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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4_예술, 유동하는 감각의 구축

수유너머웹진 2014.07.28 09:57 조회 수 : 32

[철학이란 무엇인가]_4_들뢰즈와 예술에 대하여 가상인터뷰를 진행하다.




예술, 유동하는 감각의 구축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들뢰즈와의 진짜같은 가상인터뷰!


전주희 - 와우! 유투브에 돌아다니는 동영상이랑 똑같이 생기셨어요. , 똑같다는 표현은 안 좋아 하실 수 있겠군요. 동일성과 포성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는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라면 자신의 얼굴에서도 끊임없는 변화와 차이를 읽어내실 테니 말이에요.  

차이가 있다면 음.. 제가 본 화면보다 손톱은 더 많이 긴 것 같고 탈모는 더 심해지셨네요.

 

들뢰즈 아마도 당신이 동영상으로 보았던 강의시간동안 내 손톱은 이미 자라나고 있었고, 머리는안타깝게도 모근은 쪼그라들고 있었겠죠. 눈 밑에 주름도 많아졌을 거고. 그러나 철학자에게서 눈에 보이는 차이만 본다면 그건 그다지 안목있는 거라고 하긴 어렵지요.

 

전주희 - 물론 당신은 그 영상에서 빠져나가 또 다른 사유의 흐름을 타고 있겠지요. 그러나 그건 당신 말대로 지각불가능한 것아닌가요? 그 지각불가능성이 제가 가진 감각이 무뎌서만은 아닐 것 같은데

 

들뢰즈: 맞아요. 제가 당신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했던 셈이네요. 어쩌면 기억에 의해 지각하는 평범한 눈의 탓인지도 모르지요.

 

전주희: 기억 없이 지각하는 특별한 눈이 있다는 말인가요?

 

들뢰즈: 물론 일찍이 베르그손이 지적한 것처럼, 지각은 기억에 기대어 있습니다. 그 경우에도 기억이란 현행적인 감각의 작동에 의해 다르게 불려나오고 다르게 작용하는 잠재성 같은 거지요. 좀 더 근본적인 것은 그 기억을 지우는 시간을 가동하는 겁니다

니체나 보르헤스는 미래라는 시간에 기억을 지우는 그런 시간성을 부여하고자 했지요. 예술가들처럼 창조적으로 지각하는 이에겐 이게 필요하죠. 기억 속에 뚫고 들어와 기억들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능력이.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 예술

 

전주희 하지만 맑스는 음악이 비로소 인간의 음악적 감각을 일깨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다고 했을 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야말로 신체에 각인된 감각의 축적이자 신체가 기억하는 감각이 아닐까요?

 

들뢰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기억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감각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유년의 기억을 가지고 글을 쓰는게 아닙니다. 내가 유년에 대한 글을 쓸 때에 나는 현재 아이가 되어가고-있는-중인-것에 대해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며 과거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현재에서 발견하는 복합적인 재료들로 아이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당신이 감각의 축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과거에서 이어져오는 시간들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은 하늘에서 눈이 내리면 내리는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은 오히려 그 눈을 헤집으며 휘몰아치게 하는 칼바람 같은 것입니다. 그 진동들 때문에 눈은 안전하게 땅으로 내리지 못합니다. 바다에 내려 짭쪼름한 바닷물이 되고, 버려진 광산에 내려 검은 눈이  됩니다. 우리가 보는 눈이란 이런 것이죠. 눈의 변형. 그것은 하늘의 순수한 눈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과 결합된 눈입니다

눈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하늘로부터 뜯어지는 것, 떼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눈과 하늘은 닮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이 눈을 낳은 것이 아니죠. 눈이 하늘에서 떼어지는 순간 그것은 눈이 됩니다. 눈이 대지의 사물들과 겹치는 순간 그것은 눈의 다양함들로 나타납니다. 눈이 난폭하게 분리되고 다른 사물들을 덮칠 때 낯선 것은 생성됩니다. 감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감각은 유기체적인 욕구와도 재료와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다만 감각은 감각을 구성할 수 있는 모든 재료들의 분할과 진동, 어우러짐입니다.

 

전주희 검은 눈 하니까 생각이 나네요. 한국에 태백 광산촌을 그리는 화가가 있어요. 그 화가가 그린 광부의 얼굴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아요. 검푸르지요. 광부의 충혈된 두 눈을 제외하면 광물이 가지고 있는 검푸른 미광이 전체 얼굴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의 목덜미만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살색을 띄고 있지요.

그 광부의 초상화는 광부를 재현하고 있기 보다는 지하 수천미터에서 한번도 인간의 숨결을 맞대어 보지 못한 광물을 표현하려는 듯 해요. 그 그림을 볼때마다 광물의 냄새가, 흙 냄새도 아니고 금속의 냄새도 아닌 듯한 그런 냄새가

 





들뢰즈 정말 당신이 광부의 초상에서 광산에 묻혀있었던 광물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예술을 해볼 꿈을 꾸어도 좋을 거 같네요.

 

전주희 그건 아마 광물의 냄새라고 생각되는 그런 냄새겠지요. 하지만 단지 생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그런 생각, 그런 냄새지요.


