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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강의





녹취 및 정리: 황호연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프롤로그의 제일 첫째 줄을 보면 짜라두짜가 서른 살 때의 일이었어. 집을 떠났지. 물론 집 옆에 호수로 떠났고 산으로 갔어. 이곳 산에서 10년 동안 고요한 정신의 기쁨을 누리고 고독을 즐겼어. 하지만 갑자기 마음이 크게 바뀌었지. 어느 날 새벽잠에서 깨어난 짜라두짜는 떠오르는 해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말했어.’라고 합니다. 그 앞에 보면 이 일이 서른 살 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니체라는 한 사람의 인식의 전환이라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쓸 때가 서른아홉부터 마흔 한 살 때이더라고요.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1~4부를 쓸 때가요. 그런데 그 뒤로 몇 년간 살다가 병을 얻고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어요. 1842년에 태어나서 80년대에 이 책을 썼습니다.

 


*정화 스님께서 강의 교재로 사용하신 책은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백석현 옮김, 야그 출판사, 2007년)입니다. 현재 절판되었고, 이 책을 개정해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있습니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박성현 옮김, 심볼리쿠스 출판사, 2012년)입니다.

*강의를 직접 들으신 분들은 Ⅰ.『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와 Ⅱ.『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 니체편집위원회 감수, 책세상 출판사, 2000년), 그리고 그 외 번역본들 중 편한 것을 참고하셨습니다.

*녹취록에서는 강의 중에 언급된 위 책 두 권(Ⅰ,Ⅱ)의 해당 부분을 스님이 말씀 하신 것을 참조하여 재구성해서 옮깁니다. 페이지 표시는 가독성을 위해 옮긴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하였습니다.

* 페이지 표시의 예: Ⅰ번 책의 36쪽, Ⅱ번 책의 38쪽은 아래와 같이 표기합니다. -> (Ⅰ:36, Ⅱ:38)



서른 살이라는 것은 니체 개인에 비유를 하자면, 니체는 스물여섯 살 때 문헌학 교수로 강의를 하면서 14년을 이렇게 보냅니다. 이 시기가 되면 니체는 갑자기,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도대체 뚫고나갈 수 없는 어떤 무엇에 부딪힌 것 같아요. 절에서 참선할 때 하는 이야기로 하면 백척간두 진일보의 상황 중에서 백척간두까지는 갔는데 아직 진일보가 안 된 겁니다. 그러다가 어떤 순간에 진일보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백척간두의 상황이 되면 그 전까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다 막혔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것으로 자기 세계를 해석하려고 할 때 뭔가 맞는 것처럼 보이다가, 또 조금 지나면 그것이 답이 아니고, 아 그러면 ‘B’인가? 하고 B를 찾아보니까 B도 답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자기가 무엇인가로 자기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멍한 상태까지 갔다는 것을 아마 서른 살 때의 짜라두짜로 자기 삶을 빗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기 해석이나 세계 해석이라는 모든 것을 인위적이라고 한다면, 그 인위적인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몸한테 자기를 다 맡기는 사건으로 전환합니다. 그 몸한테 자기를 다 맡기는 사건을 이 책에서는 산으로 들어가는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위를 넘어서 자연으로 가는 사건이 오는데, 그냥 자연으로 가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판단에서 좋다는 느낌으로 가는 자연이 아니고, 인위적으로는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는 그런 사건이 부딪혔을 때 온전히 멍해지는 사건을 통해서, 있는 곳에 자신과 몸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 기간을 무려 10년을 보내는 것이죠. 그렇게 하니까 몸이 외부와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 지금가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빛이 자기 앞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짜라두짜는 빛이 자기에게 비춰지고 그 빛으로 사람들을 비추게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Portrait of Friedrich Nietzsche" by 미상 - featured on the cover of "What Nietzsche Really Said" by Robert C. Solomon. Licensed under 퍼블릭 도메인 via 위키미디어 공용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Portrait_of_Friedrich_Nietzsche.jpg#/media/File:Portrait_of_Friedrich_Nietzsche.jpg


 

