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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 입문 강의] 4강 첫 번째 부분

수유너머웹진 2016.05.04 10:52 조회 수 : 95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 仲正昌樹, 『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 作品社, 2013.

 

 

 

 

 

 

 

 

 

 

4강. 『정치신학』(2) ― 누가 법을 만드는가? 혹은 ‘최후의 심판’

 

 

예외상황은 법(률)학에 있어서, 신학에 있어서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유사관계를 의식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최근 수백년 동안의 국가철학적 이념들의 발전이 인식되는 것이다.

 

[법학에서 예외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유비관계를 의식했을 때 비로소 최근 수백 년간에 걸친 국가철학상의 여러 이념의 발전이 인식될 수 있다(54쪽).]

- 『정치신학』

 

 

켈젠 비판 / ‘세계관 Weltanschauung’과 ‘국제법 Völkerrecht’ / ‘법적 결정 die rechtliche Entscheidung’ / 홉스와 슈미트 ―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 누가 결정하는가? / 법과 자연법칙 / ‘법학 개념의 사회학’ / ‘유심론적 역사철학’과 ‘유물론적 역사철학’ / 세계관과 사회의 기본구조 / 신 없는 시대 ― ‘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 <Vox populi, vox Dei> / 하르마게든[아마게돈]의 싸움 ― 독재 vs 민주주의, 아나키 / 반신학적 독재론 / 질의응답

 

 

 켈젠비판

 

 

지난 번 강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슈미트가 신칸트학파의 영향을 받은 켈젠 등의 법실증주의자에 의한 ‘형식’적 법 개념을 비판하는 동시에, ‘형식’이라는 말에는 법실증주의적 의미에서의 그것과는 상이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었죠. 조금 복습해 둡시다.

 

38頁[43쪽]에서 막스 베버를 좇아, 법적인 ‘형식Form’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① 법학적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 ② 대상 영역의 분화와 전문적 훈련에 대응한 규칙성, ③ 합리주의적 ‘형식.’ 법실증주의는 ①의 의미에서만 ‘형식’을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의 현실적 과정이 있습니다. 슈미트는 그것을 기점으로 법적 개념에 구체적인 ‘형식[形]’을 부여하고, 구체적으로 현실화하기 위한 매체로서 ‘형식’을 재파악하려 합니다. 40頁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법의 형식을 지배하는 것은 법이념이며, 또 법사상을 구체적 사례에 적용하는 필연성,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법의 실현이다. 법이념 자체는 스스로 실현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성으로 전화하려면 모두 특수한 형태화 및 형식화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실체적 법률의 형태에서의 일반적인 법사상의 형식화의 경우에도, 또한 사법 내지 행정이라는 형태에서의 실정적인 일반적 법규범 적용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법의 형식의 특성을 논하려면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법형식을 지배하는 것은 법이념이고 법적 사고를 구체적 사례에 적용해야만 하는 필연성,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법실현이다. 법이념은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없기에 이를 위해서는 특별히 구체적 모습으로 형식화되어야 한다. 이는 일반적 법이념이 실정법으로 형식화되는 데에도, 일반적 법규범이 사법적이거나 행정적으로 적용되는 데에도 타당한 일이다. 법형식의 독자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만 한다(44-45쪽).]

 

