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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사건3] 우회-아낙시만드로스

수유너머웹진 2016.09.12 06:40 조회 수 : 104

 

해석과 사건 (3)

-  우회-아낙시만드로스  -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2) 우회 아낙시만드로스



나는 여기서 앞서 행한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해석을 바라보면서,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의 근원적인 경향을 재음미하고자 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선구적 해석은 하이데거의 논문과 저서로부터 비롯된다. 하이데거는 이런저런 텍스트들을 통해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데, 나는 이 중 몇몇 부분을 재해석함으로써, ‘해석사건이 고대철학 내에서 어떤 근원적이 의미를 함축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탐구작업은 말건넴의 사태를 해석하는 것이다.[각주:1] 하이데거가 문제 삼고 있는 잠언은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딜스 번역은 다음과 같다.


Woraus aber die Dinge das Enstehen haben, dahin geht ihr Vergehen nach der Notwendigkeit; denn sie zahlen eiander Strafe und Buβe für ihre Ruchlosigkeit nach der festgesetzen Zeit(DK12A9, B1).

(그러나 사물들은 자기가 생겨난 곳으로 필연적으로 사라져 간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자신이 저지른 해악에 대하여 정해진 시간에 따라 서로 벌을 받고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각주:2])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우선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잠언의 τχρεών이다. 이것은 필연으로 번역되는데, 이때 필연은 강제의 의미를 함축한다. 이 말은 단적으로 존재자 전체의 존재에 대한 앎으로부터, 실로 존재자의 존재가 그곳으로부터 자신이 출발하고 그리로 되돌아가는 그러한 것에 대한 앎에서 말해진다고 한다[각주:3]. 하이데거는 이 단어의 수수께끼같은 의미를 캐기 위해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다른 잠언에 기대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의 짤막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내 생각에 이 구절이야말로 지금의 우리 논의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상식적인 번역은 원리는 아페이론이다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것을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에 대한 통제는 한계의 거부이다라고 번역한다. 아페이론을 한계의 거부로 아르케를 통제로 본 것이다. 아르케의 가장 적합한 번역어가 통제라는 것은 이 논문의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 이 기본적인 의미 아래에 하이데거는 다시 출발점(Ausgang), 철저히 주재함(Durchwaltung), 영역(Bereich)”이라는 다른 의미들을 덧붙인다(Heidegger 1981:2012, 170:109)[각주:4]. 그러나 이러한 통제이자 출발점인 아르케는 그 뒤에 나오는 아페이론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받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무규정적인 것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또한 하이데거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페이론은 이때 거부로 해석된다. τὸ ἄπειρον은 통상적으로 해석되듯이 무한자라고 올바르게 번역될 수 있지만, 그것이 말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오히려 한계에 저항함이라고 옮길 수 있는데,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현존하는 것의 현존에만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페이론은 존재의 아르케가 되며, “τὸ ἄπειρον은 한정의 거부이고 오로지 존재에만, 그리스식으로 다시 말해서 현존에만 관련된다”(Ibid., 110:172). 여기서 하이데거는 겉보기에 역설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통제는 현존하는 것을 출발점, 철저히 주재함, 영역 안으로 순응시킨다(fügt). 통제는 우리가 즉각 존재자라고 부르며 또한 그렇게 불렀던 것을, 그것이 비로소 그 안에서야 그리고 오로지 그 안에서만 각기 그 존재자로 있게 되는 그것, 즉 존재에다 맞추어 통제한다. 통제는 존재 자체이며 통제는 πειρον, 한계의 거부이다(Die Verfügung ist das Sein selbst, und die Verfügung ist ἄπειρον, Verwehrung der Grenze).(Ibid., 111:172-73)

 

통제가 한계의 거부라는 것은 반대자들을 억지로 절충해 놓은 듯한 인상을 강하게 내비치지만, 하이데거는 이 논지를 끝까지 밀어 붙인다. 우선은 τὸ ἄπειρον에서 아페이론의 접두어 ‘ἄ’가 결여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곧장 존재의 결여를 의미하게 된다. 이 접두어는 하이데거에게 어쨌든 존재와 연관된다. “ἄπειρον에서 αρχή의 성격, 곧 통제의 성격을 갖는데, 그것도 오로지 존재, 곧 현존과 관련해서만 그러하다”(Ibid., 112:174). 오로지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강조는 그것이 생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아페이론을 존재에 결박시키고 난 후, 이것이 동일자로 회귀하는 과정을 밟아 나간다. 우선 이것은 “ἀρχή, 즉 본질 안으로의 순응(Ausgang der Fügung ins Wesen)”으로 취급된다(Ibid., 115:178). ‘거부는 이제 본질에 순응하면서 그러한 본질을 구제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존재 안에서 아르케와 아페이론은 하나의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제와 거부는 존재로서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다시 맨 처음의 잠언으로 돌아간다. 즉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그 움직임은 동일자로부터 현출하여 동일자 안으로 떠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출과 떠남은 반드시 강제적인 필연τχρεών을 따른다. 그래서 이 필연 자체가 동일자이다. 이러한 동일자, 곧 통제(ἀρχή), 이러한 동일자, πειρονχρεών, 곧 필연이자 강제하는 것이다”.(Ibid., 116:179) 아페이론은 아르케의 충만한 본질이며, 이것이 곧 크레온이고, 어떤 시원적인 것을 보존하는 것도 이로부터다.

