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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특집번역] 아르테미 마군, "공산주의의 부정성" 1

수유너머웹진 2016.03.25 17:08 조회 수 : 50

 

 

 아르테미 마군

 

 

공산주의의 부정성: 존재론과 정치

 

 

번역: 박하연 / 이종현 / 전미라

 

 

 

 

 

 

 

아르테미 블라디미로비치 마군(Artemy Vladimirovich Magun, 1974~)은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미시간대학교와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각각 정치철학,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서구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이론, 예술, 행동을 결합하고자 결성된 <무엇을 할 것인가(Shto delat’)> 그룹에서 활동하면서 문학, 정치학, 철학, 사회학을 다루고 있는 잡지 새로운 문학 비평(Novoe Literaturnoe Obozrenie, NLO)에서 편집진으로도 일하고 있다. 랑시에르, 바디우, 지젝 등 서구의 철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한편, 마군은 러시아 혁명,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포스트-공산주의 사회, 푸틴 시대의 러시아 사회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정치철학적으로 문제들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대표작으로는 부정적 혁명(Negative Revolution. Modern Political Subject and its Fate after the Cold War., NY-L. Bloomsbury, 2013)이 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대학교 민주주의정치이론 전공 교수, 국립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마군은 이 논문에서 부정성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의 개념을 새롭게 다루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흔히 쓰이는 공산주의의 개념, 즉 미래의 유토피아를 계획하고 건설하는 이상으로서의 공산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현대 좌파 정치철학에서 논의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들을 검토한 뒤, “실제로 존재했던 공산주의인 소련의 사례를 살펴본다. 소련의 사회적 현실은 ‘res nullius’, 즉 전유되지 않은 세계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 전유되지 않은 세계는 ‘res publica’에서와는 다르게 집단의 소유가 아니었다. 마군에 따르면, 인민들은 이렇게 사물들과 국가로부터 소외되면서 새로운 공동성(communality)을 낳았다. 이 새로운 문화에서 타자는 그것이 사물이든 인격이든 형상/인물(figure)이 아니라 배경/바탕(ground)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공동성은 서구적 의미의 연대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성과는 구분된다. 이러한 역설적인 공동성의 형상을 파악하기 위해 마군은 소련의 소설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소설 코틀로반을 참고한다. 그의 소설에서 볼 수 있듯 공산주의 사회라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파내야 하는 거대한 구덩이는 기존 의미의 사회적 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준비해야 하므로 공산주의는 언제나 가난’, ‘파괴의 힘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군은 부정적인 것의 존재를 지적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거의 붕괴되다시피 한 포스트-공산주의 사회에서 바로 이러한 공동성의 심화와 새로운 주체 형성의 징후를 읽어낸다. , 그는 맑스와 엥겔스가 강조한 바대로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공산주의의 부정성을 어떻게 하면 현실적 힘으로 돌리면서 민주주의를 급진화 할 수 있을지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이 논문은 A. Magun, "Negativity in Communism: Ontology and Politics", The Russian Sociological Review, vol. 13, No 1, pp. 9-25.을 번역한 것이다.)

(정리: 이종현)

 

 

 

 

 

1. 지금의 공산주의와 도래할 공산주의

 

현재적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그것이 처음 출현했던 프랑스 혁명[각주:1] 시기부터 이상적이며 목가적인 자코뱅의 슬로건(자유, 평등, 박애 등)에 대한 보다 급진적이며, 실질적인 대안으로서 의도되었다. 전자와 달리, ‘공산주의는 경제, 보다 정확히 말해,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에 대해 언급했다. 이러한 유물론적 내용은 훗날 맑스에 의해 재확증된 바 있는데, 그는 이 개념을 통째로 거절했던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단 채로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Marx, 1975a) “(마르스크와 엥겔스에게)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공산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지양(aufheben)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이라고 불렀다.(Marx, Engels, 1975b: 37)[각주:2]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지양(abolish)’[각주:3]이라는 개념이다. 훌륭한 헤겔주의자로서 맑스는 공산주의를 단순히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부정(negation), 즉 확립된 사물의 상태에 대립하는, 아직은 잠재적이거나 유령적인(spectral)’ 힘으로 받아들였다.