여기서 추상적인 사상이나 이념으로서만 존재하는 ‘법’을 ‘현실’에 ‘적용Anwendung’할 때에는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일본어로 말하면, ‘형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형태[形]’ 혹은 ‘꼴[型]’이죠. 일본어에서 ‘형식화’한다고 말하면, 구체성을 결여하고 막연한 것으로 해버린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만, 여기서 ‘형식’은 일정한 방향으로 특수화한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죠. ‘실정법Positives Recht’이라고 할 때의 ‘실정성’은 바로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거나 사실로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만, 그렇게 되려면 ‘형식[形]’을 부여하고 현실에 대응시킨다는 조작이 필요해집니다. 예술의 ‘Form’ 얘기라고 생각하면, 알기 쉬워질지도 모르겠네요. 슈미트는 예술적 의미(sense)에서 ‘법’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날의 국가론에서 신칸트파의 형식주의가 배척당하면서, 그래도 동시에 완전히 다른 도면에서 형식이 요청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철학사를 단조롭게 하고 있는, 저 끊임없이 재차 다뤄지고 있는 사례인 것일까? 아무튼 단 하나, 현대국가론의 이 추구에 있어서 확실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형식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치환[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라스크의 범주론의 형식 개념은 여전히 인식 비판적 입장의 모든 것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듯이, 주관적이다. 켈젠더러 말하라면, 그가 일단 이렇게 비판적으로 획득된 주관적 형식 개념에서 출발하고, 법질서의 통일성을 법률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로서 파악하면서, 그때에는, 그러나 그가 하나의 세계관을 신봉하는 것을 공언할 단계가 되어서는 객관성을 요구하고, 헤겔의 단체주의에 대해서조차도 국가 주관주의라는 비난을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가 자신의 학설에 관해 요구하는 객관성이란 결국 그가 인격적 요소를 모두 회피하고, 비인격적 규범이 인격적 효력을 갖는 것으로 법질서를 환원한다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현대 국가론이 신칸트학파의 형식주의를 배척함과 동시에 전혀 다른 형식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철학사를 더할 나위 없이 따분한 것으로 만든 끊임없는 말 바꿔치기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 현대 국가론의 노력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형식이 주관으로부터 객관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라스크의 범주론에서 형식 개념은 모든 인식론적 입장이 그렇듯이 여전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켈젠은 이렇게 비판적으로 획득된 주관적 형식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법질서의 통일성을 법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가 하나의 세계관을 표명하는 단계에서는 객관성을 요구하고 헤겔적 집단주의를 국가 주관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켈젠이 내세우는 객관성이란 일체의 인격성을 회피하고 비인격적 규범의 비인격적 효력으로 법질서를 환원하는 일에 자니자 않는 것이다(45쪽).]

 

이 대목은 무엇을 문제 삼고 싶은 것인지, 여기만 보는 한에서는 알기 어렵네요. 다만, 이 ‘형식’ 얘기가 원래 볼첸도르프의 단체론적 국가론에서 “민중의 생활Volksleben”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으며, “사회·심리학적 현상”이라는 곳으로부터 들어온 것임을 생각하면, 맥락이 보입니다. 이를 어느 정도 평가한 뒤, ‘법’에 있어서의 ‘형식’ 개념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물론 켈젠 식의 ‘형식’ 개념을 타파하는 데 주안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얘기의 흐름에서 보면, 슈미트는 ‘형식’ 개념이 객관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을 환영하려 합니다만, 너무도 단순하게 그렇게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켈젠이 자신의 이론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의미에서의 ‘객관성’은 거부하고 싶었던 거죠.

 

에밀 라스크(Emil Lask, 1875-1914)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하인리히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와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에게서 배운, 서남학파(西南学派)에 속한 철학자입니다. 빈델반트 아래에서 교수자격논문 『법철학』(1905)을 썼습니다. 켈젠과 나란히 신칸트학파의 법철학자인 구스타프 라드부르흐(1878-1949)도 라스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라스크의 ‘범주론Kategorienlehre’에서의 ‘형식’ 개념이 “여전히 … 주관적이다”고 슈미트는 말하는 것입니다. 라스크의 ‘형식’은 ‘객관적’이라고 말해지지만, 슈미트가 보기에는 아직도 ‘주관적subjektiv’이라는 것이죠.

