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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3강 두 번째 부분

수유너머웹진 2016.02.12 17:37 조회 수 : 7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3강. 『정치신학』 (1) ― 주권자, 법-질서와 예외상태 (첫 번째 부분에 이어서)



* 일러두기 

1) 일본어판에는 오역도 있고, 용어 사용에서 미흡한 점이 있으나, 아무튼 일본어 번역본에 기초하여 강의가 이뤄지고 있기에 일본어판을 먼저 인용한 후, [ ] 안에는 “칼 슈미트, 『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김항 옮김, 그린비, 2010”의 번역본을 표기해 둡니다. 

2) 일본어판 쪽수는 “頁”로, 한국어판은 “쪽”으로 표기합니다. 




법학적 사유의 세 종류 ― ‘규범주의 Normativismus’, ‘결정주의 Dezionismus’, ‘제도적 유형 der institutionelle Typ’ 


8頁[9-10쪽]에서 이 동안의 슈미트의 사고방식의 변화가 시사되고 있습니다. “2장 말미(44頁[본 역서, 46頁])의, 법학적 사고의 두 가지 유형에 관한 홉스에 관한 주석에 관해, 나는 또 하나 보충해 두고 싶다[2장의 말미(50쪽)에서 법률적 사고의 두 가지 형식과 관련해 토머스 홉스를 논한 부분에 한 마디 보태고 싶다, 9-10쪽].” 그 보충을 살펴봅시다. 



요즘 저는 법학적 사고에 대해서는 이제 두 종류가 아니라 세 종류의 구별 ― 즉, 규범주의적 및 결정주의적 유형 외에, 제도적 유형 ― 을 설정하고 싶다. 독일 법률학에서의 ‘제도적 보장’에 관한 나의 이론연구 및 모리스 오리아스의 심원하고 중요한 제도론에 관한 업적이 내게 이 인식을 가져다준 것이다. 순수규범주의자가 비인격적 규범들의 형태로 사고하고, 결정주의자가 올바르게 인식된 정치상황의 정확한 판정을, 제도적 법사고는 초인격적 제도들 및 형태들에 있어서 전개된다. 


[나는 요즘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 종류의 법학적 사고를 구분하게 되었다. 바로 규범주의와 결단주의 외에 제도적 유형을 덧붙여서 말이다. 독일 법학 속에서 내가 설파한 ‘제도적 보장’ 논의와 모리스 오리우의 심오하고 중요한 제도이론에 대한 연구가 이런 인식을 얻도록 해주었다. 순수 규범주의자가 비인격적 규칙 속에서 사유하고, 결단주의자는 올바로 인식된 정치적 상황에 맞는 좋은 법을 인격적 결정 속에서 관철시키려 하는 반면, 법에 대한 제도적 사고는 초인격적 제도나 형식 속에서 전개된다(10쪽).]



슈미트는 당초 ‘규범주의 Normativismus’와 ‘결정주의 Dezisionismus’의 이항대립으로 생각했지만, 제3의 유형으로서 ‘제도적 유형 der institutionelle Typ’의 법사고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결정(결단)주의’란 바로 ‘독재’의 논리이죠. 이 강의의 5강, 6강에서 읽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열쇠 개념입니다. 미리 정해진 ‘규범’에 주안점을 둔 법이해와, 독재적 입장의 사람에 의한 ‘결단’에 주안점을 둔 법이해가 있으며, 거기서 양자가 매개하는, 혹은 양자를 가능케 하는 ‘제도’라는 측면이 덧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제도’가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지 않으면, ‘규범’이나 ‘결단’은 현실화되지 않습니다. 


