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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4강 두 번째 부분

수유너머웹진 2016.05.10 15:57 조회 수 : 330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 仲正昌樹, 『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 作品社, 2013.

 


 

4강. 『정치신학』(2) ― 누가 법을 만드는가? 혹은 ‘최후의 심판’

 

홉스와 슈미트 :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조금 앞으로 나아가 46頁을 보시죠.

법률과학에는 아마 두 개의 유형이 있으며, 그것은 법적 결정의 규범적 특성에 관한 과학적 의의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는가에 의해 구별된다. (굳이 신조어를 만든다면) 결정주의적 유형의 고전적 대표자는 홉스이다.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리바이어던』 26장)라는 대립의 고전적 정식을 찾아낸 것이 그였으며, 또 다른 유형이 아니었던 것은 역사 이런 유형의 특성상 당연하다.

 

[아마 법률과학에는 두 개의 유형이 있을 텐데, 그것은 법적 결정의 규범적 특성에 대한 과학적 의식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일부러 신조어를 만들자면) 결단주의적 유형의 고전적 대변자는 홉스이다. 다른 쪽 유형이 아니라 그가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률을 만든다”(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라는 대립의 고전적 정식화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이 결단주의적 유형의 특성에 비춰 봤을 때 자명한 일이라 할 수 있다(50쪽).]

 

「제2판 서문」에도 나옵니다만, 『정치신학』의 1판을 썼을 무렵의 슈미트는 규범주의와 결정주의의 이분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얘기가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규범주의의 대표격이 법실증주의의 켈젠입니다. 다만, 단순히, [규범주의=법실증주의]라고 간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철학의 교과서에는 홉스를 ‘법실증주의’의 원조라고 기술하는 것도 있습니다. 일단 국가가 성립한 후에는 주권자가 제정하는 ‘(실정)법’만이 법으로서 타당하다는 입장을 홉스가 선명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홉스는 법실증주의를 대표하는 켈젠의 사상적 원조가 되는 셈입니다만, 슈미트는 [도덕・자연법 vs 실정법]이라는 대립도식이 아니라 [규범주의 vs 결정주의]라는 다른 대립도식으로 생각함으로써 홉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라는 『리바이어던』에서 인용한 문장은 라틴어로 적혀 있습니다. <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 1668년에 간행된 라틴어판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세세하게 말하면, 원문에서는 <auctoritas>가 아니라 <authoritas>라고 적혀 있습니다. <authoritas>가 근대에 들어서부터 사용된 철자입니다. 『리바이어던』은 원래 영어로 써졌고, 1651년에 간행됐습니다만, 영어 원문에서는 이것에 해당되는 부분이 조금 긴 문장으로, 하나의 문장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인용할 때에 전후의 문맥도 들어있으며, 슈미트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이기에, 라틴어를 사용한 것이겠죠. 

 

만약을 위해서 라틴어와 영어의 해당 대목을 확인하겠습니다.

 

In civitate constituta, legum naturae interpretation non a doctoribus et scritoribus moralis philosophiae dependent, sed ab authoritate civitatis. Doctrinae quidem verae esse possunt: sed auth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

 

설립된 국가에 있어서는 자연의 법들의 해석은 도덕철학의 학설과 책에 의거하는 게 아니라, 국가의 권위에 의거하게 된다. 학설은 확실히 올바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드는 것이다.

 

즉, 국가 자체가 제정한 법이 아니라 자연법을 해석하여 ‘법’으로서 통용시키는 것에 관해 논하는 대목이기에 문맥적으로는 약간 미묘한 느낌이 있네요. 영어라면 더 어긋납니다.

 

The interpretation of the Lawes of Nature, in a Common-wealth, dependent not on the books of Moral Philosophy. The Authority of writers, without the Authority of the Common-wealth, maketh not their opinions Law, be they never so true.

 

국가에 있어서는 자연의 법들의 해석은 도덕철학의 책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다. 저술가들은 자신의 의견을 그것이 아무리 올바르더라도, 국가의 권위를 수반하지 않고, 스스로의 권위만으로 법으로 할 수는 없다.

 