 

지상의 비판(criticism of the earth)”(Marx, Engels, 1975a: 177)[각주:4]을 견지한 공산주의자들은 인류의 일반적인 정신주의적 지향을 대지로부터 천국으로 전도하고, 그것을 다시 깊은 대지 속으로, 만물의 깊이와 일상의 산문을 향해 되돌리길 갈망하는 낭만주의 운동의 혁명적 지류에 속해 있었다.

 

독일 자코뱅 소속이자, ‘정신의 공산주의(communism of spirits)’(Hölderlin, 1989: 239-241)의 필요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한 횔덜린은 그의 저서 안티고네에 대한 주석(Anmerkungen zur Antigonä, 1804)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와 대조적으로 하늘에서 대지로 내려오는 근대의 경향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는 여전히 대지를 가지고 있었던반면, 근대인들은 그것을 정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Hölderlin, 1988: 113-114) 그는 이러한 경향을 정언적 혁명(categorical revolution)’(Umkehr)이라고 명명했다. 횔덜린은 맑스와 같은 의견을 맑스보다 앞서 피력했는데, 즉 이러한 "유물론적 경향"이 운동의 뒤집히고 부정하는 경향과 나란히 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전통은 또 다른 좌익 낭만주의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에 의해서 이어졌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1847-1853)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단테보다 더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군주제의) 거대한 동상이 기초하고 있는 인민의 깊은 토대를, 대지 내부에서 발견해 내야만 한다.”(Michelet, 1979: 67)

 

이와 유사한 경향이 약 100여년이 지난 후 볼셰비키 혁명 기간 동안 러시아에서 이어졌다. 초창기의 혁명 지지자 중 하나였던 알렉세이 가스테프(Alexey Gastev)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천국이라고 불리는 높은 곳을 열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은 나태와 태만, 소심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갑시다! 불과 강철, 가스와 증기와 함께! 다 함께 광산을 파고,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을 뚫읍시다! 지구 내부에 있는, 아무의 손길도 닿지 않은 오래된 지층을 비워냅시다!”(Gastev, 1971: 138) 이 전통은 이후 가스체프의 제자이자 젊은 동료, 이후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안드레이 플라토노프(Andrey Platonov)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소비에트공산주의를 단지 또 하나의 교조주의적(ideocratic) 독재국가로 간주하는 지배적인 자유주의적-보수적 인식에 맞서는데 있어 중요하다.[각주:5] 만일 소비에트공산주의가 계몽주의적인 교육 체제였다면, 그것은 관념론에 대항하는 유물론적 투쟁으로부터 나타났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소비에트공산주의가 맞선 단 하나의 온전히 관념론적인 철학적 상태(state)란 바로 자유주의 국가(state).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망과 존재론적 진술 사이에 존재하는 공산주의라는 개념의 모호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심지어 그 모호함은 비록 막연하지만 그럼에도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은 분명히 갖고 있었던 맑스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그의 비전에 따르면,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 ...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Marx, Engels, 1975b: 37)[각주:6]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된다.]”(Marx, Engels, 1976: 506)[각주:7]

 

이 모호함은 이미 20세기 초 맑스주의 이론에서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 실제 과정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지닌 유물론적 측면은 과학적 법칙에 지배 받는 것으로서 실증주의적 방식으로 이해되었으며,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맑스주의의 과학적경향과 윤리적경향을 구분 짓기를 강요받았다.

