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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특집번역] 아르테미 마군, "공산주의의 부정성" 3

수유너머웹진 2016.04.10 23:28 조회 수 : 98

 

 

아르테미 마군

 

 

공산주의의 부정성존재론과 정치 (3)

 

 

 

 

 

번역박하연 이종현 전미라

 

 

 

 

 

소비에트 사회의 공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 특유의 부정적이고 멜랑콜리한 특성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 궁극적으로 체제의 파괴를 불러온 그 탈자적인(extatic) ‘공동체성부정적 조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이 운동이 집단적이고 목적의식이 있는 활동, 즉 어떤 기대 또는 애도라고 할 때, 바로 이 운동을 바탕으로 인간들은 형상(figure)이 아니라 배경(ground)이 된다.(cf. 피에르를 카페에서 만나리라고 기대했던 사르트르의 유명한 예. (좌절된) 기대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인식의 배경으로 밀어낸다)(Sartre, 1969:9-10).

 

 

소비에트 사회의 공동체성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모든 논의는 역설적으로 가장 비공산주의적인 현상에 대한 숙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의 러시아인들은 가치관이나 태도에 있어 가장 원자화되어 있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들은 개인적 행복에 무엇보다도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자선에 신경을 쓰지 않으며, 비정치적이고, 전혀 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집단적 행동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는 법이 없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상적 의사소통은 극단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현대 러시아인들은 군중 속에서 누군가를 발로 찬다고 해서 사과하는 일도 없고, 옆집에 살아도 안녕하고 인사하는 법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의 길을 누군가가 막고 있다면, /녀는 그 사람을 조용히 밀쳐 내거나 신체 일부를 한 마디 말도 없이 밀어낼 것이다. 러시아인들의 각 가정은 안락한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공동으로 사용하는 계단은 썩어 있거나 제대로 수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상황이 1990년대 흉포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흔한 의견에 저항하여 이 특성들이 우리 세대(1970년대에 태어난)의 의식적 삶 내내 존재했으며 새로운 서구지향적 문화 정치가 돌아가려고 헛되이 애쓰는 과거의 완고한 행동 패턴으로 나타났다고 즉각 응수해야 한다. 후기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이런 특성들이 밀도 높은 공동체적 요소들과 공존했을 뿐이다. 이러한 공동체적 요소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와서 중상모략을 받아 과거의 잔재, 장애물로만 간주되지만, 실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이야말로 과거로부터 이어진 산물이다.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중간 지대 혹은 중간 현상이다. 그 속에서 공동체적 삶은 개인주의에 격렬하게 대립하기는커녕 오히려 개인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공동체가 해체되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상태로 존재하도록 하며, 또한 동시에 개인은 집단에 의해 순수하게 단독적인 실존 속에서 재승인되고 반복될 때에만 그/녀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도록 할 수 있다.

 

 

 

공동아파트(kommunalka)

 

 

실제로 현대 러시아인들의 비-공동체성(a-communality)은 소비에트 국가가 극단적인 열정으로 가족들을 빽빽한 공동아파트(기존 거주자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밀어 넣었다가, 1960-70년대에 그들 중 많은 이들을 다시 개인아파트에 배치함으로써 대단하지는 않지만 열성적인 부르주아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냈던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방적인 집단주의로 보였던 공산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원자적 경쟁의 억압된 측면을 강화했다. 따라서 포스트-공산주의 러시아의 중산층은 서구의 교육받은 계층의 거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법에 의해 원자화되었지만 어떤 이상적인 연대를 위해 투쟁하는 반면, 전자는 새롭게 획득된 개인주의를 물리적으로, 의식적으로 방어하고 확립(institute)하려 한다.

 