이것이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에, ‘법’과 ‘권위’가 잘 연결되어 있지 않네요. 슈미트는 전략적으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텍스트에서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저처럼 너무 권위가 없는 학자가 하면, 수법이 간파당했을 때 심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 별로, 그다지 억지 해석도 아닌 데도, 스스로 제멋대로 정한 규칙을 좇아 “나카마사는 엉성하다!”고 인터넷에서 짖어대는 자칭 재야 지식인도 있습니다만(웃음). 슈미트는 주권자의 ‘권위’에 의해 ‘법’이 만들어진다고 하는 홉스의 논의가 근대 법학에서의 ‘결정(단)주의’의 출발점이 됐다고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위 대 진리라는 대립은 다수가 아니라 권위라고 하는 슈탈의 대립보다도 근원적이고 명확하다. 홉스는 심지어 이 결정주의와 인격주의 사이의 관련도 언급하고, 또한 구체적 국가주의를 대신해 추상적으로 통용되는 질서를 놓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물리치는, 결정적인 논점을 제출했다. 그는 종교적 권력이 한 단계 상위의 질서이기 때문에, 국가 권력은 종교적 권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해서 논하고, 그와 같은 이유 제시에 관해 다음처럼 답한다. 즉, 하나의 ‘권력’(power, potestas)이 다른 권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불과하다고 말이다. 질서에 상위와 하위의 구별을 하는, 다른 한편 동시에 추상적 입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등은, 홉스에게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We cannot understand”) 것이다. “왜냐하면 종속·명령·권리 및 권력은 인격들의 속성인 것이지, 권력들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42장).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Friedrich Julius Stahl, 1802-61)은 19세기의 법철학자로, 헤겔의 합리주의적 법이론에 반발하여 셸링과 사비니에 의거하면서, 신의 섭리를 중심으로 한 역사의 전개 속에서 ‘법’의 기초를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1840년에 베를린 대학의 교수에 취임하고, 프로이센의 국법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3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혁명적 움직임에 맞서서 보수주의적인 사상을 전개하고 보수당을 창설했습니다. 슈미트가 높이 평가하는 법학자 중 한 명입니다.
구체적 주권과 추상적 질서의 대비는 알기 쉽습니다만, ‘권력’ 얘기가 조금 알기 어렵네요. 요는 ‘권력’ 자체에는 상하나 우열의 관계가 없으며, 오로지 그 권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격’ 상호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깁니다만, 홉스가 이 얘기를 하고 있는 42장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의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의 관계를 논하는 장입니다. 그는 주권자인 국왕이 그 국가의 교회권력의 정점에 위치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의 논객인 로베르토 벨라르민 추기경(1542-1621)은 “국가권력은 교회권력에 종속된다”는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그것을 논박하기 위해 우선 이 글의 의미를 분석해 보자고 함으로써,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권력 power=Gewalt’ 자체에는 인격이 없기에,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명령을 내리거나 종속시키거나 권리를 갖는다거나 하는 관계는 되지 않으니까요. 일본어로 ‘권력’이라고 말하면, 인격적인 느낌이 듭니다만, <power>, ‘힘’이라고 생각하면 과연 그런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질서’ 얘기가 나오는 것은 질서 유지를 위한 <power>이기 때문입니다. “추상적 입장을 유지한다 abstrakt zu bleiben”는 대목을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이것은 “<power>라는 추상적인 것, 혹은 그것에 의해 지켜지는 것인 ‘질서’라는 역시 추상적인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입장을 유지한다~”라고 보충해서 이해하면 되겠죠.

 

17세기의 추상적 자연과학주의의 가장 시종일관된 대표자의 한 명이, 이렇게까지 인격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주목을 끈다. 그러나 이것은 홉스가 철학자로서 또한 자연과학적 사상가로서 자연계의 현실상을 파악하려는 것과 완전히 마찬가지로, 법률학적 사상가로서의 그가, 사회생활의 효과적인 현실상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반드시 자연과학적 실재라는 현실에서는 없는 듯한 법률학적 현실 혹은 구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홉스는 자각하지 못했다. 동시에 수학적 상대주의나 유명주의도 서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종종 국가라는 단일체를, 임의로 주어진 어떠한 기점으로부터도 구성할 수 있다고 여긴 듯이 보인다. 한편, 당시에 법률학적 사고는, 아직 홉스의 과학성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 때문에 그가, 법의 형식 속에 있는 법 생활의 독특한 실재를 느긋하게 눈감아버릴 정도로는 자연과학적 사고에 압도되지 않았다.

 

 

[17세기 추상적 자연과학의 흐름을 대표하는 이가 이토록 인격주의의 입장을 취했음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홉스가 철학자이자 자연과학 사상가로서 자연계의 현실을 파악하려 한 것처럼, 법학 사상가로서 사회적 삶의 실제 현실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는 자연과학적 실재의 현실성과는 상이한 법학적 현실과 삶 따위는 자각하지 못했다. 또한 수학적 상대주의나 유명론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그는 국가라는 통일체를 어떤 것이든 주어진 한 기점으로부터 언제라도 구성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홉스의 과학성이 아무리 강했다 하더라도, 그로 하여금 법형식 속에 있는 법적 삶 특유의 실재성을 간과하게 할 정도로 당시의 법학적 사고가 자연과학적 사고에 의해 압도당했던 것은 아니다(51-52쪽).]

