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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사건1] 왜 사건의 철학이며 해석의 철학인가?

수유너머웹진 2016.08.08 10:54 조회 수 : 59

해석과 사건

-왜 사건의 철학이며 해석의 철학인가?-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코너소개>

본 코너에서는 서양철학의 두 개념, ‘해석사건을 철학사와 존재론의 차원에서 성찰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자는 현대철학자인 들뢰즈(G. Deleuze)와 리쾨르(P. Ricoeur)의 논의를 중심으로 서양철학 전반의 중요한 철학자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두 철학자의 비교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낯설지는 않지만, 분명히 표명되지는 않은 철학적 결론으로 향해 가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필자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론을 구성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야심"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겠지요? 꽤나 긴 글이 될 것이기 때문에 목차를 먼저 밝혀 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서론

 왜 사건의 철학이며 해석의 철학인가?

 기초질문들의 존재론적 의의

 

A. 예비적 고찰

 I. ‘해석사건의 통시적 맥락

   1. 카오스, 뮈토스, 로고스

   2.고대 자연철학에서 해석과 사건의 원초적 과정

    1)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2) 우회-아낙시만드로스

    3)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

    1) ‘해석의 신화적 연원

    2) 이 두 철학자에게서 해석사건

    3) HermaSēmata 해석과 사건의 안팎

 

II. 해석과 사건의 공시적 적용 -올랭피아

   1. 현상학적 접근

   2. ‘홀림

   3. 기계론, 결정론, 목적론의 문제

 

B. 주체성의 해체와 사건

 III. 주체와 타자의 해석학

   1. ‘코기토’ - 주체화 양식

    1) 들뢰즈, 주체성의 전복

    2) 리쾨르의 코기토 비판

   2. 데카르트적 양식의 균열들

    1)방법서설- 삼중의 질서

    2)정념론1의지와 정념의 전쟁터

   3. 타자의 왜상(歪像): 프루스트

[보론 1] 들뢰즈에게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란 무엇인가?


 IV. 흩어진 주체와 응시

   1. 동일성의 포기와 대체

   2. ‘자기의 해석학수동적 초월

    1) 자기성과 자체성, 타자

    2) 수동적 초월

   3. 들뢰즈의 타자’-응시와 설명, 함축 

 

V. 사건과 의미의 발생

  1. 사건에서 의미로-리쾨르의 경우

   1) 담화의 사건, 텍스트의 세계성

   2) 은유로서의 사건-의미

   3) 오류들로부터 세 번째 소격화로

   4) 설명과 이해, 텍스트와 행동

  2. 의미에서 사건으로-들뢰즈의 경우

   1) 루이스 캐럴과 스토아

   2) 명제들과 사건들

   3) 사건의 개념

  3. 이 장의 결론-긴장과 울림

[보론 2]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VI. 해석학적 순환과 강도의 장

   1. 해석학적 순환의 존재론

    1) 해석학적 잔여의 두 가지 의미

    2)자기성의 심화, 강한 타자성

   2. 지시의 평면, 일관성의 평면, 내재성의 평면: 하나의 삶[생명] .

    1) 내재성과 잠재성

    2) 내재성의 평면을 채우는 개념들, 카오스의 단면들

   3. 강도의 장과 기호들

    1) 이중인과-재현과 강도

    2) 강도로서의 사건과 시뮬라크르: 흔적과 징후

    3) 강도장에서 감각존재로

 

C. 시간성

 VII. 해석의 시간, 사건의 시간

   1. 해석의 시간

    1)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불협화음과 화음

    2) 미메시스

    3) 리쾨르의 프루스트

   2. 사건의 시간

    1) 들뢰즈의 프루스트

    2) 은유와 상징

    3) 폭력의 토포스-첫 번째 공현존

   3. 모나드(monad)

    1) 세 겹의 토포스

    2) 시간선의 중첩과 왜곡-개체화에서 종별화로

    3) ‘침묵의 시간-두 번째 공현존

 

결론

   최초의 세 질문에 대하여

  카오스모스-세 번째 공현존





서론 



왜 사건의 철학이며 해석의 철학인가?