이것은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전체주의였지 진정한 공산주의는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일까? 포스트-공산주의 사회가 보여주는 과도한 소외(alienation)의 현상은 다른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으며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측면을 가리고 있는 듯하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공적인 공간은 무정부주의적 자유의 공간이었고 완벽한 소외는 비-전용(non-appropriation)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매력적으로-내버려져 있는(attractively-deserted) 소비에트 공간의 특성은 소비에트 예술에서 잘 볼 수 있는데, 가장 유명한 예로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의 영화 <잠입자(The stalker)>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낯설지만 신비로운 유토피아적 산업시설의 폐허는 깊은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타르콥스키의 영화가 나오기 오래 전, 혁명 세대 소비에트 산문의 대가 중 하나인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는 거의 동일한 시학을 정교하게 만들어낸 바 있다. 여러 이론가들과 작가들은 이미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 정체성들을 파괴하고 계획적으로 카오스를 창조해냈던 황홀경에 가까운(ecstatic) 유토피아적 힘으로서 공산주의를 옹호했다.(타르콥스키 이전의 그런 이론가들로 레프 븨고츠키(Lev Vygotsky)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을 꼽을 수 있다) 심지어 우리는 공산주의 혁명의 정립적(또는 탈정립적인?) 권력을 사유하고 상상했던 사람들, 공산주의적인 반-공산주의 인사들의 열전을 꾸려볼 수도 있다.

 

 

 

영화 <잠입자>의 한 장면

 

 

 

플라토노프가 사용했던 공산주의에 대한 다양한 알레고리들에서(건물을 세우기 위한 구덩이를 파는 인부들, ‘체벤구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 공산주의를 건설하려는 때 이른 시도들, 중앙아시아 사막을 떠돌던 소규모 투르크계 부족 (Dzhan)"의 해방) 사람들은 낯설고 버려진 공간들에 나타나며 극도의 가난, 피로, 고독으로 고통 받고 있다. 맑스와는 반대로 플라토노프는 공산주의를 가난과 부정성의 체제로 파악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생애와 텍스트들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 그는 소비에트 기획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참여자였다. 그리고 그는 소비에트 기획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내부적 분석자이기도 했다.

 

바디우의 철학을 빌려온다면, 체벤구르는 나머지(prochie)[각주:1], 즉 사회의 셈되어지지 않은 나머지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조직한 마을이다. 잔족은 결국 해체(dissolution)되면서 부족의 방랑을 멈추고, 각자 여러 방향으로 떠난다. 플라토노프는 공산주의를 고독과 공동체 둘 다로 본다.[각주:2] 그러나 이 두 가지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발전(비르노가 개체화라는 개념으로 사유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긴장으로 제시된다. 예를 들면, 1931년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매우 특징적인 구절이 있다. “매춘의 신비: 육체들의 결합은 영혼들의 결합을 함축한다. 하지만 매춘에서 영혼들의 결합은 부재한다. 매춘에는 사랑이 없고, 놀라움, 타락, 두려움으로부터 영혼들의 결합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끔찍한 사실이다.”(Platonov, 2006a: 185) 동시에 플라토노프는 특정한 문학적 비유의 바탕에 인간의 사회성이 놓여있다고 제시하는데, 올가 미어슨(Olga Meerson)은 그 문학적 비유를 -낯설게 하기(non-estrangement)”라고 부른바 있다.(Meerson, 1997) “-낯설게 하기는 사실 대항-낯설게 하기(counterestrangement)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이하고 놀라운 사건들을(대장간 일과 같은 험한 노동을) 오히려 사실주의적으로 보이는 서사 안에서 결코 강조되지 않는 평범한 일로 제시하는 것(그리고 인물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소외와 해체(dissolution)에서 자라난 사회성, 그리고 타자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인정하는 사회성이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

 

 