 

 

홉스의 논의, 예컨대 자연상태론 등에 자연과학적인 발상이 반영되어 있다는 얘기는 정치사상사와 윤리의 입문서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17세기는 철학과 수학이나 자연과학이 아직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시대입니다. 홉스와 거의 동시대인인 데카르트는 수학자였습니다. 홉스 자신도 물체의 운동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자연과학이나 수학과 철학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18세기 후반 정도의 일입니다. 홉스가 철학자인 동시에 자연과학적 사상가라는 것은 그런 얘기입니다. 영국의 보수주의 철학자 마이클 오크쇼트(1901-90)는 홉스의 논의가 자연과학주의적 발상에 기초하고 있다는 견해에는 부정적이고, 오히려 인간의 정신활동에서 생겨난 인위적인 제도, 공민적인 관련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그의 ‘자연과학적 naturwissenschaflich’이라는 것을 자연과학의 방법론이나 기초이론을 응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자 겸 철학자로서 “자연계의 현실상 die Wirklichkeit der Natur”을 보는 때와 마찬가지의 정신으로, 법학자로서 “사회생활의 효과적 현실상 die effective Wirklichkeit der Gesellschaft”을 보려고 했다는 의미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 후에 슈미트는 “자연과학적 실재성이라는 현실”과 “법률학적 현실 또는 구체성”은 다른데도, 그것을 홉스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다고 단정하고 있네요. 홉스에게 ‘자연과학적 인식’과 ‘법학적 인식’이 동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슈미트의 논의에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근대 자연과학은 고대나 중세의 자연학과 달리, 인격신과는 관계가 없는,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추상적인 법칙을 탐구하게 됐기에, 그것이 홉스의 법학에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면, ‘인격’의 얘기를 하기가 어려워지며, 홉스 자신은 자각하고 있지 못했지만, 그가 발견한 ‘법률학적 현실’은 자연과학의 그것과는 상이한 성질의 것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구체성’이라고 번역되는 부분의 원어는 <Lebendigkeit>로, 이것은 직역하면 “생생한 것”입니다.
유명주의란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도 있었던 ‘유명론 Nominalimus’이며, 개별 구체적인 사물이 존재할 뿐이며, 이것들에 공통되는 ‘인간’이나 ‘동물’, ‘식물’, ‘돌’ 등의 보통명사에 대응하는 보편 개념은 실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마음대로 명명한 것일 뿐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수학적 상대주의’란 그 후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체 사이의 위치관계, 힘 관계는 수식에 의해 형식적으로 재현, 재구축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우리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수학이나 물리에서 배우듯이, 방정식이나 좌표축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것과 비슷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홉스가 ‘국가’를 정말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관계성으로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법의 형식 Rechtsform’ 안에 있는 “법 생활의 독특한 실재 die spezifische Realität des Rechtslebens”를 언급한 것은 홉스에게 있어서 ‘자연과학적 인식’이 ‘법학적 인식’에 침투하고 있다면, 홉스의 논의가 오히려 인격적 요소를 배제하는 법실증주의에 가깝게 된다, 슈미트에게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슈미트는 홉스가 ‘법 생활’의 생생한 현실을 잘 관찰하고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법 생활의 현실에서 긴요한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이다. 내용의 올바름을 묻는 것과는 별개로, 결정권의 소재를 물을 필요가 있다. 결정의 주체와 내용의 대립이라는 점 및 그 주체의 고유한 의미라는 점에서야말로 법률학적 형식의 문제가 있다. 법률학적 형식은 바로 법률학적 구체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기에, 초월적 형식의 선험적 공허함을 갖고 있지 않다.

 

 

[법적 삶이라는 현실에서 중요한 점은 누가 결정하느냐이다. 내용의 올바름 문제와는 별도로 결정 권한이 어디에 있느냐를 물을 필요가 있다. 결정의 주체와 내용의 대립이라는 점과 그 주체 고유의 명료성이라는 점이야말로 법학적 형식 문제의 거처이다. 법학적 형식은 법학적 구체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초월적 형식의 초월론적 공허함과 무관하다(52쪽).]

 

 

수학이나 자연과학 등과는 달리 법학에서는 내용이 올바르냐 아니냐 뿐만 아니라 ‘누가 결정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얘기네요. 재판을 생각하면 알기 쉬운 것 같아요. 법적 논리로서 올바른 판단이라고 해서 타당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법적 절차에 기초하여 권위를 부여받고 있는 법원의 결정이어야 합니다. 법학적 형식은 ‘주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초월적 형식’은 원어로는 <die tranzendentale Form>으로, ‘초월론적 형식’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지난 번 강의에서도 나왔습니다만, “인식을 성립하게 하는 전제조건에 관련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수학이나 이론물리학, 혹은 신칸트학파의 철학, 켈젠의 순수법학에서는 ‘초월론적 형식’을 문제 삼지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본래의 법학적 인식에 있어서의 ‘형(식)’은 결정의 주체의 문제를 포함한 극히 구체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누가 결정하는가?