 

예술작품이란 스스로 독립해 존재하는 감응의 응결체


들뢰즈 그 냄새는 당신의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죠. 당신은 그 그림에서 광부의 얼굴을 보면서, 그리고 당신이 맡았던 모든 냄새들의 감각을 동원해 어떤 냄새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당신의 눈은 유기체적인 기관에서 이탈해 콧구멍이 된 거지요. 저는 회화가 재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선과 색을 재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눈을 유기체적인 본래의 기능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회화를 보는 눈은 위장이 되기도 하고 귓속에 있기도 하지요. 물론 당신처럼 콧구멍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감각작용은 화폭의 감각들과는 다른 것이죠. 저는 지금 그림의 감각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림은 그림의 실제 모델인 광부와도, 그림을 보는 당신과도 독립되어 있습니다. 예술은 스스로 자신의 감각들을 보존합니다. 광부의 얼굴을 덮친 광물가루들은 그 어느 날엔가의 곡괭이 소리, 헤드라이트의 불빛, 서늘한 공기와 축축한 땀방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날 그 가루를 들이마셨던 광부나, 그것을 포착하고자 했던 화가와도 무관합니다. 그림은 그 모든 것들을 스스로 보존하면서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감응(affect)의 응결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주희 -  감각들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의 지각작용들, 즉 화가, 모델, 관객의 기억들, 느낌들 이전에 전제된 것으로 제시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모델의 감정이 있고, 거기에 덧붙여 화가의 감정이입이 있고, 관객이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 그 모든 감각작용들의 총체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거지요?

 

들뢰즈 작품에 응결된 감각을 그런 식으로 모델과 작가, 관객의 감정으로 귀속시켜선 안됩니다

감각은 어쩌면 감정 이전에 속하는 겁니다. 다시 설명해보죠. 감각이 인간의 작용 혹은 어떤 특정한 대상의 작용만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가령 고래가 바다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바다의 감각을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고래는 바다를 정복할수록 바다의 감각들이 되어버리겠지요

고래는 바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더불어 생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서양은 고래와 바다의 리듬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전주희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개념이 바로 그런 거였죠?

 

들뢰즈 세잔 역시 말했듯이, ‘흘러가는 세상의 한 순간일지라도 우리가 그 순간 자체가 되지 않는다면우리는 그것을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술은 그 순간들을 구성하는 감응들의 응결이지요. 광부는 광물에 대한 감각으로 인해 신체가, 얼굴이 변용된 광물-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광물-인간은 인간화된 광물일까요? 광물이 된 인간일까요? 그 식별불가능한 지대를 포착해 내는 것, 살색도 아니고 지하 탄광의 어둠도 아닌 검푸른 빛으로, 더이상 객체도 주체도 없이 오로지 그 자체만을 통한 삶, 순간의 지각들을 구성하는 것이 예술이자, 예술이 해야할 작업입니다. 이럴 때만이 감각은 인간이 체험한 지각작용을 넘어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비유기체적인 감각의 생성


전주희 감각들이 유기체에 가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사실 전통적인 서구 철학에서는 감각의 이러한 비유기적 성격에 대해 매우 난감해 왔었지요. 진리에 도달하기에 감각은 오류투성이라고 보았던 이유 중에는 감각이 가지고 있는 사물들과의 관계맺음 속에서 감각이 그러한 사물성에 강하게 영향받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려움은 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하죠

하지만 현대의 사유는 고유하고 확고부동한 를 순진하게 긍정하지만은 않습니다. 매번 새로운 감각을 강요받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낯설고 새로운 사물들을 통한 새로운 감각의 확보가 절실한 것도 사실이에요.

 

들뢰즈 현대적 사유는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적들과 여전히 대결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신이 말한 매번 새로운 감각의 확보는 여전히 분열된 코기토가 아니라 매번 갱신되어 나날이 새로워지는 단일한 코기토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재현의 원리가 그 어느 때 보다 드높아지는 것이 현대이기도 하죠.  

제가 비유기적 감각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주체의 죽음이라는 테마입니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이 테마를 아주 탁월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그는 작가를 죽을 수 있기 위하여 글을 쓰는 자로 정의했죠. “시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이 있어야 하지만, 시인은 단지 시 앞에서만 마치 시를 쓴 후인 것처럼 존재한다.”고 했지요. 작가에게 작품은 그 자체가 죽음의 경험이며 그에 앞서 죽음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작품에 다다를 수 있고 심지어 작품은 죽음을 사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때 이 죽음은 내 안의 비인칭적인 것의 죽음이자 다른 감각에 의한 신체의 변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혼이라는 것은 예술가가 작품에 불어넣어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작품에 의해 예술가에게 부여되는 새로운 감각입니다. 작품을 만들때마다 예술가의 혼은 소진되는 것도 아니고 누진적으로 축적되는 것도 아닙니다. 매번 달라지는 것이지요. 예술가들이 그토록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것은 점점 더많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비대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결핍일 뿐입니다. 차라리 내 안의 익숙한 어떤 감각을 비워냈을 때의 갈증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낳을 것같습니다. 사물이 나를 덮치는 순간 그 사물이 나에게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놓는 것, 이것이 블랑쇼가 말한 시 앞에서만 마치 시를 쓴 후인 것처럼 존재하는 시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주희 : 감각을 유기체에 가두지 않으려는 시도는 당신의 예술에 대한 입장을 넘어 존재론까지 확장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곧 예술과 철학, 정치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한데, 감각의 비유기체적 사유를 위해서는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들 보다 훨씬 깊은 것으로서의 감각, 감각 이전의 감각이 사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감각이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들뢰즈 : 그게 제가 기관 없는 신체라는 말로 말하려고 했던 겁니다. 저는 시각이나 청각 등 모든 감각 영역에 걸쳐있고, 또 이러한 감각들을 모두 다 통과하는 어떤 생생한 힘을 리듬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리듬이 고정됨 없이 흐르는 연속체를 아르토의 입을 빌어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한 거지요.