 

강제적인 필연은 πειρον의 방식으로, 즉 최종적인 항존으로서의 모든 한정을 막는 저항으로서 현성한다. 모든 한계에 저항하는 방식의 통제로서 이러한 강제적인 필연은, 모든 현출함이 그로부터 나오고 모든 소거가 그리로 되돌아가는 동일자이니, 동일자로서의 그것 안에서 이행이, 다시 말해서 항존으로 전락하지 않는 본래적인 현존이 현성한다. (...)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은 존재를 말한다. 첫 번째 문장은 존재 자체를 동일자라고 명명하는 바, 모든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은 이 동일자의 통제 속에 있다.(Ibid., 117:180-81)

 

그렇다면 존재자의 출현은 이러한 강제적 필연으로 인한 현출과 소거(떠남) 속에 있게 되며, 존재 자체는 당연히 동일자여야 한다. 동일자가 존재 자체이다(Die Selbe ist das Sein selbst)”(Ibid., 117:184). 나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아낙시만드로스 잠언 해석에서 하나의 커다란 누락을 본다. 그것은 바로 생성의 문제다. 여기서 생성의 문제는 아페이론이 현출하고 소거되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이 운동은 존재의 확고부동성, 마치 일자와도 같은 위력 앞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만이 전일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통상적으로 취급되는 생성의 문제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대한 설명, 그리고 크레온에 대한 의미파악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론 안에서 그것을 충실하게 강박하고, 불러 세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존재에만 긴박된 채, 그 부동성만을 향유하기를 강요받는 아페이론이란 그 개념적 강도에 있어서 철저하다 하더라도, 그것의 풍부함이라는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형이상학』I권[Α])에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이런저런 저서들에 흩어져 있다. 사실 나의 이런 관점은 하이데거의 그것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자[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해 언제나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주 그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는 아낙시만드로스 안에서 무한자(the indeterminate)에 대한 아이디어, πρτη λη(제일 질료)의 예언자를 발견하려고 한다. ἀλλκαὶ ἐξ ντος γίγνεται πάντα, δυνάμει μέντοι ντος, ἐκ μὴ ὄντος δὲ ἐνεργείᾳ.(모든 사물들은 어떤 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어떤 것은, 잠재적으로 있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각주:5]


우선, 하이데거도 지적하다시피 아낙시만드로스는 형이상학1069b15에 가서야 논의된다[각주:6]. 그 부분은 가능태(잠재태)와 현실태를 논하는 부분인데, 아낙시만드로스 단독으로 논의 되지 않고, 엠페도클레스과 함께 논해진다. 선대의 철학자들을 빠짐없이 다루고자 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스승으로 전해지는 탈레스에 대해서는 그토록 소상하게 소개하는 데 반해 결코 그 비중이 덜하지 않은 아낙시만드로스를 해당 권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게다가 아낙시만드로스의 핵심개념인 아페이론(apeiron)은 여기서 관심에 들지도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경향은 자연학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아낙시만드로스가 단지 천체의 구성과 관련하여 지구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로 등장한다(DK12A26; 천체에 관하여II, 13. 295b10). 그리고 자연학에서는 대립자들(enantiotēs)이 하나 속에 있다가 거기서 분리되어 나온다고 주장한 철학자로 소개된다(DK12A16; I, 4. 187a12). 혹시 다른 자연철학자들을 질료인의 탐구자들로 파악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작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대해서는 질료인이라는 규정을 내리기가 저어했던 것이 아닐까? 아페이론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자연학의 해당 부분(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그대로 형이상학에 실린다)에서는 우선 아페이론을 물체’(soma)로 놓고, 그것이 결코 하나이거나 단순한 것일 리가 없다고 말한다(DK12A16, 자연학III. 4. 204b22). 여기서 하나도 아니고 단순함도 아니라는 규정은 원리’(archē)와의 상당히 심대한 대비다. 그는 원리를 형이상학V(Δ)의 맨 처음에 다루면서, 그것이 운동과 인식(), 생성첫 출처”(최초의 운동, κινηθείη πρτον)라고 논하는데, 이러한 첫 출처로 그는 φύσις, στοιχεον, διάνοια, προαίρεσις, οσία, τοὗ ἕνεκα라는 여섯 후보를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다(1013a20)[각주:7]. 이것들은 모두 하나이자 단순한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자연학을 살펴보면, 그는 아페이론이 원소’(요소, στοιχεον)와는 다른 것이라고 논한다. 오히려 그것은 그로부터 원소들이 생겨나는 어떤 것이다(DK12A16;자연학III, 4, 204b22). 또 다른 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로 모든 것이 근원이거나 아니면 근원에서 나왔고, 무한정한 것의 근원은 없다. [무한정한 것의 근원이 있다면] 그것이 무한정한 것의 한계(peras)가 될 테니까. 게다가 그것[무한정한 것]은 일종의 근원이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생겨난 것은 끝을 가질 수밖에 없고, 모든 소멸에도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한 것처럼 이것[무한정자]의 근원은 없다. 오히려 그것이 다른 것들의 [근원]이며, 모든 것을 포함하고(periecein)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kybernan)으로 생각된다. 무한정한 것 이외의 다른 원인들(aitia), 예컨대 지성(nous)이나 사랑(philia)과 같은 것들을 설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것은 신적인 것(theion)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낙시만드로스와 대부분의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사멸하지 않고(athanaton) 파괴되지 않기(anōlethron) 때문이다[각주:8].