제2판이 나온 이듬해에 해당되는 34년의 논문 「법학적 사고의 세 종류」에서 슈미트는 “제도 Institution” 대신에 “구체적 질서 die konkrete Ordnung”라는 말을 씁니다. 법실증주의적인 법이해에서 ‘법질서’는, 수학이나 논리학이 명제와 명제의 추상적 관계로 구성되어 수립되듯이, 법규범과 법규범 사이의 추상적 관계로서 밖에는 파악될 수 없었던 반면에, 역사적으로 형성된 민족·공동체의 생활형태나 사고형태에 뿌리내리고 구체적 형태를 갖춘 ‘질서’라는 의미에서, ‘구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 ‘구체적 질서’가 법을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제도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도적 보장 die institutionelle Garantie’은 슈미트의 『헌법론』(1929)에 나오는 개념으로, 도쿄대학교의 헌법 선생인 이시카와 겐지(石川健治) 씨가 이에 관해 책을 썼습니다. 일반적으로 헌법은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런 개인의 권리의 직접적인 보장과는 별개로, 어떤 일정한 법적 제도의 존속을 보장하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제도적 보장’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직업관료제라든가, 지방공공단체의 자치, 가족의 상속권, 학문 및 교수의 자유 등입니다. ‘제도적 보장’이라고 표현하면, 제도에 의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얘기처럼 들립니다만, 이시카와 씨는 ‘제도’ 자체를 보장한다는 의미부여를 강조하기 때문인지 ‘제도적 보장’이라는 번역어를 쓰고 계십니다. 


일본국 헌법에 대한 자세한 해설서를 읽으면, 그리 크게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제도적 보장론에 관한 일종의 설명이 있습니다. 슈미트 기원의 개념이라는 형태로, 슈미트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런 책들에 따르면, 일본국 헌법에서도 정교분리, 사유재산제, 학문의 자유, 지방자치 등에 관한 규정을 ‘제도적 보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개개의 인간이 아니라, ‘제도’ 자체, 더욱이 다양한 관습을 통해 형성된 ‘제도’를, 헌법에서 보장한다는 것은 어쩐지 근대의 개인주의에 반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종교라든가 대학 등을 ‘제도(체)’로서 보호하게 되면, 그것은 특권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며, ‘가족’을 제도로서 보호하면, 그 내부에서 억압이 생기기 쉬워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생깁니다. 코뮤니테리언(공동체주의자)이라면, 환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개인을 기초(base)로 생각하는 자유주의자에게는, 저항감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것이 있어서, ‘제도(체)적 보장’론에는 비판적인 헌법학자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도적 보장’은 전근대의 (신분적 특권을 동반한) 신분제의 잔재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슈미트의 ‘제도적 보장’론은 법질서 유지를 위한 예로부터의 신분제적 구조를 중시하는 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규범주의 Normativismus’ 

   미리 정해져 있는 규칙을 기계적으로 조합하여 자동적으로 대답한다. 

‘결정주의 Dezisionismus’ 

   인격적인 주체가 제반 사정을 고려한 다음, ‘판정=결단 Entscheidung’을 관철하는 사고 

‘제도적 유형 der institutionelle Typ’ 

   ‘초인격적 überpersönlich’

          ⇓

   ‘구체적 질서 die konkrete Ordnung’

    ※ 3이 정비되지 않으면 1, 2는 현실화되지 않는다. 



9頁에, 슈미트의 ‘제도적 보장’론의 참고가 된 제도론을 전개한 인물로서, ‘모리스 오리아스’라는 인물의 이름이 나오네요. 이 사람은 프랑스인으로, 이름의 철자는 〈Maurice Hauriou〉이기에, 잘못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에 ‘스’를 붙인 것은 원문에서는 성의 〈Hauriou〉에 소유의 2격을 나타내는 〈s〉가 붙어서 〈Institutionstheorie Maurice Haurious〉(=〈Maurice Hauriou〉의 제도론)이라고 하고 있기에, 〈Haurious〉를 성으로 착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법학 책에서는 ‘모리스 오리우’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오리우(1856-1929)는 프랑스의 공법학자·사회학자로, 공법적 질서에 관한 법제사적 연구를 행하고, ‘제도 institution’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게 ‘제도’란 사회적 환경 속에서 법적으로 실현하고 지속하는 행위 혹은 기획의 관념으로, 권력에 의한 조직화와, 그 실현에 관심을 가진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국가’를 ‘제도의 제도 l’institution des institutions‘라고 정의합니다. 