물론 이 짜라두짜가 배화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로 부처님보다 백 몇 십 년 전에 태어나신 분이니까 불과 연관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이때의 불은 그냥 흔히 말하는 불이 아닙니다. 내부에서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가 열리는 겁니다. 내부의 빛이 발현하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부 지향성의 눈이 더 이상 자기 삶에서 작용하지 못하고 내부에 있는 빛이 밖으로 발산 되는 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돼야 합니다. 그런 사건들을 경험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틀의 어떤 것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이라고 하는 것이 감각 세포 중에서 70%를 담당하고 있지요. 이 눈을 감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부의 감각세포들이 깨어납니다. 내부의 감각세포들은 물론 눈을 감기 전에도 깨어있어서 문화들을 수용하는 수용체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외부의 문화적 사건들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수용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문화 수용체를.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문화수용체가 작동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그런 사건인데, 이것도 그냥 답을 주는 게 아니라, 10년간 그런 상태로 있을 때 답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답에 대한 것은 어떤 상태로 얻어지냐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뒤에 보면 자기가 돌본다고 했는데, 이 돌본다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누구를 돌봅니까? 독수리와 뱀을 돌봅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 자존심 강한 의지를 가지고 지상을 내려다보지요. 독수리의 눈은 우리와 달라서 눈이 크게 두 부분으로 돼있답니다. 그래서 안쪽에 있는 눈은 굉장히 세밀하게, 거의 반사시키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지상 몇 십 미터 위에서도 지상에 걸어가는 것을 다 보는 눈이고, 바깥쪽 눈은 퍼져서 전체적인 것을 함께 볼 수 잇지요. 그러니까 사건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는 했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해석할만한 그런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새롭게 지상을 보는 눈을 돌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건이 나오니까 새롭게 보는 힘을 길러가야 하는 겁니다. 돌본다는 것은 자기에게 남아있는 세상 보기의 조그만 불빛들을 살려서 이 불빛이 계속해서 잘 타올라서 밝게 비추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독수리를 잘 돌봅니다. 이 세밀한 관찰로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 그러니까 기본적인 사건의 질서가 다른 식으로 비춰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독수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높은 데에서 내다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높은데서 내려다보고만 있는 것처럼 보일 텐데, 이때 여기엔 뱀도 있습니다. 뱀은 높은 데에서 가는 게 아니고 땅을 기어서 다닙니다. 가장 낮은 데를 기어서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서 만나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어떻게 그 사건에서 내가 새롭게 몸을 피해갈 것인가? , 관계를 구성했을 때 기존에 놓여있는 도로가 나에겐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니까 새로운 길을 내는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문으로서의 뱀을 이야기합니다. 어디에 보면 홈이 파이지 않은 평지를 홈파서 갔다고 하는 어떤 철학자의 이야기와 비슷하지요? 뱀이 홈을 파서 가고 있는데, 묘하게도 그 홈은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홈들입니다. 갈 때는 홈이 길의 역할을 굉장히 충실히 하는데 지나고 나면 그 길이 다시 메워집니다. 그래서 길이 메워지면서 만들어져가는 이 과정이야말로 진실한 길들입니다.

 

길은 그냥 길이라고도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라고도 불렀습니다. 도라고 하면 높은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도의 가장 흔한 은유는 사람이나 짐승들이 다니는 길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길이 된 이유가 있겠지요? 이것과 저것을 연결시키는 겁니다. 만일 중간에 큰 벽이 있어서 더 이상 길의 역할을 못하게 하면 그것의 길로서의 임무가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길을 새로운 것으로 내야 합니다. 자연은 항상 이처럼 있는 길을 가기도 하지만 인연이 되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뱀이 땅을 구불구불 기어가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있는 길을 가지만 그 길에 매몰되지도 않고, 그 길을 가지고 꼭 이 길만 가야한다고 강조하지도 않는, 그런 것을 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도라는 것을 육조스님은 통루라고 그렇게 번역을 해놨습니다. ‘도시통루道是通漏라고. 통한다는 말은 벽이 없다는 말이고 막힘없이 흐른다는 말입니다. 물이 흘러가고 사람이 살아가고 그 밖에 다른 것이 살아가는 것들이 인데, 생명에는 과 길이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길의 정보가 함께 있습니다. 길의 정보가 뭔가 탁 부딪힐 때는, 더 이상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길의 정보만으로는 더 이상 길을 만들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작로(새로 지은 길)를 만들어야하는데, 그 신작로가 뱀과 같은 영악한 지혜를 가진 동물을 말합니다.

 

뱀이라는 것은 우리 쪽에서는 가장 큰 뱀이 용처럼 그려져서 그렇게 나쁘게 쓰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다른가봅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에덴의 질서를 정면으로 뜯어고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질서를 신작로를 내서 바꿔버린 겁니다. 에덴을 지키려는 쪽에서는 뱀이 사탄입니다. 하지만 에덴의 질서로는 더 이상 다음 삶을 담당하기 힘들 때는 다음 통로의 길을 열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그래서 높은 데서 보는 이 힘과, 기존 질서에 구멍을 내서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으로 독수리와 뱀을 잘 돌봅니다. 이때는 할 수 없이 눈이 밖으로 가지 않고 안쪽으로 가게 됩니다.

