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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전 출간된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입니다. 여러 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1. ‘사회소설’과 저항?

 

굳이 ‘내재적 발전론’으로 국한하지 않아도, 고전 소설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보면, 여러 가지 방향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니셔티브를 갖고 있는 것은 신분 같은 전근대적인 제도가 와해되는 징표나 왕을 비롯한 봉건체제에 대항해 싸우는 투쟁의 단서를 찾는 것, 혹은 상업과 부에 대한 근대적 경제관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생신분임에도 양반자제와 결혼하는 <춘향전>, 왕의 대체물인 용왕을 희롱하며 봉건적 복종의 관념을 비웃는 <토끼전>, 근대적 경제관념이 등장하는 <흥부전>이나 <허생전>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도, <구운몽>에서 보이는 사랑의 행각 속에서도 신분을 가로지르는 결연을 주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홍길동전>을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보는 이유가 단지 ‘최초의 국문소설’이라는 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서자의 주인공을 앞세운 봉건적 신분제도 비판과 왕을 필두로 한 체제에 대한 명시적인 투쟁만으로도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이러한 해석이 주류가 된 것은 무엇보다 근대 이전의 체제에 정체된 사회임을 증명하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식민사관에 대한 오래된 비판의식과, 봉건제와 자본주의 등을 잇는, 사회의 발전법칙에 대한 맑스주의의 오래된 도식 등이 작품 해석의 방향을 이끌었기 때문일 겁니다. 유사한 맥락에서지만, 작품과 사회적 관계의 상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얼리즘 이론이 현대의 문학예술 작품에 대한 독서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다는 사실도 여기에 추가되어야겠지요.

 

이런 관점을 좀더 확실하게 충족시켜주는 것은 사회문제나 정치적 저항 같은 것을 다루는 작품일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고전소설들에는 이런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작품들이 가족이나 사랑 인근에 몰려 있습니다.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까요? 사회관계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서일까요? 그런 면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사회’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사회의 이미지는 대개 ‘국민국가’와 동일한 범위를 갖는 집합체인데, 이는 근대에 와서야 형성된 것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같은 마을이 분할되어 각각 조선과 중국에 속하게 된 것도 그것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유명한 책(Anderson, 2013)으로 잘 알려진 것처럼, 이는 국가단위의 국경이 그냥 통과할 수 없는 경계선이 되고, 국경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동일한 하나의 언어로 다루는 인쇄물들을 통해 형성된 ‘상상된 공동체’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국내 소식’으로 다루어지는 곳은, 가본 적이 없고 평생 가볼 일이 없는 곳조차 ‘내가 속한 사회’라고 상상하게 되지 않습니까? 만나본 적 없지만, 그 경계 안에 사는 이들은 나와 같은 집단(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이 ‘사회’란 말도 서양에서 수입된 society라는 말을 일본에서 번역한 단어인데, 원래 ‘협회’나 ‘모임’ 같은 것을 지칭하던 말이었습니다. 그게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확장되었다가, 우리가 아는 ‘사회’라는 의미를 갖게 된 거지요. 

 

국민국가가 특권적인 ‘사회’의 지위를 갖게 되는 근대 이전에, 사회란 당연히 다양한 층위의 집단적 경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을 겁니다. 그 단어는 없었지만, 집단적 관계가 분명히 존재하던 근대 이전의 조선에서도 그랬을 겁니다. 가장 일차적인 것은 아마도 ‘가문’이라고 해야 정확할 가족이었겠지요. 그리고 왕이 지배하는 국가가 있었으니 ‘국가’라고 불리는 집단도 있었을 것이고, 그 사이에 마을을 비롯한 공동체가 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경우엔 더 그랬을 터인데, 생각이나 이념이 지향하는 곳인 중국이 있었겠지요.

 

그렇기에 조선조 시대의 소설들은 가족이나 공동체 인근에서 진행되는 게 많지만, 특히 양반들이 쓴 작품들의 경우에는 조선이 아니라 중국을 무대로 쓰여진 것이 많습니다.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창선감의록>, <옥루몽> 등이 모두 중국이 무대입니다. 그러니 당시 조선의 ‘사회 문제’를 특별히 다룰 여지가 적었을 것이고, 다룬다고 해도 그것은 조선사회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국적 스케일로 펼쳐지는 ‘보편적 문제’로 다루어지게 되겠지요. 즉 가족 안의 문제와 중국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라는 두 극단으로 문제가 양극화되는 거지요.