따라서, 아페이론의 근원(원리, archē)은 없다. 그것은 근원의 근원으로서 모든 원리와 원소들을 포함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불어 신적인 것이다[각주:9]. 헬라스인들에게 신적인 것이란 언설할 수 없는 것, 그것을 넘어선 신성한 것을 의미한다. 빌라모비츠(Wilamowitz)에 따르면 헬라스인들에게는 모든 소중한 것들, 즉 덕 중의 덕(arethē)은 바로 신적인 것이다. 아페이론은 사멸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그것, 신성한 어떤 근원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법칙은 한정(peras)를 가져야 하며, 아르케로서 원리와 원소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연 이러한 아페이론의 특성을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알아챘음에 틀림없다. 즉 아페이론은 그가 학문의 정식’(logos)으로 설정하고자 한 아르케의 범역을 벗어나는 신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요한 것은 로고스(정의, definition). 아르케를 벗어나는 아페이론은 그래서 이 로고스 안에 정위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아르케가 인식의 첫 출처라고 한 부분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이자 단순한 것으로서의 아르케는 다름 아니라 인식의 첫 출처이며 이는 인식할 수 없는 것, 즉 아르케가 아닌 것을 배제한다. 그것은 어떤 것들은 안에 내재하고 어떤 것들은 밖에 있다”(1013a20). 이는 바로 원인’(aition)으로 가는 문턱이다. 다름 아니라 4원인 중 내재인과 외재인이 나누어지기 때문이다.[각주:10] 그리고 이러한 원인으로서의 원리야말로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된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페이론 해석은 아르케를 경유하여 원인으로 동질화되는 아페이론, 로고스로 규정될 수 있는 무규정자만을 수용하는 그 환원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보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그것에 더 가깝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아페이론에게서 생성의 의미를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나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작업이 아페이론을 동일자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시공간의 거리 어디쯤에 방치하는 것에 가깝다고 여긴다. 그리고 뒤에 말하겠지만, 방치된 일련의 사건은 그의 형이상학에서 가능태’(잠재태)라는 얼룩(흔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우는 이와는 상당히 상이하다. 플라톤은 이 무규정적인 질료로서의 아페이론을 적어도 그의 티마이오스에서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에게서 아페이론은 직접적으로 (하이데거와 유사하게) ‘필연’(anankē)과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이 연결, 즉 아페이론과 아낭케의 연결은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연관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정의(로고스)에서 어떤 흔적(잔여)으로 끈덕지게 남는다[각주:11].


플라톤은 우선 물리적 원인들(, , , 공기)부차 원인’(synaitia)으로 놓는 것에서 시작한다(티마이오스46c[각주:12]). 원인으로서의 권능을 가지지만 이 원인들은 이성(logos)이나 지성(정신, nous)을 가지지 못한다. 이것들은 마땅히 영혼(psychē)라고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46d). 이렇게 영혼에 의해 생기는 원인은 일차적 원인이며, 필연적 원인은 이차적 원인이 된다. 원인의 이중성은 사실 매우 특이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원인은 그것의 단일성과 단순성에 의해 정의되며, 4원인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차원인은 가능태에 속하는 특징이다. 어쨌든 부차원인은 어떤 무질서한 일들의 원인인 바, 주로 물질적인 것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정신(nous)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부차원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원인인 한, 정신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일차원인이 정신과 더불어 지혜(phronēsis)를 갖추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신은 이 두 원인을 모두 추구하되 물질적인 이차원인은 부수적으로만 추구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차원인은 선(agathon)과 미(kalon)의 편에서 지혜에 의해 찾아지는 비물체적인(asomata, incorporeal) 것이며, 이차원인은 물질적인(somata, coporeal) 것으로서 플라톤 선분의 체계 안에서 감각적인 것(aistheton)과 모상(eikon) 이마쥬(eidolon)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각주:13] 우주의 구성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것의 결합이다. “우주의 탄생은 필연과 지성의 결합에 의해 혼합된 결과라는 것이다(47c). 이때 필연(ananke)은 지성의 설득에 의해 승복하며, 이로써 전체’(to pan)가 구성된다. 그리고 플라톤은 세 번째 종류의 원인을 이야기 한다.