아까 읽었던 곳에서 순수 규범주의자는 비인격적(unpersönlich)으로 규칙을 따라 사고하는 반면, 결정주의는 인격적 주체가 제반 사정을 고려한 다음에 ‘판정=결정 Entscheidung’을 관철하는 사고라는 식으로 대립시켰습니다. 이 대비는 알기 쉽네요. ‘규범주의’는 미리 정해진 규칙을 기계적으로 조합하여, 자동적으로 대답을 내는 그런 느낌이네요. 그에 반해 ‘결정주의’에서는 ‘판정’하는 주체의 인격이 전면에 나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제도적 사고는 ‘초인격적 überpersönlich’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초- über-’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개개인의 인격을 넘어선 ― 어떤 의미에서는 신 같은 것 ― 존재에 의한 《결정》이라는 뉘앙스를 내기 위해 이런 말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규범주의자가 그 타락형태에 있어서, 법을 단순한 국가적 관료제의 기능방식으로 만들고, 결정주의자가 항상 순간적 시점을 중시하고 그 어떤 커다란 정치운동에도 포함되어 있는 정적인 존재를 파악하려는 위험을 갖고 있는 반면, 고립적 제도적 사고는 주권 부재의 봉건적·신분적 성장인 다원주의에 이르게 된다. 이리하여 정치적 단위의 세 영역·세 요소 ― 국가·운동·국민 ― 이 법률적 사고의 세 유형에, 그 건전한 현상형태에 있어서도 타락한 현상형태에 있어서도, 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규범주의자가 스스로의 퇴락 속에서 법을 국가관료의 단순한 기능양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결단주의자는 순간순간에 사로잡힘으로써 언제나 거대한 정치운동에 휘말려 안정적으로 존립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는 반면, 고립된 제도적 사유는 주권을 지워 버리며, 봉건-신분제적 제도들 각각의 성장으로 인해 다원주의로 전락한다. 따라서 정치적 통일체의 세 가지 영역과 요소 ― 국가, 운동, 민족 ― 또한 그 건전한 현상형식에서도 퇴폐적인 현상형식에서도 세 가지 법률적 사유 유형에 귀속된다(10쪽).]



‘규범주의’와 ‘결정주의’가 각각 타락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상정하고 있네요. ‘규범주의’는 규범을 미리 정해진 방식으로 적용하는 태도니까, 타락하면 관료주의가 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네요. 관료가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을 품지 않고 정해진 것, 명령을 조용하게 실행할 뿐이라는 이미지와, ‘규범주의’에는 친화성이 있는 것 같네요. ‘결정주의’는 ‘결정’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마치 진공 속에서 ‘결정’이 이뤄진다는 듯한 사고방식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 없는 ‘정적’인 질서가 지속되고 있는 덕분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선적으로 될 우려가 있다. 


이것들에 반해, ‘제도적 사고’는 높이 평가되는 것 같지만, 이것도 ‘규범’이나 ‘결정’ 등의 요인이 없으면, 전근대적인 봉건제·신분제를 그대로 연장한 듯한, 다원주의에 빠진다고 합니다. 봉건제와 신분제에는 다양한 ‘제도’가 갖춰져 있었지만, 근대국가에서 보이는 통일적인 법체계는 없고 통일적인 결단주체=주권자도 없다. 즉, 통일이 결여되고, 다원주의적으로 되는 셈입니다.



슈미트의 삼위일체 사고 ― ‘국가 Staat’, ‘운동 Bewegung’, ‘민족 Volk’ 


