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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1장 심청전과 ‘반인륜적’ 독서





이진경





1. <심청전>과 소설의 윤리


아버지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어린 자식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 없는 새우잡이배에 몸을 판다면, 그걸 효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자식이 있어, 그가 그리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자식이 그런다면, 정신차리라고 욕을 했을 것 같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자식의 죽음은 부모의 죽음 이상으로 큰 고통입니다. 부모가 먼저 죽는 것을 천붕(天崩)이라 하고,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을 참척(慘慽)이라 한다지요. 어느 것이나 큰 고통이지만,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은 것은 자연의 순리에 속하지만,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그에 반하기에 ‘쉽게’, 즉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것이야 윤리에 속하지만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것은 거의 동물적 본능에 속하기에, 그 상실의 고통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새끼 한 마리를 지키기 위해 어미들이 적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은 자연계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일이듯, 자식을 위해 몸을 바치는 부모는 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 반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자연계에서 그런 일은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심청전>이[각주:1] 묻는 것이 바로 이런 물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바다에 던져질 제물로 몸을 판다면, 그걸 효라고 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에는 이런 걸 효라며 권하던 책이 있긴 있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삼강행실도>가 그것입니다. 하층민을 ‘다스리기’ 위해 세종조에 만들어져 어느 책보다 많이 반복하여 인쇄되었으며, 읽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그림까지 친절하게 덧붙인 책입니다. 충성과 효행, 열행의 ‘삼강’을 가르치기 위해 이 책은 부모를 위해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 먹이거나 뼈를 고아드리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삶아 올리는 엽기적인 행위에서부터, 목숨을 바치는 극단적인 사례들까지 백여개의 얘기를 전하며 모범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습니다(강명관, 2002). 대개는 과장되거나 부풀려져 전승되었을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필경 목숨을 바치는 극단적 행위들은 소설을 쓰는 이나 읽는 이, 듣는 이로 하여금, 엽기적인 사태에 대해 무감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멀쩡한 정신을 가진 이라면 곤혹스러워할 것이 틀림없을, 효를 위해 목숨을 거는 저런 행위에 쉽게 동조하고 심지어 감동마저 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실은 반대일 겁니다. 삼강오륜의 도덕이라는 게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어서, 저런 극단적인 사례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기에, 엽기적이고 센세이셔널리즘적인 책을 만들었던 것일 겁니다.



삼강행실도 (출처: http://chd.museum.seoul.kr/chd/board/NR_boardView.do?bbsCd=1059&seq=20140408111858181)



저 끔찍한 책의 예들이 있다고 해도, 만약 자신에게 저런 사태가 닥쳐온다면 ‘무감각하게 감동’할 수 있을까요? 그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심청전>에서 딸이 몸을 팔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심봉사--사실 상당히 여러 면에서 ‘철없는 애비’로 그려지는 인물임에도--의 반응도 그러했습니다. 이는 세심하게 보아둘 필요가 있으므로, 좀 길게 인용하겠습니다.



“애고 애고 이게 웬 말인고? 못 가리라, 못 가리라. 네가 날더러 묻지도 않고 네 마음대로 간단 말이냐? 네가 살고 내가 눈을 뜨면 그는 마땅히 할 일이나, 자식 죽여 눈을 뜬들 그게 //차마 할 일이냐?...내 아무리 눈 어두우나 너를 눈으로 알고, 너의 어머니 죽은 뒤에 걱정 없이 살았더니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마라, 마라, 못하리라. 아내 죽고 자식 잃고 내 살아서 무엇하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자. 눈을 팔아 너를 살 터에[지언정] 너를 팔아 눈을 뜬들 무엇을 보고 눈을 뜨리?”(<심청전-완판본>, 정하영 역주, 『심청전』, 125)[각주:2]


심봉사만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 한 번 심청을 보았을 뿐인 장승상 댁 부인이 심청이 제물로 팔려 죽으러가는 얘기를 듣곤 황급히 불러다 눈물로 호소합니다.