이는 일체 생성(genesis)의 수용자(hypodochē)인 것으로 이를테면 유모(tithēnē)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 그것은 이것이나 저것이란 표현을, 그리고 그것들을 불변의 것들로 있는 것으로 나타내는 하고 많은 표현(phasis)을 기다려 주지 않고 피해버[립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것들을 별개의 것들(hekasia)로 말해서는 안 되고, 각각의 경우에도 그 모두의 경우에도 언제나 유사한 것으로서 반복해서 나타나는(periphenomenon) 이와 같은 것(toiouton)’이라는 식으로 불러야만 합니다. (...) 무슨 성질의 것이든 간에, 그게 뜨거운 것이거나 흰 것 혹은 대립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건 간에, 그리고 대립되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도, 그 낱말들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그걸 부르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49a~50a, ‘[ ]’는 인용자 보충).

 

플라톤은 이 필연적인 것에 대해서 이름 붙이기를 어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인용문에서 파르메니데스를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일이다. 그리고서 그는 반복되는 현상의 세계와는 달리 필연은 그 모든 것의 수용자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유비적인 지칭일 뿐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변화되지 않는 동일자이기도 하지만, 단지 이름으로 그렇게 불릴 뿐이고, 모든 것의 새김바탕(ekmageion)으로서 거기 수용되는 것들에 의해 변동도 하게 되고 모양도 다양하게 갖게 되어, 그것들로 인해 그때마다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50b~50c)[각주:14]. 이렇게 해서 이제 플라톤은 생성의 세 가지 기반에 대해 말하게 된다. 생성되는 것, 그리고 이 생성되는 것이 그 안에서 생성하게 되는 곳인 것, 그리고 또한 생성되는 것이 태어남에 있어서 닮게 되는 대상이 그것이며, 이는 각각 창조물(자연, physis), 어머니, 아버지로 지칭된다(50d).


하지만 이 수용자는 지성에 의해서도 가장 포착하기 힘든 것이며, 이에 따라 지성의 포획에도 좀체 걸려들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것은 질료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aoraton) 형태도 없는(amorphon) 종류의 것이다(51a)[각주:15]. 그래서 이런 종류의 것은 참된 설명(logos)을 동반하는 일차원인과 이차원인과는 달리 설득에 의해 바뀌지 않는 것이다(51e). 그러므로 플라톤의 설명에서는 일차원인과 이차원인이 정신(지성)에 따라 설득당하거나, 또는 설득하는 요소라면, 수용자는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는 똑같은 상태로 있는 형상”(영혼, 이데아-일차원인)이며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은 것이고, 지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52a). 그리고 두 번째 것은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고 생성되는 것이며, 언제나 운동하는 것이요, 그리고 어떤 장소(topos)에서 생성되었다가 다시 거기에서 소멸하는 것이며, 감각적 지각(aisthēsis)을 동반하는 판단(의견: doxa)에 의해 포착되는 것”(설득되는 필연-이차원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공간(chora)의 종류로서, [자신의] 소멸은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생성을 갖는 모든 것에 자리(hedra)를 제공한다(52b). 하지만 이것은 감각적 지각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서출적 추론’(logismos tis nothos)에 의해 포착되며, 믿음(pistis)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설득되지 않는 필연-이름붙여질 수 없는 원인[각주:16]). 그리고 이 세 번째 원인은 앞서의 의견의 대상을 이루었던 모상이 아니라, 영상(환영, phantasma)이라고 불린다(52c). 여기서 판타스마, 또는 판타스마타(phantasmata)는 일종의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 플라톤이 소피스테스편에서 말했던 바, 바로 그것이다.[각주:17] 여기 매우 중요한 논점이 있는데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 플라톤은 이들 세 가지 요건들을 원인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이때 플라톤은 어떤 존재자의 존재나 생성의 원인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원인 자체의 생성을 사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원인의 원인, 아르케의 아르케 또는 가장 심원한 생성의 지대, 사유불가능성의 그 지대에 사유를 맞세우고 있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앞서 말한 판타스마가 질료적이지만,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서출적 추론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플라톤에 따르면, “존재(ousia)에 매달려 있게 되거나, 아니면 그것이 전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거나 한다.” 모상의 근거이면서, 그것에 속하지 않고, 판타스마로 머물러 있으면서, 존재이기도 하며 비존재이기도 한 이것. 도대체 이것은 어떤 식으로 사유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도대체가 해석의 지평을 벗어나는 것인가