따라서 플라토노프의 우주, 즉 인간들이 서로에게 비-주제적으로(non-thematically), 서로에게 인물들로서가 아니라 바탕(ground)으로서 연결되어 있는 집단적 고독의 우주는 아론손이 묘사하는 것과 가까운 의미의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로 보인다. 그러나 아론손의 이론과는 반대로 플라토노프에게 공산주의는 급진적인 주체화의 틀 안에서 존재하는데, 이러한 주체화는 전통적으로 고정된 주체성에 문제제기하는 것을 함축한다. 플라토노프의 인물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도대체 누가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일에 집착한다. 그들 중 하나는 데카르트와의 잠재적인 논쟁을 의도하기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 나는 오직 여기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Platonov, 1999:7, 1994:13) 또 다른 이는 스스로를 가리켜 존재하지 않는 말인 “dubject(분열되고 바보 같은 주체)”라고 부른다.(Platonov, 2006b:120, 213) 또 다른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익, 좌익, 그리고 화해를 원하는 수용주의자로서의 나의 자의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슬프고, 이러한 나의 진술이 충분치 않으며 계급의 적이 취하는 전형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한다.”(Platonov, 2009b:254) 마지막 구절은 당시 소비에트 시민들에게 요구되었던 자아비판의 패러디다. 그런데 플라토노프가 보기에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체화의 진정한 움직임이다. 그것은 일종의 수행적 자기-논박(self-refutation)인데, 이러한 자기-논박은 바로 혁명적 주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수행적 선언이다. 플라토노프가 사용하는 영혼의 환관(eunuch of the soul)”이라는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영혼의 환관은 우리 각각의 내부에 있는 힘없는 내적 관찰자다. 철학자 발레리 포도로가(Valerij Podoroga)영혼의 환관이라는 형상을 모더니즘적 낯설게하기의 기법이자 일종의 현상학적 눈으로 파악한다. 이 현상학적 눈은 외부적이고 비-주체적이며 비-심리적인 것을 볼 뿐이다. 포도로가는 바로 이것들이 플라토노프의 소설들에 부조리한현실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Podoroga, 1991) 그러나 사실 문자 그대로 이 환관은 영혼의 거세된 부분, 자기-훼손(self-mutilation)의 산물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거세하고 훼손하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에 대항해 항상 투쟁을 벌이고 동시에 그/녀의 고유한 욕망을 힘없는 것으로 생산하는데 성공하는 분열된 주체이다. 플라토노프가 주장하는 공산주의적 주체들의 역설적인 고독을 낳는 것은 바로 자기-비판(self-criticism)과 자기-전복(self-subversion)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어떤 개인의 고독이 아니라 다른 비참한 부분들, 그리고 타자들의 부분들과 함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공동체에 진입하는 극도로 비참한(abject) 어느 부분이다. 플라토노프의 소설들에는 이 영혼의 환관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 인물들은 체벤구르에서 나오는 영원한 방랑자인 루이(Luy)처럼 외로운 팔루스들을 은유적으로 재현한다.

 

이 모든 것은 플라토노프의 작품에서 슬픔과 고독이 의미하는 바를 가리킨다. 슬픔과 고독은 진행 중인 소비에트 기획을 위한 어떤 주체성을 소급적인 방식으로 창조하는데 요구되는 자기-파괴(self-destruction)의 정념들이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인텔리겐치아가 고안해 낸 혁명은 이 프롤레타리아를 지어야(build) 했으며 그것의 뿌리를 길러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접근을 요구했다. “건설을 위한 구덩이라는 은유는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즐겁고 낙관적인 미래의 구축은 그것이 벌충하는 모든 슬픔 없이, 그리고 항구적으로 재건설되어야 할 모든 슬픔 없이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1946년 소련의 핵실험 시설을 짓기 위한 구덩이(코틀로반, kotlovan)을 파고 있는 인부들. 

책 <러시아 핵의 심장(Atomnoe serdtse Rossii)>의 삽화.  

 

 

 

러시아의 거리들과 아파트들에서 볼 수 있는 무관심과 공격성은 단지 러시아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을 인물(figure)이 아닌 배경/바탕(ground)으로 여긴다는 것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것은 낯선 이들을 직접 마주하는 서유럽의 정상적인 행동과는 완벽히 반대된다. 서유럽에서 낯선 이들과의 마주침은 거의 불신(disbelief)에 가까운 충격을 생산한다. 따라서 서유럽에서는 마주침 자체의 당혹스러움을 숨기기 위한 과장되고 정중한 의례들이 만들어졌다. 앞에서 언급했던 파올로 비르노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가정된 집단성으로부터 개체화로 나아가는 길이다.(Virno, 2004:64-69) 이것은 두 반대항들의 공존과 이행의 유기적 버전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러시아에는 더 우울한 시나리오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가정된 공동성(commonality)으로부터 이기주의와 냉소주의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이기주의와 냉소주의를 향하는 움직임은 앞서-존재했던(pre-existing) 공동-으로-존재함(being-in-common)의 명백한 증거로 아직도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형성된 주체들은 그들 존재의 전제, 즉 바탕이 되는 사회성(ground sociability)을 억압하고 파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주의적인것으로 전제된 소비에트 국가-당은 사실 공동의 공간을 생산했고, 그 공간은 바로 소외의 힘이라는 덕을 지니고 있었다. 국가의 재산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국가의 재산은 경제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이 폐허가 된 국유재산에 대한 관계를 통해 소유와 공동성(commonality)의 역설적인 의미를 간접적으로라도 유지시켰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공동(common)”이 실제 의미하는 바와 결합된다. 로마법에서 “res communis omnium”“res publica” 또는 “res nullius”와도 구분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에게도(로마 시민을 포함해서) 속하지 않았지만 또 결코 전용(appropriate)될 수도 없는(res nullius전용될 수 있었다) 좋음(good)이었기 때문이다.[각주:3] res communisres nulliusres publica의 매개항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았지만, 바로 이 속하지 않음 자체가 공적인 것(the public)에 의해 보호받았기 때문이다.

