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_1 개념은 사건이다

수유너머웹진 2014.04.09 06:10 조회 수 : 20

들뢰즈·가타리의 마지막 공동 저작,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은 학인들이 각 장의 내용들을 나름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1991년에 출간되자마자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고 하죠. 이 세상에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철학책이, 그것도 들뢰즈의 악명 높은 저작이 베스트셀러가 된다니 말이죠. 하지만 그의 복잡한 사유를 쫓아가다보면 새로운 두뇌가 생성되고 있다는 기묘한 고통과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들뢰즈는 이 책의 말미에서 ‘도래할 민중, 두뇌적-민중 카오스-민중’을 말하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 스스로가 철학자가 될 것을 요청고 있습니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책 제목에 비해 이 책의 구석구석은 들뢰즈가 새로운 사유를 촉구하는 선동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대체 철학자로 한평생을 살아온 들뢰즈에게 철학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이란 무엇인가] 첫번째



"개념"은 사건이다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은퇴한 철학자와 늦깍이 활동가


 


8년째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밀양 할머니들의 공식 데모가를 아시나요? 할머니들은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데모하기 딱! 좋은 나인데~’ 어느 트로트 가사를 개사한 이 노래를 부르면서 ‘딱’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아주 흡족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며 매일매일 송전탑을 막기 위해 산으로 올라갑니다. 

인생의 마지막, 시골장 5일째 어스름 저녁, 벌려놓은 좌판을 거둬들이듯 다 팔리지 못해 더 꼬질꼬질해 보이는 삶들을 주섬주섬 주워담아야 할 나이, 노년은 그런 나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아주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내 몸뚱아리 하나, 내 가족들 거둬먹이느라 주변을 돌볼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사는 동안 슬쩍 건성으로 넘어가버렸던 물음들이 몸에 들러붙어 남은 살점들을 자양분삼아 ‘지혜’가 생성되기도 합니다. 


송전탑 때문에 베어질 나무를 부둥켜 안고 울고, 전기에 힘들어하는 땅벌레들을 아파하는 나이가 된다는 것, 그리하여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삶과 죽음 사이의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 품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찰했다는 것만으로도 밀양 할매들은 프랑스의 괴팍한 철학자 들뢰즈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철학(philo-sophie)이란 그리스 말로 지혜의 친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철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후 노년에 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생의 아주 늦은 나이, 노년은 지고한 자유를 가져다주기에 이제야 비로소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사유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철학은 지식에 기대에 또 다른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이란 "하나의 사건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탈의 선을 따라 창조되는 개념

 


 

무언가를 사유하거나 창조한다는 것은 철학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이나 예술, 목공같은 기술 역시 각기 나름 대로의 사유를 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오직 ‘철학만이 개념을 창안하는 기예(art)’입니다. 이때 개념을 어떤 모형에 본떠 비슷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이란 개념들을 형성하고, 창안하고 만드는 기술(art)이다.”



오로지 철학만이 개념들을 창조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갖는다고 해서 철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특권이 부여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철학은 새로운 개념의 창조를 통해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이 과학이나 예술의 행위와 다르다고 한들, 철학은 어디에 쓸모가 있는 것일까요? 왜 개념들을 창조해야 하는 것일까요? 


평생 철학을 하다 할아버지가 된 들뢰즈는 다 늙어서 질문을 던집니다. 대체 철학이 무쓴 쓸모가 있는 것이지? ‘철학의 쓸모’를 묻다니! 철학이란 인간만이, 그것도 고도의 사유능력을 갈고닦은 소수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지혜의 향연이 아닌가! 누구나 할 수 없기에 고귀한 것이 아닌가! 어느 시인은 모든 고귀한 것은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고 했었죠. 쉽게 손에 닿을 수 없는 고귀함이야말로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들뢰즈는 ‘철학의 쓸모’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 중요한 물음은 이 책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노년의 철학자가 쓴 고루한 철학개론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게 하는, ‘도래할 민중’을 촉구하는 선언문으로 만들었습니다.

 

들뢰즈는 철학을 관조, 반성, 소통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사유를, 새로운 개념을 봉쇄한 철학자들의 행위와 단절하며 ‘개념들을 창안하는 기술’로서 철학을 정의합니다.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다는 것은 기존의 문제들과 단절해 새로운 문제를 품는 것이기에, 이로부터 새로운 감각들과 새로운 관계들을 창안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철학은 이미 정해진 진리를 향한 여행에 필요한 관조나 반성, 소통이 아니라 ‘부단한 탈선’의 행위입니다. 나침반이나 지도에 의지한 여행이 아니라 예정없는 이탈이며, 이때 창조되는 것은 개념입니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신적인 것에 대한 관조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의 개념이란 소통을 통한 보편개념의 추구이다.      헤겔은 반성을 통해 절대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가령 ‘존재’라는 개념은 철학사에서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가 ‘신’과 연결된 선을 이탈해 ‘생성’이라는 전혀 다른 개념과 함께 결합된다면 이 ‘존재’라는 개념은 존재에 대한 기존의 물음에서 이탈해 새로운 물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믈론 모든 개념은 무로부터 창조되는 것이 아니며,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특정한 어떤 개념은 특정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죠. 그런데 새로운 문제들에 따라 개념이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은 그 개념의 역사가 때론 ‘우회하며, 지그재그식으로 이어지는’ 역사, 차마 단일한 계보로 묶일 수 없는 역사라는 역설을 낳습니다. 다시말해 늘 기존의 개념에 대항해 모반을 꿈꾸는 역사만이 있는 것이죠. 