어째서 이러한 주제, 사건과 해석이 중요한가? 기획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 의문은 더 가중된다. 왜냐하면 들뢰즈와 리쾨르의 철학이 각각 사건해석이라는 주제 안에서 조망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철학사 전반에 이르기까지 확대하는 것은 사전에 이 주제의 역사적, 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장의 철학사적 고찰 내에서 일정부분 그 정당성이 확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철학사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 즉 어떤 원리들이나 원인들(4원인) 안에서 사유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삼는다는 독단적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철학사적 탐구 이전에 이 두 개념에 대한 일정한 철학적 가공, 즉 가장 상식적인 측면에서부터 시작하여 근원적인 것에까지 이르는 그러한 사유의 작업이 불가피하다.

먼저 사건또는 사건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사건’(événement)은 우선 그것의 일상적 사태 안에서 이해될 때, 수다한 어떤 발생들, 또는 그 발생들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우연적 근거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발생의 최초 지점을 지정할 때마다 그것의 필연적인 근거가 사상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정’(지칭, désignation) 자체는 찰나의 사건에 의해 지정의 기능을 금세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사유하는 주체는 그 수다한 발생들과 우연에 불과한 근거들을 맥락없이 수용하는 것으로 전락하며, 결국에는 사건의 발생과 사유의 이런 무감각함이 하나의 불분명한 덩어리로 뒤섞이게 된다. 사실 이러한 뒤섞임은 어떤 심오한 카오스적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일들’(affaires)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태도’(attitude) 없이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일상적 사태 안에서 이해되는 수다한 발생으로서의 사건은 단순하게 일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사유하고자 하는 사건에 대해 질문을 구성하자면 다음과 같이 된다. 즉, 사건이 일들인 한에서의 사건’(événement inquantum affaires)이 아니라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événement inquantum événement)이 되는 사태는 어떤 것인가? 그런데 이 질문은 그 자체 안에 이미 사건의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어떤 사태’(état de chose) 안에서 자신의 특이한(singulaire) 조건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사태 안에서의 특이성(sigularité)이라고 하는 성격이 우리에게 드러난다. 여기서 특이성은 일들 가운데 발생하는 사건들의 평범성과는 달리 사태 자체를 매듭짓거나, 아니면 사태에 어떤 해결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것이 어떤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역사’(탐구, historie)[각주:1]란 그것이 사태 안에서 단독적으로 행해지거나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상적으로만 해석되고, 망각 이전의 과정을 통해 기념비적으로 회상(réminiscence)됨으로써 다시 일상적 사태로 전락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은 그 현상적 사태 안에서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근거를 통해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일신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지금 사유하고자 하는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일상적 사태나 역사적 사건 둘 모두를 회피한다. 비록 그것이 어떤 순간에 일상적 사태와 역사적 사태 둘 모두로 변형된다 하더라도 그 급진적(radical, 뿌리까지 닿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사건의 철학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사건은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세계나 삶과 유리되지는 않지만, 그것의 소박함과는 거리(distance)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거리는 어떤 파열(rupture)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건의 본래면목이 일상이나 역사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것과 단절되어 있다는 부정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절합(articulation)되어 있다는 실증성(적극성, positivité)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리는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은 사태나 역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사유상의 거리가 곧 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거리가 사유 안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거리는 사유와 공간, 그리고 시간을 모두 변수로 놓고 계산(logos)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며, 결국에는 그 계산 자체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는 지점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석(interprétation)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해석은 그래서 인간-주체의 사유방식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실존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여기서 사유와 공간, 시간의 변수는 그것 각각이 서로에게 벡터적인 힘점으로 기능함으로써 삼항을 결정하는 사건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거리는 바로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며, 사유와 시간, 공간은 그것의 구성요건이라 할 수 있다.[각주:2] 그렇다면, 이러한 일차적인 특성을 가지는 사건이란 도대체 철학에 의해 탐구되지 않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그것이 합당하게 사건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어떤 이의가 제기될 것인가?