“네 이 무상한[무정한] 사람아. 나는 너를 자식으로 알았는데 너는 나를 어미 같이 알지를 않는구나. 쌀 3백석에 몸이 팔려 죽으로 간다하니, 효성은 지극하다마는 그게 살아 세상에 있는 것만 같겠느냐? 나와 의논했다면 진작 주선해주었지. 쌀 3백석을 이제라도 다시 내어 줄 것이니 뱃사람들 도로 주고 당치 않은 말 다시는 [하지] 말라.”(127)


장승상댁 부인의 이러한 반응은 이미 심청도 한 번 생각해 본 것이었습니다. 공양미 삼백석을 몽은사에 보냈다는 말을 듣고 황당해하는 심봉사에게 둘러댄 게 바로 말이었습니다. “지금 형편으로는 공양미 3백석을 장만할 길이 전혀 없기로 이 사연을 노부인께 말씀드렸더니, 쌀 3백석을 내어주시기에 수양딸로 팔리기로 했습니다.”(117) 이는 장승상댁 부인에게 쌀 3백석을 충당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뜻할 뿐 아니라, 심청 자신도 그 가능성을 이미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심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안해서, 혹은 염치없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고, 눈 먼 부친의 삶이 걸린 문제인데, 미안하다는 것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이미 딸로 삼겠다며 강한 호의를 표시한 분 아닙니까? 아버지에게 3백석을 거기서 얻었다고 둘러대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미안함’이나 염치없음보다는, 그걸 말하지 않은 심청에게 서운해하며 “나는 너를 자식으로 알았는데, 너는 나를 어미 같이 알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장승상댁 부인이 말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눈먼 아비를 두고 죽으러 가는 사태 앞에서, 그런 미안함이나 염치없음 때문에 자신이 가능성을 생각해본 부탁을 감히 말 한 번 꺼내보지 못했다면, 지나쳐도 많이 지나치다 해야 하지 않을까요?


더욱 납득하기 힘든 것은 쌀 삼백섬을 마련해보겠다는 장승상 댁 부인의 제안을 심청이 일언지하에 거절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를 위해 공을 드릴 양이면 어찌 남의 명분 없는 재물을 바라며, 쌀 3백석을 도로 내어주면 뱃사람들 일이 낭패이니 그도 또한 어렵고, 남에게 몸을 허락하여 약속을 정한 뒤에 다시 약속을 어기[는 것은]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129) 그러나 여기서 쌀 삼백석은 명분 없이 재물이 결코 아니지요. 장승상댁 부인이 이미 나서서 주겠다 할 정도로 명분이 분명합니다. 뱃사람과 이미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어서, 목숨과 바꾸어야 하는 약속을 물려선 안된다는 말은 계약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근대의 상인들도 생각하기 쉬운 말은 아닙니다. 


물론 자기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게 할 만한 어떤 큰 대의를 위한 것이라면, 혹은 달관하여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청이 목숨을 걸 일은, 어떤 거창한 대의가 있는 일이 아니라 남경 선인들의 뱃길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목숨 걸만한 일이 아닙니다. ‘효’라는 대의가 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심청이 물에 빠져 죽는 건 효를 위한 게 아닙니다. 효를 위해 필요한 쌀을 얻기 위한 것이니, 다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면, 효라는 대의에서 벗어난다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심청이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인물도 결코 아닙니다. “심청이 그날부터 곰곰 생각하니, 눈 어두운 백발 아비 영 이별하고 죽을 일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열다섯 살에 죽을 일이 정신이 아득하고 일에도 뜻이 없어 식음을 전폐하고 근심으로 지”냅니다(119). 배꾼들을 따라 걸으면서 같이 바느질하던 이웃집 큰애기, 같이 그네 뛰며 놀던 건너집 작은애기 등의 동무들과의 헤어짐을 슬퍼합니다(133). 그리곤 바람에 날리는 꽃잎을 보며 그렇게 떨어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봄바람이 무심하다 그 누가 말하느냐.

만일 제가 무심타면 지는 꽃잎 왜 보내랴.

저 산에 지는 꽃잎, 지고 싶어 지랴마는

바람에 떨어지니 네 마음이 아니로다.

가엾어라 이내 청춘, 저 꽃과 같은지라

하릴없는 이내 신세, 그 누를 탓하리오.”(133)[각주:3]



임당수에서 몸을 던질 때도 그렇습니다. “심청이 죽는 일은 추호도 섧지 않”다며 아버지 눈을 뜨게 해달라고 마지막 기도를 하지만, 그 말과 달리 막상 뱃전에 나서자마자 “심청이 기가 막혀 뒤로 벌떡 주저 앉아 뱃전을 다시 잡고 기절하여 엎딘 양은 차마 다시 보시 못한 지경이었다”(151) 열다섯 살, 죽음을 달관하거나 목숨을 무릅쓰기엔 너무 어리고 젊은 꽃 같은 청춘 아닙니까! 