반면 이러한 미각을 책임지는 입처럼 기관들이 있는 신체, 기관화된 신체를 유기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 그렇듯이 기관없는 신체란 유기적으로 되기 이전에 있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알은 유기적이지 않은 생명 전체입니다. 아르토는 유기체와 신체를 다르게 보죠. 그가 유기체들이란 신체의 적이다라고 일갈했을 때 유기체는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 생명 고유의 진동이나 리듬을 구획하고 특정한 역할로 기관화시키는 것으로 봤던 겁니다.

 



전주희 : 알은 유기적으로 되기 이전의 상태에 있는 신체라는 점에서 앞으로 유기체가 될 신체인 것 처럼 보입니다. 즉 마치 유기체적 신체의 앞선 조건인 듯 생각되는데요. 기관으로 구획되는 기관 이전에 리듬적인 흐름으로서 기관없는 신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유기체 이전의 알이라는 형태로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때 기관없는 신체였다는 의미부여로 만족하란 말인가요? 우리는 한때 자유인이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예속된 현재가 바뀌지는 않잖아요? 물론 현재의 예속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줄 수 있겠지만 말이죠.

 

들뢰즈 : 알은 기관없는 신체의 한 예입니다. 알은 분명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기관 없는 신체이지요. 하지만 기관 없는 신체가 곧 알은 아닙니다. 개념을 설명할 때 예를 든다는 것은 늘 개념을 이해하는 지름길로만 인도하지는 않네요. 복잡한 개념을 하나의 형상으로 환원해버리거나 단순화시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전주희 : 그런가요

당신은 <감각의 논리>에서 베이컨의 그림들을 다루면서 이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다뤘었어요. 베이컨의 그림들, 특히 얼굴이 뭉개지는 그림들을 언급하면서요. 특정한 표정이 있고 기관들로 구획된 얼굴이 해체되고 신체의 일부분인 머리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지요. 이것도 알의 이미지와 겹치는데요. 방금 기관 없는 신체는 알이 아니라고 했지만, 알의 이미지에 매여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분열된 코키토와 유기체는 어울리지 않죠. 아시다시피 유기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각각의 부분들이 부여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 되고 이 기관들이 통합되어 있는 신체를 의미하죠. 그래서 당신이 신학을 유기체적 모델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의 중심을 위해 부분들이 복무하고 또 복속되는 체계에 반대했던 것으로 압니다. 

 




들뢰즈 -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한다기 보다는 기관들의 유기적 구성에 더 반대합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단지 알이 아니라 입이고, 혀이며, 목구멍이고, 식도라고. 아니 차라리 하나의 구멍이라고. 여기서 핵심은 기관으로서 할당된 고정성을 벗어나 순수 질료적 흐름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신체적인 강밀도를 다르게 배치하는 것, 즉 새로운 흐름이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알은 특정한 고정점 없이 강밀도가 순환하는 신체죠. 이는 곧 모든 실재적인 것을 생산할 수 있는 순수질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기관없는 신체를 강밀도=0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강도 없음, 정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강도도 가질 수 있는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모든 강도의 값이 0으로 되돌려져서 다른 어떤 값도 가질 수 있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똑 같은 건 아니지만, 모든 형태가 사라지는 말레비치의 제로 포인트를 떠올리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듯 하군요.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새로운 힘의 분포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신체, 새로운 감각을 다시 또 한번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기관 없는 신체를 이미 현실에서 체험하지 않았나요? 당신이 그림을 눈으로 보고 맡은 냄새말이죠. 눈이라는 기관이 탈기관화되어 새로운 감각의 기관이 되었지요. 기관없는 신체는 특정한 기관이 탈지층화 되는 운동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정확하게 현실의 일부지만, 지금과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잠재적 현실이지요.


 전주희: 이런, 이거 아직도 듣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시간이 다 되었군요. 당신이 조금만 더 쉽게 책을 썼다면, 이 흥미로운 얘기들은 훨씬 광범위한 촉발력을 가졌을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거기서 도래할 독자, 도래할 민중을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이번에 당신이 왔지만, 다음엔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 이글은 경향아티클 < >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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