 

이제 이로부터 해석의 철학에 대한 질문은 미리 단서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앞서 해석이 드러난 맥락은 사건을 철학 안에 정위하면서부터다. 그렇다면 해석은 우선 그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의 측면은 처음부터 소극적으로 머문다. 왜냐하면 해석의 기능이라는 것이 단지 사건의 철학을 그 과정 안에서 구성하는 도구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하등 실존의 근거로 등장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해석 없이도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철학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인간의 삶과 역사는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그 조건 하에서 사태와 더불어 존재한다. 그리고 사건은 그 본래적 의미가 거리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고, 양식화된(습관화된) 일상은 이 거리에 의해 규정되며, 이 규정성은 적극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사유와 시간, 공간의 벡터가 구성하는 힘들의 소멸에 직면하여, 어떤 긍정적인 삶의 양식(습관)도 문화와 문명도 창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실과 배치된다. 그러므로 해석은 그것의 도구적 측면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측면에서 인간과 세계를 뿌리에서부터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건의 철학은 해석에 의해 그 본래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며, 그 의미획득의 매순간마다 해석은 사건의 철학에서의 그 철학과 마찬가지로 철학, 즉 해석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해석과정 자체가 의미를 통해 해석의 철학을 하나의 사건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해석은 사건의 철학에서의 그 철학과는 다른 부박하고, 도구적이며, 기술적인 작업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한 해석은 뿌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에 이어 또 다른 질문이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표현하는 구성요소들은 해석의 철학에서 어떻게 의미를 획득하는가? 이것은 또한 다음의 질문을 도출한다. 해석의 철학은 의미획득의 과정에서 어떻게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가?

 

기초질문들의 존재론적 의의

돌이켜 보자. 지금까지 나온 질문들은 어떤 결론의 형태로 제시되었지만 그것이 각각 차지하고 있는 지층은 다르다.


 

사건이 일들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 사태는 어떤 것인가?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표현하는 구성요소들은 해석의 철학에서 어떻게 의미를 획득하는가?

해석의 철학은 의미획득의 과정에서 어떻게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가?



나는 지금 당장 이 질문들에 대한 확고한 증명들을 내놓을 수 없다. 1에 대해서는 예비적으로 그 증명이 어떤 사유의 처지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만 밝혔을 뿐이고 23은 이제 막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구는 장이 거듭되면서 명확해질 것이고, 결론에 이르러서야 어떤 제대로된 형태로 제시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이 질문들의 계열은 어떤 중차대한 존재론적 상황을 예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지적될 수 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지금까지 존재론은 단지 존재인 한에서의 존재’(ens inquantum ens)에만 심혈을 기울여 왔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이 이러한 주류 경향에 반기를 들었고, 현대철학에서는 니체의 재발견(하이데거, 들뢰즈)과 더불어 회고적이지만 강력한 사유 이미지들을 통해 생성의 철학 또는 사건의 철학이 발굴되어 왔지만, 그것을 명징하게 표명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면 과도한 해석인가? 이러한 명징한 표명이 아주 사소하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한 시대 전체의 사유의 광맥을 탐사하고 그것에 어떤 명명작업을 하는 것이 그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는 없어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철학사는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두 번째로 해석의 철학이 이제야 지향의 초점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건들 간을 오가는 이 헤르메스신의 모습은 이런저런 잡다한 사태들을 엮어내는 자가 아니다. 그는 오직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에 발을 디디고 다른 사건의 고원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 자다. 그럼으로써, 헤르메스 자신이 바로 그 고원 안에서 중차대한 사건’, 바로 사건 중의 사건이 되는 것이며, 그 고원들의 숲 안으로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왜 사건의 철학이며 해석의 철학인지는 분명해 보인다. 즉 철학이 태생적으로 삶의 덧없음(aei metaballontōn)에 어떤 적극적인 형상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라면[각주:3], 사건은 이러한 삶의 가장 거대한 적수이자 가장 훌륭한 친구일 것이며, 그러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철학이 직면한 자신의 임무 중의 임무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사건의 철학과 해석의 철학이 철학 안에서 나란히 왕관을 쓰는 것이 불합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이두왕정이란 언제든지 서로를 살육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이 이상을 서론에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너무 빠른 길을 가는 것은 해석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해석학적 전통은 지름길 보다 에움길, 직행보다는 우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음 장에서 서론의 논의를 기반으로 철학사를 우회할 것이다. 이러한 우회는 해석의 철학과 사건의 철학이 철학사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살피는 기회가 된다.