 

그러면 49頁 이하의 3장으로 들어가죠. 제목이 이 책 전체와 마찬가지로 ‘정치신학’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장에서의 논의가 전체의 핵심입니다.

 

현대 국가 이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전능한 신이 만능의 입법자로 전환했듯이, 개념들이 신학에서 국가 이론에 도입되었다는 역사적 전개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체계적 구성으로부터 그러한 것이며, 그리고 이 구성의 인식이야말로 이런 개념들의 사회학적 고찰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이다.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전능의 신이 만능의 입법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여러 개념이 신학에서 국가론으로 옮겨 갔다는 역사적 발전을 봤을 때만이 아니라, 이들 개념의 사회학적 고찰을 위해서 반드시 인식해야만 하는 체계적 구조를 봤을 때도 그렇다(54쪽).]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이미 시사되고 있었습니다만, 슈미트는 여기서 확실히 신학의 개념들이 국가이론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국가이론의 구성이 신학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던 거죠. 전능한 신 대신 입법자가 전능한 존재인 양 이미지⇒상상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외상황은 법률학에 있어서 신학에서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유사관계를 의식해서야 비로소 최근 수백년 동안 국가철학적인 이념들의 발전이 인식되는 것이다.

 

[법학에서 예외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유비관계를 의식했을 때 비로소 최근 수백 년간에 걸친 국가철학상의 여러 이념의 발전이 인식될 수 있다(54쪽).]

 

첫머리에서 나온 ‘예외상태’에서의 ‘결정’을 신에 의한 ‘기적 das Wunder’과의 유비로 설명하고 있는 거죠. 전능한 신이 세계를 창조했지만, 창조한 후에는 세계의 운행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자신이 정한 자연이나 역사의 법칙에 맡기고 있다. 그 예외가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통상적인 법칙을 차단하는 형태로 신이 직접적으로 세계에 개입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에 의해 이 세계의 창조자는 신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과 평행적으로, 보통은 실정법이 객관적인 법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듯이 보이며, ‘법’을 ‘법’으로서 타당하게 하는 궁극적 ‘결정’의 주체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만, ‘예외상황’이 도면, ‘주권자’가 겉으로 나오고, ‘법’의 본질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슈미트가 이 책의 제목을 ‘정치신학’이라고 명명한 이유가 확실해집니다. 슈미트가 보기에, 켈젠 등의 법실증주의자는 신의 입장에 있는 주권자가 겉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통상상태’만 보기 때문에, ‘법’의 본질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50頁에서는 슈미트는 그런 신학과 법학의 유비에 대해 자신은 교수자격논문인 『국가의 가치』나 『정치적 낭만주의』, 『독재』 등에서 시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사상가로 프랑스혁명 당시의 가톨릭의 보수철학자인 보날과 드 메스트르, 2월혁명의 스페인의 정치가로 국가철학자인 도노소 코르테스를 들고 있습니다. 코르테스도 가톨릭보수주의의 인물로, 모든 정치적 문제의 핵심에는 신학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독재론』(1848)이나 『가톨릭시즘,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시론』(1851) 같은, 자못 슈미트가 관심을 가질 듯한 논문을 썼습니다.
슈미트만이 아니고, 법학과 신학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원래 중세 후기에 탄생한 서구 각국의 대학에서 법학은 신학, 의학과 더불어 전문 학부였으며, 중세에 법학을 체계화한 것은 성직자들이었기에, 신학과 법학이 닮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합니다. 양자의 공통성은 ‘교리학 Dogmatik’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곳에 있다고 말해집니다. 신학의 ‘교리학’은 계시에 근거한 신앙상의 교리를, 전체로서 논리적 정합성이 있는 것처럼 체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입니다. ‘법학’에서도, 이것에 상당⇒해당하는 ‘법교리학 Rechtsdogmatik’이라는 분야가 전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과학성을 표방하는 실증주의 계열의 법학자라면, 신학과의 유사성은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재미있게도 켈젠도 지난 번 강의에서 나온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에서 법질서를 넘어선 것으로서, 인격적 존재로서의 주권 국가를 상정하는 국가 이론의 사고방식은, 자연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신을 상정하는 신학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국가이론은 국가에 있다고 보고 있는, 터무니없는 힘[법 외적인 힘]은 기적에 상당한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서 자연과학이 초자연적인 신의 개념을 자연 개념에 흡수했던 것처럼, 순수 국가학이기도 한 순수법학은 법을 넘어선 것으로서의 ‘국가’ 개념을, 법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의 인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정반대의 법학을 발전시키려 한 거네요. 그렇기에 슈미트도 집요하게 켈젠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52쪽에는 국법학의 교과서에서는, 현대의 ‘입법자’의 ‘전능 Omnipotenz’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만, 이런 말투가 이뤄지는 것은 신학의 잔재라고 지적되고 있네요.