약간 까다롭기에, 우선 ‘주관적/객관적’의 통상적 의미를 확인해두죠. 칸트 이후의 근대철학에서는 인식과 판단의 ‘형식’이 ‘주체subjekt’인 인간의 편에 갖춰져 있다고 상정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형식’은 항상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라스크는 ‘주체’뿐 아니라 ‘객체objekt’의 편에도 ‘형식’이 갖춰져 있고,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몇 단계의 ‘형식’이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라스크의 ‘형식’은 종래의 칸트 철학, 신칸트학파의 그것에 비해 ‘객관적’이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주체’가 마음대로 ‘객체’의 ‘형식’을 정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라스크의 논의도 ‘인식비판’, 즉 ‘주체’에 의한 ‘인식’의 구조에 관해 주관적으로 분석하는 형식[形]을 취하기에, 이런 의미에서의 ‘주관성’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켈젠에 관해서는 어떤가? 그는 법철학자이기에, ‘객체’가 ‘법’입니다. 물질을 객체라고 하는 경우와는 얘기가 조금 다릅니다. 지난 번 강의에서도 얘기했습니다만, 켈젠이 그 전형인 ‘법실증주의 Rechtsposkivismcs’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자연법이나 도덕이 아니라 ‘실정법positives Recht’만을 ‘객체’로서 다룹니다. 당연히 법학자가, 객체로서의 ‘실정법’을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법실증주의의 ‘형식’ 개념은 ‘객관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켈젠의 경우, “법질서의 통일성을 법률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인식으로서 파악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개별 실정법의 규범이 어떻게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가에 관해, 법학자가 자유롭게 상상력을 작동시켜 재구성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라고 말하더라도, 뭐든 좋다는 것이 아니라, 앞서 라스크에 관해 말한 의미에서, 인식 비판을 통해 ‘획득’되는 ‘주관적 형식 개념’에 의해 ‘질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실증주의’적 입장에 철저하다면, 법질서라든가 근본 규범을 중심으로 한 체계 같은, 있는지 없는지 확실치 않은, 추상적인 «것[사물]»이 아니라, 개별의 제정된 법률과 판례만을 조사하면 좋겠는데요, 켈젠은 추상적인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한 다음, 그것을 ‘자유’롭게 인식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물학에서 생태계가 있다거나, 언어학에서 하나의 언어 체계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자유롭게 구성한다고 말한다면 알기 쉽습니다만, 다양한 법규범이 하나의 법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면, 그만큼 «객관적»인 느낌은 들지 않네요. 위정자가 자의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관습적으로 어쩐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법규범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적인 법질서가 ‘있다’고 단언한다면, 꽤 «주관»적인 느낌이 듭니다. 슈미트는 그것을 꼬집는 것입니다.

 

 

라스크

‘주관적’이란

칸트 이후의 근대철학에서는 인식과 판단의 ‘형식’은 ‘주체 Subjekt’인 인간의 편에 갖춰져 있는 것으로 규정

‘형식’은 주관적

‘객체 Object’의 편에도 ‘형식’이 갖춰져 있으며, 주체와 객체의 사이에서, 몇 단계의 ‘형식’이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켈젠

‘객체’가 ‘법’

‘실정법 positives Recht’만을 ‘객체’로서 다루는 법실증주의의 ‘형식’ 개념.

빕실증주의는 ‘객관성’이 높은 추상적인 «사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한 위에서, 그것을 ‘자유’롭게 인식하고, 재구성하려 한다.

 

 

 

‘자유로운 인식’이라고 말하면서, 켈젠은 “그가 하나의 세계관을 신봉하는 것을 공언하는 단계가 되어서는 객관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거네요. 이 ‘객관적 세계’의 얘기는 27頁[32쪽]에서 다뤄지고 있는 켈젠의 초기 저작 『주권의 문제와 국제법 이론』1920)의 끝부분에 나옵니다.

켈젠은 1930년부터 쾰른대학에서 국제법 담당 교수가 되며, 나치에 의해 교수직에서 쫓겨난 후부터는 제네바와 체코의 프라하 등에서 국제법을 가르칩니다. 당연히 국제법 관계의 논문도 상당히 많이 썼습니다. 2007년부터 2008년에 걸쳐 도쿄재판에서 일본의 전범들이 무죄라는 의견서를 쓴 라다비노드 팰(Radhabinod Pal, 1886-1967) 판사의 의견에 관해, 고바야시 요시노리 씨(小林よしのり, 1953-)와 나카지마 다케시 씨(中島岳志, 1975-)나 니시베 스스무 씨(西部邁, 1939-) 사이의 논쟁이 있었을 때 켈젠의 이름도 언급됩니다만, 그것은 켈젠이 국제법학자로서 나름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관 Weltanschauung’과 ‘국제법 Völkerrecht’