플라톤은 이러한 설명 뒤에 곧장 우주생성의 과정을 묘사한다. 그런데 최초의 우주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는 ’(dynamis)를 설정한다. 이 힘은 앞서 무규정적인 것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 자신의 힘(dynamis)에서 벗어나는 일이 전혀 없다는 식으로 드러난 것이다(50b). 그렇다면 우주의 시초 상태는 이 힘의 덩어리였다는 것이며, 이후 평형을 이루고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 힘은 사실 운동의 힘이다. 다시 말해, 무규정적인 것이 가진 운동의 힘은 앞서 판타스마를 언제나 운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 것에도 맞아 떨어진다. 이렇게 운동의 힘으로서의 무규정자는 그 자체가 운동을 하게됨으로써,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한데 엮고,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을 가른다(53a). 사실 여기서부터 한정(peras)이 시작되며, 그 주체는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또한 비례(logos)도 없고 척도(metron)도 없는 상태에서 질서(taxis)로 옮겨 가는 데에는 흔적들’(ichnē)의 역할도 존재한다.[각주:18] 데미우르고스는 이 흔적을 통해 우주를 그것이 있었던 바 자연(physis)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플라톤이 그 자신의 우주생성의 시초, 즉 아르케를 무규정적인 것들의 운동-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운동-힘은 마침내 조화롭게 되고 질서를 갖추게 되지만, 끝내 설득당하지 않는 것이 있어, 단적인 무규정자로 남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단적인 무규정자를 물, , 공기, 흙에 해당하는 물리적 필연성과 달리 한층 더 시원적인 원리들로 놓고, 그것은 , 그리고 사람들 중 신의 사랑을 받게 되는 이에게나 그 지식이 허용되는 것이라고 마무리한다(53d). 


다시 본래의 논의로 돌아오자.[각주:19] 우선 나는 플라톤의 무규정자가 어쩌면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과 유사하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논의의 방향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이 어떤 사건성을 함축하는지를 해석해 가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도 아페이론은 질서(taxis)를 거스르는 것이었으며, “한정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섣부른 유비를 경계하도록 하자. 우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유사성을 가지는지부터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이 가지는 그 존재론적 의미가 어떤 사건성을 가지는지를 밝혀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의 개념과 일정한 거리를 형성하는 듯처럼 보이는 보다 유사한 두 항, 즉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설명과 이해로 다가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힘(dynamis)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는 곳은 형이상학IX(Θ)이다. 여기서 그가 다루는 δυνάμις는 직접적으로 가능태또는 잠재태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아리스토텔레스가 1047b4에서 분명히 논하고 있다시피, 이 단어를 가능성과 구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가능성은 지금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지만 미래에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참이다. 하지만 잠재태 또는 가능태로서의 뒤나미스는 어떤 불가능성에 있어서도 분명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각선 측정의 경우]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따라 나올 것인데, 왜냐하면 대각선의 측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거짓과 불가능한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가능한 것은 참과 거짓의 차원과는 다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러한 결론이 지식에만 해당되지 않고 존재에 해당된다는 것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가능태(잠재태)를 논하게 되는 배경에는 운동변화에 대한 존재론적인 근거에 대한 요구가 놓여 있다. W. 로스가 언급했다시피, 논의가 진전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본질로서의 질료-형상 구조에서, 사물들이 상대적으로 형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형상을 갖춘 상태로 나아가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현실태란 표현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변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혀 B가 아닌 A가 갑자기 B가 되는 것은 아니다. A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B임의 조건들이 얼마간 그 안에 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A는 결코 B가 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잠재태 개념 없이는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각주:20]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들을 도입한 것이다.[각주:21]


이렇게 해서 뒤나미스는 현실태’(energeia)와 더불어 생성-변화를 설명하는 한 쌍의 개념이 되며, 거기에 완전태’(entelecheia)가 부가됨으로써, 생성의 목적’(telos)을 완비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완전태라는 목적인적인 원리가 아니라, 뒤나미스가 어떻게 에네르게이아로 현출하는가다. 여기서 뒤나미스의 가능태적인 힘-역능의 문제가 등장하며, 그것이 현행화’(actualisation)라는 또 다른 문제와 엮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앞서 로스가 단순한 본질이라고 표현한 그 질료-형상의 구조가 파르메니데스적 해석지평을 뛰어 넘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존재는 어떤 단일하고 유일한 연속체가 아닌 것이다. 이런 뒤나미스의 역능을 설명하는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뒤나미스 중] 어떤 것은 수동적 작용의 능력(hē tou paschein dynamis)인데, 이것은 수동적인 주체 자체 안에 있는, 다른 것에 의해서나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일어나는 수동적 변화의 원리이다. 또 어떤 것은 악화나 소멸을 향한 수동적 변화를 겪지 않음의 상태[수동적 수용력-저항력][이다.] (...) 또한 이런 뜻에서 능력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단순한 능동적 작용[의 능력](hē tou poiein dynamis)이 있고, 그런 작용이 잘 이루어지는 경우의 능력[능동적 수용의 능력]이 있[.] 능동적 작용과 수동적 작용의 능력은 하나이지만 (...) 다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그 하나는 수동적인 주체 안에 있다. (...) 그런 수동적인 주체는 변화를 겪고, 이는 저마다 다른 것의 작용에 의해서 일어난다. (...) 다른 능력은 능동적인 주체 안에 있으니, 예컨대 열기와 건축술이 그런데, 앞의 것은 열을 낳는 것 안에 있고, 뒤의 것은 건축가 안에 있다(1046a11~27, 번호와 ‘[ ]’와 강조는 인용자). 