 

 

A. 예비적 고찰

 I. ‘해석사건의 통시적 맥락[각주:4]

   1. 카오스, 뮈토스, 로고스[각주:5]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을 특징짓는 말은 자연철학’(philosophie naturelle)이다. 여기서 자연(natur)이란 생성’(gensis, génération)이라는 공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자연은 신성하다.[각주:6] 그래서 자연철학의 생성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표상[각주:7]으로 상정되기보다, 어떤 비시간적인 특성과 더불어, 원질(원리, archē)의 기원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비시간성이란 시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그러한 원질이 탄생하는(phyomai) ‘분위기또는 오케아노스 강 저편의 세상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신화적인 관점에서 탄생, 즉 자연이란 그와 같은 표상 이전의 어떤 혼돈(Chaos)[각주:8]이며, 그것이 겨우 표상되었을 때에는 크로노스라는 의인화된 이미지로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의 생성이란 기원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의 운동을 하기에 이르는데, 이때에야 시기구분이 등장하게 된다.[각주:9] 비시간적인 자연은 순수한 질료(matiére, hylē)로서의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 힘이 바로 자연의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신조차 극복불가능한 이 힘을 헬라인들은 모이라(moira)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모이라라는 이름은 이라는 그 뜻 그대로 어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미지를 수반한다. 그렇다면 자연의 힘으로 귀속되는 이 이름은 처음부터 헬라인들의 폴리스 즉 정체(政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베르낭(Jean-Pierre Vernant)이 올바르게 지적한 대로 아테네인들은 원질(archē)이 가지는 제왕적인 지위를 그들의 왕(basilēus)의 권한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왕정의 원리(archē)가 어디서 유래하는지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운 기원신화 외에 다른 설명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혼란에 코스모스(cosmos)를 가져다 주었고, 헬라인들의 관념은 이제 하나의 질서지워진 몫으로서의 모이라와 대립하여 과거의 혼란스러웠고, 고통스러웠던 왕정에서의 노예적인 처지로서의 휘브리스(hybris)를 회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정 내에서는 아킬레우스의 지도와 종용에 의한 강제전투가 아니라, 시민군들의 자발적 무장에 의한 영광스러운 의무로서 병역이 인정되는 것이다. “왕의 제의와 군주권의 신화와 연관된 오래된 우주발생론 대신에 새로운 사고방식은 우주를 구성하는 이런저런 요소들 사이에 세계 질서의 기초를 대칭(symétrie), 평형(équilibre) 그리고 동등성(égalité)이라는 관계들 위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Vernant 2000, 7)


결국 신화적 사유에서 사건이라는 이미지는 생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원질이전의 카오스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카오스는 언급한대로 질료적인 힘이라는 형상(形狀, morphē)을 반드시 내포한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로부터 비롯되는 헬라스적 사유에서 어떤 것도 무로부터 생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ex nihilo nihil fit).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그것이 신화적이었든 정치적이었든 자신들의 나고 죽음, 자연과 우주의 나고 죽음이 모두 생성의 과정 속에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성의 법칙은 신이나 인간이나 거역할 수 없는 것이며, 저 깊은 카오스로부터 기원하는 그 질료적인 힘에 의해 인간과 심지어 신까지 압도했다. ‘시기구분이 나올 때 쯤, 이제 이 생성의 과정은 어떤 기준을 가지게 된 것이고, 비록 호메로스에 비해 헤시오도스가 뛰어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헬라스적 사유에 철학적 풍미를 가미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Hack 2011, 45). 왜냐하면 우선 고대적 사유에서 철학적 맥락이 개입하는 지점은 이런 기준‘criteria’(측정)로서 로고스(logos)가 작동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기원적인 것이 아무리 혼돈에 휩싸여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이 삶의 덧없음(aei metaballontōn)과 우주에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든다(박종현 1985, 24-25). 