 

 

칸트의 코기토에서 시간을 빼도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나오지 않는다.

 

 

예를들어 데카르트의 ‘코기토’라는 개념을 생각해 봅시다.(노년의 들뢰즈는 친절하게도 예를 참 많이 들어줍니다. 물론 그 예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가 아니라는 점이 흠입니다만...)

데카르트의 유명한 정의, 아마 철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었을 법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봅시다. ‘나’ 즉 ‘자아’의 개념은 의심하다, 생각하다, 존재하다라는 세 개의 구성요소로 되어있습니다. ‘나’라는 개념은 세 개의 구성요소들을 통과하며, 세 구성요소가 응축되고, 일치되는 지점이 됩니다. ‘나’라는 개념은 이 세 구성요소들의 강도들이 교차하는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생각하다와 존재하다, 의심하다는 이제 ‘자아’라는 개념으로 응축되어 새로운 의미가 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아’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기존의 철학적 구도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기존의 전제들 위에서 사유를 전개한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구도하에서 물음을 던지고, 개념을 창안한 것입니다. 


데카르트에게 객관적인 그 무엇도 전제하는 않는 최초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코기토’입니다. 즉 코기토라는 개념은 증명되거나 추론되어야하는 명제가 아니라, 선(先)철학적인 개념, 사유 이전의 직관과도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다는 것은 이미 철학이전에 직관적으로 주어진 사유이미지를 새로운 구도 위에 구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나’ 혹은 ‘자아’와 같은 코기토의 전조가 되는 개념들이 철학사에 있어왔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어떤 개념에 구성요소 하나가 더 보태진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개념에 구성요소가 하나 더 보태진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개념은 산산히 부서지거나, 필시 다른 문제들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구도를 의미할지도 모를 완벽한 변화를 나타낼 것이다.”



아주 좋은 예로 칸트식의 코기토를 들 수 있겠네요. 칸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비판하며 ‘코기토’라는 개념에 또 하나의 구성요소를 도입합니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그토록 거부했던 ‘시간’이라는 요소입니다. 데카르트는 ‘코기토’라는 개념을 창안하면서 시간을 제거하여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을, 동일한 주체를 보증했습니다. 그런데 칸트가 ‘시간’이라는 요소를 ‘코기토’에 살짝 끼워넣는 순간 공간이라는 개념이 연쇄적으로 끼어들면서 공간, 시간, 나는 생각한다라는 세 개의 개념들이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하며 다른 개념들과의 새로운 연결들이 펼쳐지는 전혀 다른 구도가 생성되었습니다. 

칸트에 비해 데카르트의 개념이 불완전한 것일까요? 칸트가 하나의 개념을 창안했듯이 데카르트 역시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점점더 발전해가는 역사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의 개념이 그 이전의 것보다 ‘나은’것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들뢰즈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봅시다. 



“어떤 개념이 그 이전의 것보다 ‘나은’ 것이라면, 그 까닭은 그 개념이 마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고, 기발한 절단들을 행하며, 우리들 위를 비상하는 어떤  사건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전히 데카르트주의자, 칸트주의자를 자처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개념들이 우리들의 문제들 안에서 다시 활성화될 수 있고, 우리가 창조해야할 개념들에 영감을 불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념의 변주는 데카르트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이며, 그들의 개념들을 다시 부를 수 있는 권리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개념은 사건이다

 

개념이 하나의 사건이라고 했을 때, 이는 철학이라는 학문 내부의 사건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개념들은 전적으로 철학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 개념은 ‘사물들과 존재들의 새로운 사건을 세우는 것, 언제나 그것들에 새로운 사건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념은 ‘다가올 어떤 사건’의 윤곽을 미리 그리는 행위입니다. 맑스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다가올 사건을 미리 선언하는 행위이자 새로운, 도래할 혁명을 창안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사물들에서 다가올 어떤 사건을 추출해 해는 것, 그래서 새로운 사건을 세우는 것, 이것이 이 시대 철학의 고유한 역할이며 ‘철학의 쓸모’입니다. 

개념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사건을 재단하고 다시 재단합니다. 그래서 지나간 과거나 역사로서 사물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들로 다시 불러들입니다. 이것이 개념이 가지는 시대성이자 사물들에 새로운 사건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개념을 ‘순수한 사건’이라고 명명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지음, 현대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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