대부분은 물론, 논박 때문이다. 실증주의의 시대에는 학문적인 적에 대해, 그 수법이 신학 혹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비난이 이 때문에 이뤄진다. 이 비난이 단순한 비방에 머물지 않는 경우에는, 이런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일탈의 경향이 원래 무엇에 유래하는가라는 질문이 적어도 관련되어 생겨나는 것이며, 이것들이 역사적으로, 아마 유신론적 신을 국왕과 동일시한 군주론적 국가이론의 잔재로서 설명할 수 있는지, 혹은 아마도 체계적 혹은 방법론적 필연성이 이것들의 근저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논의의 대부분은 논박을 위한 것이다. 실증주의 시대에는 학문상의 적에 대해 신학적이라거나 형이상학적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잦았다. 이 비난이 단순한 비방이 아닌 경우, 이런 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일탈 경향이 어디서 유래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겨났을 터이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신론적 신을 국왕과 동일시한 군주제 국가이론의 잔영으로 설명되지는 않을까, 혹은 체계적이거나 방법론상의 필연성이 그 근저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연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57쪽).]

 

이것은 지당한 얘기네요. ‘신학적!’, ‘형이상학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것으로 비판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런 발상이 나오느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사상사, 이론사회학 등이라면, 이런 발상을 하는 것은 당연하죠. ― 분석철학계에서는 바보 같은 논의의 배경을 파고드는 것은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만. 법학이, 그렇게 파고들어가야만 하느냐고 하면, 조금 묘한 느낌이 듭니다만, 슈미트는 법학이 법학적 사고방식의 근원을 파고들어가, 신학과의 공통의 뿌리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목이 하이데거와 비슷하네요.
슈미트는 ‘신학적’이나 ‘형이상학’과 같은, 실증주의자들이 딱지(레테르)를 역으로 이용하여 반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54쪽을 봅시다. 또 켈젠 얘기가 나옵니다.

 

 

법과 자연법칙

 

켈젠에 귀속시켜야 할 공적은, 그가 1920년 이후, 켈젠 특유의 편향성을 수반하고 있지만, 신학과 법률학의 방법론적 친근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에 관한 그의 최후의 저서에서, 켈젠은 처음부터 혼란된 유추를 많이 끄집어내지만, 그러나 깊이 이념사적 통찰을 추가한다면, 여기에, 그의 인식론적 출발점과, 그의 세계관적・민주적 결론 사이의 내적 이질성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국가와 법질서를 법치국가라는 형태로 동일화하는 근저에는,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동일화하는 형이상학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켈젠에게는 1920년대 이래 고유한 관심하에서 신학과 법학 사이의 방법론적 근접성에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업적이 있다. 사회학적이고 법학적인 국가 개념에 관한 그의 마지막 저서에서 켈젠은 혼란스러운 유비를 끄집어내는데, 이는 그럼에도 보다 심오한 이념사적 고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의 인식론적 출발점과 세계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귀결 사이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가와 법질서에 대한 그의 법치국가적 동일시에는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동일시하는 형이상학이 가로놓여 있으니 말이다(60쪽).]

 

“마지막 저서” ― 이것은 “가장 최근의 저서”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 란 앞서 얘기한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입니다. 켈젠은 법학과 신학이 유연類縁관계에 있다는 것을, 슈미트가 보면 불만족한 방식이긴 하지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슈미트가 본 켈젠의 ‘인식론적 출발점’입니다. “그의 세계관적・민주적 결론”이라는 표현은,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원문은 <~seines weltanschauungsmäβigen, demokratischen Resultates>라고 되어 있기에, “그의 세계관에 입각한, 민주주의적 결론”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켈젠은 법과 국가의 본질을 가치중립적으로 파악한 뒤, 근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지며 대립하고 있기에, 국가의 의지결정은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대응하는 의회제 민주주의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슈미트는 󰡔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치󰡕(1920)에서, 자신의 민주주의론의 세계관적 배경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실천적 결론과 인식론적 전제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순은 켈젠이 ‘국가’와 ‘법질서’를 동일시하는 점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슈미트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동일시는 ‘자연법칙  Naturgesetzlichkeit’과 ‘규범법칙 Normative Gesetzlichkeit’의 동일시라는 것입니다만,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아까 얘기한 신과 국가의 소거의 얘기를 가리킵니다. 자연과학이 자연계로부터 초월한 존재이기를 계속한 ‘신’을 자연법칙으로 환원했듯이, 순수법학이, 법질서로부터 초월한 존재이기를 계속한 ‘국가’를, 규범적 법칙으로서의 ‘법 법칙 Rechtsgesetze’으로 환원하려고 한다고 켈젠은 명시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국가나 법의 사회적 현실로서의 측면에 관해서는, 자연과학적 방법에 근거한 국가・법사회학 ― ‘사회학’이 자연과학적이라는 것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만, 켈젠은, 경험과학은 자연과학적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 에 의해 해명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켈젠은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두 가지 의미에서 «동일시» ― 켈젠 자신은 동일시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 한 셈이죠. 자연계에서의 자연법칙과 규범의 세계에서의 규범법칙이 대응한다는 의미에서의 동일시와, 자연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의 현실과, 규범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법질서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동일시입니다. 슈미트는 그런 동일시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법학과 신학의 근원적 동일성을 상정하는, 국가신학적 형이상학을 거절하면서, 켈젠은 또 다른 형이상학을 암묵적으로 전제했던 것입니다.
다른 법학자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 특히 켈젠에 대한 비판은 독자가 이미 켈젠의 논의를 아는 것을 전제로 하여, 세세하게 인용하지 않고, 대충 키워드만 제시하고, 그것을 비꼬듯이 얘기를 밀고 나가기에 켈젠을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기가 힘들어요. ― 일본인의 너무 권위가 없는 법학자가 이렇게 쓰면 문장이 서툴다고 꾸중을 듣습니다(웃음). 원문을 읽고 확인하려 해도, 직접적으로 어떤 책의 어떤 대목을 말하고 있는지 자체를 모르는 곳이 적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이 없는 것도 있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요. 『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치』는 이와나미 문고에 들어있기에, 비교적 입수하기 쉽습니다.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도 고요우쇼보(晃洋書房)에서 번역이 나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옐리넥, 키스치아코프스키나 크라베의 국가론도 소개되어 있기에, 이것을 참조하면서 󰡔정치신학󰡕을 읽으면 슈미트의 집착을 꽤 쉽게 알 수 있습니다. ― 성가신 작업이 됩니다만.
본문으로 돌아가죠.