 

요즘에 뇌를 살피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만, 사람이 멍하게 있다는 건 신체가 그 사건에 있어서 감각 수용체를 가장 잘 조절하는 시기랍니다. 멍 때리는 것은 생각을 쉬고 있는 상태인데, 우리 몸이 잠을 자고 있는 것과 굉장히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그 멍함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단초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지 모르고 가만히 있게 된다는 것은 이 몸이 살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는 그냥 길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뇌 세포의 시냅스의 연결 통로가 완벽하게 새로 만들어집니다. 어떤 경우는 이미 있는 시냅스의 팔이 사라지고 그 옆에서 새로운 팔이 나와서 새로운 시냅스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통로가 마치 멍때리고 있는 사건을 기점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과 똑같은데, 멍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존의 질서가 더 이상 자기에게 삶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탁! 부딪혔을 때 아 이것이 아니다할 때에는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멍하게 있는 것은 언뜻 보기엔 그냥 뇌가 쉬고 있는 상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내야할 그런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몸 안에서 일어난 그런 빛을 여기서는 위대한 태양이라고 부르고, 이 태양을 독수리와 뱀을 통해서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짜라두짜의 두 동물

독수리 출처: 조홍섭 기자의 물바람숲 http://ecotopia.hani.co.kr/69546

뱀 출처: "Red milk snake" by The original uploader was BillC at English Wikipedia - Transferred from en.wikipedia to Commons..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Red_milk_snake.JPG#/media/File:Red_milk_snake.JPG



그러면서 이 부분 뒤에 읽어 보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하늘의 이미지를 한번 쭉 보세요. 공기의 차고 더움은 있지만 하늘의 이미지는 그렇게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불변표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땅의 이미지는 계속 변합니다. 땅은 지속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천()과 지() 중에서 불변표상을 추구하는 쪽으로 가면 그것은 허구의 삶을 사는 쪽으로 갈 수 있는 개연성이 커진다고, 여기서는 계속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땅으로 내려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표상하는 것은 사실상 생각입니다. 생각은 경험하는 사건들의 일반상을 가지고 언어 개념을 만들어서 그 사건과 만납니다. 그런데 이 일반상들에 갑자기 변화가 오는 겁니다. 길이 막히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는 땅으로 가야하는데, 계속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변의 일반상 즉 하늘의 이미지만 가지고 그 사건을 해결하려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겁니다. 실제에서 불변의 이미지가 허락되는 범주가 있는 겁니다. 우리 신체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이 불변표상의 이미지가 우리 삶을 끌어가는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임계점을 딱 넘어서면 더 이상 그 불변표상이 우리 삶을 끌고 가는 잣대가 되기 때문에 멍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땅을 중시한다는 말은, 지난번에 베르그손의 이야기처럼 시간성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을 흐름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머물러있다는 것으로는 시간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변화라는 것은, 땅이라는 보편 이미지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 시간의 변화성 속에서 자신을 살아내지 못하면, 인간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과거도 살지 않고, 미래도 살지 않고 지금 여기를 제대로 살아야 한다면서 비유해서 이야기합니다. 굴렁쇠 위에 바로 굴렁쇠가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으면서 가고 있는 상태가 마치 현재를 살고 있는 초인의 상태라고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초인은 공간을 넘어서는데, 니체가 정의한 인간이라는 것은 발을 땅에 딛고 있기는 하지만 땅의 변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기본 일관성속에 매몰되어있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매몰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상 우리가 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 너는 이렇게 생각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들, 여기서 나오는 성자라고 하는 사람처럼 신이 죽은 줄 모르고 신의 소리를 계속 하는 상태가 되면 이미 죽은 소리로 현재를 살리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것이 여기 나오는 이지요. 그것이 어떤 시대에는 아주 활발발하게 잘 타고 있는 삶의 현존성이었는데, 다른 시대로 오면서 그것이 다 타버리고 재가 됐습니다. 이 재를 살려내려면 다른 양상이 여기에 끼어들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전혀 끼어들 수 없고 이 재만으로 여기를 해석하려고 하니까 전혀 맞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재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그 시기에나 이 시기에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사상의 성자들께서 우리로 하여금 너 다른 생각하면 세상을 전혀 알 수 없어라고 계속해서 겁을 주게 되죠. 그래서 진리를 찾아 나서게됩니다.

 

 

진리를 찾아 나선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진리가 지금 나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지금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진리를 찾아갑니다. 근래에 어떤 분이 신문에 양명학과 주자학을 이야기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주자학은 모든 사람이 저기에 진리라고 말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밖에 있어서 누구라도 볼 수 있습니다. 밖에 있는 진리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나만 그 진리를 찾아가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동일하게 보는 것이죠. 그것이 주자학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양명학은 진리가 거기에 없지요. 자신의 양지良知, 그리고 양능良能, 지금 내 몸과 마음속에서 활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활동성 자체가, 그 사건의 진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아서 밖으로 가는 게 아니고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존성을 제대로 살피게 되면 그 상태가 진리로 존재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을 그렇게 말해진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초인이란 그런 사람을 넘어섰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와 양능의 현존성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인이 아니라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들이 이 책에서도 계속해서 나오게 될 겁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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