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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재는 다나 해러웨이의 책 "Staying with Trouble"을 소개하는 코너 입니다.  1월 3일 부터 수유너머104에서  강의가 진행될 예정이고, 이 코너에서는 강의원고를 간추려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선언의 사상가, 다나 해러웨이

 

                                                                                                                                                         최유미/수유너머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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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 해러웨이는 선언의 사상가다. 그녀는 두 번의 유명한 선언, 『사이보그선언』과 『반려종선언』을 발표 했고, 지금 두 개의 선언을 더 준비 중이다. 대개 선언형식의 글쓰기는 확고한 정치적 견해를 대중에게 밝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에 돌입하겠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다. 가령 「기미독립선언」은 조선은 독립국가이고 조선인은 자주민이라는 확고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해러웨이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확실히 밝혔다.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해 한번은 자신이 사이보그가 되겠다고 했고 또 한번은 자신의 개와 반려친족이라는 선언을 했다.

『사이보그선언』은 1985년에 소셜리스트 리뷰에 발표된 논문이다. 당시의 정세는 레이건-대처 시대로 대표되는 신냉전체제가 격화된 시기였다. 소련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자 레이건은 일명 스타워즈라는 엄청난 규모의 파괴적인 무기개발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그러한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것이 「사이보그선언」의 문제의식이다. 해러웨이의 정치적인 슬로건은 “지구에서 살아남으려면 사이보그를(Cyborg for earthly survival)”이다. 이 선언은 발표 즉시 대단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테크노사이언스는 핵전쟁의 위협이라는 정세 속에서 마치 2차 대전 직후처럼 파괴의 대명사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페미니즘 진영에서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사이보그선언』은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한 긍정이자, 자연과 문화(혹은 인공)을 나누는 이분법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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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의 몸은 죄 없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아이러니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능력, 기술 능력에 의한 강력한 기쁨은 더 이상 죄가 아니며, 체현의 한 양상일 뿐이다. 기계는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그것이 아니며, 존경해야 할 그것이 아니고, 지배해야할 그것도 아니다. 기계는 우리며, 우리의 활동이며, 우리의 체현의 한 양상이다. 우리는 기계에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다." (사이보그선언)

 

해러웨이가 테크노사이언스를 긍정한다고 해서 그것의 파괴적인 힘을 외면하거나 망각한다든지, 혹은 테크노사이언스의 힘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기술결정론자가 아닐 뿐 아니라, 테크노사이언스가 야기할 미래가 오직 인간의 선용과 악용에만 달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이보그선언』에서 해러웨이는 남성의 자기출산 신화를 슬쩍 도용해서 전혀 다른 신화를 만들어 버렸다. 우주전사와 함께 태어나버린 사생아 사이보그. 린 랜돌프가 『사이보그 선언』을 읽고 그린 그림은, 코요테 가죽을 뒤집어쓰고, 가슴에는 반도체 칩을 부착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유색인종 여성이다. 백인남성의 자기출산 신화가 낳은 사이보그가 우주전사라면, 해러웨이가 희망을 걸고 있는 사이보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버린 유색인종 사이보그다. 이 사이보그는 80년대 미국 반도체 생산라인으로 몰려든 제 3세계 여성을 형상화한 것이고, 유색인종의 페미니즘에 대한 응답이었다.

