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 비재현적 “감각존재”의 구축-2

수유너머웹진 2014.09.19 18:04 조회 수 : 3

 

비재현적 감각존재의 구축-2

 

 

 

 

하얀/수유너머N회원

 

 

들뢰즈 문학론의 중심에 마르셀 프루스트가 놓여 있다.

들뢰즈는 <철학의 사유>에서 감각 존재를 창안하는 자를 예술가라고 말하며

프루스트를 그 예로 들고 있다.

 

<비재현적 "감각존재"의 구축> 1편 보기 - http://nomadist.tistory.com/278 



3.감각 존재를 창안하는 방법론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3-1. 재현을 폐기하는 감각적 인상

  들뢰즈는 감각 존재를 창안한 자”(QP.240)로서 프루스트를 언급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감각의 논리에서도 언급되는데, 여기서도 그는 프루스트는 사실 너무 지적인추상적 문학을 원하지 않았고, 더욱이 어떤 스토리를 전개하기에 적합한 구상적, 삽화적, 서술적 문학도 원하지 않았다”(LS.81)고 말하며 재현적인 것들과 단절하기 위한 자신의 방법론을 구축한 자로서 제시된다. 그렇다면 프루스트는 어떻게 스스로 서는 감각 존재를 창안했는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입부에는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에 대한 유명한 구절이 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는 촛불을 끄자마자 즉시 눈이 감겨서 잠드는구나하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 시간 후,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각이라는 생각에 깨어난다.” 잠드는 과정이 30페이지 가량 펼쳐지고 있는 이 부분을 당시 출판업자는 이해할 수 없어했다. 하지만 꿈은 인상들이 산란하게 얽혀있는 기억이며,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와 상응한다.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는 이완과 수축의 리듬을 형성한다. , 혹은 가수면 상태에서 지성은 휴식을 하고 이완된 신체를 뚫고 인상들이 스며든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신체는 고정된 사물들에 의해 수축된다. 화자의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찾아지는 거대한 순환적 리듬이기도 하다.

  신체는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고정된 코드들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 형성되기를 강요받는다. 이러한 질서화된 코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베르뒤랭, 오데뜨, 빌파리지 부인, 게르망트 공작 부인 등의 계열로 이어지는 살롱이다. 이들 살롱에서 인물들은 부르주아지, 귀족, 예술가, 학자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속물근성을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살롱 내의 소통체계인 일정한 코드를 학습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게르망트 공작 부인에게서 예절이란 코드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의 예절이란 상황이나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각각의 상황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가문의 습관으로서 그들은 상황과 대상에 관계없이 살롱의 코드인 예절을 방사한다. 특히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에서 게르망트 공작의 태도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마르셀의 집에서 그를 손님으로 맞이하기를, 그래서 마르셀이 그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는 마르셀이 슬픔에 빠진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소개하지 않자 그들을 예절 따위를 습득하지 않은 괴이한 자로 판명한다.

  마르셀 역시 코드화된 미적 관념에 실제를 등치시키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스완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스완은 오데트를 처음 소개받았을 때만해도 그녀를 육체적 염오의 정을 일으키는 여인, 관능이 요구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타입의 여인으로 느낀다. 그가 오데트의 얼굴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두 볼에서 장밋빛 도는 산뜻한 광대뼈 언저리만을 떼어 마음속으로 그려야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오데트의 집에서 풀어헤친 머리채가 볼을 따라 흐르듯 늘어지게 내버려둔 채, 활기를 띠지 않았을 때에는 지치고 침울해 보이는 그 커다란 눈으로, 머리를 숙여 판화를 들여다보려고 힘들이지 않고 몸을 기울이기 위해서, 가볍게 춤을 추는 듯한 자세로 다리 하나를 구부리는 그녀의 모습”(RTP(2).56)이 시스티나 성당 벽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제트로의 딸 십보라의 모습과 동일함을 본다. 스완은 실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미적 관념을 실제에게 부착한다. 이는 오데트라는 실제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의 재현으로 오데트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만 실현될 뿐인 미적 관념이 실제에 부착되지 않을 경우 끊임없이 실망한다. 마르셀에게 라 베르마가 그러하다. 그는 라 베르마의 연극 무대에 관한 책들, 기사들을 통해 먼저 미적 관념을 선취한다. 하지만 연극 무대에 선 라 베르마를 보자마자 그는 실망한다. 관념과 실재는 언제나 이렇듯 어긋난다.

