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무한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모험




최영철/수유너머N회





0. 무한


무한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철학에서 무한은 개별 존재들의 출발점(신) 이거나  목적(절대이성) 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무한개념 덕분에 혁명적인 지식체계를 일구어 냅니다. 과학과 철학 모두가 무한에 빚진 바 클 뿐만 아니라, 근대에 과학과 철학이 맺고 있던 관계의 양상도 이 개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한은 두 얼굴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얼굴 없는 괴물과 같은 것이어서 자신이 떠받치고 있던 지적 체계에 오히려 공격을 가해 와해시키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과학과 철학은 위기에 빠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사유를 위한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무한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 번 짚어 봅시다.  



1. 사유의 동반자, 과학과 철학


과학과 철학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이 둘은 서로 경쟁하는 앎의 방법일까요? 혹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거나 아니면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한 영역일까요? 근대 과학이 성립된 이래 철학은 과학의 성과들을 종합하여 일반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받아 들여졌습니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사물에 대한 앎을 종합하여, 이들을 관통하는 보편성에 도달하려는 메타과학의 위치에 철학을 놓는 것이지요. 그래서 철학은 자연스럽게도 형이상학 Meta-physics 인 것입니다. 이 때 과학과 철학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혁명을 가능하게 한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형이상학에 대한 신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대 시기의 형이상학은 무엇보다 존재(일반)론입니다.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자연의 질서를 보여주기 때문이며, 이 질서를 치밀하게 가동하는 경이로운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섭리(사물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과학의 이름 아래 수행된 작업들이고요. 본질적 섭리는 수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의 수학화는 근대 과학의 목표이자 성취였죠. 천체의 운행도, 자연의 변화도, 혈액의 순환도 수로 계량되고 법칙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의 철학자들이 물리학자이거나 수학자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뿐만 아닙니다. 인간사회도 수학적인 법칙으로 설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출생, 사망과 같은 생물학적 현상 뿐만 아니라 질병의 창궐, 범죄의 발생, 경제활동과 같은 사회적 현상들도 수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고 심지어 예측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연한 법칙성을 발견한 서구인들은 아마도 세세한 곳까지 미치고 있는 조화로운 섭리에 깊이 감동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물의 운행을 관장하는 보편적 원리의 발견을 향한 열망에 사로잡혔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과 정열이 있었기에 과학과 형이상학의 동반관계는 전혀 의심되지 않았습니다.  






2. 무한이라는 벼랑 끝


그러나 위기는 내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과학은 자신의 발전이 이룩한 성과에 의해, 자신의 완결성을 위해 도입한 개념에 의해 궁지에 몰리고 기반을 잃게 되었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등장은 고전 물리학이 사물의 본질이라 여겼던 것들, 가령 질량이라든가 시간, 공간과 같은 개념들이 고유하지도, 불변하지도 않다는 곤란한 사실을 우리의 사유가 대면하게 합니다. 수학은 무한(소)개념의 도입에 힘입어 미적분학을 통해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는 찬란한 성과를 얻었지만 이를 위해서 치명적인 댓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무한개념은 가져다 쓰기에 요긴하였지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무한소는 0인 동시에 0이 아니어야 했기 때문이죠. 또한 무한급수는 수학적 등식(=)이 무한에서는 동일한 것을 지칭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무한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려 하면 매번 서로 다른 이면들을 보여주거나 어두운 심연만을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이 모순을 접했을 때 사람들은 크게 낙심했을 것입니다. 과학적 신념이 무너지고 수학적 법칙화의  열정이 패배하는 고통을 맛보았을 겁니다. 무한집합의 농도를 계산함으로써 무한을 회피하지 않고 세어 보려는 기막힌 시도도 있었지만 이내 역설에 빠지고 맙니다. 엄밀하고 정연한 수학적 원리는 도무지 손에 쥘 수 없었고 오히려 온갖 역설들이 논리학과 수학을 뒤흔듭니다. 이제 수학의 확고함과 엄밀성에 기대었던 자연의 수학화라는 기획은 수학 자신의 역설들과 불완전성을 대면해야 했습니다. 자연과 자연의 수학화에는 자기동일적이지 않은 본질, 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들, 참이면서 거짓인 것들이 만연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위기는 한편에선 근대과학의 기반의 와해를, 다른 한편에선 형이상학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형이상학의 무한(자)은 우선은 신이었고 그 다음에는 절대이성이었다. 이들이 자기동일적이지도 않고 엄밀하지도 않다는 것은 과학에서 뿐만 아니라 근대의 형이상학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근대과학의 위기는 형이상학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양자간의 평온한 동반관계가 해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한은 근대 과학이 자초한 벼랑 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과 철학 양 편 모두에서 우리의 사유는 무한이라는 벼랑 앞에 주저 앉아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위기는 언제나 기회와 한 몸이죠. 무한의 도입은 확실히 처치 곤란한 괴물을 우리 사유에 끌어 들인 것이지만 이 괴물을 통해 우리는 사유의 새로운 문턱을 넘을 수 있는 도약대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무한이라는 묘연한 실체 앞에서 과학과 철학의 자리가 다시 지정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으며 과학과 철학의 관계도 새로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주체, 카오스의 폭풍 속에 사라지다