 

이 경우의 ‘세계관 Weltanschauung’이란 당연히 ‘법’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주관적’이란 ‘주체’인 ‘나’를 기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며, ‘객관적’이란 객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법질서를 기점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해당 대목에서 켈젠은 ‘국제법 Völkerrecht’에 관해 생각할 경우, 개별 주체=주권국가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아니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보편적인 법질서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하는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의 차이가 ‘주관적 세계관’과 ‘객관적 세계관’의 차이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켈젠 자신은 후자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국가에는 주권이 있으며, 법을 제정하고 강제하는 구조가 구비되어 있고, 주권국가 중심의 ‘세계관’은 이런 구조가 구비되어 있지 않고 현실에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잡다한 조약의 집적에 불과한, 국제법을 기준으로 삼은 ‘세계관’보다도 «객관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켈젠의 용어법에서는 후자가 ‘객관적’인 셈입니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법질서를 기점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켈젠더러 말하게 하면, 주권국가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간주하는 ‘주관적 세계관’이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반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국제법 질서가 국가들의 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는 ‘객관적 세계관’은 평화주의로 이어집니다. 마음가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이지 자유주의 좌파의 국제법학자가 말할 것 같은 것이네요. 이런 얘기가 나오면, ‘주관적/객관적’이라는 말 자체에 켈젠의 소망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헤겔의 단체주의”란 번역어로는 조금 부정확합니다. 원문에서는 <Hegel Kollektivismus>인데, ‘집단주의’라고 번역해야죠. ‘집단주의’는 일반적으로는 개인보다도 ‘집단’을 중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의 ‘집단주의’는 개인들의 집단적 행태나 사고를 상정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헤겔 철학에서 나오는 ‘인륜 Sittlichkeit’이란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간들의 관습=윤리적(sittlich)인 행태의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국가’는 ‘인륜’의 발전의 마지막 단계이며, ‘법’이라는 형태[形]로 자기 발전을 계속하는 ‘이성’이 현실화한 것입니다.

헤겔의 이런 집단주의에 관한 논의는 조금 복잡하기에 󰡔주권의 문제와 국제법 이론󰡕의 해당 부분을 보죠. 64절 「제국주의와 평화주의」에 나옵니다.

 

Wenn der imperialismus als ein Zwillingsbruder des subjetivistischen Primates der eigenstaatlichen Ordnung auftritt, so ist dabei immer wieder die Relativität des Gegensatzes von Subjektivismus und Objketivismus zu berücksichtigen. Zweifelos sind Hegel und sein Schüler Lasson Vertreter einer objektivistischen Weltansohauung. Aber Hegels Kollektivismus blieb bekanntlich im Staate stecken. Das Verhältnis des Staates ― als Indiviuum gedacht ― zur Menschheit ist besonders bei Lasson durchaus individualistisch konstruiert. Ist eine schärfere Zuspitsung des Staats ― oder Volsindiviualimus möglich als die Vorstellung einer “auserwählten” Nation, als die Hegelsche Idee, daß der Weltgeist in einer Nation allein seinen Thron aufgeschlagen habe? Welch schrankenloser Imperialismus muß von einer solchen Vorstellung ausgehen!

 