다시 말해 뒤나미스는 작용력과 수용력(또는 저항력)이라는 두 측면에서 각각 수동성과 능동성을 가진다. 그것은 그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역량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중 작용력의 측면에서 수동적 작용력과 능동적 작용력은 각각 수동적 주체와 능동적 주체를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고 있는 뒤나미스의 특징은 다른 어떤 철학자들의 설명보다 더 분명하다. 이러한 논의를 플라톤의 논의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둘의 유사성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플라톤의 무규정적인 것이 운동-이라고 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형상과 질료(물질적인 것)와는 다른 것이며, 스스로 흔들려서’(역능을 발휘하여) 조화를 찾아 간다. 그런데 플라톤에게 이것은 수용자이며 수동성을 겪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능동성은 플라톤에게 무규정성이 규정성을 얻는 과정, 즉 무질서(ataxia)가 질서(taxia)가 되는 과정이며, 이때 비존재(mē on)는 존재(on)로 변화된다.[각주:22] 어째서 이것이 비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플라톤은 존재의 원인이 아니라 이 원인의 원인을 살피고 있으며, 그렇다면 존재와 대척점에 놓인 비존재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인다(하지만 이것은 가 아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변화와 생성을 뒤나미스와 에네르게이아 그리고 엔텔레케이아를 통해 규명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시간성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그랬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자연(physis)의 생성은 바로 우주의 조화와 질서였기 때문이며, 그것이 운동-을 근거로 이루어진다면, 여기에 시간은 관건적인 사항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성은 어떤 것인가? 현재로서 나는, ‘시간이란 미결정적이라는 것만을 밝혀 두고자 한다. 나는 이 논문의 후반부에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 도식은 플라톤의 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적합하다고 판정되는 수준에서 배치한 것으로서 단지 가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이 도식을 살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나미스가 각각의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규정 안에서 수용력과 작용력을 행사하고, 이 역능이 진행됨에 따라 현실태로서 에네르게이아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에네르게이아와 현행적(actual) 과정은 뒤나미스의 능동성이 최고조가 되면서 존재자의 꼴이 갖추어지는 질료-형상적인 개별적 실체가 형성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 현실태로서 실체화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완전태를 지향하는 것이고, 또는 잠재적(virtual)인 어떤 것이 됨으로써 점점 더 어떤 조화의 상태로 드러난다는 것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드러난 상태의 존재는 어떤 개별적 실체로서 물리적 법칙, 즉 자연학의 로고스를 따라 운행하는 천체로서 비로소 위계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리법칙으로 정립되는 로고스는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이차원인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 즉 무규정자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체계 내에서 뒤나미스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은 뒤나미스의 역동적 체계 내에서 무규정적 요소는 사실상 주체 이전의 수동성즉 수용력의 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이 근접한 사유 구도 내에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어떤 위치를 점하는 것인가? 다시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 해석으로 돌아오도록 하자. [3회차 끝]


