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퇴비를 합니까? 그들은 퇴비를 합니까? 그들에게 어떤 퇴비 더미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퇴비 만들기에 관해서 어떻게 느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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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그런데, 우린 퇴비를 잘못 할 수도 있어요. 나는 그것도 좋아합니다. 이 용어에 관해서 그 부분을 좋아해요. 우리는 퇴비를 게을리 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집어넣을 수도 있죠. 그러니까, 거기에 산업적으로 생산된 (혹은 친환경적으로 생산된 것이든) 고기를 넣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뒤집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적당한 장소에 둘 수 있어서, 그것이 퇴비에 끌려 들어와서는 안 되는 생물을 끌어 들이게 되죠. 그렇게 되면, 그것들의 삶들 자체가 인간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되지요. 너구리들처럼 말이죠. 또한 그게 또 다른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게도 하죠. 퇴비는 작동의 지점이고, 만들고 파괴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난받을 만한 실패를 포함해서, 실패의 장소입니다. 퇴비는 잘못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나는 퇴비의 그런 면을 좋아하고, 내 삶에 실패한 퇴비 더미를 상당히 쌓았습니다.

프랭클린: 예, 그래서 제가 그것을 질문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어떤 퇴비 더미를 갖고 있습니까?

해러웨이: 실제로, 세 개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이 재미나게 생긴 뚜껑달린 까만 통 안에 있어요. 이건 시에서 공급하는 통인데요. 거의 부엌 쓰레기를 넣는 곳이죠. 우리는 통이 하나 있어요. 세라믹 통.. – 아니, 실제로 그건 스테인레스 스틸 통이네요. 세라믹 통은 충분하게 크지 않아요. 우리는 싱크대 위에 스테인레스 스틸 통이 있는데, 잠시 일시적으로 거기에 넣어 뒀다가, 그 다음에 퇴비 더미로 가는데, 그 위에 뚜껑이 있고, 잔디 쓰레기 등도 들어갑니다. 그 다음, 다른 더미들도 두 개 있어요. 구멍이 뚫린 타르종이 실린더 같은 것들인데, 거기에는 섬유질이 더 많은 것들이 들어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퇴비가 될 것들을 잘 보관하는 것을 정말 잘 못해요. 있잖아요, 최첨단의 퇴비 만들기 조건들 말이죠. 우리는 충분히 높은 온도에 도달하지를 못해요. 우리는 암탉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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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당신의 퇴비는 충분히 뜨거워지지 않는군요.

해러웨이: 그게 충분히 뜨겁지 않아요. 그리고 닭똥이 퇴비 더미로 가요. 그리고, 만약 그것들이 그 똥 속에 나쁜 미생물을 받으면, 그것은 우리 정원 속에서 끝장이 납니다, 왜냐하면 나가지 않거든요.

프랭클린: 예, 그것이 복잡하기 때문에, 퇴비가 말이죠. 토질 외에도, 많은 혼합 성분의 더미들이 있고, 그것이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실패에 가까울 필요. 이것은 이 책의 또 다른 큰 주제이지요, 당신은 그것을 사정없는 실패하기에 대한 개방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동에 관한 질문들도 있어요. 왜냐하면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퇴비를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이 없거나, 공간이 없거나, 혹은 단지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그런 온갖 지저분한 것들을 싱크대 바로 옆에 두고 싶어 하지 않지요.

 

해러웨이: 그리고 계급에 관한 질문도 있지요. – 우리가 마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계급을 말합니다. 우리는 마당이 있는 집을 소유하고 있어요. 와! 2천만명 남짓한 철저한 난민들이 있는 세계, 아마 그보다 더 되겠지요, 집에서 추방된 6천만명 이상의 사람들,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불안정한 주거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나 아예 집이 없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끊임없이.... 제 말은, 충분히 큰 마당이 있는 집을 소유하고 있어서 친환경적인 정원과 퇴비 더미와 닭을 가진다는 것이 계급을 말한다는 겁니다. 아마, 내 가족의 다른 세대에, 그것은 이민자-식민 농업의 일부를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의 경우에, 아버지 쪽에, 그건 노예가 일하는 대규모 농장을 말하는 것이었을 겁니다만.