 

오늘날 21세기의 시작을 사는 우리는 공산주의의 개념과 운동의 심장부에 놓여 있던 것과 동일한, 바로 그 모호함으로 되돌아간다. 오랜 기간 동안, 진지한 맑스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연방이 공산주의적 유토피아(그것이 약속했던 미래)와 동떨어진 것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관료주의로 인해서) 과정으로서의 공산주의와도 거리가 멀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적 측면에 깃든 애초의 모호함 때문에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개념을 진지하게 탐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와 친-소비에트 맑시즘이 그 자체로서죽어버린 시기를 맞이해서야 맑스이래 처음으로 공산주의를 동시대 철학의 차원, 그리고 현존하는 정치-경제적 조건의 차원에서 사유하려는 진지한 시도들이 생겨났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가 사라져버린 이후, 제대로 된 민주주의적 요소들이 전문가에 의해 추동되는 경영적 권위주의에 굴복하며 절멸되기 시작하는 상황 속에서, 승리에 찬 자유주의적 국가에 맞설 대항논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는 공산주의의 개념을 그 어떤 실제적인 역사적 체제와도 관련시키지 않은 채, 그것을 열린 미래로 투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인 사회적 비전이 승리를 거둔 이후, 공산주의는 대의제 국가, 법치주의, 또는 개인들을 전체로 묶는 사회계약 등으로 이해된 인간적 공존의 관념론적(idealistic) 모델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다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런 관념론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통합은 상대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본래 홀로 존재하다가 이후에야 사회로 진입하는 개인이란 것을 전제한다. 이 모델의 과잉들로는 부르주아 주체의 멜랑콜리하고 도덕주의적인 개인주의, 루소주의적 공화국에서 압도적인 일반의지’, 특히 부르주아 사회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존재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묶어주는 일종의 집단적 이기주의로서의 민족주의가 있다.

 

통합의 초월적 원칙(가령 신 같은)을 수반하지 않으면서도, 구성원과 그것이 가로지르는전체 사이의 무한한 관계를 허용하는 그런 총체성을 사유할 수 있는 방식이 있어야만 한다. 맑스가 부르주아 혁명의 효과들을 묘사할 때 그는 이 정치적 혁명이 시민 사회를 그것의 요소들로 분해하는데, 이 요소들 자체에 대한 혁명 없이 그렇게 한다.”고 지적했다.(Marx, 1975b: 160) 따라서 새로운 혁명의 목표는 이런 사회적 조직의 화학적 혹은 심지어 원자핵적인 분해(dissolution), 즉 에고이즘과 이상주의의 고착된 대립으로부터의 벗어나게 할 수 있고, 새로운 종류의 통합을 향해 나아갈 그런 분해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총체성 안에서 요소들은 상호교차되고 상호침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들은 미리-정해진 한계들 내에서의 자유주의적 자유를 누리는 대신, “기교(virtuosity)”(Virno 2004)를 부리며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를 가질 것이다. 헤겔은 이미 이와 비슷한 어떤 것을 그의 절대개념 (, ‘그곳에 있는 사람 중 취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바쿠스의 축제... (그리고 동시에) 그 축제는 투명하며, 깨진 적 없는 평온한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을 가지고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헤겔은 혁명은 유기적인 국가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생각했고 정당하게도 그 보수적 경향 때문에 비판 받았다. 그의 추종자들, 젊은 헤겔주의들과 특히 맑스는 물질(그들이 보기에 헤겔은 물질을 과소평가했다)의 측면에서 그와 같은 절대를 찾았다. , 그들은 헤겔의 철학에 맞서 새롭게 정향시킨 물질의 부정적이고, 분해하는(dissolving) 힘을 강조했다.

 

중요하게 지적할 만 한 것은 연대에 대한 되풀이되는 부르주아적 옹호(미국에서의 커뮤니티주의, 또는 최근 사회적, 정치적 담론에서 언급되는 시민사회’)와 달리, 공산주의는 사유 재산의 철폐를 목표로 할지언정 결코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되는 집단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맑스와 최근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실제로 공산주의의 부정적 속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이미 현존하는 사회적 단위들의 분해를 지향한다. 공산주의는 모든 사회에서 실행되는 사회를 분해시키는 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회적 전망인 반면, 자유주의는 그 동일한 힘을 개인과 국가의 이분법의 근거로서 사용한다.[각주:8] 하지만 공산주의의 맥락에서 이 힘들은 혁명적인 것, 즉 집단적 해방의 에너지를 지니는 자기-분해의 사회적 힘들로서 간주된다. ‘공산주의가 약속하는 공통성(commonality)은 적극적으로 정의된 행동의 목표로부터 진행되기도 하지만(여기서는 일원화된 집단적 주체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유예되고 분해되는 다중의 부정적 통합으로서 진행되기도 한다. 그 다중은, 말하자면 채무 불이행(by default)’을 통해 그들 자신 가운데서 함께-자리를 잡는다(co-ordinate).