반도체 생산라인의 제3세계 유색인종 여성은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이자, 파괴적 무기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을 만드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한 테크노사이언스에 기회주의적으로 편승해서 그들을 옭아매던 가부장체계로부터 빠져나온 자들이기도 하다. 린 랜돌프가 시각화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이런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있다. 해러웨이가 되겠다고 선언한 사이보그는 사생아이기에 자신의 기원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이중적인 상황을 동시에 볼 수 있기에 손쉬운 이원론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우주전쟁이 아닌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자이다. 그는 페미니스트 사이보그다. 『사이보그 선언』에서 해러웨이의 기획은 페미니스트 사이보그-되기를 통해서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갱신하고, 그것을 통해 우주개발경쟁과 냉전, 기술적 인간중심주의로 대표되는 제국주의적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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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의 정세는 소련이 붕괴했고, 레이건의 스타워즈 프로젝트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과 기술의 평화적 사용이라는 대중들의 요구에 직면해서 흐지부지 끝난 상황이었다. 한편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에 아들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핵전쟁보다는 생명권력(biopower)이 보다 긴급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이보그에서 보통의 개로 관심을 옮겼다. 「반려종 선언」은 생권력(biopower)과 생명사회성(biosociality)에 관한 이야기이자 테크노사이언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대상은 푸코처럼 인간만이 아니라 개다. 그는 “감옥의 탄생”이 아니라 “개집의 탄생”을 이야기 한다. 개를 통한 이야기는 훨씬 더 신랄하다.

「반려종선언」의 첫 장은 해러웨이와 자신의 개, 카이엔의 깊은 입맞춤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입맞춤을 통해 카이엔의 입속에 있는 세균들이 해러웨이의 세포들을 감염시켰을 것이다. 알다시피, 생물학적인 종은 유성생식에 의한 수직적인 유전자 이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카이엔과 깊은 입맞춤을 하면서 린 마굴리스의 심바이오제네시스를 떠올린다. 린마굴리스는 진화의 원동력은 유성생식이 아니라 세포내 공생에 의해서 추동되었다고 주장했다. 해러웨이는 유전자의 수직이동에 선행하는 수평적 이동이라는 존재 양태를 반려종이라고 명명한다.

 

"나는 우리들의 게놈이 정도 이상으로 많이 닮아 있다고 확신한다. 비록 우리들의 한쪽은 나이 때문에, 다른 한쪽은 불임수술에 의해서, 각기 재생산이라는 의미에서는 침묵한 여자들일지라도.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생명의 유전정보 속에 우리들의 접촉에 관한 어떤 분자적 기록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적록색 털을 가진 오스트레일리안 셰퍼트는 지금까지 그 민첩하고 부드러운 혀를 사용해서 활발한 면역계수용체를 가진 나의 편도선조직을 핥아 왔다. 나의 화학수용체는 그녀의 메시지를 도대체 어디로 나른 것일까?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고 외부와 내부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나의 세포 시스템에서 무엇을 수집한 것일까?

우리들은 금지된 대화를 나누어 왔다; 우리는 구강성교를 해왔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저 사실일 뿐인 이야기를 하는데 열중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반려종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서로의 몸속에 만들어 낸다. 구체적인 차이에 있어서 서로에게 현저하게 타자인 우리들은 서로의 몸속에 사랑이라 불리는 짓궂은 발달성의 감염을 나타낸다. 이 사랑은 역사적인 일탈이고, 자연문화적인 유산이다." (반려종선언)

 

감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정보과학에서 말하는 명령의 일방적인 하달과 수령의 피드백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양방형을 전제하지만 정보과학이 말하는 그것은 겨우 명령의 하달과 수령의 피드백이다. 그렇기에 하달과 수령의 루프가 수백 번 반복되어도 그것은 전혀 양방향이 아니고 하달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해러웨이가 『사이보그선언』에서 말했던 남성의 자기출산 도식이다. 남성(인간)은 그 자신인 우주전사에게 명령하거나 되풀이해서 독백하지 커뮤니케이션 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차이에서 현저하게(significant) 타자인 카이엔과 해러웨이에게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정보과학의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날 수 없다. 현저하게 타자인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은 공통의 프로토콜이 없기에 결말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현저하게 타자인 그들이 서로에게 중요한(significant)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알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반복해서 서로에게 훈련시킨다. 훈련은 일방적인 것일 수 없는데, 커뮤니케이션은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는 한 번 만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결말이 가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현저하게 타자인 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은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내가 죽을 수도 있는 폭력이지만 그럼에도 그 폭력적인 감염을 긍정하고 견뎌내면서 계속 커뮤니케이션을 시도 하는 것이 훈련이고, 그런 훈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정확하게는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질 들뢰즈라면 이것을 니체의 영원회귀라고 했을 것이다.