  사실 이런 구상적인, 코드화된 세계와 어떻게 단절할 것이가 하는 문제가 프루스트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이 첫 번째 문제는 관념과 실재의 어긋남이 어디서 발생하는가와 관련되어 단절의 지점을 찾게 된다. 관념과 실재를 끊임없이 어긋나게 하는 것은 범람하는 감각들과, 인상들에 의해서이다. 마르셀은 라 베르마의 연극을 다시 보면서 예전에 자신이 라 베르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방해했던 것들이라 생각한 감각적 인상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된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공통적인 관념을 갖는다. 하지만 그러한 공통 관념과 일치하지 않는 미지의 형태가 집요하게 어른거린다. 그것이 마르셀에게 라 베르마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이다. 정신은 기존의 미적 관념과 다른 어떤 형태의 날카로운 소리를, 기이하게 울어대는 가락을 듣게되며 그것이 아름다움이냐? 내가 느끼는 바가 감탄의 정이냐? 이게 빛깔의 풍요함이냐, 고귀함이냐, 힘이냐?”하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물음 앞에서 미지의 형태는 그 물음에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 신기한 질문의 가락, 모르는 인간에서 비롯하는 횡포한 인상, 빈틈없이 물질적이라서 그 안에 연기의 넓이를 위해 남아 있는 빈 자리가 조금도 없는 인상”(RTP(5).60)으로 응대한다.

  이 인상들은 기존의 미적 관념을 범람하기에 늘 우리를 실망시키고, 어떤 재난처럼 다가오지만 오히려 정신에 포착된 적 없기에 이름 붙여지지 않았던 이러한 감각적 인상들이야 말로 프루스트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개성적인 특질들이다. 그렇기에 프루스트는 재현적인 것들로부터 단절하고 감각 존재를 세우기 위해 먼저 물질적인 감각적 인상들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를 마르셀보다 선취한 예술가로서 화가 엘스티르가 등장하는데 그는 직접 감각한 것에서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떼어내려고(RTP(6).137)애쓰는 자이고, 그리하여 이러한 감각 구성물을 순간 속에 담아내는 자이다. 엘스티르의 예술론과는 별개로 이런 감각적 인상들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는 할머니의 죽음 장면에서도 돋보인다. 여기서 마르셀은 할머니의 죽음의 과정을 육체적 역동성으로 포착해내며 스러져 가는 육체 위에 미소만이 남는 형상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물질에서 일어나는 인상들이 프루스트의 재료들이며, 이는 정신의 관습적 관념을 넘어서는 일차적인 것이자 사실로서의 감각적 구성물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장 라신Jean Racine의 <페드르Phèdre>를 반복해서 본다.

이 반복 속에서 라 베르마(가상인물)라는 여배우로부터

관념 속 미로부터 벗어나는 감각적인 것의 출현을 마주하게 된다.

 

 

 3-2. 기억의 블록화

  두 번째로 프루스트는 감각적 구성물들이 재현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기억을 블록화한다. 기억을 블록화한다는 것은 유년의 기억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재 아이가 되어가는-생성들인 유년의 블록들을 통해”(QP.240)글을 쓰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어른 화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로 읽는 것은 다시금 예술을 하나의 재현으로서 취급하는 것이고, 그 작품이 생성하는 감각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르셀이 어머니와 입맞춤을 하기 위해 계속 애썼던 그 밤을 상기하는 것, 레오니 고모와 함께 먹었던 마들렌과 홍차를 상기하는 것은 유년 시절을 추억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러한 유년은 기억의 블록화를 통해 감각적 구성물들에 골조를 부여한다.