눈을 감고 카오스를 한 번 떠올려 봅시다. 암흑 속에서 우리의 시각 중추가 만들어낸 잔상들 너머로 카오스를 상상해 보세요. 잘 되나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엇을 떠올렸든 그것은 카오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카오스는 감각기관이 포착할 수 있는 형태로 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럼 카오스를 말로 설명하는 건 가능할까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카오스는 “무질서라기 보다는", 떠오르다가 이내 흩어져 버리는 “무한한 속도"라고. 카오스는 “무가 아니라", “모든 가능한 형태를 이끌어내는", “잠재태로서의 공백"이라고. 그렇다면 이런 카오스를 사유한다는 것은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답은 "예, 가능합니다" 가능할 뿐 아니라 이 카오스와 대적하는 것이 바로 사유이며, 카오스를 사유하는 서로 다른 형식이 과학과 철학입니다. 왜 갑자기 카오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나요? 그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카오스가 바로  "무한한’ 속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과학과 철학은 이런 무한과 대적하는 것이며 무한한 속도인 카오스에 하나의 구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카오스에 일관성의 구도를 설정하고 무한운동하는 일관된 개념들을 사유의 대상으로 합니다. 반면 과학은 지시관계의 구도를 설정하고 변수들간의 함수관계를 대상으로 합니다. 카오스를 절단하는 구도들, 카오스에 수립되는 구도들로 사유를 규정하는 것은 얼핏 봐도 참으로 신선합니다. 근대의 과학과 형이상학은 사유를 주체에 의한 대상의 인식이라고 전제합니다. 근대의 과학과 철학은 대상에 내재한 법칙성과 보편적 질서를 밝혀내는 주체의 신실하고 끈질긴 시도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의 모든 주체와 대상은 모두 유한한 존재입니다. 영원과 무한은 세계의 너머에서 가정되어야 하고 세계의 너머로부터 끌어들여져와야 비로소 유한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는 유한성에서 출발하여 무한성을 사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철학과 과학은 카오스에 던지는 구도, 카오스를 절단하는 구도 위에서 펼쳐집니다. 여기에는 사유를 "하는" 주체나 사유에 포착"되는" 대상이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무한한 속도인 카오스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무한성이 따로 도입되어서 유한성에 연결지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근대과학이, 그리고 형이상학이 주체(와 대상)들의 이질성, 복수성, 결정불가능성이라는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동일적인 유한한 존재들로부터 사유를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사유가 무한에 던져진 구도라면 사유는 더 이상 주체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4. 무한, 늘 우리 곁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사유의 형식들-철학, 과학, 예술-에 따라 무한과의 관계를 다르게 제시합니다. 철학은 개념들의 무한한 운동을 통해 무한성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카오스에 구도를 설정합니다. 반면 과학은 감속을 통해 무한성을 한정하고 그 한정 안에서 변수들간의 함수관계를 뽑아냅니다. 또한 철학과 과학은 카오스를 걸러내는 체로도 비유됩니다. 철학이라는 선별체는 카오스를 절단하면서 무한한 운동을 선별하는 무한한 개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선별체는 변수들이 속한 좌표계를 형성합니다. 좌표계는 유일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좌표계들의 연속이며 그런 점에서 하나의 지배적인 견해와 다릅니다. 또한 과학적 사유가 취하는 한정은 늘 무한과 직접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한계는 환영일 뿐입니다. 철학적인 사유는 섬광과 같은 무한한 운동들이 무한한 프랙탈을 이루며 구도 위에 펼쳐집니다. 철학적 사유의 운동은 무한한 변주의 무한한 반복이라는 점에서 무한한 반면 하나의 전일적인 구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카오스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와 형이상학 간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들에게 무한성은 유한성과 분리되어 저 너머에서 도입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무한성은 철학적인 사유가 취하는 구도와 개념들 자체이며, 과학적인 사유의 한정이 반드시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무한(정)입니다. 무한성은 항상 사유와 더불어 있으며 사유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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