 

이 형이상학은 오로지 자연과학적 사고에서 비롯되고, 모든 ‘자의’의 폐지에 기초하여, 인간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그 어떤 예외도 배제하려 한다.

 

[이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롯되어 모든 ‘자의’를 폐기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모든 예외를 배제하고자 한다(60쪽).]

 

켈젠이 의거하는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적 사고를 기원으로 하는 것이며, 법칙성에 따르지 않는 ‘예외’를 ‘자의 Willkür’로서 배제하려고 한다는 것이네요. ‘예외’를 배제한다는 것은 당연히 ‘예외상황’에 있어서 그 본질을 드러내는, 인격적인 ‘주권자’를 배제하는 것에 대응합니다. 자연과학처럼 의인화와 우연성을 배제한다는 것이 슈미트가 본 켈젠의 ‘형이상학’의 특징 같네요.

그 신학과 법률학 사이의 병행의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확신이 가장 제자리를 얻는 것은 아마 J. S. 밀에 있어서이다. 밀도 또한 객관성의 관점에서, 또한 자의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법칙의 예외 없는 유효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그렇지만 밀은 켈젠과 달리, 법률학적 인식이라는 자유로운 행위가, 그 어떤 임의의 실정적 법률집 덩어리로부터도, 그 체계의 총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 객관성이 다시금 폐기되기 때문이다.

 

[신학과 법학이 곁에서 나란히 전개되어 온 역사에서 이런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한 이는 밀(John Stuart Mill)일 것이다. 밀 또한 객관성을 강조하고 자의를 두려워한 까닭에 법칙은 모두 예외 없이 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켈젠과 달리 법학적 인식이라는 자유로운 행위가 임의의 실정적 법률집으로부터 질서 잡힌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객관성이 다시 페기될 터이기 때문이다(60쪽).]

 

존 스튜어트 밀(1806-73)은 벤담(1748-1832)의 공리주의를, ‘자유’나 ‘정의’를 질적으로 높이 평가한다는 방향으로 수정했던 그 밀을 가리킵니다. ‘법률집 덩어리’란 조금 어려운 표현이네요. 원어는 <Gesetzmasse>로, 문자 그대로, 법률의 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의 ‘덩어리’란 법칙성이 있고 상호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복수의 것이 너저분하게 함께 [뒤섞여 존재]하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켈젠은 ‘법률학적 인식이라는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 그 덩어리를 분석함으로써 체계적으로 조화가 취해진 ‘법질서’를 도출시킨다고 생각한 것인데요, 밀은 그것이 무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법률의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예정조화적인 체계를 묘사하고자 한다면, «객관적인 인식»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밀도 또한 객관성의 관점에서, 또한 자의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법칙의 예외 없는 유효성을 강조한다”는 부분은, 법학의 얘기가 아니라, 경제학과 논리학, 과학방법론 등, 다양한 학문영역에서의 밀의 ― 자연과학적 의미에서의 ― ‘법칙’ 지향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밀은 다른 분야에서는 ‘예외 없는 법칙’을 요구했지만, 법이론에 관해서는 벤담, 그 영향을 받은 분석철학자 오스틴(1790-1859) 등과는 달리, ‘법실증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오스틴은 법실증주의의 창시자라고 간주됩니다.

