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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반려종과 실뜨기하기(1)

compost 2017.12.31 05:20 조회 수 : 1231

반려종과 실뜨기 하기

 

최유미

 

1. 테라폴리스

 

자연은 추상적인 말이다. 과학자들에게 자연(nature)은 읽어야할 비밀스런 텍스트이고, 자본주의자들에게 자연은 자원이자 소유이고, 에코페미니스트나 급진적인 생태주의자들에게 자연은 인간들에게 혹은 서구의 남성중심의 문명에게 무참하게 유린된 상처 입은 어머니다. 갈릴레오는 자연을 수학으로 쓴 성경이라고 했고, 아인슈타인은 과학을 하는 것은 수풀속의 미로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고전시대의 재현이 그렇듯이 심히 투시법적인 시선이다. 과학자는 빛을 비추는 자의 대리인 혹은 빛을 비추는 자로 소실점에 위치하고, 자연은 단지 빛을 반사할 때에만 드러나는 사물, 계몽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활용되기를 기다리는 자원이고 소유물이라는 자연스런 귀결에 이른다. 반면 에코 페미니스트나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투시법적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들에게 자연은 이 모든 것을 낳는 어머니다. 낳다 혹은 낳아진 것이라는 어원을 가진 네이쳐가 동아시아에서 자연으로 번역된 것은 낳다는 의미에 충실한 번역이다. 그런데 이런 초월적 의미의 자연 개념은 이들이 비판하는 투시법적 시선과 주인과 노예의 위치만 바꾼 거울상이다. 낳는 것으로서의 자연은 남근적인 어머니다.

해러웨이는 사실이나 허구처럼 자연은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유기체만 해도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 기원에 신을 두지 않으면 설명이 안 된다. 그것이 신이 아니라 섭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신비한 무엇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서 보호되어할 무엇도 아니다. 자연은 그 속에 존재하는 액터들의 구축물이다. 그러나 액터는 인간만이 아니다.

 

 

자연은 미리 존재할 수 없지만 그것의 현존도 이데올로기적이지 않다. 자연은 평범한 것(commonplace)이고, 인간이든 아니든 물질-기호론적 액터들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초래된 종잡을 수 없는 강력한 구축이다. 그런 실체들을 목격하는 것은 그 액터들과 유리되어 있는 발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고 언제나 불평등한 구조화하기, 모험하기, 능력을 위임하기에 관한 것이다. (The promises of Monsters: A Regenerative Politics for Inappropriate/d Others)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최초의 빅뱅으로부터 법칙적인 시간에 의해 지금의 지구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는 그 속에 있는 인간만이 아닌 모든 액터들에 의해서 구축되어 온 것이다. 다나 해러웨이는 이를 “테라포밍(terraforming)”이라 부른다. 그녀는 이론적인 우화로서 테라포밍의 방정식을 이렇게 쓴다.

테라포밍.png

 

이 땅은 그곳에 거주하는 인간 비인간의 모든 액터들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활동인 테라포밍에 의해서 만들어진 테라폴리스이지 그 활동 이전에 이미 있었던 컨테이너가 아니다. 테라폴리스의 시민은 인간만이 아니고 비인간 복수종의 크리터들이 당연히 포함된다. 해러웨이가 우화화한 중적분방정식은 열려있다. 퓌지스에서 부터 사회성, 물질성 등 온갖 것들이 하나씩 각각의 차원을 차지하고 심지어 아직 오지 않은 차원도 있다. 그래서 테라폴리스는 한 몸에 온갖 것들이 뒤엉킨 키메라다. 이런 차원들과 별도로 또 다른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시간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한 시계적인 시간은 아니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가 얽혀있는 시간이다. 이 테라폴리스의 거주민들은 반려종이지 근대의 발명품인 “휴먼(human)”이나 그것의 강화버전인 “포스트휴먼(posthuman)”이 아니다.

 

 

2 . 실뜨기 혹은 SF

 

우리가 어렸을 때 하고 놀았던 실뜨기는 해러웨이 사상의 중요한 개념이다. 해러웨이는 실뜨기(string figure)를 SF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이언스 픽션만이 아니다.