 

중세[각주:4]에 공유지는 봉건영주에게 속할 수 있었지만, 그가 공유지에 대한 완벽한 주권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이 경우 그 재산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권리는 배제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서유럽 국가들의 공유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에게 사용이 허가되는 공공의 재산이므로 경찰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어야 한다. 불을 지피는 것, 음주, 흡연, 카메라 설치 등은 금지된다. res communis omnium의 경우에서, 법은 오히려 슈미트적인 의미의 예외에 대한 권리로 작동한다. 법은 소유의 체제로부터 영토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공산주의적 반-공산주의(communist anti-communism)는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분명한 설명방식이 있다.

 

첫 번째 설명에 따르면,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적 계몽의 정신에 따라 사회적 관계들이 근대화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기이한 방식이었다. 그러한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제시할 수 없었으면서 단지 어떤 전근대적인 사회성을 동결하는 데에만 성공했다. 그 전근대적인 사회성이란 경제활동을 위해 고객리스트 같은 네트워크들을 활용하고 푸짐한 음식과 술을 나누는 영원한 성찬식 속에서 살면서도 서로에 대해 의심하는 군중, 그리고 친족과 친구들 사이의 가족 같은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이것은 지노비예프가 말하는 공동체성(communality)”에 가까운데,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특징들이 집단주의적이지 않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렇다. 소비에트 사회는 서유럽의 사회보다 일상적 차원에서는 공동체적이었다.(예로 들면, 서유럽에서 룸메이트들이나 예전에 알지 못했던 개인들이 함께 거주하는 것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정상적인 제도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공동거주는 소비에트 공동아파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큰 사회적 문제나 반체제적 담론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두 번째 설명은 역설적인 것인데, 유사-신정주의적인 소비에트 국가-당은 역사의 간계로 인해 terrares nullius(기이하게도 동시에 res communis이기도 한)의 세속적 신성함의 자리를 차지하는 기호(placeholder)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이스와 릐클린의 신학적 설명도 이와 유사한데, 다만 그로이스와 릐클린의 설명에서는 종교의 부정적이고 부정신학적 요소들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두 번째 설명과 다르다.

 

두 가지 경우들에는 이 상황의 사건적이고 재앙적인 좌표들을 무시하거나 그것들을 단지 옛것으로 치부해 버리며 이 상황을 인정해 버릴 위험이 존재한다.

 