여기서 비로소 해석이 등장한다. 미리 말하자면, 이 과정은 바로 사건-이미지에서 이미지-해석으로 가는 과정이며, 여기서 이미지생성에서 존재로 변모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원초적 형태는 아직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것의 상징성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기껏해야 이것은 이미지’, 즉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 없는 이미지라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사유의 혁명을 담지하고 있고, 그것을 세계와 사유 안에 이미장착시켰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각하고 있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 예기치 못한 힘이 사유와 세계에 느닷없이 밀어닥치는 가장 막대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카오스적 사태에서 재난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로고스적 사태에서는 축복이었다.


2. 고대 자연철학에서 해석과 사건의 원초적 과정[각주:10]

이제 앞서 말한 자연에 덧붙여 철학이 어떤 방식으로 해석사건을 자연철학적으로 사유했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나는 이 사유의 이미지를 살펴보기 위해 세 사람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의 자연철학을 탐구할 것이다. 이 탐구 과정을 완수하기 위해 나는 나름의 해석을 진행할 것이지만, 이 방면에서 철학사에 의미심장한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의 철학자(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하이데거)의 사유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다. [1회차 끝]


* 일러두기

* 이 논문에 사용된 들뢰즈와 리쾨르의 주요 저서에 대한 약어는 다음과 같다. 양자를 구분하기 위해 들뢰즈의 저서는 약호 맨 앞에 항상 D를 사용하고, 리쾨르의 경우에는 R을 사용한다. 더 자세한 서지 사항은 참고문헌에 기재하였다. 인용된 구절들은 원문과 영역판, 국역판을 모두 참고하였으며, 필요할 경우 수정 또는 보완하였다.

들뢰즈: Emprisme et subjectivité: DES. Nietzsche et la philosophie: DNP.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DPK. Proust et les signes: DPS. Le bergsonisme: DLB. Différénce et Répétition: DDR. Spinoza et le probléme de l"expression: DSP. Logique du sens: DLS.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DSPP. L"Anti-Œdipe: DAE. 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 DKA. Dialogues: DDI. Mille plateaux: DMP. Francis Bacon: Logique du la sensation: DFB. Le pli. Leibniz et le baroque: DLP. Qu"est-ce que la philosophie?: DQP.

리쾨르: Philosophie de la Volontaire1-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 RVI. De l’interprétation: Essai sur Frued: RDI. La symbolique du mal: RSM. La métaphore vive RMV. Du texte à l"action: RTA.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 Essays on Language, Action and Interpretation: RHH. Temps et récit. Tome I: L"intrigue et le récit historique: RTR I. Temps et récit. Tome II: La configuration dans le récit de fiction: RTR II. Temps et récit. Tome III: Le temps raconté: RTR III. Soi-même comme un autre: RSA.