독립국의 질서의 주관주의적 우위의 쌍둥이 형제로서 제국주의가 등장한 것이라 한다면,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립이 상대적인 것임을 항상 거듭거듭 상기해야 할 것이다. 헤겔과 그의 제자인 라손이 객관주의적 세계관의 대표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헤겔의 집단주의가 국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라손에게서는 (개체로서 생각된) 국가가 인류와 맺는 관계는 개체주의적으로 구성된다. 국가 혹은 민족개체주의의 첨예화는 「선택된」 국민의 사상, 달리 말하면 세계정신은 하나의 국민에 있어서만 그 왕좌를 세운다고 하는 헤겔적 관념으로서 가능해지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제약의 제국주의가 생겨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비교적 알기 쉽네요. 아돌프 라손(Adolf Lasson, 1832-1917)은 헤겔주의의 철학자로, 『국제법의 원리와 장래』(1871)라는 저작이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로, 헤겔 전집을 편찬한 게오르그 라손(Georg Lasson, 1862-1932)은 그의 아들입니다. 라손은 국가의 관할을 넘어선 ‘국제법’에 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했습니다. 헤겔과 라손은 실재하는 집합체를 기준으로 사고한다는 의미에서 객관주의적입니다만, 그들의 집단주의는 국가 혹은 민족(Volk) 수준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국가 혹은 민족을 넘어선 더 고차적인 집단이 상정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인류나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개별적인 ‘주체’로서의 국가의 관점에 정위하여, 주관주의적 사고방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국가 주관주의Staatssubjektivismus’를 첨예화하면, 선민사상이라든가 제국주의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슈미트 자신의 논의로 얘기를 되돌리죠. ‘법률학적 인식’이 ‘자유로운 행위’라고 지적하는 한편, 국가 중심의 세계와 국제법 중심의 세계관의 대립을 논하는 국면이 되면, 국가 중심의 견해를 ‘주관주의적’이라며 비판하는 켈젠의 논의는, 슈미트가 보면, 이중잣대(double standard)이며 모순되는 것입니다만, 억지를 부려 정합적으로 해석한다면, 켈젠이 말하는 ‘주관적’이라는 것은 “인격적 요소를 포함한다”고 하는 게 아니냐고 슈미트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인격’이란 법을 해석하기도 하고 적용하기도 하는 판단 주체로서의 개인의 인격입니다.

“비인격적 규범이 인격적 효력을 갖는다”는 것은 법규범이 수학의 정리나 물리의 법칙처럼 인간이 개입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인간은 단순한 정보전달의 매체 같은 게 되어 버리죠. 법실증주의란 재판관 등의 자의적 재량에 의해 실정법과는 다른 요소를 법적 판단에 들여오는 것을 배제하는 사상으로, 이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켈젠의 이론이 이런 의미에서의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려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슈미트가 보기에, 인격적인 것의 관여 없이 다양한 법규범이 자동적으로 조직화되고 통일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견해는 이상한 것입니다.

만일 그런 수학처럼 아름다운 법질서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법질서를 ‘자유로운 인식’에 의해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주체는 도대체 어떤 자인가? 슈미트가 아니더라도, 이런 의문이 나옵니다. 그런 게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신과 같은 존재겠죠. 신과 같은 초월자가 인간 지식[人知]을 넘어선 방식으로 법질서를 창조했다면, 그 초월자가 자신이 만든 법질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합니다만, 켈젠은 법학에 그런 형이상학적 전제를 들여오는 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정치적 낭만주의』에서 봤듯이, 슈미트는 그런 초월적 존재의 필요성을 공공연히 주장합니다. 그것이 ‘주권자’이라고 생각하면, 법실증주의와 단체이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켈젠

법실증주의

재판관 등의 자의적 재량에 의해 실정법과는 다른 요소를 법적 판단에 들여오는 것을 배제하는 사상

그것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켈젠의 이론

 

 

 

 

 

 

 

 

 

 

 

 

 

 

 

 

 

 

그러나 슈미트의 입장에서 보면, 인격적인 것의 관여 없이, 다양한 법규범이 자동적으로 조직화되고 통일적인 ‘질서’를 형성한다는 견해는 이상하다

그 법질서를 ‘자유로운 인식’에 의해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주체

그런 초월적 존재의 필요성을 공공연히 주장

주권자

 

 

본문으로 돌아가죠. 41頁에 아까의 얘기가 계속되고 있는 대목을 보시죠.

 

주권 개념에 대한 다양한 설들 — 크라베, 프로이스, 켈젠 — 은 이런 객관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때 그런 설들의 공통점은, 인격적인 것은 모두, 국가 개념에 의해 소실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격과 명령은 그들에게 분명히 공통성을 갖는다. 켈젠에 따르면, 인격적 명령권이라는 개념이야말로 국가 주권에 관한 설들의 근본적 오류이다. 국가적 법질서의 우위설을, 그는 ‘주관주의적’이라고 부르고 법이념의 부정 —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규범의 대신에 명령이라는 주관주의가 놓여 있다는 이유에 의해 ― 이라고 단언한다.