 

                                                                                 SF.jpg

 

SF는 공상과학(science fiction),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 판타지(science fantasy), 사변적 우화화(speculative fabulation),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그리고 또 실뜨기(string figure)를 위한 기호다. 실뜨기 게임을 하는 것은 패턴을 주고받기이고, 실을 떨어뜨리고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유효하게 작동하는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고, 문제가 되는 연결들을 전달하는 것이다. 땅위에서 지구에서의 유한한 번창을 만들어 가기 위해 손에 손을 포개고,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접합부위에 접합부위를 이어가는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이전에는 거기에 없었던 중요하고 아마도 아름답기까지 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실뜨기는 받고 전해주기 위해서 가만히 있기가 필요하다. 실뜨기는 주고받기의 리듬이 유지되는 한, 모든 종류의 수족으로, 다수에 의해 플레이 될 수 있다. 학문과 정치도 역시 그것을 닮았다 – 열정과 행동, 가만히 있기와 움직이기, 고정시키기와 시작하기를 요구하는 꼬임과 뒤얽힘 속에서 전달하기. (Staying with the trouble)

 

 

SF의 리스트는 길다. 허구적이거나 사변적인 이야기와 과학적 사실이 나란히 놓이고, 그 옆에는 사변적 페미니즘도 놓인다. 말들의 어원으로부터 통상의 용법과는 다른 의미의 개념창조에 적극적인 해러웨이는 사실(fact)과 허구(fiction)에 대해 두 단어 모두 행동을 가리키고 어원도 가깝지만 시제가 다르다고 한다. 사실(fact)은 이미 일어난 일로 과거완료형이고 허구(fiction)는 아직 결말을 모르고 진행 중인 현재완료형이다. 허구는 대개 여태까지 일어난 사실과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허구를 거짓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허구는 우리가 여태까지는 진실이란 것을 몰랐지만 결국은 진실이라고 알게 될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허구는 거짓이 아니다.

사실과 이야기도 또한 함께 놓일 수 있다. 해러웨이는 이것을 신문사의 스포츠 기자였던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평생을 경기스토리에 대한 것만 썼다. 신문계에서는 경기스토리보다는 칼럼이 더 대접 받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경기스토리쪽을 선호했다. 해러웨이 아버지가 썼던 이야기는 사실을 쓴 것이다. 해러웨이의 표현에 의하면 특정한 시점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메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에 착 달라붙어서” 쓴 이야기다. 사실들은 이야기로 전해진다. 이야기에는 문채가 더해지고, 그것은 사실들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실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비단 스포츠 경기만이 아니다.

브뤼노 라뚜르가 말하는 것처럼, 과학적 사실은 실험실의 인간과 비인간 액터들의 협동작업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실들은 사변적인 우화를 필요로 하고, 사변적인 우화는 사실들을 요구한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과학적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이론이 아니라 사변적 우화다. 해러웨이가 이렇게 이론 대신 사변적인우화라고 하는 이유는 이론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투시법적인 시선이기 때문이다. 사변적이라는 말은 논리적인 정합성을 함축한다. 해러웨이는 사변과 우화를 합쳐서 투시법적 시선이 아니라 회절이라는 시각을 확보하려고 한다. 회절은 빛의 파동적인 성질로 간섭과 방해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회절하는 빛은 직선이 아니라 휘돌아간다. 그래서 투시법적 시선은 꿈도 못 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문제가 있다면 다른 이야기로 언제든 방향을 틀 수 있는 것이 회절이라는 시각을 확보한 우화다.

『사이보그 선언』에서 해러웨이가 예기치 않는 사생아를 포착하고 창조신화가 아닌 다른 신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다른 이야기를 위해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사변적 페미니즘을 가지고 복수종의 삶을 이야기한다면, 어머니 자연이 아니라 테라폴리스를 이야기할 수 있고,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반려종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휴머니즘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테라폴리스나 반려종은 어림없는 일이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과 사변적인 우화는 둘 다 사변적인 페미니즘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가 탐구하는 것은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고, 누가 행동하고 있고, 무엇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현실 세계의 행위자들이 조금이라도 비폭력적인 모습으로 서로 설명책임을 다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뜨기는 파트너가 있는 놀이이고, 패턴을 만들고, 그것을 주고받고, 문제가 있는 패턴을 전달받고 그것을 들고 있어야 하는 놀이다. 패턴을 주고받을 때 마다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이 요구된다. 이것이 해러웨이가 말하는 곤란함과 함께하기의 핵심적인 의미다. 그래서 실뜨기는 “되기”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되기”의 문제다. “되기”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는 출구로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휴먼이 아니라 수많은 되기, 가령 동물-되기, 여성-되기, 어린이-되기, 심지어 지각불가능하게-되기의 존재라고 그들은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되기”는 일상의 삶과는 관련이 없고, 오히려 일상을 벗어나게 하는 매혹적이고 악마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보기에 이런 “~되기”로는 인간중심주의를 빠져나가는 출구를 찾기가 어렵다. 해러웨이에게 출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은, 인간 아닌 타자들과 엮어온 부단한 함께-되기를 활성화시키는데 있다.

 

 1월 3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다나 해러웨이 "곤란함과 함께하기-페미니스트 사이보그가 가르쳐준것"에대한 강의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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