  프루스트가 집착하였고 탄생하도록 원하였던 것은 구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무런 구상적 기능도 없는 일종의 형상으로서, 이를 위해 그는 무의식적 기억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무의식적 기억이 과거를 삽화적으로 밝히거나 서술하는 의식적 기억과는 반대로 이 순수한 형상을 솟아나게 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LS.81) 기억을 블록화하는 방식인 무의식적 기억으로서 상기란 무엇인가.

  성인 화자인 마르셀은 흘러간 집의 옛 생활, 콩브레에 있는 대고모 댁, 발베크, 파리, 동시에르, 베네치아, 그 밖의 고장에서 생활을 회상하며 밤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조차 아리송할 때 추억souvenir이 구원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물 뿐 아니라 나라는 부동성과 그 부동성에 대한 확신은 우리 사고의 부동성 이며,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습관이 만들어낸 것이다. 오히려 사물이나 나는 불확실한 것들의 수면 위에 있다. 달리는 말을 구경하면서 영사기가 나타내 보이는 연속적인 자태를 실제로 분리해서 판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화자에게 기억mémoire 또는 기억을 한다는 것이란 연속적이고 확실한 것 아래서 일렁이는 불확실한 것들을 상기évocation해내는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무의식적으로 기억한다는 것, 상기는 “4차원의 현재를 만들어내는 일이고 망각으로 탈환되는 영토를 망각의 바다 속에 솟아올라 다시 지어지기”(RTP(1).97)를 기다리는 일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상기의 방식은 다시 두 가지로 세분화될 수 있다. 먼저는 마들렌과 홍차로 대표되는 인접성에 의한 상기의 방식이다. 화자는 어느 날 어머니가 주신 마들렌과 홍차를 마시게 된다. 이때 불현듯 그 물질적 대상은 화자에게 무상과 재앙, 짧음을 넘어선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 힘찬 기쁨(RTP(1).66)가져온다. 그리고 이 물질적 대상은 과거 콩브레의 유년과 관계되어 있다. 마들렌과 홍차는 레오니 고모가 주일날 아침이면 방에 찾아온 내게 내주었던 것이다.

이 기억은 커 버린 마르셀의 기억 밖의 기억이자 버려진 기억이 되었지만 마들렌과 홍차라는 물질의 감각, 냄새와 맛만은 연약하게, 그만큼 뿌리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 추억의 거대한 건축을, 다른 온갖 것의 폐허 위에, 환기하며, 기대하며, 희망하며, 거의 촉지되지 않는 냄새와 맛의 이슬 방울 위에 꿋꿋이 버”(RTP(1).69)티며 숨어 있다. 과거는 지성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물질적 대상 속, 그 감각 안에 숨어 있다가 우연적으로 다가와 펼쳐진다. 콩브레라는 미학적 형상은 성인의 어린아이-되기라는 감각적 생성의 응결이다. 이는 물질적 대상 속에 격리됨과 동시에 되기로서 펼쳐짐으로써 특유의 리듬을 갖는다.

  하지만 마들렌과 홍차라는 인접성에 의한 상기 방식은 늘 재현의 위험에 노출된다. 마들렌과 홍차의 예가 성인 화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처럼 빈번하게 읽히는 이유가 이러한 인접성의 상기 방식에 기인한다.

여기서 두 번째 상기의 방식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르와 콩브레가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아상블라쥬 방식의 상기라고 할 수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마르셀은 가수면 상태에서 동시에르의 아침을 떠올린다. 동시에르는 친구 생 루의 병영이 있는 곳인데, 한 해 전에 갔던 그곳의 인상들이 안개 속에서 펼쳐진다. 특이 이 안개 속에의 인상들 에서 혁대를 윤내고 있는 마치몰이꾼이 벽화에 나타난 인물처럼 돋아난다. 이런 동시에르의 아침은 거리로 나오면서 콩브레의 시기와 연결된다. 안개로 인해 가로등 빛이 약해서 지척이 분간이 안 되는 칠흑 같은 어둠은 언젠가 밤에 도착한 콩브레를 상기시킨다. 양립불가능한 기억이 상기되면서 그 둘은 자신의 집을 이루는 면들을 부수고 틀들은 결합된다. 이들은 어떤 인접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조의 돋아남과 안개의 결합이 일구어내는 공통된 리듬에 의해 연결된다. 이것을 우리는 더 깊은 인접성,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프루스트에게 이런 무의식적 기억, 상기의 두 가지 방식은 현재의 판에 박힌 기억에 칼자국을 내는 것이며, 그 사이로 하나의 빛이 스며드는 것이다. 이로써 프루스트는 버려져 있는 기억의 비가시적 시간의 힘들을 독자로 하여금 보게 만든다.