 

다시 우리 시대, 1980년대 말로 돌아오자면, 탈형이상학 철학의 프랑스 학파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두 철학적 개념이 거의 동시에 출현했다. 장 뤽 낭시(Jean-Luc Nancy)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철학이 그것이다. 이 두 철학은 명백히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결과로 생겨난 것으로 후자와 달리 권력의 당-국가 조직화나 사회주의적 국가자본주의 경제와는 관련이 없는 공산주의의 새로운 비전을 제안한다.

 

여기에서 나는 간략히 이 접근들을 요약할 것이다. 낭시[각주:9]는 공동체의 존재론적, 다원적 성격을 주장하고 존재 그 자체의 초월적 속성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주장한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인간적, -인간적 상호관계들의 내재성 내부에서 초월과 탈자태(extasy)’를 재생산하는 철학이다. 낭시는 공동체를 엄격하게 내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의견에 반대하는데,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것은 대상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분배할 준비가 되어있는 단일한 하나의 주체(‘인민’, ‘국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낭시의 존재론적 공산주의는 흔히 비현실적이고 비-혁명적인 개념이라고 비판 받곤 하지만 그의 접근이 지니는 가치는 공산주의와 공동체의 전복적인 탈자적(ecstatic)’ 본성에 대한 주장에 있는 바, 그것은 연대를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으로 옹호하는 순진한 관념론에 반대된다.

 

알랭 바디우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사건(Badiou, 2006) 에서 폴 코헨(Paul Cohen)의 정리에 대한 정치적, 형이상학적 해석을 내놓는다. 그 정리는 주어진 집합 내에서 가능한 모든 종류의 실정적 정의들과 정체성들을 가로 지르며’, 그것을 벗어나는 하부집합 혹은 유적(generic)’ 집합을 구성한다. 바디우에게 이런 수학적 형식은 투사적 주체의 임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주체는 특정한 해방적 사건에 충실하면서 서서히 유적 집합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는 묘사될 수 없고 식별될 수 없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사물들과 발생들을 골라낸다.” 한편, 사건은 또 나름대로 수학적 집합들의 질서 잡힌 세계 내부에서 인식되지 않는 다수(‘단독적요소들)의 폭발이다. 보다 최근 저작에서 바디우는 이념(idea)’(칸트적 의미에서의 정향원칙으로서의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수학과 철학에서 이미 일어났던 것들은 이제 정치적 실천 속에서 더 넓게 시험되고 증명되어야만 한다.

 