진화생물학적으로 호모사피엔스인 우리는 이미 복수종들의 이런 폭력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부단한 훈련의 결과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출현과 역사를 같이 하는 개는 상호간의 부단한 훈련을 통해서 함께 역사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는 함께 역사를 만들어온 개와 가축들에게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가혹한 생명권력를 작동시키고 있다. 해러웨이는 푸코가 말한 생명권력은 그저 인간만을 염두에 둔 것일 뿐이라고, 그렇게 해서는 인간중심주의를 반복하기 십상이라고 경계했다. 그래서 그녀는 “감옥의 탄생”대신에 “개집의 탄생”을 이야기 한다. 감옥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도 개집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위해 해러웨이가 선택한 슬로건은 개와 인간의 협동 스포츠에서 훈련 시에 사용하는 “빨리 뛰어, 꽉 물어!” “닥치고 훈련!” 이다.

반려종에는 개와 가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은 수많은 반려친족들이 뒤엉켜 살고 있는 하나의 행성이다.

 

“내가 내 몸이라고 부르는 세속적 공간을 구성하는 전체 세포의 약 10퍼센트에만 인간의 게놈이 있고, 나머지 세포의 90%가 세균, 균류, 원생생물등의 게놈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는 사실이 기쁘다. 약 90%들에는 살아있는 그 자체와 협동하고 있는 것도 있고,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나와 우리의 나머지 부분들에 달리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탄탄하게 떠맡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리고 이런 작은 반려들쪽이 나보다는 훨씬 수가 많기 때문에, 더 잘 말하자면, 우리는 이런 작은 식사동료들과 함께 한사람의 성인이 된다. 한사람의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하는 과정이다. 이런 미시적 생물들 일부는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나에게 위험한 존재이지만 그들 이외의 모든 세포들과 인간세포들이 협조함으로써 어쨌든 위험이 방지되고 있고, 그리고 그 덕분에 의식이 있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 내가 죽으면 이런 아름다운 공생자와 위험한 공생자들이 나를 넘겨받고, 가령 잠시나마 신체의 찌꺼기를 사용해 주는 것이 기쁘다.” (종과 종이 만날때)

 

반려(companion)의 라틴어 어원은 쿰 파니스 (cum panis)로 빵을 함께 나눈다는 말이다. ‘빵을 함께 나눈다’는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반려(companion)가 종(species)과 연결될 때 그 의미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진화생물학적 존재인 종(species)은 필멸의 존재자들이고, 이들이 함께 먹어야 한다면 죽이기가 포함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려종들에게는 살기와 살리기만큼 죽기와 죽이기가 중요한 문제다. 그것을 생명권력에게 내맡겨놓을 수는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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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해러웨이는 『곤란함과 함께하기: 쑬루세에서 친척만들기(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Chthulucene)』와 『매니페스틀리 해러웨이(Manifestly Haraway)』를 펴냈다. 『매니패스틀리 해러웨이(Manifestly Haraway)』는 미네소타 출판의 포스트휴머니티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되었고,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선언과 시리즈의 에디터인 캐리 울프와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이 연재에서는 『곤란함과 함께하기: 쑬루세에서 친척만들기(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Chthulucene)』를 다룰 것이다. 쑬루세(chthulucene)는 인류세와 자본세에 대항해서 해러웨이가 만든 말이다. 책에서 해러웨이가 내건 슬로건은 “곤란함과 함께 하라(Stay with the trouble)”와 “아기를 낳지 말고 친족을 만들라(Make kin not baby)"다

 

 

 1월 3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다나 해러웨이 "곤란함과 함께하기-페미니스트 사이보그가 가르쳐준것"에대한 강의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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