 

 

만  레이Man Ray가 찍은 프루스트

프루스트는 재현적인 것과 단절하기 위해

감각적 인상의 출현, 기억의 불록화, 무한 생성의 리토르넬로의 글쓰기를 수행한다.

 

 3-3. 무한 생성의 리토르넬로

  앞서 재현적인 것과 단절하기 위한 상기의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리듬에 대해 언급하고 지나간 바 있다. 하나는 마들렌과 홍차의 인접성의 상기에서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 다른 하나는 동시에르와 콩브레의 아상블라주식 상기에서 나타나는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었다. 재료들의 감각, 물질적 사물들의 감각을 넘어서서 이제 리듬들이 감각이 된다. 그리고 리듬은 각각의 미학적 형상물들의 공통의 일을 만들어내며 각각의 윤곽을, 집의 거주자로서 위치를 파기하기에 이른다.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이 아직 형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일이라면, 돋아남과 결합은 형상과 풍경(이는 세계이자 우주이다)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둘러싼 거대한 리듬 혹은 순환적 리듬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꿈과 꿈에서 깨어나기의 테마에서 나타나는 이완과 수축의 리듬이다.

  이 리듬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시간의 힘이기도 하다. 먼저 도취의 시간이 있다. 도취의 시간은 삶의 목적을 현재의 찰나적 행복에 두는 시간이다. 이 도취의 시간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발베크에서 취기 속 마르셀의 모습이다. 마르셀은 할머니와 함께 간 여행에서 낯선 호텔, 낯선 사람들, 낯선 방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긴장 상태에 있다. 그래서 그는 할머니의 보살핌 없이 그 공간을 견디질 못한다. 하지만 잠시 생 루와 술을 마시는 그 취기의 시간 동안 근심에서의 해방을 느낀다. “현재의 찰나에 밀착, 감각 이상의 확장을 못 갖고 감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목적밖에 없으므로, 현재의 찰나의 감각만이, 그 야릇한 힘, 그것이 가져다주는 희열속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이는 취한 시간 동안만 삶의 가치를 바꾸는 계수”(RTP(4).247)를 갖는다. 형상은 현재의 찰나 속에서 자신의 감각을 고립시키면서 오로지 그 안에서만 펼쳐짐, 즉 감각의 해방이 일어난다. 고립과 펼쳐짐의 리듬은 취기가 끝날 때까지만 형상 안에서만 일어나는 리듬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취의 시간은 충분히 감각적이지만 이 감각은 스스로 보존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두 번째 잃어버린 시간이 있다. 이 잃어버린 시간은 알베르틴과의 만남 속에서 포착된다. 발베크 바다에서 만났던 알베르틴이 파리의 마르셀의 집으로 찾아온다. 발베크에서 그의 입맞춤이 거절당한 이후로 처음 만남인데 마르셀은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만남에서 마르셀이 알베르틴과의 입맞춤에서 포착한 형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베르틴과 입맞추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마르셀에게 발베크의 인상들이 다가온다. “발베크에서의 우리의 생활의 온갖 추억, 창 밑에 부서지는 물결 소리, 어린이들의 고함이 일렁이며 알베르틴의 형상(머리칼, 두 볼, 눈과 볼 사이의 곡선)이 발베크의 거대한 풍경, 산맥과 봉우리, 골짜기가 된다. 비인간적 풍경 되기 속에서 형상은 비인간적 되기라는 감응을 촉발한다. 그리고 알베르틴이라는 형상은 풍경의 변화와 속도 속에서 열 사람의 알베르틴이 돋아난다. 이 형상과 풍경 사이에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 있다. 형상은 풍경-되기를 통해 풍경과 결합함과 동시에 더욱 그 형상은 돋아난다. 이때 돋아나는 형상은 구상적 형태가 아닌 변화하는, 비인간적인 것 되기로 변화하고, 생성되는 신체이다.