무조건의 실증주의가 법률에 직접 의거하는가, 아니면 우선 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가는 객관성의 열정 속으로 갑자기 침입하는 형이상학의 앞에는 아무런 구별도 보증할 수 없을 것이다.

 

[고삐 풀린 실증주의가 법률에 직접 의존하든, 혹은 우선 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든, 갑작스레 객관성에 흠뻑 빠져든 형이상학 앞에서는 차이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60쪽).]

 

이것은 추상적이고 알기 어려운 느낌입니다만, 슈미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문구 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A인가 아니면 B인가는 … 아무런 구별도 보증할 수 없을 것이다 Ob A, oder ob B, sollte … keinen Unterschied rechtfertigen”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구별을 보증하지 않는다” ― 정확하게 번역하면, “구별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 라는 추상적인 표현이 되고 있기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습니다만, 요는 “구별을 못하다” 혹은 “구별할 수 있다고 해도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법실증주의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기대지 않고, 법률 혹은 법률의 핵심에 있는 ‘법규범’에 직접 의거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명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법실증주의가 실체법을 하나하나 깔끔하게 분석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유리한 자의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되면 이상하네요. 하지만 체계의 탐구를 방기해 버린다면, 법규범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의미가 없어지며, 법학은 단순한 개별 법률 지식의 덩어리가 되어버립니다. 이 때문에 ‘법실증주의’는 실재하는 개개의 법률과, 체계의 어느 한쪽에 중점을 둠으로써 고려하게 되는 것입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어느 쪽이 되더라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켈젠으로 대표되는 법실증주의의 ‘객관성’에 대한 열정 속에, ‘형이상학’이 숨어 있으며, 그것이 갑자기 겉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까다로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학문의 ‘실증성’이란 원래 무엇이냐고 추궁해서 생각하면 반드시 나오는 문제입니다. 실재하는 개별 구체적인 대상을 관찰하여, 그로부터 논리적으로 정합성이 있는 체계를 도출하는 것입니다만, 양자가 제대로 일치한다는 보증은 없다. 자연과학이라면, 관찰이나 실험을 반복해서 잘 일치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곳으로까지 가져가지 않겠지만, 법의 경우,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객관성을 설정할 수 없습니다. 슈미트와 켈젠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법이라는 것은 일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는 많은 인간의 의지가 복잡하게 얽혀져 만들어진 것이기에, 개개의 법을 관찰했다고 해서, 개개의 법을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 법칙, 그것에 기초하여 형성되는 체계를 발견할 수는 없다. 법칙성이라든지 체계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객관성’은 아예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입니다만, 슈미트가 켈젠 자신이 모종의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에, 까다로운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법학 개념의 사회학’

 

켈젠이 그 방법론적 비판을 한걸음 내딛는 순간, 이번에는 전연 자연과학적인 원인 개념을 조작한다는 사실은 흄이나 칸트의 실체 개념 비판을, 그대로 국가 이론에 적용할 수 있는 것과, 그가 믿고 있으며 (국가 개념, p.208) 스콜라적 사상에 있어서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라는 점을, 그가 간과하고 있다는 것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켈젠이 스스로의 방법론적 비판을 한걸음 넘어서자마자 그야말로 자연과학적인 원인 개념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에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그는 흄(David Hume)이나 칸트의 실체 개념 비판을 그대로 국가이론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때 켈젠은 스콜라적 사고에서의 실체 개념이 수학적-자연과학적 사고에서의 실체 개념과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60-61쪽).]

 

 