  1. 고대적 사유 안에서 ‘탐구’ 즉 historia는 바로 ‘현상들의 구제’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것은 현상에 대한 이론적, 학문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며, ‘근거를 밝히거나 설명을 해 줌’(logon didonai), ‘현상들의 구제’(sōzein ta phainomena), 곧 진리, alētheia 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진리란 ‘간과된 채로 망각된 상태에 있는 것을 비망각의 상태로, 비간과의 상태로 바꿔 놓음’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문제(problēma)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박종현, 『희랍사상의 이해』, 종로서적, 1985, pp. 29-30). 하이데거에게서 이 문제는 다시 ‘존재의 구제’라는 문제로 변형된다. 내 생각에 ‘현상의 구제’에서 ‘존재의 구제’로라는 이 변형의 사건은 곧 해석의 사건(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간의 거리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다시 ‘생성의 구제’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사건의 구제’를 가능하게 하는 사유이미지로 구축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인용문 출처는 본문 인용문 뒤에 ‘약호, 페이지수’, 이를테면, ‘박종현 1985, 29-30’과 같이 표시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사건의 철학 안에서 이 ‘거리’의 문제, 그리고 ‘구성요건’의 문제는 이 논문의 결론부에 그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본문으로]
  3. ‘삶의 덧없음’이라는 주제는 헬라인들의 기본 정조(sentiment)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 정조는 비극시기 이전 서정시의 시대에 많이 드러나며, 그 반대급부로 ‘영원한 삶에 대한 종교적 희구’를 낳게 된다. 디오니소스 숭배나 오르페우스 비교(秘敎), 그리고 크세노파네스나 피타고라스의 철학적 종교라고 할 만한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은 퓌시스(physis)에 대한 탐구로 흘러갔다(박종현 1985, 1부 1장 참조). [본문으로]
  4. 이 장의 내용들은 순전히 ‘압축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압축적 내용들은 전체 철학사에 대한 일종의 ‘예화’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철학 외에 근현대 철학의 예화들도 논문에서 이후 전개될 것이지만, 철학사의 면면 모두를 이 한정된 지면에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속작업들이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문으로]
  5. 통적으로 철학사에서는 신화적 사고(뮈토스)와 철학적 사유(로고스)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콘퍼드와 버넷). 하지만 이 관점들은 두 가지 점에서 누락을 포함한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로 이러한 양자택일은 당대 헬라인들의 사회, 정치적 격변을 무시한다. 사실 사회, 정치적 요인을 주요변수로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이론적 설명의 부적합성이 드러나는 곳에서 이에 대한 고려는 어떤 경우 결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로 이 대립적인 관점들은 뮈토스와 로고스 외에 ‘카오스’에 대한 탐색을 소홀히 하고 있다. 사실상 카오스라는 주제야말로 뮈토스와 로고스의 대립적이면서고 연속적인 측면을 공평무사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전망이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베르낭의 견해를 따른다. Jean Pierre Vernant, Les origines de la pensée grecque, PUF, 2000, chap. 7 참조. [본문으로]
  6. McClure는 헬라인들의 ‘자연’을 몇 가지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헬라인들은 자연을 ‘생명, 힘, 영혼, 신성함, 가치기준’으로 바라보았으며, 이 중 신성함이 가장 중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기서 McClure는 헬라인들에게 힘과 운동의 구분은 없었으며, 그것은 동일한 생명의 요소라고 말한다. M. T. McClure, ‘The Greek Conception of Nature’, The Philosophical Review, Duke University Press, Vol. 43, No. 2 (Mar., 1934), pp. 109-124 [본문으로]
  7. ‘Vorstellung’ 즉 대상(gegenstand)을 ‘앞에 세워 닦달함’이라는 하이데거적 의미를 가져오자면, 표상은 생성을 그 자체로 직관하거나 살피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것을 ‘고정’시킴으로써 닦달하기 용이하게 만드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는 고대적인 ‘생성’과는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8.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이 주제에 대한 신화적 사유의 표현이다. 나는 뒤에서 이 ‘카오스’라는 주제가 어떻게 복권되는지를 다소나마 살펴볼 것이다. 어쨌든 고대 헬라스 세계의 소위 신화적 사유시기를 지나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면서 이 카오스에 대한 사유가 배제되거나 약화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조대호의 논문이 유익하다. 조대호, 「카오스와 헤시오도스의 우주론」, 한국철학회 『철학』 71호, 2002, pp. 51-74.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르케와 카오스를 명시적으로 대조하는 부분은 그의 『형이상학』1091a30-1091b10을 참조하라. 이 논문에서 인용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Metaphysica는,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호 역, 『형이상학』,나남, 2012의 번역을 따른다. [본문으로]
  9. 역사적 저술에서 ‘시기구분’이 최초로 표명된 것은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이다. 헤시오도스의 시기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그 이전의 호메로스적 역사서술과는 달리 상당한 합리성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들의 의인화, 즉 인격적 측면이 더 강조되는 것도 헤시오도스에 이르러서이다. 이에 대해서는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지음, 이신철 옮김, 『그리스 철학과 신』, 도서출판 b, 2011(원전 서지: 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Kessinger Publishing, LLC (June., 2008)), 3장 참조. [본문으로]
  10. 여기서 사용되는 번역문은 김인곤 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의 것을 따랐으며, 필요할 경우, DK 판본(Hermann Diels, Walter 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Weidmann, 1903;1992)과 KRS 판본(G. S. Kirk, J. E. Raven, M. Schofield,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7;1983)을 참고하여 수정하였다. 인용문 뒤의 부호는 Diels-Krantz 판본의 고유 번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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