지적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의 정치적 근접성과 대개 헛된 유토피아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옹호에도 불구하고 두 이론이 상반된 경향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맑스처럼 낭시는 현재의 사회적 현실을 조망할 특정한 앵글을 제공하는 변함없는 존재론을 겨냥한다. 반대로 바디우에게 공산주의는 주체의 작업방식(modus operandi),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의 이미지 혹은 이념이다 비록 그 자신 또한 객관적이고 초-존재론적인(ultra-ontological) 정당화, 즉 사건(그 자체로는 아직 내용적으로는 공산주의적이지는 않고 다만 혁명적인)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주목할 것은 두 저자가 부정적인, 거의 부정신학적인 용어를 통해 공산주의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낭시의 경우에는 초월 혹은 탈자태”, 바디우의 경우에는 현존하는 범주들로부터의 벗어남). 공산주의에 관한 최근의 텍스트에서[각주:10] 낭시는 공산주의가 현존하는 공동체들이 분해되어가는 때에야 비로소 의제가 된다고 덧붙였다. 이 관찰은 그의 이론의 매우 중요한 발전이다. 바디우의 경우는 두 가지 이유에서 보다 복잡하다. 그가 강조하길, 사건의 묘사와 유적 절차가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현행성은 언제나 확언(affirmation)의 효과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단순히 파괴적인(destructive)” 것이 아니라 감산적(subtractive)”인 것이다.(Badiou, 2006: 407-408)[각주:11] 부정적인 것의 실체성에 대한 이와 같은 거부는 바디우에게서 문제적인데 왜냐하면 현재의 상태를 지양할 힘은 그의 설명에서 부재하며, 이 누락은 새롭게 인식된 사건과 그것이 그것의 출현으로 전복시킨 억압적 장치 전체와 공존할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새롭게 인식된 사건이 그와 같은 장치들에 매우 의존적이다. 둘째, 여기서 실종된 부정적 힘은 개입과 충실성이 그것의 이름으로 확립하는 긍정적 형식들로부터 복귀하여 사건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바디우는 사건은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 상태에 머물러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비록 그는 어떤 주체적 운동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여주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 두 명의 프랑스 철학자에 덧붙여 이탈리아 좌파의 사유, 특히 파울로 비르노(Paolo Virno)의 저작이 언급되어야만 한다.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비르노 또한 낭시와는 다른 결로 공산주의에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한다. 낭시와는 달리 비르노에게 공산주의는 내재적인 것이지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사유 그리고/또는 노동의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본성을 통해 이해한다. 비르노에게 공산주의는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며, 다만 우리가 자본주의적 통치와 합리성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켜 공적인(public)’ 것으로 만들고 민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비르노는 낭시보다 더욱 공산주의자의 주체성에 신경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낭시와는 비슷하지만, 바디우와는 다르게 미래의 변형에 대한 지나치게 유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면서 공산주의를 존재론으로 만들고 있다.

 

맑스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공산주의의 가장 열렬한 창조자는 다름 아닌 자본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르노는 자본의 공산주의”(Virno, 2004: 97-98)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경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일반 지성공공장소들에 기초한다. 완벽한 사적 소유나 특허 따위를 축출하는 새로운 기술들이 발명되는 곳은 바로 자본주의의 내부다. 생산 수단의 소유 형태는 더 이상 사실적으로 사적이지 않다. 노동의 유연성은 노동의 분할을 의문시한다. 여가 활동이 노동보다 더 많은 시간과 주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 공산주의는 시장과 이윤의 법칙에 종속된 상태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그것들과 양립 가능하다. 이런 사실적(factual)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즉 실제적 공산주의는 인위적인 계약적 관계의 결과로서 제시된다. 한편, 비르노의 설득력 있는 개념 안에서 인격으로서 여전히 형성되고 계발되어야 할 자유로운 개인은 바로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미 주어진 선-조건으로서 제시된다. 오직 혁명적인 사건만이 이런 삶과 사유의 방식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사건이 언제나 공산주의를 개념화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구상되는 것은 아니다. 낭시에게 공산주의는 일반적인 모체(matrix)이며, 바디우에게 사건 자체는 언제나 예측불가능하고 놀라운 것이다. 오늘날의 과제는 과거의 사건들, 이를테면 파리 코뮨이나 1968년 혁명 따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비르노와 네그리 같은 이탈리아 포스트-노동자주의자들(post-operaist)은 보다 실천적으로 정향되었지만 심지어 그들 또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피한다. 대신 그들은 탈주같은 부정적인 전략들을 주장한다. 이런 부정적 형식들의 우세는 민주주의와 민족국가와 대립하여, 공산주의가 표상하는 무한하고(infinite) 막연한(indefinite) 종류의 총체성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네그리와 비르노는 탈주가 그것의 부정성 때문에 중요하다는 사실은 명시적으로 부정한다.[각주:12] 그들은 여하한 사건의 내재적 긍정성을 주장하면서 들뢰즈의 입장을 따른다. 그 결과 그들은 혁명의 과제가 이미-존재하는 다중의 창조적 힘에 모든 자유를 부여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주장에 반대하여 우리는 아마도 혁명적 자원을 사회적 부정성 그 자체 안에서, 즉 분해(dissolution)의 무의식적인 집단적 형식 안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맞서 확증되어야만 할 어떤 가정된 긍정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현재 상태의 파괴와 밀접하게 결합된 조건으로서 혁명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공산주의에 관한 맑스의 오래된 딜레마를 부활시킨다. 만일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틀렸다면, 바디우가 제안하듯 공산주의가 하나의 가설이라면,(Badiou, 2009) 혹은 증명되어야 할(즉 실천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하나의 정리라면, 그것은 또 하나의 이상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다. 만일 공산주의가 인류의 존재론적 조건(심지어 탈자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적 결정화를 비껴가면서 반혁적 행위에 그다지 영감을 줄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만일 자본주의 내부에 진보적인 경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자신의 전제들(즉 자본주의의 전제들)을 파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딜레마들을 피해가려면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정치적 정의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현재의 조건을 파괴할무언가를 실제 현실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 정확히 우리가 낭시와 바디우, 그리고 비르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어떤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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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fr.pekea-fr.org./p.php?c=comm/8-7-Y-MOULLIERBOUTANG.html (05.10.2013).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Minneapolis: Th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Nancy J.-L. (2010) Communisme le mot. L’idée du communisme (eds. A. Badiou, S. Žižek), Paris: Lignes, pp.  197214.

