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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 2 

 

 

 

번역 이 종 현 / 수유너머N 회원

 

 

 

 

 

 

 

 

 

 

조금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무엇 덕분에 맑스와 브레히트는 철학과 연극 안에서 새로운 실천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의 근본적인 조건, 즉 철학과(맑스의 경우) 연극(브레히트의 경우)의 본성(nature)과 메커니즘들에 대한 인식(connaissance)[각주:1]입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결정적입니다. 철학과 연극의 본성과 메커니즘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위대한 이론적 저작들의 대상이 되었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철학이든 연극이든 그것들의 본성과 메커니즘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하나의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맑스와 레닌은 철학의 본성과 메커니즘들의 이론에 대하여 순진하고, 브레히트 역시 연극의 본성과 메커니즘들에 대하여 순진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그들은 철학교수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론적으로 순진합니다. 철학교수들은 언제나 명료하고 완전무결한 이론적 논문들을 언제나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실들, 새로운 실천들입니다. 비록 이 사실들과 혁명적 실천들이 명료하고 완전무결한 이론적 담론의 주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맑스와 레닌의 철학적 실천 안에서, 바로 브레히트의 연극적 실천 안에서 그들의 대상, 즉 철학과 연극의 본성과 메커니즘들에 대한 다소 명료한 인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실천들을 검토해 보면, 우리는 철학과 연극에 공통적인 다음과 같은 결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맑스와 레닌은, 그리고 브레히트는 철학과 연극이 한편으로는 과학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와 맺고 있는 심오한 관계들을 완벽하게 알고 이해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첫 번째 포인트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제들을 단순화하기 위해, 저는 과학들과의 관계는 한편으로 제쳐두고 정치와의 관계에만 매달려 보겠습니다. 맑스와 브레히트는 각자의 방식대로 철학과 연극의 고유한 속성은 정치와의 신비화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이해했습니다. 철학과 연극은 근본적으로 정치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이 결정을 지우기 위해, 이 결정을 부정하기 위해, 정치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 붓습니다. 연극의 바탕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의 바탕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정치입니다. 그러나 철학이나 연극이 말할 때, 우리는 결과적으로 전혀 정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철학과 연극은 언제나 정치의 목소리를 가리기 위해서 말합니다. 그 둘은 훌륭하게 목적을 달성합니다. 심지어 엄청나게 많은 경우들에서 철학과 연극의 기능은 정치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데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둘은 정치를 통해서만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그 존재를 빚지고 있는 정치를 폐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결과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은 자신이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계급의 정치적 갈등보다 높은 곳에 있다고, 자신은 모든 인간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자신은 당파 없이, 즉 자신이 취하는 정치적 당파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인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모든 시간을 씁니다. 맑스는 이러한 철학을 가리켜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만족하는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어떤 철학도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든 철학은 정치적으로 능동적인데, 대다수의 철학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능동적이라는 점을 부정하는데 모든 시간을 씁니다. 철학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당파를 취하지 않으며, 우리는 세계를 해석하는 데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데에 만족한다. 바로 이것이 프로이트가 부인(dénégation)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나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가 정치를 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연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레히트는 정치를 하고 있지만 정치를 하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연극을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부릅니다. 저녁에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연극(le théâtre du divertissement vespéral), 식도락적 연극(le théâtre culinaire), 단순한 미학적 쾌락의 연극(le théâtre de la simple jouissance esthétique)이라고 말입니다. 수치스러운 연극과 마찬가지로 수치스러운 철학도 존재합니다. 수치스러운 철학은 관조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수치스러운 연극은 미학주의의 병을, 연극성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하나의 진정한 종교, 마력, 도취, 최면, 순수한 쾌락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철학은 소비와 관조적 쾌락의 대상이 됩니다. 철학자들은 마침내 소비와 관조적 쾌락을 위해 철학들을 만들어내고(fabriquer), 극작가들, 연출가들, 배우들은 소비와 미학적, 식도락적 쾌락을 위해 연극을 만들어냅니다. 세계를 관조하고 해석하는 것에 대한 맑스의 비판과 식도락적 연극이나 오페라에 대한 브레히트의 비판은 하나의 동일한 비판입니다.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1번 원고)

 

 

 

 