  이 시간은 형상과 풍경 사이의 생성의 리듬을 담지하고 있지만 마르셀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기도 하다. 이 돋아남과 결합의 리듬이 무한의 구도 속에서 수축과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이 리듬은 마르셀에게 잃어버린 시간이 되는 것이다.

마르셀은 지속적으로 소멸에 대한 힘을 느낀다. 하지만 한번은 죽음의 편에서이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때야만 이 힘은 오히려 생성의 편으로 탈취될 수 있다. 엄마가 함께 해주지 않는 콩브레의 밤과 발베크의 낯선 호텔에서 마르셀은 긴장하면서 잠들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오이디푸스적 인 것이 아니라 소멸에 대한 힘 때문이다. 그 힘이 마르셀을 짓누르는 것이다. 소멸은 소박하게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인간적 소멸에서부터,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등을 돌리거나 붕괴될지 모른다는 존재적 소멸에까지 이른다.

  마르셀의 할머니의 죽음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 존재적 소멸이 죽음의 편에서가 아닌 생성의 편으로 탈취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독증에 의한 증상들은 눈멈과 귀먹음은 차례로 다가와 할머니의 얼굴을 흔들어 놓는다. 할머니나 식구들은 이 힘을 외면하고자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듯, 여전히 들리고 보이는 듯 행동한다. 그녀는 죽음 직전까지 이 소멸의 힘 속에서 웅크린다. “침대 위에 몸을 반원형으로 구부리고, 할머니가 아닌 다른 인간, 그 머리털을 뒤집어쓰고, 그 시트에 누운 일종의 동물이, 헐떡거리며, 신음하며, 경련하며, 이불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RTP(6).37) 소멸의 힘에 의해 신체는 수축하면서 더욱 도드라지는 육체적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며, 동시에 숨결과 맥박은 이완 속에서 한 지류’, ‘새소리, 거대한 자연으로 이행한다. 그것은 고정된 의미의 말이 아니지만 말하고 싶은 것이 모조리 이와 같이 흘러나오듯, 참으로 장황하게, 열성 있게. 진심을 토로하여 우리한데 말하고 있는 듯하다”(RTP(6).45) 거대한 우주 속으로 스며든 형상이 표현하는 것은 바로 형상과 풍경을 통과하는, 거대한 이완과 수축의 리듬의 순수한 순환적 시간이다. 이 이완과 수축의 거대 리듬의 구도 속에 형상과 풍경이 소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소멸의 힘을 우리는 카오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익숙한 것들을 삼켜버리는 재난. 프루스트는 이 카오스와 대결한다. 그리고 그와 대결하기 위해 상기하는 것이며 글을 쓰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카오스를 통과해내야만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되찾은 시간, 혹은 새로운 세계는 이미 곁에 있는 세계로서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이다. 이 잃어버린 세계, 우연히 사물들·인상들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세계를 가시화하는 하는 것이 예술의 길이다. 프루스트에게서는 무의식적 기억, 인접성과 아상블라쥬라는 상기의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 감각적 인상들의 가시화가 이루어졌다. 예술은 카오스에서 탈취한 구도를 통해 동일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며, 그것은 이미 새로운 세계이다. 소멸조차도 생성의 편에서 힘으로 포착해내는 것, 그래서 소멸조차 우주적 생성의 무한으로 열리게 하는 세계를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주어준다. 할머니가 남긴 이 비인간적인 미소만이 되찾은 시간이며 대상이나 주체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서는 감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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