 

[주권 개념에 대한 다양한 이론 ― 크라베, 프로이스, 켈젠 ― 은 이런 객관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인격적인 것을 모두 국가 개념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인격성과 명령은 그들에게 명백히 똑같은 것이다. 켈젠에 따르면 인격적 명령권이라는 표상이야말로 국가주권론의 본질적 오류이다. 그는 국내법 우위설이 객관적으로 유효한 규범을 명령이라는 주관주의로 대체하기 때문에 ‘주관의적’이며 법이념의 부정이라고 단정한다(45-46쪽).]

 

 
여기서 이름이 언급되는 세 명의 공통성으로서, ‘인격성 Persönlichkeit’과 ‘명령 Befehl’을 ‘주관적’이라 여기고, 그것을 배제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적 법질서의 우위설(優位説)’이란 앞서 화제가 됐던, ‘국가적 법질서 die staatliche Rechtsordnung’와 ‘국제 법질서 Völkerrechtsordnug’를 대비하여, 국가법이 우위에 있다는 설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국제법 질서가 객관적이라고 한다든가, 우위에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분명하지 않네요. 당시의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은 현재의 ‘국제연합 United Nations’에 비하면, 조직도 정비되지 않았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 개입을 하기 위한 틀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국제법 질서의 우위가 객관적이라고 하는 켈젠의 논의는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법적 결정 die rechtliche Entscheidung’

 

그건 그렇고, ‘인격적인 것’을 ‘국가’로부터 완전히 배제한다면 국가는 어떻게 통치되고 있는 걸까요? “법 자체가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건데요, 다시금 생각하면 이미지하기가 어렵네요. SF에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 컴퓨터가 아키텍처를 구사하여 지배한다는 설정이 자주 있습니다만,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법’이 그 역할을 맡는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이미지⇒상상하기 쉬워질지도 모르겠네요. ‘법’이 프로그램처럼 자동적으로 자신의 코드를 좇아 개별 사례에 스스로를 적용하고 문제를 처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입법기관이나 사법은 그런 법의 자동작용이 착실하게 진행되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게 되겠네요. 다만, 현실의 ‘법’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아니기에, 스스로를 자동적으로 집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이미지⇒상상하기 어렵네요.

 

이처럼 인격적 명령을 추상적 규범의 객관적 효력과 대치한다는 것은 법치 국가적 전통을 이어받는 것이다. 19세기 법철학에서 이를 특히 명료하고 흥미롭게 부연한 것은, 예를 들어 아렌스였다. 프로이스와 크라베에게 인격적 표상은 모두 절대 군주제 시대로부터의 역사적 유물이다. 이들의 모든 이의제기가 간과하는 것은 인격 표상 및 형식적 권위와 그 관련이라는 것이 뛰어난 법률학적 관심에서 생겨났다는 것, 즉 법적 결정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특히 명백한 의식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크라베는 인격 대 비인격의 대립을 구체 대 보편, 개별 대 일반의 대립과 결부시키고 나아가 관헌 대 법규, 권위 대 내용적 타당성의 대립으로 끌거 나가, 스스로의 일반적인 철학적 정식화 속에서의 인격 대 이념의 대립에까지 이른다. 이런 일련의 사고방식은 법치국가적 전통에 합당한 것이다. 이 전통 속에서 추상적 규범은 실질적으로 유효한 인격적 명령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19세기 법철학에서 아렌스는 이 대립을 명쾌하고도 흥미롭게 설명한 바 있다. 프로이스나 크라베에게 인격이라는 표상은 모두 절대군주제의 역사적 유물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논의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인격이라는 표상과 그것이 형식적 권위와 결합되는 것은 특수한 법학적 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관심이란 법적 결정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매우 선명한 의식에 다름 아니다(46쪽).]