슈미트는 이런 세 유형에, ‘국가 Staat’, ‘운동 Bewegung’, ‘민족 Volk’의 세 요소가 대응한다고 보는 것이네요. ‘국민’은 〈Nation〉의 번역어로 배정되는 경우가 많기에, 구별하기 위해서 〈Volk〉는 ‘민족’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앞에서 나카마사 마사키는 이를 ‘인민’으로 번역했음에 유의할 것]. 〈Nation〉은 정치적 자각, 동일성(identity) 의식을 공유하는 ― 어떤 의미에서 근대적인 ― 공동체입니다만, 〈Volk(민족)〉는 반드시 그런 자각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이나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예로부터의 《공동체》와 같은 뉘앙스를 동반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국가’는 법규범의 체계와 그것을 준수하는 관료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운동’이란 정치·사회적인 운동, 예를 들어 나치와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네요. ‘운동’은 대개의 경우, 인격적인 지도자에 의해 인솔되며, 다양한 국면에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결단’을 행하고, 그것에 의해 자신의 존재방식을 변용시킵니다. ‘민족’은 다양한 역사적·관습저인 ‘제도’를 따라 사고하지만 체계성이나 통일성을 결여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 가지는 본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20년대의 슈미트는 가치중립성에 몰두하며, 규범주의적으로 일을 처리하려 하는 관료적 국가의 폐쇄성을 타파하고자, ‘독재관+헌법의 수호자’로서의 대통령의 ‘결단’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규범주의 vs 결정주의]의 도식만으로 좋았습니다만, 30년대에 들어서면, 나치라는 ‘운동체’에, 질서 재생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되며, 또 다시 나치가 기반으로 하는 ‘민족’ 공동체에 본래 갖춰져 있을 터인 ‘구체적 질서’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여기서 ‘제도적 사고’ 혹은 ‘구체적 질서 사고’가 문제가 되며, 삼항도식이 되는 셈입니다. 공화국의 한 기관으로서의 대통령은 ‘결단’은 내리지만 반드시 ‘운동체’를 따르는 것은 아니며, 민족의 ‘구체적 질서’에 뿌리를 내려서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후, ‘국가’를 이끄는 ‘총통=지도자 Führer’가 된 히틀러는 ‘민족’을 재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운동체’를 이끌었습니다. ― 히틀러의 칭호인 〈Führer〉는 일본어로는 ‘총통’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본래의 의미는 ‘지도자’입니다. 슈미트의 삼위일체의 사고는 그가 나치로 경도됐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 

법규범의 체계와, 그것을 준수하는 관료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동 

정치·사회적인 운동, 예를 들어, 나치와 같은 것. 인격적인 지도자에 의해 인솔되며, 다양한 국면에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결단’을 행하며, 그것에 의해 자신의 존재방식을 변용시킨다. 

민족

다양한 역사적·관습적인 ‘제도’를 따라 사고하지만, 체계성이나 통일성을 결여한다. 




법의 ‘중립성’ 비판 


빌헬름 시대 및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 국가·법학설의, 이른바 실증주의 및 규범주의는 ― 자연법 또는 이성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단순히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규범들에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 타락했다. 따라서 내부 모순으로 가득 찬 규범주의이며, 그것에, 단순히, 법적으로 맹목적인, 참된 결정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의 규범력’에 의거하는 타락한 결정주의인 실증주의의 혼입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빌헬름 2세 시대와 바이마르 시대 독일 공법학의 이른바 실증주의와 규범주의는 하나의 퇴락 ― 자연법이나 이성법에 근거하기보다는 단순히 사실상 ‘유효한’ 규범을 추종하기 때문에 ― 한, 따라서 자기모순으로 가득 찬 규범주의일 뿐이며, 법에 대해 맹목적이며 진정한 결정 대신에 ‘사실들의 규범적 힘’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타락한 결단주의일 뿐인 실증주의와 결합되어 있다(10-11쪽).]



빌헬름 시대란 황제 빌헬름 2세(1859-1941)의 시대입니다. 빌헬름 2세가 즉위한 것은 1888년입니다만, 2년 후인 90년에, 그때까지 독일황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던 비스마르크(1815-98)를 해임하고, 스스로 정치를 하게 됐습니다. 90년부터 제1차 대전 말까지를 가리킵니다. 비스마르크가 다른 서구 열강과의 사이에서의 힘의 균형을 중시한 반면, 빌헬름 2세는 제국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영불과의 사이에서 긴장관계를 산출하며, 제1차 대전의 먼 원인을 만들어냅니다. 제국의 위신을 보여주는 건물이나 문화재가 많이 생산되고, 그것에 걸맞은 행동방식이 권장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모리 오가이(森鴎外, 1862-1922)가 소설 「그처럼(かのやうに)」(1921)에서 주인공의 눈을 통해 묘사한 것은 이 시대의 독일입니다. ― 오가이 자신이 독일에서 유학했던 것이 빌헬름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80년대 후반입니다. 