달리 말하자면, 있잖아요, 이 퇴비 더미가 나의 마당에서 잘못 만들어 지고 있도록 허용하는 다양한 역사들과 다양한 형성들을 어떻게 이어받을까에 관한 물음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고는, 나는 나의 퇴비 작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좀 더 응답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물려받은 것을 현재로 데려온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좀 더 역사적이 되기 위한 자극제들입니다.

프랭클린: 그 얘기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군요. 그리고 더 나가기 전에 퇴비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퇴비와 관련해서 당신 집안에 어떤 노동의 분할이 있습니까?                                                    

 

해러웨이: 예, 그리고, 물론 그것은 복수종생물의 노동 분할인데, 파리들, 벌레들, 미생물들, 그리고 곰팡이들이 대부분의 일을 하고,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제대로 된 주거를 제공합니다. 닭들은 그들의 똥이 거기로 들어가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하고, 기타 등등이지요. 그리고 러스틴과 내가 상당한 일을 합니다. 젠더 노동 분할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런데,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군요. 러스틴은 나보다는 퇴비를 더 많이 뒤집습니다. 나는 러스틴보다 거기에 더 많이 넣지요. 우리 둘 다 그 일을 합니다. 정확히 성별 분할은 아니지만, 그게 약간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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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예, 제 생각에 퇴비는 멋진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퇴비를 둘러싸고, 문제시 되는 작동 중인 일상생활의 많은 정치학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사람들이 그들의 가정공간과 가계소비에 관해서 더 많은 책임을 수행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퇴비 문제는 더욱더 중요해졌습니다.

 

해러웨이: 그리고 사소한 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나는 퇴비가 사이보그적인 정치학을 배제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이보그 실체를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이보그’를 언제나 그렇게 규정해 왔고, 그렇게 규정할 것인 것처럼, 그것은 기계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특정 역사성들의 관점에서 그것을 규정한다면 말이죠. ‘사이보그’는 로봇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그게요, 반짝 반짝 빛나는 금속성이나 어떤 것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벨텔레폰과 같은 기업적 통신 산업들, 그리고 2차 대전과 냉전의 전개들과의 협업, 특히, 군사적기구들과 감시기구들과의 협업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통신 과학들과 그 기관들에 관련된 사이버네틱 유기체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이보그가 그러한 역사성들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리고 언제나 그런 역사성들을 넘어서고, 최초에 조차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이보그’는, 그것이, 예를 들면, 현대 생물학적 과학들, 생태학적 과학들의 세속화 (worldings)와 되기(becoming)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퇴비를 포함합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분자나 생물학적인 프로세스들, 그리고 미생물 군집들, 자양분들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들을 통해 퇴비에 관해 생각하고 퇴비와 상호작용 합니다. 이 특정한 방식들 – 이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사이보그 과학들을 포함합니다. 또한 내가 나 자신의 퇴비 더미를 살펴보면, 그것들의 물질성 또한 사이보그적입니다 – 플라스틱이 나의 더미들 중 하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의 역사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그것의 일부분인 어떤 경제 시스템에 의해 가능하게 된 계급과 여가의 특정한 구조. 이것들은 절대로 내가 의미하는 바의 사이보그 세속화(cyborg worldings)를 제외하지 못합니다.

프랭클린: 예, 물론이지요. 자, 그 얘기가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는 방향을 여러 가지로 열어 주네요. 하지만, 잠깐만, 당신이 사용하는 말들에 관한 주제로 돌아가서,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사용하는지, 거기에 대한 당신의 생각,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이 관점에서 더 최근의 것으로는 ‘Anthropocene(인간세)’와, 그리고 ‘Capitalocene(자본세)’라는 말과 관련하여 그 용어에 관한 당신의 생각. 이 두 가지 용어들에 대해서 조금만 말해 주시겠습니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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