 

 

    
하인리히 아렌스(Heinrich Ahrens, 1808-74)는 19세기의 유력한 법철학자로, 젊었을 적에 자유주의적 청년 운동의 멤버가 되며, 하노버 왕국의 괴팅겐 시에서 일어난 혁명 기도(1831)에 참여하고, 벨기에로 망명하기도 했으며, 48년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에 선출되기도 합니다. 독자적인 자연법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법치국가’론에서는 아무래도 ‘추상적 규범의 객관적 효력 die sachliche Geltung einer abstrakten Norm’이 중시되고 ‘인격적 명령 der persönliche Befehl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게 됩니다. 이런 흐름을 품고 있는 프로이스와 크라베는 국가의 법질서를 인격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절대군주제 시대의 유물, 즉 루이 14세의 “짐이 국가다 L’État, c’est moi”라는 말로 상징되듯이, 국왕의 ‘인격’이야말로 ‘국가’의 본질이라는 사고방식의 잔재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에 반해 슈미트는 ‘인격 표상 persönlichkeitsvorstellung’과 그것에 부수되는 ‘형식적 권위 die formale Autorität’는 구시대의 유물 따위가 아니라 ‘법적 결정 die rechtliche Entscheidung’에 대해 법학적으로 생각하는 데 불가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재판관이나 대통령이나, 그 지위에 따른 ‘권위’를 가진 ‘인격’의 ‘결정’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통용되는 것입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이러한 결정은 바로 모든 법적 지각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법사상도 모두 그 순수성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 법이념을 상이한 응집 상태로 옮겨 놓고 또한 법이념의 내용으로부터도, 또 얼마간의 일반적인 실정적 법 규범의 적용에 있어서, 그 내용으로부터도 끌어낼 수 없는, 한 요소를 부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법률학적 결정에는 모두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 없는 하나의 요소가 포함된다. 왜냐하면 법률학적 결론은 그 전제로부터 완전히 남김없이 도출되지 않으며, 또한 결정이 불가피하다는 상황이 어디까지나 독립적인 결정적 요소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이 결정은 법적으로 무언가를 지각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것이다. 모든 법적 사유는 순수한 형태로는 현실화될 수 없는 법이념을 다른 응집상태로 변화시키며, 법이념의 내용으로부터도 도출될 수 없고 현실에 적용되어야 할 일반적인 실정적 법규범으로부터도 도출될 수 없는 하나의 계기를 덧붙이기에 그렇다. 모든 구체적인 법적 결정은 법의 내용과 무관한 계기를 포함하는데, 현실의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의 전제로부터 추론하는 법률적 연역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어떤 결정을 요구하는 상황 그 자체가 결정적인 계기로 남기 때문이다(46-47쪽).]

 


우리가 “이것이 법이다”라고 지각할 때는 반드시 ‘결정’이라는 요소가 수반된다, 거꾸로 말하면 ‘결정’이 없으면 ‘법’으로 ‘지각’할 수 없다고 슈미트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떠한 ‘법적 이념 Rechtsidee’도 자동적으로 현실화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법적 이념’ 자체는 구체적인 ‘형태[形]’를 갖지 않은, 막연한 «것[사물]»입니다. ‘실정법적 규범’도 그 자체로서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것들이 ‘결정’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부가받고 개별 사례에 적용될 때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인식 가능해집니다. 법적 이념으로부터 자동적으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얘기인 것이라고 하면 감이 안 올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A씨와 B씨 사이에서 토지의 경계선이나 채권·채무를 둘러싼 분쟁이 생겼다고 합시다. 분쟁의 유형마다 민법 등 관련 법률에 의해서, “법적으로 옳은 사고방식”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고방식이 해당 사례에 어떻게 적용되는가가 자동적으로 정해지고 무엇이 올바른 해결이 되는지가 자동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것 같다면 재판은 필요 없습니다. 법원으로 끌고 가 쌍방이 여러 가지 쟁점을 제출하고, 그것을 들은 판사가 “○○법 △△조를 적용한다”고 ‘결정’하고, 판결문을 낸 시점에서 처음으로 ‘법적 이념’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결정’이라는 요소에 의해 법적 이념이 다른 ‘응집상태 Aggregatzustand’, 더 구체적인 형태로 이행한다고 보느냐 아니냐가 핵심[열쇠]이 되는 것입니다.