  1. 그런데 이것은 실제 역사적 방향과는 그 순서가 다른데, 이렇게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조언을 받아들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상가들 사이에 의존성과 영향력을 추적한다는 것은 사유의 오해이다. 모든 사상가는 존재의 말 건넴(Zuspruch)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의존성의 범위가 현혹하는 영향력의 자유를 결정한다. (...) 우리 후대인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을 숙고하기에 앞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을 회상하면서 사유해야만 했다. 그때에 비로소 한 사상가의 철학은 존재에 관한 이론이었고 다른 사상가의 철학은 생성에 관한 이론이었다고 하는 오해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Martin Heidegger, Holzwege, Gesamtausgabe 5, Klostermann, 1977, pp. 369-70. : 하이데거, 신상희 옮김,『숲길』, 나남출판, 2010, p. 543.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숙고하기에 앞서’가 가지는 그 연대기적인 순서가 아니라, 앞서 언급된 ‘의존성과 영향력을 추적’하는 것의 오해 측면, 그리고 사상가들의 ‘말 건넴’이다. 다시 말해,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단순한 연대기적인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고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의 말 건넴’이라는 측면에서 살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낙시만드로스가 이 둘의 ‘선배’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이 우리에게 뒤늦게 도착한 것이 다른 두 사람의 철학자를 결정적으로 ‘근거짓게’ 한다. 즉 보다 근본적으로 말 건네게 한다. 우선 그러한 ‘말건넴’은 서양 사유에서 가장 오래된 잠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이 잠언의 문헌학적 가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 해석으로부터 ‘해석과 사건’의 요건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논문의 앞 절들에서 진행되는 번역에 대한 논의와 철학사적인 회고는 단지 참고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2. 국역은 앞 주에서 언급된 신상희 번역판을 따른다. [본문으로]
  3. Martin Heidegger, Grundbegriffe, Gesamtausgabe, 51, Klostermann, 1981, p. 106 : 하이데거 지음, 박찬국, 설민 옮김『근본개념들』, 길 2012[이하 Heidegger 1981:2012], p. 166하이데거 책의 인용쪽수는 독어본을 앞에, 국역본을 뒤에 쓴다. [본문으로]
  4. 하이데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1. 현출과 소거를 선행적으로 주재하는 출발점(Vorauswaltender Ausgang des Hervorgangs und der Entgängnis). 2. 현출이 소거로 이행함을 철저히 주재하는 규정(Durchwaltende Bestimmung des Übergangs des Hervorgangs zur Entgängnis). 3. 출발점이면서 철저히 주재하는 개시된 영역을 열린 채로 견지함(Offenhalten des eröffneten Bereiches ausgänglichen Durchwaltens)”(Ibid., 109:170) [본문으로]
  5. Martin Heidegger, Basic Concepts of Ancient Philosophy, trans. Richard Rojcewicz, Indiana University Press, 2008, p. 45. 하이데거가 인용한 『형이상학』의 해당 부분은 그 자체로 놓고 보았을 때에도 아낙시만드로스 단독의 중요성을 논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뒤에 논한다. [본문으로]
  6. 사실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해 제대로 다루어졌어야 할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선대 자연철학자들의 평가하는 A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낙시만드로스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본문으로]
  7. 해당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διὸ ἥ τε φύσις ἀρχὴ καὶ τὸ στοιχεῖον καὶ ἡ διάνοια καὶ ἡ προαίρεσις καὶ οὐσία καὶ τὸ οὗ ἕνεκα; Hence "nature" is a beginning, and so is "element" and "understanding" and "choice" and "essence" and "final cause" [본문으로]
  8. 『자연학』III. 4. 203b6 [본문으로]
  9. 희랍인들에게 theos는 서술적 기능을 가진다. “말하자면 희랍인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이나 유대인들이 하듯, 먼저 신의 존재를 단언한 다음, ‘신은 선하다’, ‘신은 사랑이다’라는 등의 말을 함으로써 신의 속성을 열거하기 시작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삶이나 자연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즐거움이나 두려움을 주는 것들에 의해서 몹시 감화를 받거나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되면, ‘이것은 신이다’라든가 또는 ‘저것은 신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희랍인은 ‘사랑은 theos이다’, 즉 ‘하나의 신이다’라고 말한다”(Guthrie 2000, 24-25). [본문으로]
  10. 거칠게 말하면 질료인과 형상인은 내재인이요, 작용인과 목적인은 외재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예외를 포함한다. 즉 상대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11.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필연’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a) 보조원인: 그것 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는 것. (b) 그것 없이는 좋은 것이 있거나 생겨날 수 없는 것이나 또는 나쁜 것을 없애거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2) 강제하는 것과 강제, 충동이나 선택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 설득해도 바꿀 수 없는 것. (3)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없는 것, 논증. 어떤 경우 ①다른 것이 그것들을 필연적이게 하는 원인인 반면, 어떤 것들의 경우에는 그 원인이 결코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②그것들 때문에 다른 것들이 필연적으로 있게 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이자 주도적인 뜻에서 필연적인 것은 단순한 것이다. 따라서 영원하고 운동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강제적인 것도, 본성에 어긋나는 것도 없다(1015a19-1015b11). 여기서 플라톤의 경우와 유사한 정의는 바로 (2)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정의들도 플라톤의 영향이 엿보인다. 특히 ‘보조원인’은 플라톤의 ‘서출적 원인’과 동일하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아낭케는 질료적 바탕이며, 이것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적인 사유구도를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아낭케에 대한 정의에서 아페이론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본문으로]