사실 공산주의는 반드시 좋은(nice)’ 무언가도 아니고, 반드시 집단주의적인무언가도 아니다.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적 힘과 실제적 운동의 힘 모두는 즉각적인 연대의 가능성 그리고 인간들을 극도의 고독 속에서 서로에게 노출시키면서 사회적 신체를 해체(dissolving)하고 분열(disrupting)하는 힘 둘 다에 바탕을 두고 건설된다. 바로 이 힘은 공산주의를 현재 상태의 유지에 대한 위협 또는 희망으로 전환시킨다. 거기에는 혁명과 전복의 잠재적 힘이 존재한다. 또 거기에는 그 어떤 모델이나 관념론적 규정에도 해당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이념도 동시에 존재한다. 사실 공산주의는 능동적으로 그러한 모델을 파괴하며 그 대신 사회적 해체(dissolution)의 구조와 우발적 사회성(aleatoric sociability)의 구조 둘 다를 건설한다. 오늘날 포스트-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보이는 연대의 비-존재는 거기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이미 지나가고 없는 유령(specter)’으로 남아있는 공산주의의 일시적 비-존재에 해당할 것이다. 이 유령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도주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억압 속에서 다시 돌아오는 부정성에 자연스러운 것이다.[각주:5] 권위주의적 환경에서 형성된 집단적 고독의 문화는 아마 부르주아적 사회성에 대한 대안을 발명해 내기 위해서도 도치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결론을 말하자면, 공산주의를 정치적으로, 주체적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공산주의를 지금 존재하는 국가를 대체하는 해방적인 지양의 계기로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 제도들은 공산주의 사회의 발전을 위해 종종 복잡하고 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정치적 주체화가 없다면 공산주의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양가적 과정으로 남을 것이다. , 그러한 양가적 과정은 정치적으로는 자기-경영(self-management)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에 의한 사회적 연결망의 파괴로도 이어질 것이며 심지어 집단의 파시즘적인 초동일시(hyper-identification)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의 정치적 제도들이 어떻게든지 스스로 부정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정체성들의 파괴와 분류 불가능한 새로운 실체들의 발명을 촉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공산주의의 개념과 민주주의의 개념 사이의 유사성을 도출할 수도 있겠다. 클로드 르포르의 유명한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최고권력의 자리가 일시적으로 비어있는 체제이며 그 자리를 정기적으로 비워내기 위해 특별한 조치들이 취해져야 한다.(Lefort, 1986)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공산주의와 유비적이다. 적어도 몇몇 중요한 영역들에서 사유재산은 금지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식적이지 않은 사회적 제도로서 능동적으로 반대되어야 한다. 삶을 법에 종속시키고 기업의 권위주의와 비-시민을 취급하는 권위주의를 감싼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한계와 이상성을 비판할 수도 있겠다. , 민주주의가 인민을 해체(demobilize)하고 그들을 오직 수동적인 이해당사자로 여기는데 활용된다는 이유에서도 민주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세계의 민주주의국가들에서 현존하는 체제에 대항하는 비조직적 반대세력이 비합법적이고 비공식적인 대중시위를 이끌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국가들은 분명히 반대세력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조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국가들에는 민주주의적인방식으로 체제에 저항하도록 누군가를 선동하는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의 무언가가 존재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력 있는 옹호자인 자크 랑시에르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민주주의는 인정받지 못한 새로운 주체들이(몫 없는 자들 les "sans-parts")이 등장해 현 상황에 대해 경합하는 곳에서 시작된다.(Rancière, 1995)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공산주의로 의미하는 바는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이해가 수반하고 있는 것의 더 급진적이고 덜 형식적인 버전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극복이 항구적으로 가능한 체제이다.

 

공산주의의 잠재적 파괴성을 대가로 해서라도 공산주의적 정립적 권력의 전복적이고 황홀경적인(ecstatic) 성격을 보존할 방법들이 존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사회정치적 상황은 민주주의 안에서든 또는 공산주의(이것은 민주주의의 더욱 강력한 정식화다)와 함께 하든 항구적으로 시민들을 교육시켜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기주의와 개인적 도피주의(escapism)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이기주의와 도피주의를 성공적으로 사람들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게다가 공산주의 자체의 바로 그 부정적이고 해체하는(dissolving) 힘은 그것이 정지되는 순간 무관심한 최후의 인간을 생산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릎 쓴다.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의 원자화와 무관심에 공산주의적 배경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교육적 자세도 교육자들의 반대효과(counter-effect)와 전도를 불가피하게 생산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공산주의 정부는 진정으로 변증법적이어야 하리라. (진정한 변증법은 사이비-변증법적인 자유주의 국가와 반대된다. , 그로이스는 변증법을 무의미(nonsense)”로 이해하고 소비에트 국가의 교조주의의 특성으로 잘못 설명하는데, 진정한 변증법은 소비에트의 교조주의에도 반대된다.) 자신의 몰락을 지속적으로 대비하는 그런 정부는 가혹하면서도 동시에 유연해야(harsh and plastic)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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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주] “прочие(prochie)”는 러시아어로 “나머지”를 뜻한다. [본문으로]
  2. 플라토노프의 멜랑콜리에 대해 쓴 조나탄 플래틀리의 중요한 책을 보라. Flately, 2008. 플래틀리는 아론손과 마찬가지로 주체성이 아니라 공동으로-정서적인 존재(affective being-in-common)을 강조한다. [본문으로]
  3. Inst. 2.1, 2.1.1, Dig. 1.8.2 pr-1(Marcianus), in: Koptev, Lassard, 2013 [본문으로]
  4. Moulier Boutang, 2010을 참고. [본문으로]
  5. 정치에서의 부정성이 지니는 여러 특징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부정적 혁명(Negative Revolution)』(Magun, 2009)을 참고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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