‘방법론적 비판’이란 다른 법학, 구체적으로는, 국가를 인격적으로 파악하는 법학의 방법론의 비판이라는 것입니다. 켈젠은 다른 사람의 방법론을 비판할 때에는 날카롭지만, 자기의 설을 전개하는 단계가 되면, 자연과학적 발상이 법학에서도 통용된다는 형이상학에 얽매인다. “자연과학적 원인 개념을 조작한다”는 것은 법질서 속에, 자연계의 [원인-인과] 관계 같은 작용이 작동하고 있다고 상정한다는 것입니다. “조작하다”의 어원은 <operieren>으로, 이것은 ‘작용하다’고도 번역됩니다. 칸트나 흄이 비판한 ‘실체 개념 Substanzbegriff’이란 다양한 물질적 대상의 근저에 있는, 궁극적인 ‘실체’를 가리킵니다. 흄이 인과법칙, 자아, 물질 등은 관습화된 경험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실체는 없다는 논의를 했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칸트는 실체로서의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유명하죠.
‘국가 개념’이라고 생략되는 것은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입니다. 이 책의 해당 대목에서는 칸트, 흄 외에, 경험론의 철학자인 로크, 물리적 현상을 감각에 의한 직접 경험으로 환원하려 한 것으로 알려진 물리학자 마하(1838-1916), 주체/객체의 분리 이전의 ‘순수 경험’으로 되돌아가, ‘자연적 세계 개념’을 부흥시키려 하고, 마하나 후설(1859-1938)에 영향을 준 독일의 철학자 아베나리우스(1843-96)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모두 ‘경험’에 대해 비판적인 고찰을 가하고, 궁극적인 ‘실체’를 상정하는 것을 형이상학으로서 물리친 인식론 또는 인식비판의 철학자들입니다.
해당 대목의 조금 앞부분에서는 (당시의) 현대물리학에서는 ‘힘 Kraft’, 심리학에서는 ‘혼 Seele’ 같은 ‘실체’ 개념이 소멸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켈젠은 그런 실체 비판의 사고방식을 국가 이론에 적용하고, ‘실체’로서의 국가를 소거하려던 것인데요, 슈미트는 켈젠이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간과하고 있는 내용입니다만, 번역이 부정확하니까 조금 알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스콜라적 사고에 있어서의 그것과는 전혀 별개이다”에 상당하는 원문은 <daβ der Substanzbegriff des scholastischn Denkens etwas ganz anderes ist als der des mathetisch-naturwissenschaftlichen Denkens>입니다. 빠져 있는 데다가 주어와 비교 대상이 된 보어가 바뀌어 있네요. 제대로 번역하면, “스콜라적 사고의 실체 개념은, 수학・자연과학적 사고의 그것(실체 개념)과는 완전히 별개이다”가 됩니다.
이것으로 조금 분명해집니다만, 왜 ‘스콜라적 사고’가 나오는지 잘 모르겠네요. 아마 신학과 법학의 결부가 생겨난 것은 중세의 스콜라철학의 시대이며, 스콜라 철학의 영향 아래서 ‘국가’가 신과의 유비로 이해될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스콜라적 사상에서의 ‘실체’ 개념은 근대의 수학이나 자연과학적인 사고에서의 ‘실체’ 개념과는 상이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네요. 그렇다고 한다면,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마찬가지의 요령(要領)으로, 법의 근저에 있는 ‘실체’로서의 ‘국가’를 소거하려는 것은 짐작하는 바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켈젠이 그 민주정에 대한 신앙고백에 붙인 이론화에 있어서, 그의 체질적으로 수학적・자연과학적 사고양식이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사회과학논총, 1920년, p.84). 즉, 민주정이란 정치적 상대주의의 표명이며, 또한 기적이나 교리로부터 해방되고, 인간의 오성과 비판적 회의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성의 표명이라고.

 

[켈젠 자신이 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지 밝힌 대목을 보면, 그에게는 수학적-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정치적 상대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며, 기적과 도그마로부터 해방된 인간 오성 및 비판적 회의에 토대를 둔 과학성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닌 셈이다(61쪽).]

 

이런 「사회과학 논총」에 게재된 논문이란 아까 얘기한 『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치』입니다. 처음으로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Politik»라는 잡지에 게재되고, 같은 해에 사적으로도 간행됐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켈젠은 국가나 법을 비인격적, 가치중립적인 것으로서 이해한 위에서, 그런 국가에 걸맞은 통치는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켈젠이 이해하는 민주제는 법을 넘어서 작용하는 주권이나 신학적 교리 같은 것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 제1강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슈미트가 『현대 의회 정치의 정신사적 지위』에서 전개한 민주주의론은 그 대극에 있습니다.

주권 개념의 사회학에 있어서는 법률학적 개념의 사회학 일반에 대한 이해가 불가결한 전제이다. 그 신학적 개념과 법률학적 개념 사이의 체계적 유사는 법률학적 개념의 사회학이 수미일관된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주권 개념의 사회학을 위해서는 법학 개념 일반의 사회학을 해명해야만 한다. 법학 개념의 사회학은 하나의 일관되고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를 전제하기 때문에 저 신학 개념과 법학 개념의 체계적 유비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다(61쪽).]

 

“주권 개념의 사회학”이란 구체적으로는 켈젠의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의 사회학적 측면을 가리킵니다. “법률학적 개념의 사회학”은 법률학적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사회 속에서 형성되어 왔는지에 대한 ‘사회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학적 연구를 할 경우, ‘법학’ 자체가 “수미일관된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개념에 일관성이 없고 산산이 흩어져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개념의 사회학’을 할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 때, 신학과 법학이 체계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서구의 법학은 역사적으로 신학과 결부되면서 발전한 것이니까. 즉, 켈젠 등처럼 순수 법학과 법의 사회학을 나누어 생각하고, 전자에서 신학이나 형이상학을 추방했다고 해도, 후자에서 ‘법학 개념의 사회학’라는 형식[形]으로, 신학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의입니다. 신학을 뿌리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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