  12. 아래 본문 중 괄호 안의 쪽수는 『티마이오스』스테파누스 쪽수이다. 번역은 박종현 판을 따랐다. 플라톤 지음, 박종현, 김영균 옮김, 『티마이오스』, 서광사, 2000. [본문으로]
  13. 그러나, 여기서 이마쥬(eidolon)의 위상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후 시뮬라크르와 매우 가까운 특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감각으로부터도 지성으로부터도 알려지지 않는 어떤 것이며, 그 자체로 물체적인 특성을 가지기 떄문이다. 나는 이 eidolon이 사유 이전도 또 그 이후도 아니며, 감각도 지각도 아닌 어떤 것, 또는 에피큐로스의 원자와 같은 것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루어질 것이다. [본문으로]
  14. 하지만 동일자는 플라톤 우주론의 근간이며, 이후 이 수용자는 스스로가 동일자로서만 머물진 않지만, 동일자로 환원된다. [본문으로]
  15. 나는 여기서 어떤 사유이미지의 전환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청각’에서 ‘시각’으로의 전환이다. 앞서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청각적 실재, 즉 ‘들리거나 말해지는 것’이었다면 이제 플라톤에게서는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데아의 시각 기원을 비롯하여) 따로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본문으로]
  16. 플라톤의 이 사유구도가 앞서 논한 파르메니데스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있어서도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것은 비존재에 근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17.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후반부에서 소피스트들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모순을 만드는 기술에서, 위장하는 기술에서, 믿음에 의존하는 기술에서 나온 모사자 그리고 유사닮음을 만드는 종족에서, 모상 제작술에서 나와서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을 제작하는 부분 그리고 말로써 볼거리를 만드는 부분으로 구분된 자”(268c-d). 이 중 ‘유사닮음’을 만드는 모상제작술은 직접적으로 모상이 가상을 산출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여기서 ‘가상’이 바로 phantasma며, 이것은 모상과는 또 다른 것으로서 ‘모사술’의 핵심이다. 소피스트적 모사술은 이 phantasma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신랄해질 수 있다. 이런 점이 바로 소크라테스적 산파술이나 변증술과 차이를 형성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소피스트들은 ‘본질’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것의 ‘쓰임’에 관심이 있을 뿐이고, 어떤 것의 동일성보다, 차이에 관심이 있다. 이에 대해 커퍼드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시사점을 준다. “그[프로디코스]는 ‘x가 무엇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 x는 y와 다르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접근을 단지 ‘x가 무엇이냐?’고 묻는 소크라테스의 접근과 구별되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핵심적인 것들에서 그는 통상적으로 단지 ‘x가 무엇이냐?’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선행자로 남는다 (...) 그들 모두에 있어서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에 있었다. (...) 소크라테스도 동일한 길을 가긴 하지만 그가 ‘x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가 찾고 있는 것의 오노마 또는 이름이 보통은 하나의 단어로 찾아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일련의 단어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공식, 또는 로고스 또는 정의일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죠지 커퍼드George Kerferd 지음, 김남두 옮김, 『소피스트 운동』, 아카넷 2003[이하 Kerferd 2003], pp. 124-25. [본문으로]
  18. 마찬가지로, 해석에 있어서도 어떤 비례도 척도도 없는 그 상태가 도래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시간의 도래, 아니 시간 자체가 혼돈에 휩싸인 그런 무한정성의 도래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해석주체는 어떤 ‘흔적’을 통해 해석에 도달할 것인가? [본문으로]
  19. 나는 여기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아페이론이 하이데거의 그것과 어떻게 차이 나는지 만을 다루기 위해 이들을 사유하고자 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이데거를 우회하여 아낙시만드로스의 주제를 살피고, 그 와중에 다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우회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해석과 사건이라는 큰 주제에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살피는 것이었다(해석학적 우회). 더 나아가 이것은 앞서 논해졌던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철학에까지 소급되어, 이들에게 있어서 해석과 사건의 의미조차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본문으로]
  20. W. D. Ross 지음, 김진성 옮김, 『아리스토텔레스-그의 저술과 사상에 관한 총설』, 누멘, 2012. p. 228. [본문으로]
  21.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변화’와 ‘생성’과 ‘운동’이 구분된다. 우선 뒤나미스는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운동(kinēsis)과 변화(metabole)의 원리”로 정의된다(1019a14). 여기서 ‘다른 것’과 ‘다른 것인 한에서 자기 안에 있는 것’이란 운동과 변화의 원리로서 그 운동과 변화의 주체 안에 내재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라, 잠재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의미로 새겨야 한다. 따라서 이때 뒤나미스는 ‘생성’(genesis) 자체이자, 그것의 작용주체(agent)라 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것이 ‘주체’라고 새겨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주체는 하나의 생성자체로서 실체적 성격을 잃어버린다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본문으로]
  22. 주의해야 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mē on을 분명 가능태와 관련짓는다는 점이다. 뒤의 구절들에서는 이러한 가능태로서의 ‘있지 않음’이 언젠가는 존재할 것이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생성의 차원에서 이 ‘있지 않음’은 어떤 경로를 거쳐 나가는 ‘존재의 심도’ 또는 ‘정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energeia는 mē on과 함께 이해되어야 그 개념적 함축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ouk on과의 구별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그것의 비존재적 함축이 더 강하다. 이 me on와 ouk on의 구분은 플라톤 『파르메니데스』의 162a-b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들뢰즈는 여기 주목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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