 

또한 조선 안에서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룬 작품이 적은 것은 가정이나 지역을 넘어서면 곧바로 왕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나아가야 했고, 이 경우 사회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왕이 지배하는 체제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었을 겁니다. 굶주림의 고통이 극에 달하지 않고선 저항의 계기를 찾지 못하던 시대에 그런 대결을 쉽게 기대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정치적 권리’에 익숙한 우리의 관념을 과잉투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홍길동전>이나 <허생전>은 확실히 특별한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허생전>은 책만 읽던 선비가 상인이 되어 돈을 벌고 굶주리다 도적이 된 무리를 이끌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얘기인데다, 당시 사회에 대한 통렬한 명시적 비판이 더해져 있고, <홍길동전>은 적서의 차별이라는 신분제도에 대한 분노로 ‘의적’의 무리를 이끌고 왕과 관리들에게 저항하다 멀리 조선을 떠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까지 하는 드라마니까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홍길동전 / 사진출처: By Heo Gyun (d. 1618) - [1],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2293

 

그러나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이번에 작품들을 찾아 다시 읽으면서 가장 당황하고 실망했던 작품은 바로 <홍길동전>이었습니다. 대부분 지루하고 뻔해 재미없었던 ‘고전의 기억’ 가운데서 가장 신나고 가장 정치적이며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게 그것이었지요. 그래서 전에 『노마디즘』이란 책을 쓰면서, 오래된 독서의 기억만으로 ‘전쟁기계’란 『수호지』의 양산박이나 홍길동의 활빈당 같은 것을 지칭한다고 예로 들었었는데, 막상 이번에 읽어보니 홍길동에 대해선 그 말을 취소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 ‘전쟁기계’란 전쟁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죽이는 나쁜 장치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가치의 전쟁’이라는 니체의 개념을 확장한 것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안함으로써 지배적인 가치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것을 지칭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입니다(Deleuze/Guattari, 2000(2); 이진경, 2002(2)). 그렇기에 “좋은 전쟁에선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미리 말해두자면, 홍길동은 서얼의 신분제에 대한 반감 속에서 관가를 털고 왕과 전쟁을 벌이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안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왕에 대항하는 소란을 벌이지만, 실제론 왕조체제는 물론 기존의 왕조차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왕에게 매우 충성스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 “호부호형”도 못하는 서자신분에서 벗어나 아버지나 왕의 인정을 얻으려고 할 뿐이고, 결국 자기 소망대로 병조판서에 임명해준다고 하니까, 일체의 활빈활동을 중지하고 말지요. 나중에 율도국을 ‘세웠다’고 하는 것도 없던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기존에 멀쩡히 있던 평화로운 나라를, 왕의 자리를 탐하여 침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여 왕이 되지만 자신을 그리 서럽게 했던 서얼제도나 신분제도를 없애거나 바꾸는 일조차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했다는 ‘활빈 활동’이란 왕의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벌인 요란스런 ‘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치다 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가정소설이란 관점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시다피시 이 작품은 호부호형 못하는 서자, 그리고 그 부자관계에 끼어드는 아버지의 또 다른 첩이 얽혀서 암살 시도로까지 이어지는 분란이 발생하고, 그걸 계기로 홍길동이 집을 나가게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정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집으로부터 탈영토화되고, 허구적인 가족적 윤리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작품이지요. 그러나 홍길동은 가족을 치고 나갔지만 무엇을 하든 ‘호부호형’ 못하는 한을 잊지 못하며 끊임없이 그 생각만 반복한다는 점에서 어디를 가도 가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며, 어디에 있든 가족 안으로 되돌아와서 자기 자리를 찾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율도국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가장 정성들여 하는 일은 아버지의 묘자리를 거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작고한 아버지를 그 왕릉 같은 묘에 모시는 것이었지요. 

 

이점에서 홍길동은 <사씨남정기>의 사정옥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 심청과는 아주 상반됩니다. 길동이 가족적 윤리가 깨지는 지점에서 집을 나가지만 언제나 가족으로 되돌아올 생각만 하고 있다면, 심청은 가족의 윤리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따라가 임당수의 심연 속으로까지 들어가지만,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대신 아버지를 비롯한 전국의 봉사들이 집으로부터 나오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심청은 주어진 윤리를 과도하게 준수함으로써 그 윤리를 해체하지만, 길동은 윤리를 벗어나 체제에 대항하지만 실은 윤리 안에서 인정받고 체제 안에서 자리 잡는 데에만 몰두한다는 점에서 정반대되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길동과 심청은, 작품이 갖는 정치적 의미나 가치란 그것이 명시하는 주제나 주인공이 하는 행동의 거칢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하에서는 가족소설이란 관점에서 <홍길동전>을 읽기보다는 흔히 하듯 ‘사회소설’로서 읽고자 합니다. 홍길동이 했던 왕에 대한 투쟁이 어째서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가 벌인 사회적 저항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세밀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어떤 명시적 투쟁이나 항쟁을 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중요한 ‘사회소설’의 주인공인 허생과 비교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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