요컨대 심청은 피할 수도 있었을 죽음을 굳이 무릅쓸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죽음 앞에 의연하였기에 남의 신세를 지느니 차라리 죽자고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자신을 생각하나 눈 먼 부친을 생각하나, 죽기엔 너무나 안타깝고 애처로운 사연이 가득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면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장승상댁 부인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리도 안타깝고 그리도 두려운 죽음이라는 극단적 사태를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안타깝고 두려운 죽음을 왜 피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극단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효행을 과시하려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는 눈멀고 “늙으신 아버지를 홀로 두고 죽는 것이 불효인줄”(『심청전』, 보리, 72)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을 때나 되살아난 뒤에나, 자신이 죽은 뒤 홀로 된 부친의 곤경을 걱정하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이와 대응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죽는 것이 단순히 ‘효’라는 성격만 갖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셈입니다. 진정 ‘효’의 최대치를 위해서라면 죽지 않고 해결해야 합니다. 더구나 자신을 위해 자식이 몸을 팔아 죽는다는 사태에 기겁했던 부친의 심리적 부담감이나, 자식의 참척 앞에 고통스러워할 부친의 고통을 생각하면, 승상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몸을 팔아 죽으러 가겠다는 심청의 결단은 그게 정말 효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효인지 불효인지 말하기 어려운 식별불가능성이 출현합니다.



심청전 완역본(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http://blog.unikorea.go.kr/1623)



그렇다면 왜 심청은 이런 무리수를 두어가면서, 그 두려운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요? 죽음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삼강행실도>의 엽기적 가르침이 몸에 배인 것일까요? 그러나 그 가르침은 홀로 된 부친의 곤경을 비롯하여, 심청이 죽음으로 인해 야기될 복합적인 사태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을 가정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그게 아니면 도덕의 무조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라도 펼치려는 것일까요? 사실 칸트가 말했듯이, 규범이나 도덕적 명령은 언제나 ‘절대적’ 지위를 자처합니다. ‘정언명령’은 무조건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지, 조건이나 상황을 봐가면서 행할 것이 아닙니다. 조건을 봐가면서 행한다는 것은 ‘계산’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런 계산은 칸트가 보기엔 ‘도덕’ 내지 ‘윤리’에 속하지 않습니다. 조건이나 상황이 어렵더라도 무조건 해야 하는 것, 그게 도덕률의 본질입니다. “해야 하는 것인 한, 나는 할 수 있다(Ich kann, wenn ich soll).”  


그러나 효와 불효, 도덕적 행위와 비도덕적 행위가 식별불가능하게 된다면, 제아무리 칸트주의자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효인지 결정불가능한 상황에서, 도덕적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르고자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심청은 효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에 공양미와 바꾼 죽음을 결단한 게 아닙니다. 밉고 싫어도 부친이니 몸 바쳐야 하기에 죽으려는 게 아니라, 동냥젖부터 시작하여 애절하게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에 대한 애정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공양미를 구해보겠다는 것이지요. 죽음으로써 효성을 증명해야 하기에 죽는 게 아니라 몸을 파는 것 말고는 공양미 삼백석을 구할 길이 없기에 몸을 팔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모면하면서 공양미 삼백석을 구할 수 있다면 죽지 않으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죽지 않는 게 최대치의 효가 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최선의 효를 위해 살아서 공양미와 아비 봉양을 하는 걸 굳이 거부하고, 죽음으로 효를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시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심청은 왜 피할 수도 있었고, 효를 위해서라면 피하는 게 좋았을 자신의 죽음을 향해 고집스레 밀고나갔을까요? 아니, <심청전>은 왜 심청을 그런 방향으로 밀고 갔던 것일까요?







  1. 이하에서 <심청전>의 분석은 완판본을 중심으로 하며, 판소리본, 경판본 등을 필요에 따라 참조합니다. 고대민족문화연구소의 번역본(정하역 역주, 『심청전』)을 주로 인용하며, 필요에 따라 판소리본이나 다른 이본을 인용하겠습니다. [본문으로]
  2. 이 책은 이하에서 쪽수만 표시합니다. [본문으로]
  3. 이 부분은 시적인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보여 같은 내용을 시로 적은 『심청전』(보리, 2007), 79쪽에서 인용했습니다(이 책은 북한에서 출판한 것을 재간행한 것인데, 어느 판본인지 표시는 없으나 완판본과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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