그렇기 때문에 맑스와 브레히트에게서 실천의 혁명이 생겨납니다. 새로운 철학이나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 내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철학이 세계를 해석하는 것, 즉 신비화이기를 멈출 수 있도록 철학의 내부에 새로운 실천을 삽입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연극이 신비화, 즉 식도락적 기분전환이기를 멈추고 세계를 변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연극의 내부에 새로운 실천을 삽입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새로운 실천의 첫 번째 효과 역시 철학과 연극의 신비화를 파괴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철학과 연극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신비화를 폐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물들을 제 이름에 맞게 불러야 하고[각주:2], 철학을 제 이름에 맞게, 연극을 제 이름에 맞게 불러야 합니다. 철학을 그것의 진정한 자리로 되돌려야 하고 연극을 그것의 진정한 자리로 되돌려야 합니다. 그 목적은 그것의 신비화를 신비화로서 드러나게 만들고, 동시에 철학과 연극의 진정한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철학과 연극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철학과 연극을 그것들의 진정한 자리에 놓기 위해서는 철학과 연극의 내부에서 하나의 자리바꿈(déplacement, spostamento[각주:3])을 실행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도 맑스와 브레히트가 제시하는 것들은 완전히 비슷해 보입니다. 브레히트가 생소화효과(Verfremdungseffekt)라고 부르는 것을 이러한 의미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보통 이 말을 불어로는 거리유지의 효과(effet de distanciation)라고 번역하는데, 저는 이 말을 자리바꿈의 효과 또는 자리 옮기기(décalage)의 효과라고 번역하기를 선호합니다.

 

이 효과는 어떤 연극적 기술의 효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연극적 실천에서 일어난 혁명의 일반적 효과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자리를 바꾸는 것, 배우들의 연기에서 어떤 작은 요소들을 이동시키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연극의 조건들의 전체(ensemble)에 영향을 미치는(affecte) 자리바꿈이 문제입니다. 동일한 규칙이 철학에도 유효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실천을 구성하는 자리바꿈들의 전체(ensemble)[각주:4]가 관건입니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모릅니다!"

브레히트가 제시한 "생소화효과"의 한 예. 

갑작스럽게 간판을 들어 관객들에게 극의 진행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한 자리바꿈들 중에는 다른 모든 자리바꿈들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다른 모든 자리바꿈들을 요약하는 근본적 자리바꿈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관점의 자리바꿈입니다. 맑스와 브레히트의 위대한 교훈은 바로 일반적 관점을 자리바꿈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이 일반적 관점으로부터 철학과 연극의 모든 질문들이 고려됩니다. 세계를 관조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철학)이나 식도락적이고 미학적인 쾌락의 관점을(연극) 버려야 합니다. , 대체로 정치의 자리인 다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리바꿈을 해야 합니다. 저는 방금 철학 안에서, 그리고 연극 안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정치이지만 그 정치의 목소리는 대체로 은폐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치에게 말을 되돌려 주고, 따라서 정치의 자리로부터 말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철학의 목소리와 연극의 목소리를 자리바꿈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레닌이 철학에서의 당의 위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브레히트에게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연극 안에서 당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당의 위치라는 말을 정치에서의 당의 위치와 동일한 무언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철학과 연극(또는 예술)정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과학과도 다른 것이고, 정치와도 다른 것입니다. 연극은 과학과도, 정치와도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과 과학을, 철학과 정치를, 연극과 과학을, 연극과 정치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연극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정치를 재현/표상(représente)하는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철학과 연극 안에서 정치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기 위해서는 철학과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정치가(그리고 과학이) 거기서 어떻게 재현/표상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맨눈으로는 연극 안에서 정치의 자리를 보지 못합니다.(이 자리는 역사 안에서 자리바꿈을 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는 철학과 연극의 역사 안에서 자신의 대리인들(représentnants)을 바꾸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단 이 근본적 자리바꿈을 실행시킨다면 다른 모든 자리바꿈들은 그것의 결과들로서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이 모든 것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제가 자리바꿈들을 구분하는 것은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실에서는 그러한 구분들이 없습니다.

 

 

 

 

  1. [역주] 영역은 ‘knowledge’로 옮겼다. [본문으로]
  2. [역주] 영역은 ‘being blunt(직설적이다)’이다. [본문으로]
  3. [영역주] 발음이 듣기 좋은 단어인 ‘spontamento"는 알튀세르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좌담회를 위해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 [역주] 영역은 ‘totality’로 옮겼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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