Negri A., Hardt M. (2000)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Platonov A. (1994) The Foundation Pit,  Evanston: Th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Virno P. (2004) A Grammar of the Multitude: For an Analysis of Contemporary Forms of Life, London:  Semiotext(e). 

 

 

 

 

 

  1. 레티프 드 라 브르톤(Restif de la Bretonne)에 의해,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 자코뱅(German Jacobins)에 의해 프랑스 혁명은 급진적으로 사유되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 할 것. Grandjonc Jacques, 1983. [본문으로]
  2. [역주] 맑스와 엥겔스가 쓴 글들의 한국어 번역은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전 6권), 감수 김세균, 번역 최인호 외, 박종철출판사, 2010에서 가져온다. 이 책에서 번역을 가져올 경우, 각주에 권, 쪽만 적는다. 1권, 215쪽 [본문으로]
  3. [역주] 맑스와 엥겔스의 글에서는 “지양(aufheben)”이라는 단어가 쓰였지만 마군이 인용하는 영역본에서는 “abolish”라는 단어가 쓰였다. 따라서 국역본을 따라 “abolish”는 “지양”으로 옮긴다. [본문으로]
  4. [역주] 1권, 2쪽 [본문으로]
  5. (포스트) 소비에트 시기 연구분야에서 자유주의적 입장을 보이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보리스 그로이스(B. Groys), 미하일 리클린(M. Ryklin), 예브게니 도브렌코(E. Dobrenko) 등이 있음. [본문으로]
  6. [역주] 1권, 214쪽 [본문으로]
  7. [역주] 1권, 421쪽 [본문으로]
  8. 칸트의 “반사회적 사회성(asocial sociability)”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할 것. Kant, 1911: 41-53. [본문으로]
  9. 다음의 저서를 참고 할 것. The Inoperative Community (Nancy, 1991). [본문으로]
  10. “공동체(koinoia, communitas, Kommunsm)는 심오한 사회적 변형들과 사회적 질서의 혼란들, 또는 파괴들의 시대들에서 나타난다.” (Nancy, 2001: 201) [본문으로]
  11.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감산’과 ‘파괴’에 대한 바디우의 최근 이론은 다음의 저서를 참고할 것, Badiou, 2007. [본문으로]
  12.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에 대해서는 다음의 저서를 참고할 것. Hardt, 2000: 131-132. 또한 역사의 부정성를 부주의하게 다룬 네그리와 하르트를 비판하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의 글도 매우 중요하다. Laclau, 20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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