‘규범주의’와 나란히 언급된 ‘실증주의 Positivismus’란 ‘법실증주의 Rechtspostivismus’입니다. ‘실증주의’란 일반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만을 기초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발상을, 인문·사회학에서도 도입한 것입니다. 역사학, 심리학, 민족학, 사회학, 경제학 등에는 침투하기 쉬운 사고방식입니다. ‘법실증주의’는 조금 달라서, 추상적인 도덕 관념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제정된 법률이나 판례 등, ‘실정법 positives Recht’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정법주의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해석자의 도덕감정이나 주관을 섞지 않고, 실정법에만 기초를 두고 생각하려 하는 ‘(법)실증주의’는 미리 주어진 ‘법규범’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규범주의’와는 궁합이 잘 맞습니다. 빌헬름 시대나 바이마르 시대의 ‘국법학 Staatsrechtslehre’에서는 ‘실증주의 + 규범주의’가 지배적이었지만, 슈미트는 그것이 타락한 형태라고 말합니다. ― 다나카 씨 등은 〈Staatsrechtslehre〉를 ‘국가·법학설’로 번역합니다만, 독일계 법학에서는 국가의 기본적 법구조에 관한 법체계, 넓은 의미에서의 ‘헌법 Verfassungrecht’을 ‘국법 Staatsrecht’이라 부르기에, ‘국법학’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네요. 왜 타락하고 있는가 하면, ‘자연법’ 혹은 ‘이성법’에 관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현실적으로 “‘통용=타당하고 있는’ 규범들 ‘geltende’ Normen”에 의거하여 생각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법규범’이 ‘타당하고 있다 gelten’는 것은 무엇인지를 엄밀하게 정의하려고 하면 꽤 어렵습니다만, 이 경우는 단순하게 사회 속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 겁니다. 


즉,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법규범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려 하는 경향, 달리 말하면 단순히 현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국법학에서 지배적이게 되며, 그것은 타락하고 있다고 슈미트는 주장하는 셈입니다. “사실적인 것의 규범력 die ‘normative Kraft des Faktichen’”은 어려운 듯한 표현이지만,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이 그대로 ‘규범’으로서 버젓이 통용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는 루소나 흄(1711-76) 이후, ‘사실’에서 ‘규범’을 도출할 수 없다고 곳곳에서 말해집니다만, 법학자나 관리는 “실제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르다’고 자동적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슈미트는 그것을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결정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의 규범력’에 의거하는 타락한 결정주의인 실증주의”라는 표현이 조금 더 알기 어렵네요. “참된 결정 echte Entscheidung”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이비 결정이라는 것이죠. ‘법실증주의’는 사이비 결정주의라는 것입니다. 왜 사이비 결정이냐면, “사실로서 타당한 규범”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결정》을 하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정말은 “현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이나 감정에 근거하여 자의적으로 판단할지도 모르지만, ‘실증주의’적인 치장을 전면에 내고 그것을 속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타락한 “실증주의+규범주의”에는 어설픈 사이비 결정주의적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슈미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실증주의+규범주의”는 오늘날의 법철학에서는 “리걸리즘(legalism)”이라고 불리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현행법과 규칙을 따를 《뿐》입니다”라는 일견 객관적·중립적인 태도를 가장하면서 실제로는 그런 법들이나 규칙들의 배후에 있는 질서와 가치를 고집하는, 법률가나 법학자의 행태를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현행법을 지키려는 태도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입니다. 슈미트는, ‘결정’은 중요하지만 자신이 《결정》하고 있는 것을 숨기려 하는 “실증주의+규범주의”의 체질은 비판하는 것입니다. ‘결정’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처럼 슈미트는 법실증주의로 상징되는, ‘법’의 중립성의 치장을 비판하고 그 배후에 있는 가치관이나 결단을 겉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왜, 슈미트를 포스트모던 좌익이 좋아하는지 알 수 있네요. 포스트모던 좌익도 근대법과 시민사회적 도덕의 《중립성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 배후에 있는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슈미트와 비슷한 것입니다. 물론, 《중립성의 가면》을 부순 뒤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다릅니다. 포스트모던 좌파라면 그동안 억압되어 온 모든 ‘차이’를 생생하게 해방시키려 하겠지만, 슈미트는 오히려 독재자적인 주체를 최종심급으로 하는 질서, 구체적 질서를 재건하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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