 

법적 이념으로부터 자동적으로,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법이다”라고 지각할 때에는 반드시 ‘결정’이라는 요소가 수반된다.

어떠한 ‘법적 이념 Rechtsidee’도 자동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다.

‘실정법적 규범’도, 그것 자체로서는 추상적인 «것»

이것들이 ‘결정’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부가 받고 개별 사례에 적용될 때에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인식 가능하게

 

 


 이런 식으로 ‘결정’이라든가 ‘구체성’을 강조하면 분쟁 발발부터 법적 재정(裁定)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사회적 사건의 연쇄나 당사자의 심리 등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결정의 인과적이고 심리학적 성립이 아니라 ― 추상적 결정 자체는 이런 경우에도 중요하지만 — 법적 가치의 결정인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결정의 인과적이고 심리학적인 발생이 아니라 법적 가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추상적인 결정 자체는 중요하지만 말이다(47쪽).]

 

‘법적 가치의 결정 die Bestimmung des rechtlichen Wertes’라는 것이 조금 이해하기 어렵지만, 쟁점이 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법적 평가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겁니다. “○○와 같은 사례에서는 법적으로 △△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평가입니다.

 

그것은 규범적인 것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설령 판정 기준으로서는 법적 원리가 보편적 일반성에 있어서 존재하는 데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사실은 구체적으로 판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례마다 항상 변형이 생기는 것이다. 법이념 그 자체로서는 변형할 수 없는 것은 누가 그것을 적용해야 하는가에 관해 법이념이 무엇 하나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명백하다. 모든 변형에는 권위의 개입이 있다. 어떠한 개인 또는 어떠한 구체적인 기관이 이와 같은 권위를 자기의 것으로서 주장할 수 있는가에 관한 변별 규정은 법규의 단순한 법의 성질로부터는 끌어낼 수 없다.

 

[이 법적 관심은 규범적인 것의 특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구체적 사례는 구체적으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판결의 기준으로 하나의 법적 원리가 일반적 보편성으로 주어져 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개별 사례들에 따라서 그 사례만큼의 판결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법이념 자체가 변화할 수 없음은 누가 그것을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법이념이 말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변화에는 권위가 개입해 있다(auctoritatis interposite). 그러나 어떤 개인이나 어떤 구체적 기관이 그런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획득할 수 있는지를 변별하는 규정은 법조문의 단순한 법적 성질로부터는 도출될 수 없다(47-48쪽).]

 

‘변형 Umformung’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지난 번 강의부터 화제가 되고 있는 ‘형식[形] Form’의 문제가 또 나오고 있습니다. 보편적 일반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법적 원리’가 ‘결정’을 부가 받고 구체적 세례에 적용될 때, ‘형식[形]’이 바뀌는 것입니다. ‘형식[形(式)]’은 고정되는 게 아니며, 적용에 있어서 변용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변형’을 누가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권위의 개입 auctoritatis interpositio’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일본어의 일상어라면, 권위와 권력이 같은 의미로 취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만, 법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권위 Autorität’는 반드시 물리적・조직적 힘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며, 법적으로 ‘올바른 응답’을 확정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부여되고 있는 능력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신학자나 성직자가 가진, 교리상의 ‘권위’와의 유비에서 생각하면 이미지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통상적으로는 법률에 의해 누구에게 ‘권위’가 있는지가 정해집니다만, 해당 법 명제의 성질에 의해, 누가 ‘권위’를 갖고 판정하는 것이 맞는지가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히 왜 법원에 ‘권위’가 있는가, 그 이유를 순수 법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힘들죠. 기껏해야 재판관은 교육을 받고 실무 경험이 풍부하니까 … 등과 같은 경험적 이유밖에는 생각나지 않네요. 그렇다면 재판관이 받는 교육 내용이나 개별적 판결에 관한 법적 판단의 가이드라인은 어떤 ‘권위’에 의해 정당화되느냐고 하는 더 파고들어간 질문을 제기하면, 어떤 법적 논리에 입각한 대답을 내놓기란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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